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은사주의 분류

조용기 목사와 김세윤 교수의 사사로운 성경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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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04년 08월호>

이 시대의 타락한 죄인들의 문제점은 자신의 짧은 생각과 경험과 기준으로 하나님의 절대적인 기준을 판단하고 거부하려는 데 있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성경에는 그렇게 기록되었지만, 그것은 구시대적 유물일 뿐이야. 지금이 어떤 시대인데 2,000년 전에 기록된 성경을 문자적으로 적용할 수 있겠어? 시대적 상황에 맞는 새로운 해석이 필요할 때야.” 모든 배교의 시작은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기준대로 판단하고 거부했을 때 찾아온다. 그러나 사람들의 의견과 생각과는 달리 하나님께서는 변치 않는 절대적인 기준을 우리에게 제시하셨고, 2,000년 전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훈육하기에 유익하며, 아무런 부족함을 찾아볼 수 없고 시대적 상황에 맞는 새로운 해석 따위는 전혀 필요치 않다.
타락한 죄인들이 갖고 있는 두 번째 문제는 “권위”에 순종하지 않고 자기 자신이 그 “권위”가 되기 원한다는 사실이다. 높아지려는 인간의 마음은 사탄이 자신의 보좌를 하나님의 보좌 위에 높이려고 했던 그때부터 시작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모든 권위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를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질서의 하나님으로 모든 것들을 조화롭게 창조하셨다. 따라서 이 권위의 질서를 깨뜨리면 창조 세계의 조화가 무너지고 “혼란”이 찾아오게 된다.
20세기의 큰 혁명적 변화 중 하나는 여권신장 운동, 즉 페미니즘이다. 부당한 대우를 받는 여성들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고 이를 해결하겠다는 것은 좋은 취지였으나 여권이 너무 강해진 나머지 약한 남자들이 남권을 부르짖는 판국이 되었다. 역 성차별이 생기게 된 것이다. 이러한 사회적 변화는 교회 안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어 여권신장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고 그 결과로 성경에는 없는 여자목사들과 여자집사들이 버젓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를 무너뜨리는 행위로 비정상적인 일이지만, 이제 교계 안에서는 정상적인 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여자 목사에 관한 문제는 본지 129호, 특집 “여자목사가 비성경적인 이유”를 참고하시오.

이러한 시대적 조류에 맞춰 바울신학의 세계적 권위자로 알려진 김세윤 교수와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를 운영하고 있는 조용기 목사는 여성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면서 남성과 여성은 평등하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 여성의 역할은 커져야 하며 여자목사, 여자집사는 “성경적”인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과연 그러한가? 우리는 변개되지 않은 하나님의 말씀의 빛으로 그들의 주장을 판단하고(고전 2:15) 구석구석 비추어서 잘못된 점들을 들춰내고 바로잡을 것이다.

조용기 목사의 사사로운 성경 해석

1. 로마서 16:1에 대한 잘못된 해석
조목사의 주장을 한번 들어보자.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로마서 16장 1절은 뵈뵈를 겐그레아 교회의 여집사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그녀가 교회에서 책임 있는 위치에 있다는 것을 뜻한다... 바울은 그녀에게 설교할 것을 위임했고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그녀가 사역에 자유로웠다는 것이다.」 기독교연합신문, 2004. 5. 30, 15면.

하지만 개역성경에도 “...교회의 일꾼으로 있는 우리 자매 뵈뵈...”라고 말하고 있거니와 일꾼이라는 단어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아카논”은 여성 명사가 아니라 중성 명사이기 때문에 “여집사”라고 해석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또한 여집사는 “집사”의 자격 요건을 기술하고 있는 디모데전서 3장 말씀과 정면으로 위배된다. 『집사들은 한 아내의 남편으로서 자신의 자녀와 집안을 잘 다스려야 할지니라』(딤전 3:12). 『켄크레아에 있는 교회의 일꾼 된 우리의 자매 페베』는 신실한 『교회의 일꾼』이었지 공식적으로 집사의 직분을 받은 “여집사”가 아니었다. 더군다나 이 한 구절을 통해서 바울이 페베에게 설교할 것을 위임했다고 말하는 것은 성경적으로 뒷받침할 수 없는 지나친 추측에 불과할 뿐이다.

