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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땅에서 지켜야 할 법들 4 - 피흘림에 관한 법 (신명기 19-2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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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09년 03월호>

19-21장을 한 단락으로 묶을 수 있다면, 그것은 “피흘림에 관한 법”이라고 말할 수 있다. 19장은 무죄한 피를 함부로 흘리지 말라는 뜻에서 도피성읍에 관한 명령을 주셨고, 20장은 전쟁에 관해서, 21장은 알 수 없는 시체를 처리하는 법에 대해서 명령을 주셨다. 그리고 이 모든 명령들은 약속의 땅을 올바로 차지하고 올바로 지키기 위한 법으로, 그 땅이 잘못된 피에 물들지 않고 성결하게 유지되도록 하시려는 목적이 있다.

1. 도피성읍 (19장)

(1) 부지중에 사람을 죽인자를 보호함(19:1-13)
도피성읍은 실수로 사람을 죽인 자를 보호하기 위해 마련된 성읍이다. 요단 서편에 세 곳, 동편에 세 곳을 두어, 가까운 지역으로 피신하게 하였다. 2절을 통해서는 요단 서편의 도피성읍들을, 9절을 통해서는 동편의 도피성읍들을 말씀하신다. 본문에는 성읍의 이름이 제시되지 않지만, 민수기 35장과 여호수아 21장에서 구체적으로 제시되었다. 그 성읍들은 서편에 케데스(납탈리 지파), 세켐(에프라임 지파), 헤브론(유다 지파), 동편에 골란(므낫세 지파), 라못(갓 지파), 베셀(르우벤 지파)이다.
도피성읍이 세워진 목적은 분명하다. 그것은 살인자들로 도피하게 하려는 목적인데(3절), 그것은 부지중에 살인한 자들에게만 제한되었다(4절). 원한 관계도 없고 평소에 미워해서 의도적으로 죽인 것이 아닐 때, 5절에는 이에 대한 한 예로, 벌목하러 산에 가서 도끼질을 하다가 도끼가 자루에서 빠져 우연히 이웃을 쳐 죽인 경우를 제시한다.
민수기 35장에서는 좀더 상세하게 나오는데, 철로 된 기구나, 사람을 죽일 만한 돌이나, 그러한 나무 무기로 죽이면 의도적인 살인이다. 또 몰래 기다리다가 무엇을 던져 죽여도 살인이다(민 35:16-21). 그러나 의도적이지 않게 무엇을 던진다거나, 심지어 사람을 죽일 만한 돌을 던진 것도 의도적이 아니면 살인자가 아니다(민 35:22,23).
그러면 무엇 때문에 도피성읍을 만들었는가? 어차피 의도적이지 않은 죽음은 책임이 없는데, 왜 그는 도망해야 하는가? 그것은 “피의 보복자” 때문이다(6절). 피의 보복자는 가족이나 친지 중에 있을 텐데, 그는 형제가 죽었다는 이유만으로 보복을 하려 할 것이다. 따라서 그의 의도를 분명히 판단하여 처리를 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피의 보복,” 즉 복수를 인정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민수기 35장에 따르면, 그 살인자는 당시의 대제사장이 살아 있는 동안 도피성읍에 머물러야 하고, 만일 도피성읍을 벗어나면 보복자에게 죽임을 당할 수 있었다. 도피성읍은 억울한 죽음을 당하지 않게 보호하시려는 하나님의 자비의 성품이 반영된 것이지만, 살인과 복수라는 기본적인 법은 여전히 존재한다. 이것은 의도적인 살인자의 경우에 직접적으로 적용된다. 만약 의도적인 살인자가 도피성읍에 숨는다 해도, 그의 성읍의 장로들은 그를 도피성읍에서 끌어내어 보복자의 손에서 죽게 해야 한다(11,12절). 무죄하게 흘려진 피는 땅을 오염시킨다. 이 거룩한 약속의 땅을 오염시키지 않으려면, 그들은 그 살인자의 피를 흘려 무죄한 피의 죄가를 갚아야 한다.
이것은 사형제도, 넓게 말해서 형법의 기본 원리를 보여 준다. 사형 제도의 기본 원리는 복수의 정신이다. 창세기 9:6에서 하나님께서 처음 사형 제도를 정하셨을 때도, 사람의 피를 흘리는 사람은 그도 피흘려지게 된다고 말씀하셨다. 죽인 자는 죽임을 당해야 한다. 그것이 억울하게 죽은 사람의 복수가 행해지는 것이며, 하나님의 공의이다. 성경은 복수를 인정한다. 다만 아무나 함부로 복수를 하지 못하게 억제할 뿐이다. 왜냐하면 복수자는 이성을 잃어 잘못 복수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로마서 12:19은 다음과 같이 말씀한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 스스로 복수하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시편 94:1은 『오 주 하나님이여, 복수가 주께 속하였나이다.』라고 말씀한다. 따라서 우리는 직접 복수하지 않는다. 대신 하나님께서 그 복수를 행해 주시는데, 이 세상의 통치자들에게 그 권위를 위임해 주셨다. 그들은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를 행하는 보응자들이다(롬 13:4). 따라서 사형 제도라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에 따라 반드시 행해져야 한다. 오늘날 사람들은 형법의 목적을 “교화”에 둔다. 그런데 아무리 사형을 하고 형벌을 주어도 교화가 되지 않으므로 사형 제도는 의미가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성경에 따르면 형법, 특히 사형 제도는 교화가 아니라 “복수”가 그 목적이다.
그러나 여기 도피성읍에서 보여 주는 것은, 공의 가운데서도 나타나는 하나님의 자비의 한 아름다운 예표이다. 비록 의도적이지는 않았다 하나, 복수가 인정되는 그 시대에 당연히 죽어야 할 살인자를 보호해 주는 제도이다. 그리고 그는 대제사장이 살아 있을 동안 도피성에 있어야 하는데, 이는 결국 대제사장의 보호 가운데 있다는 말이다. 이러한 이유들로 도피성읍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그분은 대제사장으로서, 우리 죄인들을 구원하셨을 뿐 아니라 중보하시고 계신다. 마귀가 우리의 죄들을 들어 하나님께 고소하나(계 12:10), 그분은 우리를 보호하시고 변호하신다(요일 2:1).

