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지상강좌 분류

팔레스타인의 언약 1 (신명기 28장)

컨텐츠 정보

본문

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09년 07월호>

1. 신명기 제3부(28-34장)에 대한 설명

28장부터는 신명기의 세 번째 부분이 시작된다. 신명기 제1부(1-11장)에서는 모압 땅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광야 생활로 겪었던 일들에 대한 교훈을 주고, 제2부(12-27장)에서는 율법의 구체적인 내용들을 언급함으로써 레위기 율법을 반복해 주었다. 이제 제3부에서는 그들이 율법을 참으로 잘 지켜야 한다고 결단을 요구하고 있다. 결단을 요구하는 것은 이미 27장부터 시작되었으나, 28장부터는 특별한 “언약”(covenant)의 형태로 새로이 시작된다.
모세가 전해 준 율법은 모두 새 땅에서 지켜져야 할 내용들이다. 그리고 이들은 지금 요단 강을 목전에 둔 모압 땅에 진치고 있다. 모세는 말해야 할 모든 율법들을 말해 주었다. 이스라엘은 이제나 저제나 그 땅에 들어갈 날을 기다리고 있다. 즉 새 땅에 들어가는 것은 이미 현실이 된 것이다. 이때 그들은 엄중히 하나님 앞에서 그들의 행위에 대한 결단을 해야 한다. 그래서 신명기 제3부에서는 모세가 설교 혹은 예언을 하는 형식으로 백성들의 결단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신명기 제3부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진다. 첫째 부분은 28-30장으로서, 흔히 “팔레스타인의 언약”이라 하는데, 이 부분은 카나안 땅에서 복을 받거나 저주를 받는 조건, 또 그들이 회개하면 돌이켜 주시겠다는 하나의 약속이다. 둘째 부분은 31장 이후로서 모세가 이스라엘에게 주는 마지막 경고이다. 이 부분은 32장이 핵심인데, 특별히 “모세의 노래”라 불린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의 언약”이나 “모세의 노래”는 모두 하나님의 율법에 백성이 복종해야 한다는 것을 담고 있으며, 그들이 온전히 행하면 복을 받고 그렇지 않으면 멸망하되, 회개하면 용서해 주신다는 약속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동일한 관점이다. 또한 모두 미래에 대한 예언이라는 점도 닮았다.

