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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신학자를 불러서 자신을 극찬하게 한 조용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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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04년 08월호>

지난 6월 3일과 4일에 여의도 CCMM 빌딩 영산아트홀에서는 한세대 영산신학연구소 주관으로 “2004 영산국제신학심포지엄”이 열렸다. 여기에는 독일 튀빙겐 대학의 명예교수인 위르겐 몰트만 박사가 초빙되었고, 주제는 여의도순복음 교회 목사인 “조용기 목사의 희망 신학”이었다. 몰트만 박사는 “희망의 신학”이라는 것을 주창한 “금세기 최고의 신학자”라고 선전되었다. 한세대의 김성혜 총장은 “이번 심포지엄으로 조용기 목사의 희망에 대한 신학적 논의가 국제적으로 가속화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이전에도 조용기 목사와 몰트만 박사는 서로 많은 교류가 있어왔다. 그리고 이번 심포지엄에서 강사인 몰트만 박사는 발제에 앞서 조용기 목사와 순복음교회에 대해서 이렇게 찬사를 보냈다.
“조목사님은 뛰어난 기독교 신학자로서 전 세계적으로 진지하게 다루어질 가치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교회는 성경적인 복음 아래 서 있고, 스스로를 그것에 의해 평가받고자 하는 기독교적 교회입니다.”

이번 글에서는 순복음교회측 대학인 한세대에 의해 초빙되어 조용기 목사를 극찬한 이 몰트만이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또 그 몰트만이라는 사람이 심포지엄에서 무슨 이야기들을 했는지를 살펴봄으로써, 그동안 그와 지속적으로 교류해왔고 그를 초빙해서 자신을 극찬하게 한 조용기 목사 또한 어떤 사람인지를 평가해 볼 것이다.

(1) 조용기 신학 심포지엄 강사였던 몰트만의 이전 발언들
조용기 목사를 극찬한 몰트만은 「삼위일체와 하나님의 역사」(대한기독교서회)라는 책에서 자신의 “구원 간증”을 이렇게 써놓았다.
“17살이 되던 1943년에 나는 군인으로 징집되었고... 1945년에는 전쟁포로가 되었으며, 3년 후인 1948년에 풀려났다. 벨기에와 스코틀랜드의 포로수용소에서 나는 생의 확실성이 무너져내리는 것을 경험했고, 이 가운데서 나는 그리스도교 신앙 속에서 새로운 생명의 희망을 경험했다. 이 신앙은 정신적 생존만이 아니라 아마도 육체적 생존까지 내게 선사했던 것 같다. 왜냐하면 이 희망은 절망과 자포자기로부터 나를 건져내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 되돌아왔고, 내게 생명을 선사한 희망의 능력을 파악하기 위하여 신학을 공부해야 하겠다는 새로운 개인적 동기를 갖게 되었다...”

그냥 언뜻 보면, 극심한 한계 선상에서 복음을 믿고 그에게 아주 놀라운 역사가 일어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그때의 상황을 몰트만은 「나는 어떻게 변하였는가?」(한들출판사)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상세하게 밝혀 놓았다.Bible Believers / 17
󰠏󰠏󰠏󰠏󰠏󰠏󰠏󰠏󰠏󰠏󰠏󰠏󰠏󰠏󰠏󰠏󰠏󰠏󰠏󰠏 가짜 그리스도인 신학자를 불러서 자신을 극찬하게 한 조용기 목사 ⊙

“밤에 나는 처음으로 하나님에게 외쳤습니다. ‘나의 하나님, 당신은 어디에 계십니까? 무엇 때문에 나는 살았고, 다른 사람들처럼 죽지 않았습니까?’라고 나는 물었습니다. 3년간의 포로수용소 기간에 나는 우선 구약성서의 탄식 시편에서, 그 다음에는 마태복음에서 해답을 구했습니다. 예수가 죽을 때 외쳤던 소리에 이르자, 나는 다음과 같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하나님에게 버림받은 너를 이해하시는 너의 신적인 형제와 주님이 계시다.”

