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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관기, 왕이 없는 혼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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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05년 09월호>

재판관기, 왕이 없는 혼란기



재판관기는 재판관들이라는 신정 과도기의 주인공들의 이야기들이 묶여 있는 책이다. 이 시기는 일종의 과도기로서, 왕이 없어도 신정이 올바로 이루어질 수 있는가에 대한 시험이 다루어지는 기간인데, 결과는 실패로 드러났다. 그것도 “점진적으로” 실패해 간다.
이 실패는 첫째, 백성들이 지속적으로 타락하고, 둘째, 그 땅에서의 이방인들의 상황이 점점 더 악화되고, 셋째, 재판관들마저도 육신적으로 흐르고 있으며, 넷째, 이제는 외적의 침입 외에도 내전까지 치러진다는 것 등으로 설명될 수 있다. 룻기에서(재판관들의 시대를 다루고 있는) 소망을 제시해 주고는 있지만, 재판관기 자체는 실패로 나아가는 책이다. 게다가 사무엘상에서는 엘리의 아들들(이들도 재판관들이었다)이 이스라엘의 신앙을 혼탁하게 만들고, 설상가상으로 사울이 왕이 되기는 했는데 그는 불법적인 왕으로서, 다윗을 죽이려 했다. 이 모든 혼란은 다윗이 왕이 되어서야 정비가 되었다. 사울과 다윗은 각각 누구를 예표하는가? 사울은 적그리스도를, 다윗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역사적인 관점으로 말할 때, 이 책은 왕정이라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우리는 “그 당시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다.”(판 17:6; 21:25)는 문구를 주의깊게 봐야 한다. 이것은 재판관기가 왕정이 확립된 후에 과거를 돌아보며 기록되었다는 증거가 되기도 하거니와, 1)
기다리는 그 왕이 다윗으로 확정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종결되는 하나님의 역사관을 그대로 보여 주는 것이다.
재판관기는 다음과 같은 세 구분으로 되어 있다.
(1) 서론(1,2장) :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죄가 일어나는 원인을 설명
(2) 각 재판관들의 기사(3-16장) : 반복적인 죄의 주기들과 하나님의 인도하심의 내용
(3) 극도로 타락한 시대상에 대한 설명(17-21장)

1. 우상 숭배의 모습
재판관기 시대의 이스라엘의 가장 큰 문제는 하나님을 떠나 카나안의 신들을 섬기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두말할 나위 없이 율법을 범한 죄로서, 이 죄 때문에 이스라엘은 심판을 받는다. 재판관기에는 일곱 번에 걸친 배교의 주기가 나타난다. 그 각각의 주기는 “배교(우상 숭배)-심판(이방 민족의 압박)-회개-구원자(재판관)를 통한 구원”으로 이루어진다.
이들이 우상 숭배를 하게 된 것은 그 땅의 민족들을 다 쫓아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방 민족들을 쫓아내지 않는다면 그들의 종교와 악한 문화를 본받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쫓아내고 멸하며, 우상 숭배의 모든 도구들을 파괴하라고 명령하셨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왜 그런 종교와 문화를 좇아갔는가? 무엇이 도대체 이스라엘을 매료시켰는가?
카나안은 이스라엘에게 경탄을 자아내게 하는 땅이었음은 물론이다. 그들이 카나안을 처음 봤을 때, 비록 그 거민이 무섭기는 했지만, 그 땅만큼은 몹시도 탐났다(민 13장). 그들이 종으로 섬기던 이집트는 나일 강변을 제외하고는 광야였다. 또 그들은 시내 광야에서 이동 생활을 했었다. 그런 그들의 눈으로 볼 때 카나안은 산과 계곡과 평지가 어우러져 있는 풍요로운 땅이었다. 또한 유목민인 이스라엘의 눈으로 봤을 때 카나안의 농경 문화는 우수해 보였다. 그런데 그러한 “우수한” 문화가 그들의 종교로 뒷받침되었던 것이다. 카나안의 신들은 “풍요”의 신들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고대에서 풍요를 빌기 위한 신들은 대부분 음란의 신들이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2)
고대 신전에서의 풍요를 비는 의식들을 신전 창녀들이 주관했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민수기 25장의 “바알프올의 범죄”는 이러한 종교 의식을 잘 보여 준다. 그들은 종교를 빌미로 행음을 했던 것이다.
카나안에는 많은 신들이 있지만 대표적인 신들로는 바알과 아스타롯을 들 수 있다. 바알은 폭풍(비)의 신 혹은 태양의 신 등으로 묘사되는데, 여러 우상들 중에서 가장 강력한 신이다. 물론 그 “비의 신”은 엘리야 때에 무기력의 극치를 드러냈다(왕상 18장). 이스라엘이 바알에게 눈독들일 필요가 없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에게 비를 내리시는 분이기 때문이다(신 11:14). 아스타롯(Astarte, Ashtoreth) 또한 “풍요”의 여신인데, 전쟁과 사랑의 여신으로 등장한다. 물론 여기서 사랑이란 그리스 신화의 많은 여신들과 마찬가지로 음행을 말한다.
이외에도 많은 신들이 있지만, 어쨌든 이스라엘은 이와 같은 다신교 체제에 쉽게 빠져들었다. 그것은 영적, 군사적 혼란을 야기시켰다. 이는 단순히 왕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만은 없다. 우상 숭배는 왕이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후에 왕정이 들어선 후에도 여전히 우상 숭배는 있었다. 그것은 그들이 율법을 지키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문제였다. 결국 그들은 율법을 지킬 의지가 없었던 것이다. 이는 여호수아 23,24장에서 이미 예언된 것이며, 그 결과로 일곱 번의 배교의 주기가 발생한다.

