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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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제5권 - 영원한 감사와 찬양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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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07년 03월호>

우리는 앞에서 시편 제5권을 통해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에 대해 살펴보았다.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은 다른 어떤 것도 신뢰하지 않는다는 절대적인 믿음이다. 이러한 믿음은 특히 고난 가운데 두드러지는데, 시편에서는 악인들로 인해 고난당할 때 하나님을 신뢰하는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그런데 이러한 모습은 단순히 악인들에게서 구해 달라는 간구의 차원으로 끝나지 않고, 그 악인들을 멸해 달라는 저주의 기도로까지 발전된다.
1. 악인들에 대한 저주
109편은 대표적인 저주의 시다. 다윗은 악인을 사탄에게 넘겨주고 있으며(6절), 빨리 죽게 해달라고(8절), 그의 가족들도 불행에 처하게 해달라고 기도한다(9,10절). 『나의 대적들은 부끄러움으로 옷입게 하시고 겉옷을 입듯 자기들의 수치로 스스로를 덮게 하소서』(109:29). 이런 면들은 시편에서 두루 발견되는 바, 지극히 구약적인 모습이라 할 수 있겠다. 신약에서 우리 주님께서는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마 5:44). 이러한 모습은 신구약 간의 사상적 모순처럼 여겨지기도 했고, 유대주의의 도덕적 열등성으로 비쳐지기도 했다. 혹은 시편만을 가지고 기독교 사상의 편협성을 지적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소위 “저주 시편”들은 그런 관점으로 봐서는 안 된다. 이것은 구약에서 하나님의 공의를 드러내는 아주 정상적인 방법이었다.
십자가의 사랑이 제시되기 전까지 하나님의 공의는 의인에 대한 복과 악인에 대한 저주를 통해서만 드러날 수 있었다. 구약 히브리 성도들에게 악인의 번영은 율법과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도전이라고밖에 여겨질 수 없었다. 그들은 간혹 악인이 의인을 박해하면서도 번성하는 것을 보아야 했는데, 이것은 그들에게 참으로 인내를 요구하는 일이었다. 물론 이것을 통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가르쳐 주시는 면도 있었다. 그것은 바로 그와 같이 하나님께서 악한 이스라엘을 오래 참으시고 계셨다는 것이다. 하지만 구약은 여전히 하나님의 공의가 드러나는 책이었고, 따라서 시편 기자는 단순히 자신의 어려움 때문에 그 악인을 멸해 달라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공의를 위해서 그 일을 이루어 달라고 간구하는 것이다.
우리는 신구약의 이러한 차이로 인해서 “향상된 계시”라는 진리를 발견해야 한다. 구약의 계시는 신약에서 더 밝히 드러나고 완성된다. 구약이 틀렸기 때문에 바뀌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더 완벽하게 드러났다는 것이다. 만약 구약에서 공의를 제시하지 않고 사랑만을 제시했다면 그것은 오히려 반쪽짜리 진리가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에서 율법과 공의를, 그리고 신약에서 은혜와 사랑을 제시하심으로써 그분의 온전하신 뜻을 드러내 주신 것이다.