이것이 복음인가? 이것이 그리스도교 신앙 속에 있는 “생명의 희망”인가? 이렇게 믿으면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인가!
하나님이 계시는 것을 믿는다고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아니다. 비참한 인간을 이해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는 것을 믿는다고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아니다. 성경에 따르면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서 자기의 죄값을 모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대신 치러 주셨음을 믿고 그분을 모셔들일 때에 이루어지는 것이다(고전 15:2-4, 요 1:12,13). 몰트만의 “구원 간증”에는 자기가 죄인이라는 말도 없고, “죄”라는 말조차 없다. 더군다나 예수님이 자신의 죄를 대속해 주셨다는 말은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찾을 수가 없다. 몰트만의 “구원 간증”의 내용은 요약하자면, 자신은 (죄 가운데가 아니라) “절망 가운데” 있었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탄식과 절규를 성경에서 읽고서 “동질감”을 느꼈다는 것이다. 세상에는 별 “그리스도인”도 다 있는 것 같다.

조용기 목사를 극찬한 이 몰트만은 철학자들의 영향을 받아서 자신의 신학을 정립했다는 것을 그의 글 곳곳에서 말하고 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1960년에 나는 에른스트 블로흐의 ‘희망의 철학’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이 책에 너무 매료되었기 때문에 나는 산의 경관을 감상할 틈도 갖지 못했습니다... 블로흐가 현대의 포이어바하-막스적 무신론을 희망의 근거로 생각했다면, 나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을 위한 그의 사회적 유토피아와 ‘억압당하고 멸시받는 자들’을 위한 그의 정의의 유토피아에다가 나는 종말론적 지평으로서 ‘죽은 자들의 부활’을 추가하였고...”

『아무도 너희를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노략질하지 못하도록 주의하라. 그것들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유치한 원리를 따른 것이며 그리스도를 따른 것이 아니니라』(골 2:8). 몰트만은 성경의 경고를 무시하다가 노략질당한 것이다. 다음을 보면 몰트만의 정체를 보다 더 확실히 알 수 있다. 다음은 “나는 하나님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라는 그의 글 중에 나오는 내용이다.18 / Bible Believers

“우리가 복음서에 따라서 예수의 사화(史話)들을 추적해 본다면 우리는 먼저 예수의 성령세례를 목도하게 된다... 이것은 예수가 요르단 강에서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은 것을 말하는데, 이로 말미암아 예수는 비할 바 없는 영 경험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영 경험과 함께 예수에게는 하늘이 열린다. 그는 하나님과 메시야적 자녀의 관계 안으로 들어간다.”

성경은 예수님이 성령으로 잉태되심으로써 하나님의 아들이시며(눅 1:31,32), 아기 때도 아들이셨고(마 2:15) 소년 시절에도 하나님의 아들이셨음을(눅 2:49) 거듭해서 말씀하고 있지만, 이 무지한 몰트만은 인간 예수가 성인이 된 후 요단 강물에 들어갈 때 굉장한 영적 경험을 함으로써 하나님을 “아버지”로, 자신을 그분의 “아들”로 이해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이 아니라 영적 경험을 한 인간으로 취급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어지는 다음의 말에서 더 분명히 드러난다.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 신분 안에서 두 차원, 즉 그의 하나님 관계와 인간 관계를 구분하는 것은 의미가 있다... 만약 오로지 ‘외아들’만이 강조된다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술어는 예수를 인간 너머의 하나님까지 높이 들어올리며, 부당하게 그를 신격화한다.”
성경은 예수님을 지칭하면서 만물을 지으신 분이 육신이 되었다고 했는데(요 1:1-3,14),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높이 들어올리는 것이 부당한 신격화인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는 그리스도인과는 다른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는 교회 안에 “몰래 들어온” 자다(유 4).