2. 재판관들

이들은 여호수아 이후부터 왕정이 시작되기까지 신정국가의 과도기적 주인공들이다. 이들은 왕이 아니므로 세습되지 않으며, 특정 지파에 한정되지도 않는다. 단지 외적으로부터 민족을 지키는 것(판 2:16), 또 백성들을 재판하기 위한 목적(판 4:5)으로 하나님께서 어느 지파에서나 필요에 따라 선정하신 인물들이다. 여러 경우에 있어서, 한 재판관이 죽은 후에 한 차례 배교가 있고 나서 새로운 재판관이 선임되곤 했지만, 어떤 경우에는 한 시대에 두 명의 재판관이 서로 다른 지역에서 재판하기도 했다. 재판관기에 기록된 재판관들은 12명이다.
일곱 번의 배교 주기와 연관해서 각 12명의 재판관들은 도표와 같다. 어느 민족에게 몇 년 압제당했고, 어떤 재판관이 어떻게 싸웠으며 또 얼마나 안식했는지에 대한 자세한 상황은 도표로 대신한다(p.39 도표 참조). 다만 주목해야 할 몇 가지만 짚고 넘어가도록 하자.
드보라의 경우 바락이라는 장군이 함께 등장한다. 바락도 재판관으로 말하는 경우도 있지만, 일단 바락이 재판했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다만 바락이 수행한 전쟁이 중요한데, 이는 재림 때의 아마겟돈 전쟁의 예표가 되기 때문이다. 드보라와 바락이 승리의 노래를 부르는 재판관기 5장은 예언적인 노래인데, 여기에서 『그들이 하늘로부터 싸웠으니 그들의 길에서 별들이 시스라와 싸웠도다.』(판 5:20)라는 구절이 주목할 만하다. 또한 이들이 싸운 지역이 므깃도, 즉 아마겟돈임도 이 전쟁의 예표적 모습의 중요한 근거가 된다.
기드온은 재판관기에 등장하는 “주요 재판관들” 중 하나이다. “기드온과 삼백 용사”로 알려져 있는 이 전쟁 또한 아마겟돈 전쟁의 예표가 되는데, 왜냐하면 이 전쟁은 삼백 용사의 힘으로 이긴 전쟁이 아니기 때문이다. 재림 때 예수 그리스도를 앞세운 하늘의 군대는 아마겟돈 전쟁을 위해 내려온다. 그러나 싸우시는 분은 그리스도 한 분이시고(사 63:3), 군사들은 그분의 뒤를 따라 오면서 땅을 황폐화시키는 역할을 한다(욜 2:1-11). 마찬가지로 기드온 전쟁에서 미디안군은 하나님께서 치셨고(그들은 자기들끼리 싸워 자멸했다.), 삼백 용사는 나머지 잔류군을 쳤을 뿐이다.
도표에서는 기드온 이후의 다섯 번째 배교의 결과를 아비멜렉의 내란이라 표시했는데, 이 아비멜렉이란 자는 기드온의 서자 중 한 명으로, 왕을 사칭한 자이다. 기드온이 죽자 이스라엘은 또 우상 숭배라는 배교를 했고, 하나님께서는 아비멜렉이라는 폭군 아래서 이스라엘을 고난받게 하셨다. 배교한 백성들에게 주시는 벌은 반드시 외적의 침입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입다는 출신 지파를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요단 동편, 즉 길르앗 사람이다. 이 지역은 암몬 접경이었으며, 당시 암몬 족속은 출애굽 때 이스라엘이 빼앗은 자기네 땅을 돌려달라고 요구하며 전쟁을 일으켰다. 이는 마치 오늘날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1948년에 이스라엘이 빼앗은 땅을 돌려 달라고 우기는 것과 같다. 그 땅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땅이고, 암몬 자손의 땅은 빼앗지 않았었다. 입다는 비록 창녀의 아들이었으나, 자기 민족의 역사, 즉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땅으로 이끄신 역사를 분명히 알고 있었으며, 그들과 싸워 이겼다(판 11장).
그러나 입다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승리케 하신다면 사람을 제물로 바치겠다는 끔찍한 서원을 하게 되는데, 이로써 입다는 자기의 딸을 바치게 되지만, 이는 이스라엘의 재판관이 율법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는 어리석은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다(신 18:9,10). 입다는 암몬과 모압 접경에 살면서, 그들의 “문화,” 즉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종교 풍습을 보고 배웠던 것이다. 이처럼 배교는 너무나 뿌리깊게 침투해 있어서 돌이키기 힘든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오늘날도 이방 종교들은 종교의 모습으로가 아니라 문화의 모습으로 달려온다. 그리고 교회들은 그 문화들에 깊게 젖어 들어 있다. 재판관기의 말엽처럼, 오늘날도 회복 불가능한 상태로 들어간 것이다.
드디어 마지막 재판관 삼손은 그 자신의 육신적인 모습을 여실히 드러내고야 말았다. 그는 이방 여인의 품에 들어갔다가, 두 눈을 뽑히고 조롱당하는 비참한 신세로 전락하고 만다. 이 사실은 잠언에서 주시는 교훈에 대한 생생한 실례가 아닐 수 없다. 『타국 여인의 입술은 벌집처럼 꿀을 떨어뜨리고, 그녀의 입은 기름보다도 미끄러우나, 그녀의 마지막은 쑥같이 쓰고 양날 가진 칼처럼 날카로우니라』(잠 5:3,4).