무엇보다 “저주 시편”들 역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비록 다윗이 간구자의 입장으로 악인의 저주를 바라는 시를 쓰고 있지만,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겠다는 성령님의 의지 속에서 기록된 성경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 말씀들은 오늘날도 유효하다. 비록 지금이 은혜 시대이기 때문에 그분의 사랑이 드러나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분의 공의가 무너진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을 십자가를 통해서 용서하셨을 뿐, 십자가를 통하지 않고는 여전히 그분의 공의에 따라 세상을 벌하신다. 다윗이 “악한 자를 벌하소서.”라고 기도했다면, 이것은 하나님께서 “악한 자를 내가 벌하리라.”는 말로 이해해야 한다. 다윗이 『사탄으로 하여금 그의 오른편에 서게 하소서.』(109:6)라고 한 기도는 사도 바울이 신약에서 『그러한 자를 사탄에게 넘겨주어 그 육신은 멸망케 하여도...』(고전 5:5)라고 말한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신약에서 공의는 놓쳐 버리고 사랑만 발견한 사람은 성경을 반쪽밖에 읽지 못한 사람이다. 신약에서도 죄인들은 벌을 받는다. 다만 구원받지 않은 죄인은 지옥의 형벌을 받을 것이요, 구원받은 자가 죄를 지으면 살아 있는 동안 징계받는다는 것만 다를 뿐이다. 그러나 그 징계가 육체적인 죽음에까지 이르게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또 하나의 대표적인 저주 시편은 137편이다. 8,9절의 표현은 잔인하기까지 하다. 『오 멸망할 바빌론의 딸아, 네가 우리를 대한 대로 네게 갚는 자는 행복하리로다. 네 어린 것들을 집어서 돌에 메어치는 자는 행복하리로다.』그러나 이것은 민수기나 여호수아에서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을 멸하시는 모습과 연관해 본다면 그리 충격적이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출애굽 때 이스라엘에게 약속의 땅을 주시려고 그 땅의 악한 거민들을 쫓아내셨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잔인하리만치 멸하신 것은 그들이 그만큼 충분히 악했기 때문이었다. 여기서도 마찬가지인데, 시편 137편의 배경은 바빌론이 유다를 멸망시킨 것이다. 바빌론이 유다에게 그렇게 행했다. 그래서 유다는 하나님께 바빌론에게도 그렇게 갚아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다. 즉 복수를 요구하는 것이다.
이것은 공의도 공의지만,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회복하시겠다는 약속이 반영된 것이다. 1절은 『우리가 바빌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정녕, 우리가 시온을 생각하며 울었도다.』라고 하면서, 그들의 포로 된 상태를 보여 준다. 이방인들은 그곳에서 노래하고 즐거워하라고 하지만(3절), 유대인들은 거절한다. 오히려 『오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는다면 내 오른손으로 그 기교를 잊게 하라.』(5절)고 하면서 예루살렘을 결코 잊지 않겠다는 결심을 한다(6절). 시온의 노래는 예루살렘에서 불러야 한다(4절). 하지만 그들은 지금 바빌론에 있다. 즉 다시 시온으로 돌아가겠다는 강력한 의지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의지가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이다. 신명기 28-30장에서 약속하신 바, 소위 “팔레스타인의 언약”이다. 그것은 그 백성이 율법을 지키면 약속의 땅에서 번성할 것이요, 율법을 어겨 범죄하면 그 땅에서 쫓겨날 것이며, 타국 땅에서 회개하면 다시 그 약속의 땅으로 돌이켜 주시겠다는 약속이다. 이것은 일찍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바, 그 땅을 영원히 아브라함의 씨에게 주시겠다는 언약을 반복하신 것이다(창 15:18 등). 이 언약에 따라 그들은 그 땅을 차지했으나(여호수아) 지속적인 범죄로 인해 책망 받더니 급기야는 이방인들에게 멸망당했다(열왕기하, 역대기하).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회복하셨다(에스라-느헤미야). 시편 137편은 바빌론 유프라테스 강변에서 고향 땅을 그리워하는 망향의 노래지만, 이스라엘의 회복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이 담겨 있는 예언적 노래다.
유다가 본토로 돌아올 때 시편 137:8,9에 예언된 대로 바빌론은 멸망당했다. 유다는 페르시아의 코레스가 바빌론을 멸하면서 본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는 또 먼 미래로 향하는 이중적 예언의 말씀이다. 이 구절은 일차적으로 과거 바빌론의 멸망에 적용되겠지만, 이차적으로는 대환란 끝에 있을 “신비의 바빌론”의 멸망에도 적용될 것이다(계 17,18장). 바로 적그리스도의 도성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더불어 멸망하고, 이스라엘은 천년왕국이라는 큰 안식의 땅을 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그때 이 망향의 노래는 완전히 성취될 것이다.