2. 로마서 16:3에 대한 잘못된 해석
이어지는 조목사의 상상의 나래를 살펴보자. 「로마서 16장 3절에서 바울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언급하고, 그들의 집 안에 있는 ‘저의 교회’(5절)에 대해서 말한다. 그들의 집에서 누가 설교자 역할을 해왔겠는가? 나는 동양적 배경에서 그때 상황을 그려보았다. 동양에서 지도자는 항상 첫 번째에 언급되었다... 바울이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말할 때, 바울이 그들을 언급한 순서는 그가 살고 있는 동양 문화를 배경으로 판단돼야 한다. 브리스길라는 아굴라의 부인이었지만, 성령님께서는 바울에게 브리스길라를 첫 번째로 언급하도록 이끄셨는데, 그것은 브리스길라가 그 가정교회의 지도자였음을 뜻한다. 말하자면 브리스길라는 ‘목회자’였고, 아굴라는 조력자였는데, 바울이 그 권한을 아굴라가 아닌 브리스길라에게 위임했기 때문에 가정교회를 목양할 수 있었다.」 기독교연합신문, 2004. 5. 30, 15면.

조목사는 성경 해석의 기본 원칙을 망각했거나 아니면 아예 모르고 있다. 『또한 우리가 그것들을 말하되 인간의 지혜가 가르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성령께서 가르치시는 말로 하나니 영적인 일들을 영적으로 비교하여 말하느니라』(고전 2: 13). 『너희는 주의 책을 찾아 읽으라. 이들 중에는 하나도 부족한 것이 없고, 하나도 자기 짝이 없는 것이 없으리니 이는 나의 입으로 그것을 명령하였고, 그의 영이 그들을 모으셨음이라』(사 34:16). 성경은 성경으로 비교하여 알 수 있는 것이다. 성경을 찾아보면 바울은 단 한 번도 여자에게 설교할 수 있는 특권을 준 적이 없다. 바울은 『감독은... 한 아내의 남편이어야』 한다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딤전 3:2). 동양적 배경에서 그때 상황을 그려 본 조목사는 자신의 상상에 취한 나머지 디모데전서 3:2의 확실한 구절은 눈에 띄지 않았나 보다. 성령님의 감동을 받은 바울의 분명하고 확고한 명령은 계속된다. 『여자는 온전히 순종함으로 조용히 배우게 하라. 나는 여자가 가르치는 것이나 남자에게 권위를 행사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다만 조용할지니라.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았고 그후에 이브며, 또 아담이 속은 것이 아니라, 여자가 속아 범죄하였음이라』(딤전 2:11-14). 바울이 기록한 영감받은 말씀에 자신이 정면으로 위배되는 행위를 했을 거라고 추측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동양적 배경에서 그때 상황을 그려 본 조목사의 상상뿐이지 않은가! 그런 빈약한 근거로 여자목사를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누가 그 주장을 납득하고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꿈을 가진 선지자는 꿈을 말하며 내 말을 가진 자는 내 말을 신실하게 고할지니라. 쭉정이가 밀에게 무엇이겠느냐? 주가 말하노라』(렘 23:28). 조목사가 계속해서 자신의 상상(꿈)을 말할 동안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신실하게 선포해야 할 것이다. 조목사가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김세윤 교수의 사사로운 해석 장로교 합동측 소속인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여동문회에서 지난 7월 5일 김세윤 교수를 초청해 ‘성경에 나타난 여성의 역할’이라는 주제로 세미나를 개최하였다. 그 세미나의 내용 중 일부이다.