(2) 율법의 엄격함(19:15-21)
이 부분에서는 도피성읍에서 보았던 복수의 정신이 그대로 담겨 있다. 율법에 드러난 형법의 모습이다. 누군가가 고소당해 왔을 때 공정한 판단을 위하여 두세 증인의 확증을 받아야 하겠지만(15절), 그 죄가 분명히 드러난다면 “생명에는 생명으로,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손에는 손으로, 발에는 발로” 해야 할 것이다(21절).
그러나 본문은 그보다는 그 고소가 거짓 고소일 경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18절). 이 경우 그 거짓 고소자는 자기가 이웃에게 행하려 했던 대로 받아야 한다. 즉 그가 이웃을 직접 죽이지 않았다 해도, 거짓 고소로 이웃을 죽이려 했다면 그 의도 그대로 그가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 거짓 증거의 죄는 십계명에 포함될 만큼 매우 중요했다(출 20:16). 오늘날에는 거짓 증거로 재판을 굽게 하는 일이 너무나도 많다. 이러한 죄는 하나님께 가증한 것이고, 그렇게 될 경우 이 약속의 땅은 죄로 오염된다. 하나님께서는 그 땅을 성결하게 지키기를 원하신 것이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이것이 율법의 정신인 것은 분명하다. 신약성경은 그보다는 사랑과 용서를 다루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분명 우리를 이렇게 다루지 않으셨다. 우리는 극악한 죄인들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한량없는 자비와 사랑으로 우리를 다루셨다. 십자가의 보혈이 우리의 모든 죄들을 씻었다. 따라서 신약 교리로 말할 때, 우리는 스스로 복수를 하지도 말고, 우리 개인이 당하는 문제들에 있어서 용서를 베푸는 것이 옳다. 하지만 복수는 하나님께서 오늘날까지도 이 세상에 두신 법이고, 공의는 바로 세워져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십자가를 통해 성도들에게 한없이 주어지지만, 세상에게는 엄격한 잣대로 공의를 행하실 것이다. 구원받지 않은 모든 사람들은 심판 날 자비를 받지 못하고 멸망하게 된다. 따라서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세상적 원리에 적용하면 안 된다. 세상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유일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십자가를 전파하는 것뿐이다.

