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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7 - 선지자의 표적들 (예레미야 13-17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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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10년 07월호>

선지자들은 단순히 말로만 예언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때때로 특별한 상징적 행동과 더불어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했다. 백성들은 그러한 상징적 행동들을 의아해 하지만, 이윽고 "이와 같이 너희들도..."라고 말할 때면 하나님의 말씀을 더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상징적 행동이라는 것이 선지자 자신에게는 꽤 부담스러운 것들이었다. 호세아의 경우는 창녀와 결혼하라는 것이기도 했고(호 1장), 에스겔의 경우는 아내가 죽어도 곡을 하지 말라는 것이기도 했다(겔 24장). 담을 뚫고 이사가는 해괴한 행동을 해 보이기도 했다(겔 12장). 예레미야도 예외가 아니다. 예레미야는 조용히 말만 하는 "편안한 설교자"가 아니었다. 여기서는 하나님의 특별한 메시지를 위한 몇 가지 표적이 제시된다. 그 표적들과 함께 설교하는 선지자의 외침을 들어보자.

1. "베띠"의 표적과 징계의 말씀 (렘 13-15장)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베띠를 사서 허리에 두르고 유프라테스 강가로 가서 바위틈에 감추라 하신다. 그리고 여러 날 후 다시 가서 찾으라 하셨고, 예레미야가 그 띠를 찾으니 이미 훼손되어 쓸모없게 되었다(13:1-7). 이 표적은 하나님께서 유다를 멸망시켜 바빌론에 사로잡혀가게 하시겠다는 말씀에 대한 상징적 행동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방법으로" 유다의 자존심과 예루살렘의 큰 자존심을 훼손시키겠다 하셨다(13:9).
지금까지 예레미야는 이스라엘과 유다가 범죄하여서, 특히 하나님과의 언약을 파기하여서 멸망한다는 메시지를 계속 전했었다. 그런데 여기 13장부터는 그 멸망을 더 구체적으로 선언한다. 이 표적의 내용으로 볼 때, "베띠"를 허리에 부착한다는 것은 그만큼 하나님께선 이스라엘과 유다를 그분께 부착시키려 하셨다는 말이다(11절). 하지만 그들은 거절했고, 그래서 "유프라테스 강"가에 묻혀진다. 유프라테스는 바빌론의 강이다. 베띠가 유프라테스 강가에 숨겨진다는 것은(4절) 유다가 바빌론으로 사로잡혀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때 유다는 그 훼손된 베띠처럼 완전히 멸망할 것이다(7,10절). 그리고 이렇게 된 모든 원인은 그들이 "다른 신들을 따라 행하고 그것들을 섬기며 경배"했기 때문이다(10절).
그러면 유다는 어떠한 모습으로 완전히 훼손되는가? 첫째, 술취함으로 훼손된다(13:12-14). 유다는 왕들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거민들 모두가 "술취함으로 채워졌다." 그럼으로 그들은 서로 치고받으며 혼란스러운 모습을 보이게 되는데, 이것은 유다에게서 보여진 지속적인 모습이었다.
둘째, 흑암이 그들을 덮쳐 버릴 것이다(16절). 그들이 아무리 찾고 찾아도 빛은 죽음의 그림자로 바뀌어 버릴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여기서 이처럼 흑암이 뒤덮여지기 전에 『주 너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16절)고 말씀한다. 하지만 결국 그들은 흑암에 휩싸이게 된다. 그들은 영적으로 암흑이 될 것이며, 어떠한 소망도 없다는 의미에서 빛을 잃어버릴 것이다. 또한 이 본문은 대환란에 대한 예언이기도 한데, 왜냐하면 대환란 때에는 실제적으로 흑암이 뒤덮는 현상까지 일어날 것이기 때문이다(계 16:10).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안타까운 심정을 보게 된다. 『그러나 만일 너희가 그것을 듣지 아니하면 내 혼이 너희의 오만함으로 인하여 은밀한 곳들에서 울 것이며 또 주의 양무리가 사로잡혀감으로 인하여 내 눈이 심히 울고 눈물을 흘릴 것이라』(17절). 로마서 8:26에서 성령께서 신음하신다는 말씀 역시 이와 비슷한 맥락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죄로 인하여 슬퍼하신다. 우리가 무엇이관대 감히 우리 하나님의 눈에서 눈물을 흘리시게 해야 하겠는가?