1. 성경을 거부하는 김세윤 교수
「‘여자여 잠잠하라’는 구절은 고린도전서 14장 34절과 35절을 사본학적으로, 또 바울의 남녀관계에 대한 가르침의 전체적 맥락에서 살펴봤을 때, 바울이 쓴 말이 아니고 후대에 쓰여져 현재의 성경에 불안하게 삽입된 것이 확실하다.」 「고린도전서 14장은 바울이 교회에서 예언하고 방언하는 것에 관한 가르침을 주는 장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생활에서 남자의 독점적 리더십을 옹호하려는 사람들이 이 구절을 디모데전서 2장 11~15절과 함께 계속 바울의 진짜 가르침으로 보고 금과옥조로 삼기를 원한다면, 심각한 신학적 문제를 만들어 내게 된다.」
일본에서 독도는 우리 땅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터무니없는 주장이듯이 김교수의 주장도 뒷받침할 만한 신뢰할 수 있는 증거도 없고 입증할 수도 없는 주장이다. 하나님의 무오한 말씀을 어설픈 추측으로 뒤집어엎으려는 시도는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으로 그가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하지 않는지 보여 주는 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겠다. 고린도전서 14:34,35 말씀이 후대에 불안정하게 삽입되었다는 필사본 증거는 전혀 없다. 오히려 신약 필사본들 가운데 P45(3세기), א(4세기), A(5세기), B(4세기), 33(4세기), 1175(5세기), 2464(4세기), 구라틴 역본(2세기), 아르메니아 역본(5세기) 등 초기 필사본들과 번역본들, 그리고 절대 다수의 필사본들이 모두 고린도전서 14:34,35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사본학적으로 이 구절이 후대에 삽입된 것이라는 김교수의 주장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소위 바울신학의 세계적 권위자라고 하는 김교수가 필사본 증거에 대한 객관적 검증도 제대로 하지 않은 채 자신의 유명세에 의존했다면 대단히 큰 오류를 범한 것이며, 또한 무지한 자들을 속인 것이다.
“신실함”의 척도는 성경에 대한 바른 자세에서 찾아볼 수 있다. 성경은 모든 것을 판단하는 최종권위로 그리스도인의 믿음의 시작이요 토양이며 완성이기 때문이다. 성경에 대해서 신실하지 못한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께 신실할 수 있겠는가? 바르지 못한 성경관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의문을 제기하며 그리스도인들을 오도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바로 김교수와 같은 학자그룹이다. 성경이 후대에 편집되었다고 주장하는 그가 성경을 온전히 믿고 신뢰하고 받아들이는 사람이겠는가? 성경을 묵상하면서 ‘이 구절은 고대의 사본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아. 신뢰할 수 없는 부분이야.’라고 생각하는데 과연 하나님의 말씀에서 진리와 은혜를 발견할 수 있겠는가? 성경의 권위를 업신여기며 자신의 권위를 내세우는 김교수는 성경변개자인 클레멘트, 오리겐, 웨스트코트와 홀트의 뒤를 따르고 있으며, 사탄이 이브에게 사용했던 방법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참으로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더냐?” 그들의 목적은 우리의 손에서 성경을 빼앗고 자신들을 권위있게 제시하기 위함이다.
그는 강의 내내 “성경에 쓰여 있는 문자보다는 정신이 중요하다”는 말을 수차례 강조했다.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를 믿기보다는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배경 등을 따져보고 이해를 해야 한다는 것으로써 성경을 거부하는 그의 모습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외교문서나 계약서와 같은 문서들이 문자적으로 기록되지 않았다면 권위를 지닐 수 없듯이 성경의 권위는 문자적으로 기록되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대로 믿고 실행해야만 한다. 정신이 중요하다면, 그 정신을 전달해 줄 수 있는 매개체인 언어 또한 중요한 것이다. 성경은 영감으로 기록되었고 섭리로 보존되었기에 오류가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정말로 심각한 신학적 문제는 김교수와 같이 성경을 변개하고 거부할 때 찾아온다. 성경에 대한 바른 입장은 말씀보존학회 간 <하나님께서 지키신 성경>을 참고하시오.