조용기 목사라는 사람은 이런 가짜 그리스도인을 초빙해서 자기의 위상을 높이고 극찬을 받고 앉아 있으며, 또 그런 자와 지속적으로 교류를 해온 것이다. 조용기 목사의 정체는 최근 불교대학원 특강 관련 망언에서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그가 지속적으로 해온 일들이 모두 그의 정체를 증명한다.

(2) 조용기 신학 심포지엄에서의 몰트만의 발언들

이번 심포지엄에서 조용기 목사를 극찬한 몰트만이 말한 내용 중 눈여겨볼 부분은 다음과 같다.

몰트만은 자기가 쓴 책 「희망의 신학」과 비교하면서 그 희망의 신학과 조용기 목사가 펼치고 있는 오순절 운동은 “하나의 공통된 영적 뿌리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심포지엄에 참석한 사람들은 아무도 이에 대해 반기를 들지 않았다. 곧 조용기 목사의 오순절 운동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면서 철학에 매료된 한 가짜 그리스도인이 불신자인 철학자의 사상에서 끄집어낸 신학 이론과 공통된 영적 뿌리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 뿌리는 성령님이 아니다. 그 뿌리는 “다른 영”이다(고후 11:4).Bible Believers / 19


한편, 몰트만은 이번 심포지엄에서 재림과 종말론에 관해서 아주 불량한 입장을 보였다.
“역사 속에서 그리스도의 임재를 더 잘 이해하고, 성령의 은사적 경험들을 향해 우리 자신을 열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의 강림 종말론을 필요로 하며, 세대주의 종말론을 떠나야 합니다.”

성경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것에 대한 예언도 문자 그대로 믿으며 주님을 기다리는 세대주의 종말론을 배격하고서, 과연 어떤 종말론을 주장하고 있는지는 계속되는 말들 속에서 알 수 있다.
“그리스도가 이 세상 속으로 오심으로써, 이미 여기서 그리고 지금, 잘못된 삶 가운데 참된 삶이 시작됩니다... 우리가 개인적으로 영과 육체, 두려움과 희망, 미움과 사랑 사이의 내적 전투 속에서 끝까지 싸우는 것은 우주적이고 종말적인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오심을 촉진하며 이 세상의 어두움 가운데 하나님의 위대한 날을 비추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성령께서 오신 것을 두고서 “그리스도가 이 세상 속으로 오셨다”고 말하고 있고, 미래에 있을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해서는 성도의 개인적인 내적 전투가 그 오심을 촉진한다고 말하고 있다. 몰트만은 세대주의 종말론을 떠나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그것이 어디가 잘못되었는지, 또 자신이 주장하는 종말론이 왜 옳은지를 전혀 성경을 가지고 입증하지 못하고 있다. 성경 어디에 성령님께서 오신 것을 두고서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셨다고 되어 있는가? 성경 어디에 성도의 내적 전투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촉진한다고 기록되어 있는가? 자기 생각만 주장하고 성경 구절로 입증은 하지 못한다면 어떤 교리인들 만들지 못하겠는가? 그는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지 않고 있다. 그는 현학적이고도 복잡한 표현들을 사용하면서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의 가치를 최대한 깎아 내리려고 혈안이 되어 있다.
“널리 쓰이는 ‘재림’이란 용어는 좋지 않습니다. 만일 그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으며, 그리고 우리가 그 어디서나 그의 임재를 느낀다면, 왜 그리스도가 ‘다시 오셔야’ 한다는 말입니까?... 그래서 저는 그리스도의 ‘재림’ 대신에 ‘그리스도의 강림’에 대해 말할 것을 제안합니다.”20 / Bible Believers