셋째, 그들의 "영광의 면류관"이 내려올 것이다(13:18). 이것은 그들의 정사들, 즉 왕과 왕비를 포함한 통치자들이 몰락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어지는 19절에 따르면 유다가 모두 완전히 사로잡혀간다. 그 멸망케 하는 자들은 "북쪽"에서 온다(20절). 이것은 바빌론의 침공을 직접적으로 묘사한다. 물론 바빌론은 북쪽이 아니라 동쪽에 있는 나라이다. 하지만 그들의 침공로는 유프라테스 강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서 강 상류 부분에서 이스라엘 땅을 향해 남쪽으로 내려오기 때문에, "북쪽에서 온다"고 표현한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교리적으로 대환란에 대한 예언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21절에서 그 상황을 『마치 진통하는 여인처럼 고통이 너를 붙들지 않겠느냐?』라고 말씀하기 때문이다.
넷째, 가뭄이 극심하게 임할 것이다(14-15장). 이 가뭄은 실제적인 가뭄이었다. 귀족들마저도 우물에서 물을 가져오지 못했다(14:3). 그뿐 아니라 "칼과 기근"이 있을 것이고(14:15), 칼과 기근에 더해 사로잡힘까지 있게 될 것이다(15:2).
선지자는 이 모든 일에 있어서 하나님께 간구한다. 마치 그 민족의 대표가 된 양 하나님께 회개한다. 『오 주여, 우리의 죄악들이 우리를 거슬러 증거할지라도 주께서는 주의 이름을 위하여 그 일을 행하소서. 이는 우리의 타락함이 많으며 우리가 주를 거역하여 죄를 지었음이니이다』(14:7). 『오 이스라엘의 소망이시여, 고난의 때에 구원자시여... 주께서는 우리 가운데 계시며 우리는 주의 이름으로 칭함을 받사오니 우리를 떠나지 마옵소서』(14:8,9). 선지자는 조상들의 죄악을 "인정"했다(14:20). 3:13에서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죄악을 "인정하기만 하라."고 말씀하신 바 있다. 예레미야는 바로 그 말씀 그대로 죄악을 인정했다. 예레미야는 또한 "주의 이름을 위하여" 기도했고, "주의 영광의 보좌"를 생각했으며, "주의 언약"을 기억해 달라고 간구했다(14:21). 즉 그의 기도는 철저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맞춰진 기도였다. 지극히 성경적인 기도였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선지자의 이 기도를 철저히 외면하신다. 심지어 하나님께서는 선지자에게 『너는 이 백성을 위하여 그들의 복을 기도하지 말라.』(14:11)고까지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금식과 부르짖음과 번제물과 헌물도 받지 않으실 것이다(14:12). 하나님께서는 심지어 모세와 사무엘이 있다 할지라도 그들을 내쫓아 버리시겠다고 선언하신다(15:1). 도대체 왜 그런가? 하나님께서는 회개하는 자를 용서하시지 않는가?
그것은, 첫째 이 회개는 민족 전체가 한 것이 아니라 예레미야 혼자 한 것뿐이며, 둘째 회개로 돌이키기에는 너무 늦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유다 왕 히스키야의 아들 므낫세로 인하여, 곧 그가 예루살렘에서 행했던 일로 인하여"(15:4) 이 징계를 내리시겠다고 말씀하신다. 물론 므낫세 다음에 요시야가 개혁을 하기는 했다. 하지만 그것은 심판을 다소 연기시킨 것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므낫세의 죄악은 멸망 때까지 지속적으로 유다 땅에 존재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회개하면 용서해 주신다는 영적 원리를 발견한다. 요한일서 1:9에서도 자백하면 용서해 주신다고 하셨다. 하지만 이것은 징계나 심판이 내려지기 전에 해당되는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심판을 선언하시기 이전, 즉 아직 "오래 참으시는" 동안에 돌이켰다면 심판은 내려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심판이 선언되었다면 돌이킨다 해도 소용없다. 그때는 돌이킨다 해도 심판을 받아야 한다. 하나님의 용서가 그에게 임하여 그와 하나님과의 교제는 회복될지언정 징계는 받는 것이다. 왜냐하면 심판이 이미 선언되었기 때문이다. 다만 심판 후에 그가 회복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시기는 한다. 이것은 우리의 영적 생활에 중요한 교훈이 될 것이다.