2. 전쟁의 법 (20장)

(1) 이스라엘을 위해 싸우시는 하나님(20:1-9)
이스라엘은 수많은 전쟁을 겪어야 했다. 원수들은 이스라엘보다 훨씬 많다. 그때 그들이 기억해야 할 것은 이 말씀이다. 즉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이는 이집트 땅에서 너를 데리고 나오신 주 너의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계심이라』(1절). 이것은 여호수아에게 주신 말씀이기도 하다(수 1:9). 전쟁에 임하는 모든 군대는 담대해야 하지만, 이스라엘에게 있어 그 담대함은 하나님을 의지함에서 나온다. 성도에게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담대함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용기가 아니라 만용이다.
우리가 왜 우리보다 훨씬 많고 막강한 원수들 앞에서 담대할 수 있는가?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이는 주 너희 하나님께서는 너희와 함께 가시고 너희를 위하여 너희 원수들을 대적하여 싸우시며, 너희를 구원하시는 분이심이라』(4절). 홍해를 가를 때에도 모세는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출 14:14)고 말했다. 그렇다. 주 하나님은 그분의 성도들을 위해 친히 싸우시는 분이다. 그분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신데, 그 전능하심을 그분의 성도들을 향해 사용하신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전쟁에 임함에 있어서 병사들의 수에 절대로 의지해서는 안 된다.
“새 집을 지어 놓고 봉헌하지 않은 자”는 집에 돌아가라 했다(5절). “포도원을 만들어 놓고 그 열매들을 먹지 못한 자”도 집에 돌아가라 했다(6절). “아내와 정혼하고 그녀를 취하지 못한 자”도(7절), 심지어 “겁에 질리고 낙담하는 자”도 집으로 돌아가라 했다(8절). 왜 그런가? 그런 자들이 없어도 충분히 싸워 이길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기드온에게서 300명만 남기고 3만 명 이상을 돌려 보내신 이유이다(판 7장). 사울왕은 필리스티아와 싸울 때 백성들이 흩어지는 것을 보고 불안하여 성급하게 직접 번제를 올렸다가 하나님께 버림받았다(삼상 13장). 제사장의 직분을 행한 것도 주제넘은 짓이었지만,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군사의 수를 의지한 것이 큰 죄였다. 다윗은 일평생 주님을 의지하면서 살았지만, 이스라엘과 유다의 백성들을 계수함으로써 하나님께 징계를 받았다(삼하 24장). 군사의 수를 바라본 잘못된 생각 때문이었다.

(2) 전쟁의 정도와 그 범위(20:10-20)
이스라엘이 전쟁을 치를 대상은 크게 둘이다. 하나는 약속의 땅이라는 그들의 유업을 벗어난 지역과(10-14절) 또 하나는 약속의 땅 지역이다(16-18절). 이 두 지역에 대한 전쟁의 정도는 확연히 다르다.
첫째, 카나안 땅 밖에서 전쟁을 행할 때, 이스라엘은 먼저 화평을 선포해야 한다(10절). 본문은 동등한 나라 간의 평화적 외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싸워서 이겨야 하는 전쟁을 말하는 것이지만, 그래도 먼저는 화의를 요구하는 것이 좋다. 그렇게 해서 상대방으로 하여금 이스라엘에게 고개를 숙이고 조공을 바치게 하면 된다(11절).
그러나 상대방이 화의를 거절하고 싸움을 걸게 되면 용감히 싸워 이겨야 한다. 이 경우 그 성읍의 남자들, 즉 군인들은 모두 쳐 죽이되 여자들과 아이들은 살려야 한다. 물론 그들을 다른 탈취물들과 함께 취할 수 있다(13,14절). 이것은 전쟁에서 보는 가장 일반적인 모습이다. 실제로 이것이 지켜지지 않는 비인간적인 학살을 전쟁에서 많이 보기는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원리요, 전쟁에서 지켜져야 할 최소한의 법칙이다. 실제로 솔로몬도 카나안 외의 정복지에 대해서는 조공의 법으로 다스렸다.
둘째, 카나안 땅 안에서의 정복 전쟁에 대해서는, 앞의 경우와 매우 다르다. 이 경우 이스라엘은 대상 민족들을 완전히 멸절해야 한다. 16절은 이에 대해서 『호흡이 있는 것들은 아무것도 살려 두지 말지니』라고 말씀한다. 여자와 어린아이를 포함한 모든 것들을 죽여야 한다. 이것은 매우 잔인해 보일지라도 하나님의 분명한 명령이다. 그 목적은 분명하다. 그들이 행한 우상 숭배의 악한 죄가 이스라엘에 침투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18절). 그러한 죄들은 여자와 어린이들에게도 충분히 오염되어 있기 때문에 그 악한 죄들이 거룩한 땅을 다시금 오염시킬 것이다. 그들의 종교는 문화와 풍습 가운데에도 악한 모습으로 남아 있기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어떠한 행위도 본받지 말라고 하셨다. 이것은 이스라엘에게 새로운 땅을 주심에 있어서, 그 땅의 오염을 완전히 청소하고 완전히 새로운 땅을 주심으로 성결한 백성을 성결케 인도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의지가 담겨 있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성경의 이러한 구절들을 보며, 하나님께서는 매우 잔인하시며 피에 굶주린 신이라고 비난한다. 하지만 이러한 잔인한 모습은 오직 카나안 땅에 대해서만 보여진다. 앞선 구절에 보는 것처럼 다른 지역에서는 전쟁을 하더라도 결코 잔인하지 않다.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에 보이시는 관심은 이토록 매우 특별한 것이다. 물론 그 땅의 백성이 매우 악하다는 것도 그들이 진멸당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된다. 반면 앗시리아나 바빌론 등 이방 제국들의 역사를 통해 볼 때, 그들이야말로 타지역에 대한 정복 전쟁을 수행함에 있어서 민간인들을 학살하는 매우 잔인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특별한 목적을 제외하고는 전혀 잔인하지 않으시다.

