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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3 - 옛 언약을 기억하시며 책망하시는 하나님 (예레미야 2,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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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10년 03월호>

예레미야의 사명이 심판과 멸망을 선포하는 것이니만큼, 그의 예언은 유다를 책망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을 책망하심에 있어서, 어디까지나 "그분의 백성"임을 전제로 두신 상태에서 책망하신다. 심지어 버리신다고 말씀하실 때조차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너무 사랑해서 그렇게 하신다는 의미로 말씀하신다. 이것은 우리에게 매우 큰 교훈을 준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것들로 하나님을 아프게 하는가?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자녀들을 책망하시되, 사랑의 마음으로 책망하시는 것이다.


1. 옛 언약에 대한 기억 (2:1-11)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해 예루살렘에 선포하시는 첫 말씀은 『내가 너를 기억하나니...』(2:2)이다. 무엇을 기억하는가? 『네 젊은 시절의 친절과 네 정혼할 때의 사랑』(2절)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첫 언약을 맺을 때의 모습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출애굽할 때였는데, 호세아 2:15에서도 비슷한 말씀을 하시면서 『그녀가 거기에서 그녀의 젊은 시절처럼, 또한 그녀가 이집트 땅에서 올라오던 날처럼 노래하리라.』고 하셨다. (문맥적으로는 예레미야 2장은 책망의 말씀이고, 호세아 2장은 회복의 예언 말씀이다.) 즉 이스라엘이 출애굽하면서 국가적으로 탄생하는 장면인데, 하나님께서는 그때 이스라엘을 민족적으로 선택하신 것이다.
그때 이스라엘은 주 앞에 "거룩함"이었다(3절). 즉 그들의 시작은 주 앞에 거룩하게 구별되었던 것이다. 세상의 모든 민족들과 다르게 특별한 모습으로 구별되었는데, 출애굽기 19:5,6에서는 "독특한 보물, 제사장들의 왕국, 거룩한 민족"이라는 지위까지 부여해 주셨다. 시내 산에서 주신 율법은 그들이 어떻게 성별되었으며 또 그들의 삶이 어떠한 거룩함으로 유지되어야 하는지를 잘 보여 준다. 또한 그때 그들은 "첫열매들"이었다(3절).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첫태생으로 여겨졌는데(출 4:22), 그래서 이집트의 첫태생들이 모두 죽임을 당하기도 했다. 본문 3절에서도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자들은 그들 위에 재앙이 임한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이스라엘을 복된 위치에서 출발시키셨다. 문제는 그들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저버렸다는 데에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과의 관계에서 신실하셨지만 그들은 하나님을 떠나 버렸다. 그들은 하나님 외에 다른 것들을 찾아 떠났는데, 그 다른 것들을 하나님께서는 "허무한 것"(vanity)이라 말씀하신다(5절). 이 "허무한 것"은 전도서에서 말씀하시는 바 "헛된"것들이다. 전도서에서는 하나님을 떠난 모든 세상적인 것들을 헛되다고 말씀하시는데, 이스라엘은 바로 그 세상으로 나아간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 안에서 만족을 누리지 못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광야에서 인도해 주시고 온갖 축복의 땅으로 인도해 주셨지만(6-7절), 그들은 그러한 하나님의 은혜에 불만을 느끼는 것이다. 그들은 항상 그땅 거민들에게 매력을 느꼈었다. 그 땅의 풍요와 발달된 문화를 동경했으며, 그들을 주관하는 "신들"을 바라봤다. 이방인들이 그들보다 더 우월하다고 느꼈기 때문에 이방의 정치 제도를 본받고자 했고(삼상 8:20) 이방의 군사력에 기대곤 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복들을 거절하고 이방의 모든 것들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것들을 "허무한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방을 향한 그들의 눈은 자연스럽게 이방의 우상들로 향하게 된다. 그들은 "바알"을 향해 나아갔다(8절). 중요한 것은 백성의 일부가 아니라 모두가 총체적으로 배교해 버렸다는 것이다. 『제사장들은 "주께서 어디 계신가?"라고 말하지 아니하였으며, 법을 다루는 자들은 나를 알지 못하였고 목자들도 나를 거역하여 범죄하였으며 선지자들은 바알을 힘입어 예언하였고 이롭지 못한 것들을 따라 행하였느니라』(2:8). 제사장들과 "법을 다루는 자들"(왕 혹은 재판관들, 즉 통치자들)과 목자들(여러 종류의 지도자들)이 모두 타락했다. 백성들이 온전할 리 없다. 그래도 최후의 보루는 선지자인데, 선지자마저 타락해 버렸다. 선지자란 백성들이 범죄할 때 하나님의 말씀으로 책망하는 사람들인데, 그들이 타락해 버리면 더 이상 책망할 사람이 없게 되는 것이다. 그들의 타락이란 하나님을 떠나 이방의 우상에게로 나아갔다는 것이다.