2. “팔레스타인의 언약” - 복과 저주

신명기 28-30장에 대해 세대주의자들은 기본적으로 “팔레스타인의 언약”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이것은 팔레스타인 “땅”에 대한 언약이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이 언약의 핵심은 땅이기 때문이다. 카나안 땅, 즉 약속의 땅이 이 언약의 핵심인데, 이스라엘이 복을 받거나 저주를 받는 것도 그 땅을 중심으로 설명되는 것이다.
다만 그 땅을 “팔레스타인 땅”이라 지칭하는 것에는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그 땅은 결코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땅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땅을 팔레스타인 땅이라 부르신 적이 한 번도 없다. 카나안 땅이라 불릴 수는 있는데, 이는 그 땅에 카나안 사람들이 살았기 때문이다.
팔레스타인이라는 명칭의 기원인 필리스티아인들은 이스라엘이 카나안 땅에 정착한 이후 약 100여 년 후부터 이스라엘 서남 해안에 정착하기 시작했다. 아스클론에서 가자에 이르는 “필리스티아 해안 평야”가 바로 그곳인데, 이곳이 유일하게 “팔레스타인 땅”이라 불릴 수 있었던 곳이다. 이들은 원래 크레테 섬에 근거를 둔 해양 민족으로서, 창세기 10:13,14에 따르면 함족 미스라임 계열이다. 카나안과는 계열부터 다르기 때문에 이 땅에 대해 어떠한 권리도 없는 사람들이다. 삼손 때에는 유다 지역에 실력을 행사할 만큼 강해졌으나, 다윗과 솔로몬 때 거의 제압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 때에도 필리스티아 해안 지역을 포함한 이스라엘 전역은 “유대 땅” 혹은 “이스라엘”이라고만 불렸다. 다시 말해서 성경 시대에 카나안 땅을 팔레스타인 땅이라고 불릴 만한 근거는 전혀 없었다. 그러다가 A.D. 135년 이후 로마 황제 하드리안이 유대 지역에서의 반란을 진압하면서 그 땅에서 유대인들을 추방시키고, 이스라엘을 “시리아-팔레스티나”로 부르기 시작했다. 이것이 오늘날 그 땅이 팔레스타인 땅이라 불리는 유일한 이유이며, 성경적으로는 전혀 인정할 수 있는 이름이 아니다. 물론 오늘날 “팔레스타인인들”이라 불리는 사람들은 고대의 “필리스티아인들”의 후손들이 전혀 아니므로 그들이 이 땅의 일부라도 주장할 근거는 전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언약을 “팔레스타인의 언약”이라 부르는 것은 전적으로 이미 “용어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스코필드나 라킨 등의 세대주의자들이 활동할 무렵 이 땅은 영국 등 제국주의 국가들에 의해 “팔레스타인 땅”이라는 국제적인 명칭으로 불리고 있었다. 세대주의 학자들은 이 언약을 그 땅과 연관된 언약이라고 잘 설명해 놓았지만, 당시의 명칭 때문에 “팔레스타인의 언약”이라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엄밀히 말한다면 이 언약은 팔레스타인의 언약이 아니라 “카나안 땅의 언약”이라 불러야 할 것이다. 단지 이미 신학적인 용어로 굳어졌기 때문에 관례상 팔레스타인의 언약이라고 부르는 것뿐이다. 마치 세대주의(dispensationalism)라는 말이 틀린 번역임에도 이미 신학적으로 용어화되어 있기 때문에 그대로 사용하듯이 말이다. [“dispensation”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경륜,” 즉 하나님의 경영 방침을 말한다. “세대”(generation)는 특정 시대와 연관된 특정 부류의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아무튼 이 언약은 카나안 땅과 연관된 언약이다. 이 언약은 다음과 같이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어진다. 첫째, 신명기 28:1-14을 통해 볼 때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율법을 잘 지키고 그분과 온전한 관계 가운데 있으면 이스라엘은 “그 땅”에서 번영을 누린다. 둘째, 반면 28:15-68과 29장 전체를 통해서 볼 때 이스라엘이 율법을 어기고 하나님께 범죄하면 저주를 받게 되는데, 궁극적으로는 “그 땅”에서 쫓겨날 것이다. 그리고 셋째, 30:1-10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스라엘이 회개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용서하시어 그들을 다시 “그 땅”으로 회복시키실 것이다. 이 언약은 이렇게 카나안 땅과 관련이 있기에 “땅에 관한 언약”이라 불린다.
이처럼 이 언약은 그들의 행위에 조건지워져 있다. 그들이 그 땅에서 번성하거나 쫓겨나는 것은 그들이 율법을 얼마나 잘 지키느냐, 즉 하나님께 얼마나 신실하느냐 하는 “행위”에 달려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행위”로 복과 저주에서 양자택일해야 한다. 그래서 이 언약은 조건적인 언약이다.
그런 면에서 이 언약은 “모세의 언약”에 속해 있다. 모세의 언약은 한마디로 율법을 말하는 것인데, 하나님께서 시내 산에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과 맺으신 언약이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주시면서 그들을 “독특한 보물,” “제사장들의 왕국,” “거룩한 민족”이 되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출 19:5,6). 이것은 그들이 율법을 지키는 조건에서 주어지는 축복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고,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 이것이 바로 모세를 통해 주어진 이스라엘의 민족적인 언약이다. 그런 점에서 팔레스타인의 언약도 다르지 않다. 다만 신명기 29:1에서 『주께서 호렙에서 이스라엘 자손과 맺으신 언약 외에 그분께서 모압 땅에서 모세에게 명령하여 그들과 맺은 언약의 말씀들이 이러하니라.』는 말씀을 통해서 볼 때, 하나님께서 모압 땅 언약을 시내 산 언약과 구별해서 말씀하신 것을 보게 된다. 그래서 이 부분을 별도로 “팔레스타인의 언약”(사실은 “카나안 땅의 언약”)이라 부르는 것이다. 또한 이 언약의 핵심이 “땅”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것임을 볼 때, 이 언약을 모세의 언약과 구별해 부르는 것은 자연스럽다. 하지만 시내 산 율법(레위기)과 모압 땅 율법(신명기)이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것과 결국 율법 준수를 명하신다는 점에서 팔레스타인의 언약은 모세의 언약의 한 부분으로 취급할 수 있다. 다만 구별해 말한다면, 모세의 언약은 민족적 선택이라는 관점에서, 팔레스타인의 언약은 이스라엘에게 주시는 땅의 유업이라는 관점에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3. 카나안 땅에서 받을 복 (28:1-14)