3. 역사적 상황 - 필리스티아인들의 등장
재판관기 시대에 이스라엘은 커다란 외세의 유입을 맞이하게 된다. 여호수아가 그 땅에 진입할 당시에 이미 있었던 일곱 족속들(수 3:10)이 있었지만, 그들은 큰 위협이 못되었다. 그들 중 대부분은 이미 복속시킨 상태였다. 그러나 재판관기의 중반 이후에, 대략 B.C. 12세기 이전에 서남 해안에 정착하기 시작한 필리스티아인들은 매우 큰 위협거리였다. 이들은 가자, 아스클론, 아스돗, 에크론, 가드 등 다섯 개 주요 성읍들의 우두머리 5명을 수반으로 하는 동맹체로 구성되었다.
필리스티아인들에 대한 첫기사는 세 번째 재판관 샴갈 때에 등장한다(판 3:31). 3)
그리고 한참 후 입다 때에 그들은 본격적인 위협 세력이 되었으며(10:6), 드디어 삼손 때에는 가장 위협적인 존재가 되어(13장), 다윗왕 때에야 완전히 복속하는 모습을 본다. 필리스티아인들은 에게해에 본거지를 둔 해양 민족으로서, 강력한 철기 문화를 바탕으로 그 땅에 큰 위협 세력이 되었다. 이들은 철기 제작을 독점하면서 이스라엘을 괴롭혔는데, 이 상황은 사울의 시대에까지 이어졌다(삼상 13:19- 22).