이상하게도 이스라엘은 우상에게 나아가길 좋아한다. 자기들의 하나님을 떠나길 좋아한다. 그런데 오히려 이방인들은 자기들의 신을 잘 떠나지 않는다. 『어느 민족이 자기들의 신들을 바꾼 적이 있느냐?』(2:11)고 말씀하신 것처럼, 이방 민족들은 자기들의 종교적 전통을 꽤 오랫동안 유지한다. 특히 고대에는 민족신의 개념이 강해서, 각 민족들은 자기들의 신들을 중심으로 뭉쳐 있었다. 그 신들은 사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우상일 뿐임에도 이방인들은 그렇게 했다. 하지만 유독 이스라엘은 그들의 하나님을 버렸다. 어느 민족도 그토록 재빨리 버릴 수는 없을 것이다. 이스라엘은 여호수아가 죽은 지 얼마나 되었다고, 재판관기 시대부터 우상들로 나아가더니, 왕들의 시대에는 더욱더 나아갔다.
하나님께서 이방 민족의 신들을 언급하시면서까지 이러한 말씀을 하시는 것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간에 맺은 언약을 강조하시기 위함이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통해서 "그들의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이라는 언약 관계를 분명히 설정해 놓으셨다. 이 언약은 하나님, 오직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오직 이스라엘과만 맺으신 언약이다. 즉 이 언약에서 이스라엘은 매우 특별한 지위를 얻었다. 율법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매우 위대하게 만들어 주셨던 것이다.
이와 같이 예레미야 초기 장들에서 이 언약을 자주 언급하시는 것은 이와 유사한 또 다른 언약을 통해서 회복하시겠다는 암시가 있는 것이다. 그 또 다른 언약이란 "새 언약"(New Covenant, 렘 31:31)인데, 하나님께서는 율법이라는 옛 언약을 맺어 이스라엘을 위대한 민족으로 삼으셨듯이 새 언약을 맺어 다시금 그 민족을 위대한 민족으로 삼으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처음 지위를 온전히 얻게 하실 것이다. 비록 그들이 그 언약을 파기하여 버림받았지만, 회복될 때에는 새로운 언약으로서 그 지위를 세워 주실 것이다. 이스라엘은 부름받았을 때에도 아내였으며, 회복될 때에도 아내의 지위를 되찾게 된다. 그러한 점에서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언약"이라는 주제로 진행되는 책이다. 즉 하나님께서 첫 언약을 맺어 주신 것과, 이스라엘이 그 지위를 던져 버린 모습, 그리고 다시금 회복시키시는 새 언약, 이러한 큰 주제로 말씀하시는 가운데 이스라엘의 구체적인 범죄와 심판의 모습이 예언으로 그려져 있는 책이 바로 예례미야인 것이다.


2. 버림받음의 결과 (2:12-19)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그 백성을 철저히 징계하신다. 그 징계가 얼마나 컸으면 『오 너희 하늘들아, 이 일에 놀랄지니라. 심히 무서워할지니라.』(2:12)고까지 선포했겠는가? 그처럼 놀라야 하는 이유는 바로 그 땅이 "극심하게 황폐할"것이기 때문이다. 이 황폐함은 예레미야 당대에 이루어진 예언이다. 자신의 생애 가운데 성취되는 예언을 바라보며 그는 그 민족과 더불어 눈물을 흘려야 했다.