유다가 이토록 되어간 이유 중 하나는 거짓 선지자들 때문이다(14:14). 그들은 속임수로 예언하며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시지 않았음에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거짓되이 예언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인 칼과 기근을 부정하며 화평만을 예언했다. 즉 하나님의 심판이 다가옴에도 백성들의 눈과 귀를 가려 버린 것이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는 얼마나 많은 거짓 선지자들이 있는가? 수많은 강단들에서는 "죄와 심판과 지옥"에 대한 설교가 사라졌다. 죄를 지어도 경고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이 점점 더 가까워짐에도 사람들은 회개하지 않는다. 결국 당시의 거짓 선지자들이 유다를 멸망케 했듯이, 오늘날의 거짓 선지자들도 이 세대를 멸망케 할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완전히 버리신 게 아니다. 비록 버리셨지만 회복하심으로써 그들을 다시 구속하실 것이다. 이것은 신명기 28-30장의 소위 "팔레스타인의 언약"에 따른 역사하심이다. 예레미야가 회개할 때, 징계는 여전히 주어졌지만 회복의 약속 역시 주어진 것이다. 그 회복은 "남은 자"를 통해 이루어진다.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진실로 너희 남은 자들은 복을 받으리니 진실로 내가 재앙의 때와 고난의 때에 원수가 네게 간청하게 하리라』(15:11). 하나님께서는 재앙과 고난의 때에도 "남은 자"를 지켜 주실 것이다. 이것은 대환란 때 적용될 예언이다. 왜냐하면 바빌론 포로 당시, 끌려가지 않고 남은 그 땅의 잔류자들은 어느 누구에게도 보호를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환란 때에는 유대인들이 기본적으로 심판을 받겠으나, 믿음과 행위로 끝까지 인내하는(계 13:10; 14:12) 유대인 남은 자들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게 될 것이다.
이 경우 선지자 예레미야는 바로 그 남은 자의 예표가 되었는데, 왜냐하면 예레미야는 당시 유대인들에게 박해를 당하면서도 끝까지 하나님을 의지하며 믿음을 지키고 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까지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예레미야를 통해서 "남은 자"의 두 가지 중요한 특성을 보게 되는데, 그것은 첫째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실함과(15:16), 둘째 조롱하는 자들로부터의 완전한 성별이다(15:17). 이것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중요한 교훈을 준다. 성경대로 믿는 성도들 역시 온 세상이 배교로 치닫는 이때에 "남은 자"들처럼 믿음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우리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굳게 신뢰해야 할 것이며, 온전한 성별로써 세상을 등지고 하나님만을 바라봐야 할 것이다.

2. "혼인하지 않은 선지자"의 표적과 징계의 말씀 (렘 16-17장)

선지자 호세아의 경우는 창녀와 혼인하라고 하셨지만, 예레미야의 경우는 아예 혼인을 하지 말라고 하셨다(16:2). 예레미야는 아내를 두지도 말고, 그래서 자녀도 낳지 말아야 했다. 이 표적이 주는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유다 땅에 있는 모든 부모와 자녀들이 "가혹한 죽음"으로 죽는다는 것이다(16:3,4). 그들은 어떠한 애도도 받지 못할 것이며 지면의 똥같이 될 것이고, 시체는 새와 짐승들의 먹이가 될 것이다. 예레미야가 예언하고 있는 동안에도 유다 땅에는 여전히 혼인식과 잔치의 노래가 있었지만, 예레미야는 그 모든 것들이 철저히 파괴된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결혼하지 않는 표적을 몸소 행하고 그에 따르는 징계의 말씀을 선포한 것이다. 이 역시 대환란에 대한 예언인데, 왜냐하면 마태복음 24:19에서 예수님께서 『그 날들에는 아이를 밴 자들과 젖 먹이는 자들에게 화 있으리라!』고 분명히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여기서 제시되는 죄 역시 우상 숭배다. 『이는 너희 조상들이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좇아 행하였으며 그것들을 섬기고 그것들을 경배하였으며 나를 버리고 나의 법을 지키지 아니하였으며』(16:11). 앞에서도 누누이 강조했지만 우상 숭배라는 것은 단순한 죄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간의 언약을 파기해 버릴 만한 큰 죄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었는데,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게 되면 하나님은 더 이상 그들의 하나님이실 수 없다. 따라서 하나님의 어떠한 도움도 받을 수 없으며, 오히려 극심한 심판을 당하게 된다. 이러한 유다의 죄가 얼마나 극심한지 하나님께서는 "철필과 금강석 끝"으로 기록되었다고 말씀하신다(17:1). 도저히 지워질래야 지워질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죄들을 지워 버리실 것이니 그분의 은혜와 능력이 얼마나 위대한가!)