28장의 앞부분은 이스라엘이 카나안 땅에서 받는 복에 대해 설명한다. 물론 그러한 복을 받는 조건은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이다.
1절은 그 대전제를 선포한다. 『네가 주 너의 하나님의 음성에 열심히 경청하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분의 모든 계명들을 지켜 행하면...』 그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땅의 모든 민족들보다 높게 세우시리라.』고 약속하셨다. 2절부터는 구체적인 복들을 나열하는데, 이 약속은 2-7절과 8-14절, 두 부분으로 나뉘어서 설명된다.

(1) 물리적 번영 (2-7절)
『네가 주 너의 하나님의 음성에 경청하면, 이 모든 복들이 네게 임할 것이며 네게 미치리라.』(2절)로 시작하는 이 첫부분은 주로 물리적인 번영을 강조한다.
첫째, 그들은 성읍에서나 들에서도, 즉 들어와도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다(3,6절).
둘째, 자손들과 농산물과 가축들이 풍성히 번성할 것이다(4,5절).
셋째, 원수들이 한 길로 왔다가 일곱 길로 도망갈 만큼, 이스라엘은 강성해진다(7절).
그리고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유업으로 주시는 새 “땅”에서의 복이라는 점을 강조한다(8절).

(2) 위대한 민족에 대한 약속 (8-14절)
이 부분 역시 『네가 주 너의 하나님의 계명들을 준수하고 그분의 길에서 행하면...』(9절)이라는 이 복의 조건으로 시작한다. 여기서도 이스라엘의 번영을 말하고, 앞에서 말한 물리적인 복을 말하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영적인 복을 포함하여 한층 더 강화된 복들을 언급한다.
첫째, “거룩한 백성”으로 세우신다(9절). 이 약속은 출애굽기 19:6에서 율법을 처음 주실 때 하신 맹세이다. 즉 그들이 새 땅에서 하나님의 계명을 준수하고 그분의 길에서 행하기만 한다면 하나님의 약속은 더욱 견고히 서게 될 것이다. 온 땅에 이스라엘처럼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나라는 존재하지 않는다. 온 이방은 주의 이름으로 불리는 이스라엘을 보고 두려워하게 될 것이다(10절). 앞에서 하신 약속을 반복하신다는 것은, 그 약속을 지키실 의지가 굳건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이스라엘을 “거룩한 백성”으로 만드실 것이며, 그것은 그분의 “맹세”이다(9절).
둘째, 재산과 자손과 가축과 농산물이 번성할 것이다(11절). 이것은 앞부분에서 강조한 바와 똑같다. 다만 여기서는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서”라는 수식이 붙는 것으로 보아, 이스라엘이 지금 받는 복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그 언약을 근거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이스라엘이 받을 복은 그들의 행위에 따른 조건이기 이전에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이다.
셋째, 계절에 따라 비를 내리시고 그들의 모든 일에 복을 주실 것이다(12절). 이스라엘은 이 번영으로 인해 다른 민족들에게 빌려 주기는 할 것이나 빌리지는 않게 된다. 즉 이 번영은 단순한 물리적 축복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모든 민족들 위에 우뚝 서게 되는 그들의 부강한 입지를 보여 주는 것이다.