3. 시체 검시의 법 (21장)

21장에서는 시체 처리와 관련해 두 개의 규정을 주신다. 하나는 어떻게 죽은지 밝혀지지 않은 시체에 대한 것이고(1-9절), 하나는 죄짓고 죽어 나무에 달린 시체에 관한 것이다(22,23절). 두 경우 모두 그 땅을 성결케 해야 한다는 의도가 담겨 있다.
첫 번째 경우는 살해되어 들에 엎드려져 있는 시체가 발견될 때이다(1절). 이러한 일이 발생한 경우 그 발견 장소와 가장 가까운 성읍의 장로들과 제사장들은 “아직 부리지도 않았고 멍에도 메지 아니한 암송아지”(3절) 한 마리를 “갈지도 심지도 아니한 항상 물이 흐르는 계곡”으로 끌고가서 목을 쳐 베고(4절), 그 계곡에서 손을 씻어야 한다(6절).
이것은 그들이 그 피에 대해 무죄하다는 것을 하나님 앞에 드러내는 것이다(7,8절). 시체가 들에 쓰러져 있다는 것은 누군가에 의해 불법적으로 무죄한 피가 흘려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적법한 복수라면 몰래 들판에 버릴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분명히 범인이 잡혀져 그 동일한 벌을 받아야 하나, 그렇지 않더라도 적어도 백성들이 그 피에 대한 자신들의 무죄함을 증명해야 한다. 그렇지 않을 시 백성들은 그 피에 대해 방관하고 동조한 셈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땅이 무죄한 피로 더럽혀진다.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땅이 얼마나 성결해야 하는지를 보여 주는 법이다.
두 번째 경우는 사형에 합당한 사람이 죽어 나무에 달린 경우다(22절). 죄를 지어 죽는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이 경우에는 죽이는 것이 오히려 땅을 깨끗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죽는다 하더라도, 시체를 나무에 매달게 되면 그 시체는 반드시 그날에 장사해야 한다. 밤새도록 나무에 매달아 두면 안 된다. 그것은 그 땅을 더럽히는 또 하나의 일이다. 왜냐하면 나무에 매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날 이스라엘 회중 가운데 누군가에게 저주가 임한 것이다. 그 저주가 이스라엘 가운데 남아 있어서는 안 된다. 그 저주는 그 날로 족한 것이다. 이것은 율법에 따른 정결례와 관련되어 있다. 레위기 11-16장에 있는 정결례의 법을 보면, 동물의 시체를 만진다든지, 유출병이 있는 사람과 직간접적으로 접촉한 사람의 경우 등에서 그런 사람들은 저녁까지 일시적으로 불결하게 된다. 신명기의 피흘리는 경우에 있어서도 그 땅이 일시적으로 불결하게 된 것이다. 그 불결은 지속되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그 시신은 당일날 처리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위대한 예표가 되기도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셨다. 신명기 21:23에 따라 나무(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께서는 저주받으신 것이다. 온 땅에 임하실 저주를 그분 홀로 받으셨다. 물론 신명기의 법에는 죽어 마땅한 죄인이 죽은 경우지만, 예수 그리스도께는 죄가 없으셨다. 대신 온 세상의 죄를 친히 담당하신 것인데, 그 순간 그분은 우리를 위해 죄가 되시고 저주가 되셨다(고후 5:21, 갈 3:13). 그리고 신명기의 예표대로 그분의 몸은 그날 장사되었다(마 27:57-60).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무죄한 분이시지만 범죄자들과 더불어 헤아림을 받으셨다(막 15:28).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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