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성경과 예언 분류

세상 종교로는 어림도 없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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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18년 02월호>

성경적인 기독교 신앙을 아무 소망도 없는 세상 종교들처럼 변질시킨 자들은 누구인가? 성경에 무지한 채 하나님의 부르심도 없이 스스로 목사가 되겠다고 나선 자들과, 구원도 받지 않았으면서 그저 종교심 하나로 교회에 발을 들여놓기에 급급했던 그들의 교인들이다.

진리의 말씀, 곧 구원의 복음을 듣고서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믿고 영접하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침을 받아(엡 1:13) 영이 거듭나고 혼이 구원받는 경험을 할 수 있지만, 그들은 그저 "종교심"으로 믿음을 대체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종교심으로는 아무도 거듭날 수 없다. 이런 이유 때문에, 성경적 기독교가 일반 종교들과 극명하게 다른 점 두 가지가 "부활"과 "예언"임에도, 그들은 부활에 대한 소망을 가질 수 없을 뿐 아니라, 예언이 문자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믿음도 갖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이보다 더 비참한 일이 있겠는가!

세상의 어떤 종교 지도자들도 죽었다가 "부활"하지 못했다. 이것은 그들 역시 죄인들이고 그런 세상 종교로는 인류의 죄를 제거할 수 없음을 보여 준다. 만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었다면 우리가 믿는 믿음이나 구원 역시 헛것이 되었을 것이고(고전 15:17), 인간의 무덤들은 그 뼈들이 먼지와 재로 변하면서 영원히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무덤을 비우신 예수님께서는 그분을 믿는 성도들을 향해 『내가 살고 너희도 살겠음이라.』(요 14:19)라고 말씀하신다. 이처럼 "부활"은 참된 복음을 위한 시금석이며, 다른 종교들은 감히 흉내 낼 수조차 없는, 오직 성경적 기독교 신앙만이 지니는 뚜렷한 특징이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피의 속죄보다 부활에 대해 더 많이 강조했는데, 인류 역사상 빅뉴스는 "무덤에서 온 소식"이었다. 『그분은 여기에 계시지 않고 말씀하셨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주께서 누우셨던 자리를 보라』(마 28:6). 누가 뭐라 해도 예수님은 실제로 살아나셨고 그분의 무덤은 비어 있는 것이다.