넷째, 그로 인해 이스라엘은 다른 민족들에게 지도력을 행사할 것이다. 이스라엘은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는 않을 것이며, 위에만 있게 되고 아래에는 있지 않게 될 것이다(13절). 이것은 출애굽기 20:6에서 맹세하신 바, “제사장들의 왕국”이 된다는 약속이기도 하다. 이스라엘은 이방을 이끌 것이며, 이방이 복을 받는다면 이스라엘을 통해서 받게 될 것이다. 또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바 『네 안에서 땅의 모든 족속들이 복을 받을 것이라.』(창 12:3)는 약속과도 연관되는 약속이다.
그리고 이 축복의 약속들은 하나님의 계명에 경청하라는 경고로 마무리된다(13절). 특히 14절은 “다른 신들”을 따라가지 말라고 경고하시는데, 우상 숭배는 헛된 신들을 섬긴다는 그 자체로도 죄이지만, 이스라엘에게는 특히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는 행위이기 때문에 큰 죄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메소포타미아라는, 이방 신들의 지역에서 불러내셨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을 이집트라는, 이방 신들의 지역에서 출애굽시키셨다. 이스라엘은 오직 하나님과만 언약을 맺은 백성이다. 신명기 전체에서 이 내용은 매우 자주 반복되었거니와, 그것은 그들이 이제 곧 들어갈 카나안 땅에는 이전 땅만큼이나 많은 신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카나안 땅에서 또 그들을 데리고 나오지 않으실 것이다. 대신 카나안 거민들을 다 멸하실 것이다. 이것이 이전 백성들로부터 성별시키신 것과는 다른 상황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상은 하나님의 언약에서 절대적으로 배격되어야 하는 것이고, 이스라엘은 오직 하나님만을 섬겨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시며 온 우주를 창조하시고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이신데, 바로 그분이 이스라엘을 택하시고 출애굽시키시고 언약을 주신 분이시며 새 땅으로 인도하시는 분이시다. 또한 그분은 오늘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기도 한다.

(3) 예표적 의미
카나안 땅은 흔히 성도들이 영원 안식을 얻는 천성, 혹은 새 예루살렘에 대한 예표로 알려져 있다. 카나안 땅이 “안식의 땅”이라 불리다 보니, 성도들의 죽음이라는 안식과 연결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성도들의 죽음을 “요단 강 건넌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교리적으로는 그렇지 않다. 이스라엘은 카나안 땅이라는 안식을 행위로 얻었다. 그들이 그 땅을 차지하는 조건은 율법의 행위에 달려 있다. 심지어 카나안 땅에 들어간 후에라도 그들은 행위에 따라 그 땅에서 쫓겨나게 된다. 반면 신약 성도인 우리들은 믿음으로 안식에 들어가며, 현세에서나 내세에서 결코 떨어져 나가지 않는다. 또한 카나안 땅은 정복 전쟁으로 차지했으며, 그 땅에 들어가서도 많은 전쟁을 치르게 된다.
따라서 카나안 땅을 신약 성도에게 예표적으로 적용한다면, 성도들이 행위로 얻는 유업에 적용해야 한다. 우리는 구원, 즉 영원한 안식은 은혜로 얻게 되며, 유업은 행위로 얻게 된다(마 5:5, 눅 19:11-26, 딤후 2:12a).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신 후 천년왕국 통치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현재 우리가 이생에서 그리스도를 위해 행한 의로운 행위들은 그날 유업으로 주어질 것이다. BB

전체 341 / 8 페이지
RSS
번호
제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