말씀을 보존할 수 없는 하나님이라면 여러분의 혼을 지킬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께서 우리의 혼을 안전하게 지키시듯이 하나님의 말씀 또한 안전하게 보존하신다. 1,000억 개가 넘는 은하계를 운행하고 보존하실 수 있는 하나님께서는 충분히 그러한 능력을 갖고 계신다. 김교수는 성경에 대한 믿음도 올바로 정립되어 있지 않은 학자일 뿐, 성경을 믿는 그리스도인은 될 수 없다.
2. 갈라디아서 3:28에 대한 오해
「바울은 남녀관계에 있어 일관되게 갈라디아서 3장 28절에 나오는 동등성의 원칙에 따라 가르치고 있다... 만약 바울이 고린도전서 14장 34절과 35절을 썼다면 바울은 한 편지 안에서도 서로 모순되는 가르침을 주는 종잡을 수 없는 사도가 되는 셈이다.」
『너희의 여자들을 교회 안에서 조용히 하게 하라. 그들이 말하는 것이 허락되지 아니하였으니 율법에서도 말한 것과 같이 다만 복종할지니라. 그러나 만일 그들이 무엇을 배우고 싶어하면 집에서 자기 남편들에게 물을지니라. 이는 여자들이 교회 안에서 말하는 것은 수치임이니라』(고전 14:34,35). 이것은 분명히 영감으로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이며, 자신의 생각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제거하려는 김교수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위치에 서 있는 어리석은 자이다. 성경과 내 생각이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있다면 변해야 할 것은 “나”이지 “성경”이 아니다. 김교수의 주장과는 달리 고린도전서 14장 말씀은 갈라디아서 3:28과 모순되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남자와 여자도 없으니』라는 갈라디아서 3:28의 말씀으로 남녀 평등을 주장하며 여자도 목사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그 말씀의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26절), 곧 구원받는 것에 있어서 차별이 없다는 뜻이다. 어떤 말씀이든지 말씀의 앞뒤 문맥을 살피는 것은 중요하다(갈 3:16 -29). 구원받는 데 있어서만큼은 남녀노소 인종의 차별 없이 누구나 평등하지만, 구원받은 후에 남자와 여자가 같아지는 것은 아니다. 다른 것은 같지 않다는 것이 진리이듯이 남자와 여자는 같지 않다. 다른 것은 다른 것이다. 여자목사가 성경적이라는 주장은 성경을 올바로 나누어 볼 수 없었던 김교수의 사사로운 해석일 뿐이다. 종이 통치자를 다스리는 것이 어울리지 않듯이(잠 19:10) 여자들이 남자들에게 권위를 행사하는 것도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여성의 역할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시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니라』(고전 11:3). 이것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질서이다. 하나님께서는 창조하셨을 때부터 이 질서를 세우셨다. 위대하신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을 때의 시점으로 되돌아가 보자. 하나님께서는 온 우주 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신 뒤, 흙으로 사람을 만드셨다. 바로 최초의 사람 ‘아담’이다. 아담에게는 한 가지 명령이 주어졌는데 “다산하고 번성하며 땅을 다시 채우고 그것을 정복하라. 그리고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에서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는 것이다(창 1:28). 하나님의 통치의 권위가 아담에게 주어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남자가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자를 지으리라.』(창 2:18)고 말씀하신 뒤 아담의 갈비뼈를 취하셔서 돕는자인 이브를 지으시고 아담에게로 데려오셨다. 이때부터 여자의 첫 번째 역할은 남자를 돕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권위를 주셨고 이브는 그 권위에 순종할 것을 명령받았다. 이브는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에 관한 명령을 주님께로부터 직접 받지 못했다. 왜냐하면 이브의 머리는 아담이기 때문에 아담이 이브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 주었던 것이다. 