"예언"도 마찬가지인데, 다른 종교들에는 예언이 없다. 사실 감히 예언을 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함부로 예언했다가는 그 종교의 존립 자체를 뒤흔드는 위험천만한 일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자칫 잘못 예언했다가 그 예언들이 성취되지 않을 경우 그 종교나 경전들은 가짜로 판명될 것이고, 그 종교에 대한 신뢰와 가치가 떨어져 이 지구상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힌두교에는 예언이 없다. 불교도 없다. 설령 예언이 있다 해도 몇 억 년이나 억겁의 세월 후에 있을 일들을 말한다. 즉 어느 누구도 확인하거나 검증할 수 없는 일들, 증명하지 못할 일들을 예언이랍시고 가르치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앞으로 나타날 미륵불, 곧 미래에 나타날 부처가 있다고 말한다. "언제 오는 것인가?" 했더니, 57억 년 뒤에나 온다는 것이다. 현실 속에서는 결코 등장하지 않는다. 아무도 증명할 수 없는 그런 내용을 예언이라고 제시하는 것이다. 이슬람교도 없다. 코란에는 두 개의 예언이 나오긴 하지만, 이는 다니엘 2장에서 훔쳐 온 것들로서 마호메트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성취된 것들이다. 마호메트는 알라의 예언자로 자처하지만, 그는 코란 114개의 장에서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의 일이든, 죽은 후의 일이든, 단 하나의 예언도 하지 못했다. 선지자 모세는 모세오경에서 그가 죽은 이후 이 땅의 역사 속에서 일어날 미래의 사건들에 대해 96개의 예언들을 기록했다. 그러나 코란은 단 하나의 예언도 하지 못했다. 분량으로 보면 코란이 모세오경의 세 배나 되지만, 마호메트는 단 하나의 예언도 감히 하지 못했던 것이다. 예를 들어 마호메트는 자신이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죽을지에 대해 예언하지 못했다. 반면 모세는 자기가 언제, 어디에서 죽을지 알았고(신 32,34장), 선지자 엘리야도 자신이 하늘로 들려 올라가게 될 것을 알고 있었다(왕하 2장). 초림 때 선지자로 사역하신 예수님께서는 갈보리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 전에 다가올 그분의 죽음에 관한 열 가지 내용을 구체적으로 말씀하셨는데(마 20:18,19, 눅 9:22) 그것은 그대로 이루어졌다.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예언뿐 아니라 성경의 다른 모든 예언들도 논쟁의 여지없이 과거에 실제로 일어났고, 현재에도 일어나고 있으며, 미래에도 반드시 일어나게 된다. 그만큼 성경은 쓰레기같이 허접한 종교들이나 경전들과는 확연히 다른 책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세상 종교들과 우상 숭배자들을 향해 이렇게 도전하시는 것이다. 『주가 말하노니 너희는 송사를 일으키라. 야곱의 왕이 말하노니 너희의 강력한 주장을 내어 놓으라. 그들로 주장들을 내어 놓고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우리에게 보이게 하라. 그들로 이전 일들을 보이게 하여, 그것들이 무엇이든지 간에, 우리로 그 일들을 숙고하고 그 일들의 나중 결말도 알게 하라. 아니면 앞으로 있을 일들을 우리에게 선포할지니라. 이후에 있을 일들을 보여 주어 우리로 너희가 신들인 것을 알게 하라. 정녕, 선을 행하거나 악을 행하라. 우리가 놀라며 그것을 함께 보리라』(사 41:21-23). 마호메트, 진 딕슨, 노스트라다무스, 마더 쉬프튼, 에드가 케이시 등 소위 예언자들이라 불리는 그 누구라도 성경의 예언에는 견줄 수 없는 것이다. 참된 하나님에 대한 시금석은 역사에서 이루어진 예언들에 있다. 그래서 진리의 말씀인 성경은 아무런 주저함도 없이 예언을 하는 것인데, 특히 이 예언들을 가리켜 성경은 『확실한 예언의 말씀』(벧후 1:19)이라고 단언한다. 성경의 기록이 완성되었을 때 성경의 "5분의 1"이 예언이었다. 모형이나 상징으로 제시되는 간접적인 예언들까지 포함하면 "3분의 2"가 예언이라 할 수 있지만, 직접적인 예언들만 본다면 20%가 예언인 것이다. 이 예언들만 모두 합쳐 놓으면 성경 66권 중 약 13권에 해당하는 분량이고, 이것은 신약 전체의 절반 정도에 해당한다. 이것만 보아도 예언이 성경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예언들을 선지자들을 통해 선포하시고, 더 나아가 그 예언들이 반드시 이루어지도록 모든 역사를 주관하신다. 이것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다. 오늘날 세계 인구 약 74억 명 중에서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존재는 단 한 명도 없다. 주님께서는 인류의 모든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이기에 예언을 미리 기록해 두실 수 있고, 또 미리 기록된 그 예언, 곧 미래의 역사적인 사건을 반드시 이루실 수도 있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주님께서 시공간을 초월하시는 영원하신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즉 시간상으로도 "영원부터 영원까지" 살아 계시는 분이고(시 90:2), 공간상으로도 모든 분자 활동이 정지되어 있는 "영원"이란 장소에 거하시는 분인 것이다(사 57:15). 그래서 하나님께서 앞으로 일어날 사건에 대해 미리 아신다고 했을 때, 이것은 "현 시점에서"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 그 미래의 일을 단순히 아시는 것 정도만을 의미하지 않고, 시공간을 초월하여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난 "미래의 시점에" 실제로 가 계실 수 있는 분이라는 사실을 보여 준다. 앞으로 일어날 미래의 예언도 주님께는 과거에 일어난 사건으로 여겨질 수 있기에, 인간의 관점에서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의 일도 하나님께서는 이미 일어난 과거처럼 성경에 생생하게 기록해 두실 수 있는 것이다. 일례로 여리코 전투와 관련하여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내가 여리코와 그 왕과 힘센 용사들을 네 손에 주었으니』(수 6:2)라고 말씀하셨을 때, 아직 전투를 치르기 전이니까 미래 시제인 "줄 것이니"로 기록되는 것이 올바른 것처럼 보이지만, 성경은 분명 과거 시제, 곧 이미 주어진 것처럼 "주었으니"로 기록하고 있다. 마치 여리코가 이미 함락된 것처럼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는 시공간을 초월하시는 하나님께서 여리코가 함락된 미래의 시간으로 건너가셔서 이미 함락된 상황을 보고 계시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네 손에 주었으니』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당시 여호수아는 이 말씀을 믿고 여리코로 진격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정말 그렇게 해 주실까?" 하면서 주님의 말씀에 대해 의심할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이것은 단순히 말로만 하신 약속이 아니라, 여리코의 함락을 직접 눈으로 보시면서 말씀하신 약속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약속은 기도 응답에 관한 약속에도 적용된다. 『우리가 구하는 것은 무엇이나 그가 들으시는 줄을 안다면, 우리가 그에게 구한 요청들을 받은 줄도 아느니라』(요일 5:15). 왜 여기서는 우리가 구한 요청들을 이미 "받은 것"으로 안다고 말씀하는 것인가? 그것은 우리가 주님의 뜻 가운데서 기도하는 것이 확실할 때, 그것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추호도 의심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주님께서는 우리가 구한 요청들을 이미 다 이루어 놓으셨고, 미래의 시간으로 가셔서 이루어진 그것을 실제로 보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에 따른 확신을 가지고 기도를 드릴 수 있다.

이처럼 성경은 세상의 그 어떤 종교 경전과도 다르다. 성경만큼 역사상 수없이 이뤄져 왔던 예언들을 갖고 있는 책이나 경전은 이 세상에 단 한 권도 없다. 역사상 이미 이뤄진 예언들이 우리 앞에 있을 때(초림과 연관된 300여 개의 예언들), 아직 이뤄지지 않은 예언도 이뤄질 것이라고 우리는 확신할 수 있다(재림과 연관된 500여 개의 예언들). 그래서 성취된 예언이 어떤 기적들보다도 "성경의 영감성과 무오성"에 대한 확실한 증거가 되는 것이다. 이제 공은 당신에게 넘어가 있다! 물론 선택은 개인의 자유다. 그러나 그에 대한 책임은 반드시 져야 한다. 기회는 무한정 주어지지 않는다. 지금 바로 모든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과 그분께서 친히 기록하신 성경 앞에 겸손히 무릎을 꿇고, 그 역사의 주인이신 주님의 명령에 온전히 승복하는 것이 현명한 선택임을 기억해야 한다.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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