우상 숭배에 대해서 본문은 "아세라"와 "산당"을 지적한다(17:2,3). 산당은 높은 산들에 불법적인 제단들을 만든 것이고, 아세라는 자그마한 수풀을 꾸며 놓고 그 안에 우상을 세워 놓은 것이다. 초기에는 하나님을 섬기는 산당들도 있었다(삼상 10:13, 왕상 3:4). 하지만 이것은 성전이 세워지기 전의 모습이었다(왕상 3:2). 성전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이름을 두시려고 특별히 선정하신 곳이었기에(신 12:5), 성전이 세워진 후 백성들은 성전에서 경배해야 했다. 그러나 많은 백성들은 여전히 산당에서 경배했고, 따라서 그 불법적인 산당들은 자연스럽게 우상 숭배의 장소로 전락되었다. 그때부터 모든 산당은 우상의 제단이 되어 버렸다.
산당과 아세라는 남북왕국 모두에게 있어 뿌리깊은 우상 숭배의 장소였다. 간혹 유다의 선한 왕들이 바알의 제단을 헐어 버렸을 때도 산당들까지 손대지는 못했었다. 히스키야와 요시야가 산당을 없애긴 했지만(왕하 18:4; 23:8), 완전히 뿌리뽑지는 못했었다. 이처럼 그들은 우상을 따름으로써 "생수의 근원이신 주를 버렸"다(17:13).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여기서도 회복의 메시지를 주신다. 즉 바빌론 포로에서 회복시켜 주신다는 것이다. 과거에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 땅에서 인도한 주께서 살아 계시거니와』라고 말했었다(16:14). 이스라엘의 출애굽 역사는 그들 대대로 기억해야 한다고 하나님께서 친히 명령하셨기에 그렇다. 하지만 이후로는 『북쪽 땅과 그들을 쫓아내었던 모든 땅으로부터 이스라엘의 자손을 인도한 주께서 살아 계시거니와』라고 말할 것이다(16:15). 이것은 바빌론 포로에서 회복되는 것을 말하는 예언임과 동시에, 대환란 이후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이스라엘의 회복을 말하는 예언이기도 하다. 16:18은 『내가 그들의 죄악과 그들의 죄를 배로 갚으리니』라고 말씀하시는데, 이는 이사야 40:1,2에서 성취되는 예언으로 주어진다. 『너희는 내 백성을 위로하라... 그녀의 죄악이 용서받았나니 이는 그녀가 그녀의 모든 죄에 대하여 주의 손에서 배로 받았음이라.』 이것은 대환란의 고통으로 이스라엘의 모든 죄들을 완전히 심판하신 다음, 그들을 용서하시며 회복해 주시는 예언이다.
이것은 앞에서 설명한 "남은 자"의 예언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대환란은 극심한 고통도 고통이지만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배교하고 멸망하는 기간이다. 그러는 가운데 신실한 소수의 남은 자들이 존재하게 된다. 그들은 주를 신뢰하고 그의 소망을 주께 둘 것이다(17:7). 그래서 재앙의 날에도 주님은 그들의 소망이 되실 것이다(17:17). 하지만 이러한 대환란 예언은 그 영적인 견지에서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다. 우리 역시 이 영적으로 혼탁한 세상에서 주께 소망을 두어야 할 것이다. 주께서는 『사람을 신뢰하는 사람과 육신을 그의 무기로 삼는 사람과 그의 마음이 주로부터 떠난 사람은 저주를 받으리라.』(17:5)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주께 소망을 두는가, 아니면 사람을 신뢰하는가? 히브리서 6:19,20에는 우리의 소망이 혼의 닻같이 되어, 휘장 안(하늘 보좌)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안전하게 박혀 있다고 말씀한다. 정녕 그러한 사람은 물가에 심겨진 나무처럼 풍성한 열매를 맺을 것이다(17:8). 우리는 참으로 주님을 신뢰함으로 이와 같은 풍성한 삶을 살고 있는가?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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