2.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뢰
시편에는 성경에서 가장 긴 장이 있다. 바로 시편 119편이다. 총 176절로 되어 있는 이 시의 전체적인 주제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보통 “말씀장” 혹은 “말씀시”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 시가 “하나님에 대한 신뢰”라는 큰 주제가 다루어지는 가운데 등장하는 이유는, 우리가 신뢰해야 할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은 곧 예수 그리스도시기 때문에 말씀을 신뢰하는 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것이다. 비록 하나님의 말씀을 “법규”나 “계명” 등으로 제시하고 있지만, 그것은 이 시가 구약성경의 한가운데에 있어서 그럴 뿐, 결국은 하나님의 말씀 자체를 가리키는 말이다.
문학적으로는 히브리어 알파벳 22자가 순서대로 여덟 절씩 총 176절에 두운(頭韻)을 이루고 있다. 1절에서 8절까지는 매 절이 “א”(알렙)으로 시작하고, 9절에서 16절까지는 매 절이 “ב”(베드)로 시작하여, “ת”(타우)에까지 이른다(169-176절). 이것은 히브리어 성경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히브리 시의 정수인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기록해 놓으신 것은 알렙에서 타우에 이르기까지 모든 면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으뜸이며, 그 말씀이 모든 것에 모든 것이 된다는 영적인 의미가 있는 것이다. 마치 요한계시록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알파와 오메가”가 되신 것처럼 시편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알렙에서 타우”가 되는 것이다. 모든 언어는 시작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에 맞춰져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시의 주제여야 하고 모든 노래의 주제여야 한다. 우리의 언어가 그분을 찬양하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아무리 멋진 미사여구를 구사하는 시인이라 해도 아무리 아름다운 음악을 만드는 음악가라 할지라도 그의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가 없다면 그것이 하나님 앞에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물론 번역본에서는 이와 같은 두운을 맞추기 힘들다. 그래서 <킹제임스성경>에서는 매 여덟 절마다 히브리어 알파벳을 마치 소제목처럼 붙여 놓고 있다.
우리는 이 시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위대함을 발견한다. 이 시에서는 성경을 가리키는 명칭들이 많은데,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주의 법(1절), 그의 증거(2절), 그의 길(3절), 법규(4절), 규례(5절), 계명(6절), 의로운 명령(62절), 말씀(9절).
성경은 보물이다(14,72,127절). 하나님의 말씀은 세상의 어떤 재물보다 가치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또한 우리의 상담자이고(24절), 우리 순례자들의 노래가 된다(54절). 또한 주의 말씀은 꿀보다 더 달며(103절), 우리를 인도하는 빛이 된다(105,130절). 또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영원한 유산이며(111절), 우리를 정결케 하는 물과도 같다(9절).
성경은 우리에게 복을 주며(1,2절), 생명을 주고(25,37,40,50,88,93절), 힘을 준다(28절). 또한 우리를 자유롭게 하며(45절), 지혜롭게 한다(66,97-104절). 그런가 하면 우리에게 친구를 만들어 주고(63절), 위로를 주며(50,76,82,92절), 방향을 제시해 준다(133절).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이런 것들을 준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 우리는 먼저 성경을 사랑해야 한다(97,159절). 그리고 성경을 존중해야 한다(72,127절). 성경을 공부해야 하며(7,12,18,26,27절), 마음에 간직해야 하고(11절), 묵상해야 한다(15,23,48,78,97,99,148절). 또한 말씀을 선포해야 한다(13,27절). 무엇보다 성경을 신뢰해야 하며(42절), 성경이 말씀하시는 바를 지켜야 한다(1-8절). 즉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시편 119편에서 배워야 할 교훈이다.
3. 올라가는 노래들
시편 제5권에는 “올라가는 노래”(song of degree)라는 매우 독특한 표제어가 붙어 있는 15개의 시들이 있다(120-134편). 대부분은 짧은 시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다윗의 저작임을 밝힌 시들은 네 편뿐이다(122,124,131,133편). 또한 “솔로몬을 위한” 올라가는 노래가 한 편 있는데(127편), 시편 전체에서 솔로몬이 언급된 제목은 단 두 편뿐이다. 나머지 한 편은 72편으로 “솔로몬을 위한 시”라고 되어 있다. 둘 다 풍성한 복을 받는 내용이며, 솔로몬이 이룬 위대한 왕국과 잘 어울리는 내용들이다.