4. 재판관 시대의 혼란
17장부터는 연대기적인 순서를 멈추고, 몇 가지 사건들을 통해 당시 사회의 혼란상을 보여 준다.
17,18장에서는 에프라임 지역에 사는 미카의 우상 숭배 기사가 나온다. 그는 우상 숭배를 위해 한 레위인을 가족 제사장으로 임명했는데, 단 지파에서 그를 빼앗아가 지파 제사장으로 임명한다. 레위인은 기본적으로 율법을 수호하는 임무를 맡았는데, 이 레위인은 우상 숭배를 단 지파까지 퍼뜨린 장본인이다. 또한 단 지파에서 그 레위인을 빼앗아 간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단 지파에 레위인이 없었기에 그를 빼앗아갔는가? 그렇다면 이미 율법은 땅에 떨어졌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율법에 따라 레위인은 모든 지파에 골고루 분포되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19장에서는 한 레위인이 도망간 첩을 찾으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베냐민 출신의 벨리알의 자식들에게 그 첩을 내어주어 윤간을 당하게 한 후, 그녀가 죽으니 그 시신을 열두 조각으로 나누어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에 보낸다. 첩을 취한 것도 잘못이고, 베냐민 지파의 간음도 잘못이며, 시신을 나누는 것도 잘못이다. 이스라엘 지파들에게 이 가증한 짓(베냐민의 간음)을 알리기 위해 이 같은 일을 할 필요까지 있었을까? 이것은 이스라엘이 그 땅의 이방인들을 쫓아내지 못함으로 생긴, 그 땅 문화와의 동조 현상 중 하나였다.
20장은 19장 사건의 연장으로서, 베냐민 지파의 이 가증한 행동에 대해 온 지파들이 담합해 베냐민과 싸우는 상황, 즉 내전의 상황을 묘사한다. 사실 재판관기에는 총 세 번의 내전이 있다. 첫째 아비멜렉의 불법적 왕권 찬탈 사건 때(9장), 둘째 입다의 승리 이후 에프라임인들과의 전쟁(12장), 그리고 여기 20장에서 보는, 레위인의 첩 사건으로 인한 베냐민과의 전쟁이다. 내전을 치른 것도 잘못이요, 내전 후에 한 지파를 살리기 위해 취한 방법도 잘못되었다(판 21:20-23).
이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17장 이후의 사건들은 이스라엘의 배교의 극치를 보여 주는 사건들이다. 사실 이 사건들은 연대기적으로 16장 이후의 사건이 아니다. 적어도 중기 재판관들 이전 사건들일 텐데, 이와 같이 성령님께서 맨 뒤에 배열한 이유는, 재판관기의 결론 자체가 배교로 끝난다는 사실을 보여 주시기 위함이다. 재판관기의 주제는 바로 배교와 실패이기 때문이다. 백성들의 우상 숭배와 뿌리깊은 이방 문화들, 재판관들의 배교, 거기다가 영적 지도자들인 레위인들의 배교까지, 참으로 전체적인 배교가 이 책의 결론이다. 마치 오늘날의 상황과 똑같다. 그리고 재판관기의 결론은 이 모든 이유가 “왕이 없었으니”라고 말한다. 그렇다. 왕이 없으면 혼란스럽다. 그래서 왕이 오셔야 한다. 우리가 기다리는 왕은 누구인가? 바로 만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시다. 그분이 오셔야 이 세상의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 인간들의 노력으로써가 아닌 것이다. BB



1) 재판관기의 저자가 누구인지 확실히 말할 수는 없으나, 그 기록 연대는 왕정이 확립된 후인 B.C. 1050-1000년경이라 말할 수 있다. 이 시기는 사무엘이 활동하던 시대이기도 한데, 그래서 유대인의 전통에서는 재판관기, 룻기, 사무엘서를 모두 사무엘이 기록했다고 한다. 이 세 책이 마치 한 책인 양 주제가 일관되어 흐르는 것은 사실이다.

2) 고대의 유물들 중 필요 이상으로 젖가슴과 엉덩이가 큰 돌 조각상이라든지, 이상하리만큼 젖가슴이 많은 비너스상 등은, 역사학자들에 의해 풍요를 기원하는 주술 혹은 종교를 반영하는 것이라 여겨졌다. 이 말은 맞지만, 동시에 그것은 음행 종교임을 보여 준다.

3) 창세기 21:32; 26:1, 출애굽기 13:17 등에도 필리스티아인들이 언급되지만, 이들은 단지 고대의 에게인들(Aegean people)을 말할 뿐이며, 필리스티아인들은 그들과는 별도로 재판관기 시대에 대규모 유입을 해서, 그때부터 이 땅을 본격적인 활동 무대로 삼았다. David M. Howard Jr., The Philistin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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