이 진리는 신약의 은혜 시대에서도 변하지 않는데 다만 권위에 순종하기 싫어하는 아담의 타락한 성품이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를 대적하고 있는 것이다(고전 11:3,8,9). 결혼하기 전과 결혼한 후, 자매들에게 갖는 하나님의 기대는 달라지는데, 결혼하지 않은 자매에 대해서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몸과 영을 다 거룩하게 하며 주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일에 매진하는 것을 원하시고(고전 7:34), 결혼한 자매에 대해서는 『한 남자의 아내』로서 자녀를 잘 양육하고 모든 선한 일에 드려지기를 원하시며 남편에게 순종하기를 바라신다(딤전 5:9,10, 엡 5:21-25). 결혼하기 전의 형제 자매는 평등한 관계에 있으나 결혼하게 되면 아내는 남편의 권위 아래로 들어가게 된다. 우리는 남편에게 순종함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렸던 좋은 본을 아브라함의 아내였던 사라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너희 아내들아, 너희 자신의 남편에게 복종하라... 마음에 숨겨진 사람을 썩지 아니하는 것 곧 온유하고 고요한 영으로 단장할지니 그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매우 값진 것이니라. 예전에 하나님을 신뢰했던 거룩한 여인들도 이와 같이 자기 자신의 남편에게 복종함으로써 자신들을 단장하였느니라.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부르며 복종했던 것과 같이 너희가 선을 행하고 어떤 놀라운 일에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면 그녀의 딸들이 되느니라』(벧전 3:1-6). 주어진 권위에 순종하고 자신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 하나님을 섬길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며, 자매로서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남자나 여자 모두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셨으나 그 둘 사이에는 질서가 있고 사역에 있어서 엄연한 차이가 있다. 이러한 차이를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남자와 여자를 통해서 조화롭게 일하고 계신다. 여자 같은 남자, 남자 같은 여자를 만드는 것이 현대 교육의 목표일지라도 남자는 남자이며 여자는 여자이다. 남자는 남자다울 때 가장 멋지며, 자매는 자매다울 때 가장 아름다운 것이다. 형제들에게 권위를 행사하는 자매는 하나님의 질서에 위배되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에는 주님을 헌신적으로 섬겼던 아름다운 여인들이 많이 등장한다. 하지만 단 한 명도 남자에게 권위를 행사하며 설교하는 모습은 결코 찾아볼 수 없다. 비록 목사와 집사의 자격 요건이 형제로 국한되고 설교할 수 있는 권위도 형제들에게만 주어졌지만 이러한 섬김 말고도 자매로서 주님을 섬길 수 있는 길은 얼마든지 많이 있다. 사역자의 아내가 되어 남편을 돕는 자로서의 역할이 있고, 자녀들을 바른 말씀으로 양육하는 역할이 있다. 주일학교 학생들을 가르친다거나 거리에 나가서 죄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 또한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아름다운 섬김의 모습이다. 또한 글을 쓰고 찬송가를 작곡할 수도 있고 무릎을 꿇고 중보기도를 드릴 수 있다. 이외에도 섬길 수 있는 방법과 기회는 많이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섬길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기도하고 기회가 주어졌을 때 신실하게 그 일을 수행하는 것이다. 형제들과 마찬가지로 자매들도 주어진 상황 안에서 여러 가지 일로 주님의 사역에 동참할 수 있다. 남자가 되었든 여자가 되었든 모두는 주님 안에서 귀하고 중요한 지체들이다. 다만 남자와 여자가 같지 않듯이 맡겨진 역할이 서로 다를 뿐이다. 이를 이해하고 받아들일 때, 형제와 자매가 조화롭게 하나님의 일을 수행해 나갈 수 있으며 하나님의 질서를 굳건히 세워나갈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혼란의 창시자가 아니라 질서의 하나님이심을 기억하자(고전 14:33,40).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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