이것은 단지 현재 하나님과의 교제를 중시하는 차원을 넘어서, 현재 하나님과의 교제가 있으니 재림 따위는 필요치 않다는 말이 아닌가! 그것은 신약성경에서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괴이한 기독교 신앙이다. 그리고 실제로 재림에 대해서 왜곡된 주장을 하고 있다.
“구세주는 오고 계십니다. 그분은 영원 속의 한 장소에 고요히 앉아 계시다가 갑자기 내려오실 특별한 시점을 기다리시는 게 아니라, 오고 계십니다.”
하늘에 오르셔서 셋째 하늘 낙원의 아버지의 오른편에 앉으셨던 그분이 과연 2,000년 전부터 계속 오고 계시는가? 그럼 지금 어디쯤 와 계시는가? 지금쯤 태양계 안에 도달하셨는가?

성경으로 입증되는 종말론을 거부하고서 엉뚱한 종말론을 멋대로 주장하는 몰트만은 결국 다음과 같이 하나님의 심판을 흐리는 짓을 하면서 자기의 의견을 매듭지었다.
“강림의 복음은 마지막 심판의 기대를 기쁜 소식으로 만들어야 하며, 그것을 더 이상 협박의 메시지로 방치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마지막 심판을 기쁨으로 기다려야 하며, 더 이상 그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이 회개하지 않은 죄인들에게 큰 두려움이 될 것임을 누누이 경고하고 있다. 『누구든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그는 우리 주께서 오실 때 저주를 받을지어다』(고전 16:22). 『이는 주의 날이 밤에 도둑같이 오리라는 것을 너희 자신이 정확히 알고 있기 때문이니라. 그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고 말할 때에, 아이밴 여인에게 진통이 오듯 갑작스런 멸망이 그들에게 임하리니, 결단코 피하지 못하리라』(살전 5:2,3). 『주 예수께서 그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나타나실 때에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을 불길 가운데서 벌하시리니 이런 자들은 주의 임재와 그의 능력의 영광으로부터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게 될 것이라』(살후 1:7b-9).

몰트만은 결코 주님의 오심이 성도들에게 기쁜 소식이어야 한다는 뜻으로 말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성도와 불신자를 가리지 않고서 주님의 오심이 기쁜 소식이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었다. 다음과 같은 그의 마지막 결론에서 더 분명히 드러난다.
“최종적으로 모든 사람들이 구원을 받게 될까요? 우리는 그것을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소망할 수 있고, 이를 위해 기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온 세상의 그 무엇인가를, 그리고 그 누군가를 포기하신다고 오늘이나 영원이나 결코 말할 수 없다... 마지막은 다음과 같을 수밖에 없다... 예수께서는 심판하실 수는 있지만, 영원히 멸망시킬 수는 없다. 이것을 나는 가장 깊은 지옥 아래서도 선포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을 것이다... 제게도 이것은 ‘그리스도의 강림의 순복음’입니다.”Bible Believers / 21


그는 하나님의 두려운 심판을 제거해 버렸다. 그는 주의 임재로부터 떠나 불길 가운데로 들어가는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제거해 버렸다(살후 1:8,9). 하나님의 심판과 죄의 형벌이 없다고 말하면서 사람들에게 거짓 희망을 갖도록 속이는 것이 바로 “희망의 신학”인 것이다.
몰트만은 여러 모로 구원받지 않은 가짜 그리스도인의 실체를 드러내었다. 그러나 그 심포지엄에 참여한 자들 중에서는 이에 대해 반대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이 심포지엄을 두고 조용기 목사의 “희망 신학”이 국제적으로 확대되는 자리가 되었다며 자화자찬하고 있다. 이것은 몰트만과 오랫동안 교류하고 그를 위대한 신학자라며 초빙한 순복음 교회와 한세대와 조용기 목사의 영적 상태가 아주 불량하다는 것을 입증하고도 남는 자리였다.
『두 사람이 동의하지 않고 함께 걸을 수 있겠느냐?』(암 3:3)
물론 절대로, 절대로 그럴 수 없다.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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