그 황폐함의 원인은 13절에서 직접 언급된다. 『이는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범하였음이니, 즉 그들이 생명수의 근원인 나를 버렸음이요, 또 물통들을 만든 것인데 물을 저장하지 못할 깨진 물통이라.』 그들은 생명수의 근원을 버리고 다른 데서 물을 얻으려 했다. 그래서 물통을 만들었지만, 그 역시 깨진 물통이다. 어디서도 그들은 갈한 목을 적실 수 없다. 더 강력한 나라가 되기 위해 이방에게 나아갔으나 그들은 더 약한 나라가 되었다. 더 풍요롭기 위해 이방에게 나아갔으나 그들은 더 가난하게 되었다. 더 찬란한 문명을 위해 이방에게 나아갔으나 그들은 더 쇠잔해졌다. 이방에게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그들은 더욱더 낮아지고 궁핍해지며 초라해지고 결국 멸망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그들이 그들 생수의 근원이신 주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이다. 오늘날도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에게 동일하게 말씀하신다. 세상과 친구가 되고자 하는 자는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약 4:4). 더 나은 삶을 위해 세상으로 나아간다면 그는 더 초라한 모습으로 비참하게 하나님 앞에 돌아오게 될 것이다.
본문은 그들이 받을 징계의 모습이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다. 12절에서는 그 땅이 황폐하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고, 14절에서는 포로가 된다고 말씀한다. 15절에서는 그 황폐함의 모습을 성읍들이 불타는 것으로 묘사한다. 이 모든 것들은 바빌론이 침공하여 유다를 멸망시키면서 이루어졌다. 16절은 "놉과 타하파네스"가 유다의 왕관을 부순다고 했는데, 이는 이집트를 말한다. 이집트는 바빌론이 침공해 오기 이전에 먼저 유다를 침공하여 요시아의 아들 여호아하스를 폐위시켜 이집트로 끌고 가고, 여호야킴을 친이집트적인 왕으로 임명했다. 물론 요시야를 죽인 것도 이집트다. 예레미야는 이 예언을 요시야 당대에 하고 있었으므로, 그 예언은 정말 급하게 성취된 것이다.


3. 유다의 범죄 - 영적 간음 (2:20-3:25)

20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옛적에 내가 네 멍에를 꺾고 네 결박을 끊었더니』라고 말씀하시는데, 이는 출애굽 때 이집트의 결박을 끊으신 것을 말한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책망하실 때마다 옛 언약을 기억하신다. 그들을 책망하심에도 여전히 사랑하는 백성임을 잊지 않으시는 것이다.) 이에 이스라엘은 범죄하지 않겠다 다짐했었다. 모세 앞에서도 다짐했고, 여호수아 앞에서도 그가 죽기 전에 다짐했었다. 하지만 그 다짐은 오래 가지 못했고, 수없는 우상들에게로 나아갔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우상 숭배의 죄를 "창녀짓"이라고 규정하셨다. 창녀란 일반적 간음녀와는 달리 "여러 남자들"과 음행하는 여인이다. 즉 이스라엘은 어떤 특정한 신에게로 돌이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제외한 모든 우상들에게 돌이켜 버린 것이다. 그들의 영적 음행은 "모든 높은 산 위"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20절)에 새겨져 있다. 그들의 음행이 얼마나 심한지, 마치 발정기에 있는 암나귀가 심하게 발광하여 누구에게라도 쉽게 드러나는 것과 같다(24절). 유다에 있는 신들의 수는 유다 성읍 수와 같다(28절). 이쯤 되면 어느 누가 고대 이스라엘 사회를 일신교 사회라 말할 수 있겠는가? 이스라엘은 모든 이방 사회와 마찬가지로 "다신교"사회였다. 명목상의 국가 종교가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었지, 실제적으로 그들 민간 사회는 극도로 철저한 다신교 사회였던 것이다. 그것은 일본이나 인도나 중국과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이스라엘의 민간 신앙은 바알 종교였으며, 이는 왕, 고관들, 제사장들, 선지자들에게도 예외가 없었다(26절).