이 “올라가는 노래”가 무엇이냐에 대해서는 많은 이견이 있다. 그 중에 가장 많은 의견은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라는 것이다. 성전에 열다섯 계단이 있는데, 한계단 한계단 오를 때마다 부르는 노래라는 견해이다. 그래서 <한글개역성경>에서는 아예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라고 제목을 붙여 버렸다. 물론 “성전에”라는 말은 원문 어디에도 없다. 이 견해는 그럴듯한 추측이지만 증명될 수 있는 주장은 못 된다. 수많은 성전 성가대가 한 계단씩 올라가서 한편 한편을 노래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degree”는 각도, 단계 등을 말한다. 그래서 우리는 이 열다섯 편의 시가 단계적으로 발전하는 노래임을 알 수 있다. 독자들이 이 시편들을 읽어 본다면 각 편이 넘어갈 때마다 점점 발전하는 분위기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즉 앞의 시에서는 고난을 노래하고 뒤의 시에서는 승리를 노래하는 것 말이다. 그런데 이러한 단계는 120편부터 순서대로 열다섯 단계까지 가는 것이 아니라, 세 편씩 묶어 단계적 발전을 다섯 번에 걸쳐 반복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즉 발전 단계가 120,121,122편으로 이어지다가 123편으로 발전되지 않고, 다시 123편에서 시작해 125편으로 끝난다. 그리고 또다시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단계적 발전이 세 편씩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첫 번째 단계적 발전은 “고난 → 도우심 → 화평” 순이다. 120:1은 『내가 고난 중에 주께 부르짖었더니 그가 나를 들으셨도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121:1,2은 『내가 나의 도움이 오는 산을 향하여 내 눈을 들어올리리니, 나의 도움이 하늘과 땅을 지으신 주께로부터 오는도다.』라고 노래한다. 이 찬양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주님께 도우심을 바랄 때, 혹은 도우심을 받았을 때 드리는 감사 찬양이기도 하지만, 문맥적으로는 이스라엘의 도우심을 말한다. 『보라,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그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라』(121:4).
이 이스라엘을 “영적 이스라엘”이라 말하여 교회에 적용하는 사람들이 많으나, 이는 영적인 적용일 뿐 교리적인 해석은 되지 못한다. 우리는 시편을 전체적으로 보았거니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이스라엘의 회복을 다루는 예언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120편의 고난도 대환란과 연관된다. 그리고 122편은 『예루살렘의 화평을 위하여 기도하라.』(122:6)고 말한다. 이 구절은 이사야 40:1,2의 “예루살렘의 위로”와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즉 메시야 안에서 회복된 이스라엘이 누리는 화평을 말한다. 122:1-3에서는 “주의 전”으로 들어가는 기쁨이 예루살렘의 번영과 연관되어 있다. 이것은 다윗 시대에 있었던 실제적인 번영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예언적 의미도 담고 있는 것이다.
두 번째 반복은 123편에서 시작한다. 여기서 시인은 자비를 기다리고 있다. 왜냐하면 멸시를 당하고 있기 때문이다(3절). 그리고 124편은 주께서 이스라엘의 편이 되셨음을 찬양한다(1절). 그래서 이스라엘은 해방되고 승리한다(6,7절). 그리고 125편에서는 이 승리가 이스라엘 위의 화평으로 발전한다(5절).
세 번째 반복은 그들이 포로에서 돌아오는 것으로 시작한다(126:1). 그리고 “집을 세우는 것”으로 발전하는데(127:1), 이는 개인적으로는 각 성도 가정에 내리는 하나님의 복을 말하기도 하지만, 민족적으로는 “이스라엘 집,” 즉 민족적 이스라엘이 굳게 세워지는 것을 말한다. 이어서 128편에서는 “예루살렘의 번영”과 “이스라엘 위의 화평”으로 완성된다(5,6절).
네 번째 반복에서 이스라엘은 그들의 대적자들에게 저주를 선언하고 있다(129:5-8). 즉 그들이 고난을 받는다는 말이다. 그리고 130편에서는 주를 바라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는 단순히 고난에서의 구출이 아니라 그들의 죄를 자백하는 모습이다. 『그러나 용서하심이 주께 있으니...』(4절). 대환란 후에 그들은 회복되겠지만, 그것은 영적인 회복, 즉 회개를 전제로 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때 그들을 모든 죄악에서 구속해 주실 것이다(8절). 그들은 용서를 비는 가운데, 하나님을 간절히 기다린다(6절). 그리고 131편에서는 이스라엘에게 영원토록 주를 바라라고 권면한다(3절). 그들이 회복된 것은 자기들의 의 때문이 아니라 주님의 용서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교만하지 말고 주님만을 바라야 한다(1절).
다섯 번째 반복은 고난받았던 다윗이 주의 성소를 간절히 바라는 노래다(132:1-5). 다윗이 주의 궤 앞에서 얼마나 주를 위해 열심을 다했는지는 익히 알고 있는 바다(대상 15-17장). 이어지는 133편은 형제들이 하나되어 함께 거하는 것의 기쁨을 노래하는데(1절), 그것을 아론의 머리에서 흘러내리는 향유와 연관시킨다(2절). 이 기름은 성령님을 상징하는데, 그럼으로써 이 시는 이스라엘에게 내리는 영적 축복을 언급하는 것이다. 그리고 134편에서는 성소에서 주님을 송축하며 시온에서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것으로 끝난다(2,3절).
보는 바와 같이, 이 열다섯 편의 올라가는 노래들은 이스라엘의 고난과 회복을 간략하게 노래한 시들이다. 시편 전체를 예언서에 비유한다면 이 올라가는 노래들은 소선지서와 같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소선지서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이스라엘의 고난과 회복을 핵심적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 올라가는 노래들은 시편 전체에서 볼 수 있는 바, 예언적인 요소들을 핵심적으로 요약해 준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비록 고난을 받지만 영육 간에 회복되어 번영을 누린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그들의 메시야, 즉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영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그와 같은 영적인 복을 충만히 받으리라는 기쁨의 노래들이기도 하다.
4. 영원한 찬양의 노래
시편의 마지막 다섯 편은 『너희는 주를 찬양하라.』는 선포로 시작한다(146, 147,148,149,150편). 이 뒷부분은 순수한 찬양으로 가득하다. 예언적인 내용은 앞에서 충분히 다루었다. 찬양의 이유에 대해서도 민족적이든 개인적이든 앞에서 다 말했었다. 이제는 그처럼 위대하신 주님에 대해서 찬양으로 마무리를 하는 것이다.
주님의 능력과 그 위엄과 위대하심에 대해 찬양한다. 146편에서는 세상을 주관하시며 약한 자들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한다. 147편에서는 만물을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한다. 148편에서는 천군천사들, 영적 존재들, 모든 피조물들에게도 찬양을 선포한다. 물론 그분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심을 잊지는 않는다(147:19; 148:14; 149:2).
149편에서는 왕과 함께 있는 군사들, 즉 성도들에게 주시는 크나큰 영광으로 인하여 찬양한다(149:5-9). 그리고 150편에서는 여러 가지 악기들을 동원하여 마지막으로 힘차게 찬양하는 것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참으로 시편은 위대한 예언서이며, 거대한 오라토리오다. 그 주인공은 예수 그리스도신데, 그분은 영원토록 송축받으실 왕이다. 비록 예언적으로는 많은 부분이 이스라엘에 초점이 맞춰져 있지만, 이 모든 영광은 사실 그리스도인들이 누릴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분의 백성일 뿐만 아니라 그분의 몸이요, 또 신부이기 때문이다. 이 위대한 영광을 주신 주님께 어찌 감사와 찬양으로 송축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영원한 찬양을 드리자. - 이번 호로 시편을 마칩니다.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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