유다가 창녀가 된 것은 그 원래의 지위가 아내였다는 것을 생각해볼 때 더욱 충격적이다. 아내와 창녀는 모두 어떤 남자에게 의탁하는 여인이다. 차이가 있다면 아내는 남편에게만 의탁하는 데 반해, 창녀는 여러 남자에게, 아무 남자에게나 의탁한다는 것이다. 아내와 창녀의 차이는 엄청나다. 하지만 이스라엘과 유다에게 있어 이 두 여인의 모습은 종이 한 장 차이였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아내와 창녀라는 두 상이한 여인으로 그 백성을 비유하고 계신다. 그 백성은 원래 하나님의 아내였지만, 이제는 더 이상 아내가 아니고 창녀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유다가 이처럼 더렵혀진 것은 북왕국 이스라엘의 책임이 크다. 북쪽 이스라엘이 먼저 이방을 향해 창녀짓을 했다. 여로보암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국가 종교로 삼았고, 오므리와 아합은 바알 숭배를 확립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이혼증서"를 주시어 아내의 지위에서 쫓아내셨다(3:8). 창녀로 간주해 버린 것이다. 하지만 유다 역시 그 일을 보고 창녀짓을 행했다. 차이가 있다면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전혀 돌아오지 않았던 반면, 유다는 가끔 돌아왔다는 것이다. 유다에는 여호사밧, 히스키야, 요시야 같은 왕들이 있어, 백성들을 우상들로부터 하나님께로 돌이키곤 했었다. 이로 인해 호세아 선지자는 『에프라임은 거짓말로, 이스라엘 집은 기만으로 나를 에워싸나, 유다는 여전히 하나님과 함께 다스리며 그 성도들과 더불어 신실하도다.』(호 11:12)라고 말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 돌이킴은 온전하지 못했다. 이 몇몇 왕들은 순수한 신앙으로 그렇게 했다 할지라도 백성들은 그렇지 못했다. 지금 이 예언은 요시야 시대, 즉 신실한 왕 요시야 시대에 했던 예언임을 기억하라. 또한 이 왕들 이후에는 다시 악한 왕들이 등장하여 북왕국 이스라엘의 길로 행했다. 이처럼 조금 돌아오는 것 같다가 다시금 우상에게로 나아가는 모습을 가리켜 하나님께서는 『유다는 전심으로 내게 돌아오지 아니하고 거짓으로 돌아왔도다.』(3:10)라고 평가해 버리셨다. 이것은 우리에게 귀한 교훈을 준다. 우리가 다소간에 범죄하였을 때 하나님께 돌이킨다고는 하나 다시금 그 죄악으로 돌아가기를 반복한다면, 그것은 "거짓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그렇게 여기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이에 하나님께서 호소하듯 외치시는 말씀을 주목하라. 『너희 타락한 자식들아, 돌아오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의 타락을 치유시켜 주리라』(3:22). 『주 너의 하나님을 거슬러 범죄한 것과 모든 푸른 나무 아래서 타국인들에게로 네 길을 흩어 버린 것과 너희가 내 음성에 복종하지 않았던 네 죄악을 인정하기만 하라. 주가 말하노라』(3:13). 여기서 "인정하기만 하라."는 말씀을 주목하라. 그들이 죄악을 밥먹듯하면서도 인정하기조차 않았던 모습이 역력하다. 그들은 맞아도 바로잡히지 않았고(2:30), 뻔뻔하게도 무죄하다고 변명했으며(2:35), 창녀짓을 함에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았다(3:3). 이처럼 목이 곧고 완고한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네 죄악을 인정하기만 하라."는 것이다.
혹자는 죄악을 인정하는 게 뭐 그리 어렵냐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크든 작든 상습적인 죄를 행하는 사람은 자기의 죄를 인정하기 쉽지 않다. 돌이켜야 한다는 것은 알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돌이키기 힘든 상황에 있는 사람은 자기의 죄를 합리화시키는 데 익숙하다.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기도하고 간구할 때 그 죄는 감춰 버리고, 해결하기 그리 어렵지 않은 다른 죄들만 자백하며 경건의 모양만 가지고 기도를 드린다. 하지만 성령께서는 지속적으로 그 마음속에 말씀하신다. 인정하지 않고 있던 바로 그 죄를 인정하라는 것이다. 그 죄를 인정하기만 하면 그는 돌이킬 수 있고 치유받을 수 있다. 그 죄가 무엇이든지 간에 말이다. <다음호에 계속>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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