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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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 사랑의 법들 2 (신명기 24-2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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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09년 05월호>

24-25장은 22장부터 시작되는 “형제 사랑에 관한 법”의 연장이다. 이스라엘 백성 상호 간에 지켜야 할 규정들을 다루는데, 이것은 단순한 사회적인 법이 아니라 언약의 백성이라는 독특한 백성 내에서 지켜져야 할 규례인 것이다. 이스라엘은 모든 이방인들과 달리 하나님의 특별한 언약을 받은 백성이고, 따라서 그들은 각자가 서로에게 소중하다. 그들에게 형제 사랑의 법, 즉 이웃 간의 법은 여타 이방인들의 그것과는 기본 의미부터 다르다. 그리고 그들 상호 간에 지켜지는 이러한 귀한 법들은 그 땅에서 그들이 영속되이 살아가는 귀한 조건이 되기도 한다.

1. 연약한 자들에 대한 보호 (24장)

(1) 이혼증서 (24:1-4)
어떤 남자가 아내에게서 불결함이 발견되어 이혼해야 할 일이 생길 경우에는 “이혼증서”를 써 보내야 한다. 여기에서 이혼 사유에 대해서는 정확히 나오지 않으나, 여자에게서 “불결함”을 발견했다는 말을 보아(1절), 적어도 남자가 이유 없이 임의로 버린다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이 증서는 그 여자를 자유롭게 해준다는 큰 의미가 있다. 이혼증서란 확실하게 이혼했다는 표식이며, 이 증서를 받은 여인은 재혼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이혼증서가 없으면 아직 남편에게 속해 있는 여인이기 때문에, 아무리 쫓겨났어도 재혼하면 간음한 것이 될 것이다. 따라서 이 규정은 아내를 함부로 버리지 말라는 것과 더불어, 여성에 대한 보호라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그 여인이 재혼한 남편에게서도 다시 이혼했거나 혹은 사별했을 때 다시 첫 남편에게 돌아갈 수는 없다. 법적으로는 새 남편에게서 자유로워졌을지언정 전 남편에게 돌아가기에는 다른 남자로 인해 더럽혀졌기 때문이다. 성경은 여인이 여러 남자에게 속하는 것은 “가증한” 것이라고 규정하고 있다(4절).
아무튼 이혼증서라는 것은 버림받았다는 것이다. 비록 여인에 대한 보호라는 의미가 엿보인다고는 하나, 기본적으로는 버림받았다는 것이다. 특이하게도 “이혼증서”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비블리온 아포스타시우”(βιβλίον ποστασίου, 마 19:7)인데, 이것을 직역하면 “배교한 성경”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이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음행한 아내에게 이혼증서를 주듯이, 배교한 교회에게 배교한 성경을 주어서 세상과 마음대로 결합하는 것을 허락해 버리신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배교한 교회는 이 “이혼증서”를 가지고 세상과 결합해 버렸다.

(2) 혼인한 병사 (24:5)
본문에 따르면, 어떤 사람이 혼인을 하면 일 년 동안은 전쟁에도 나가지 말고 업무도 맡지 말면서 아내와 즐겁게 지내야 한다. 율법은 참으로 세세한 부분까지 백성들을 배려하고 있다. 군대라는 것은 개인의 사정을 봐 주지 않는 곳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군대는 하나님께서 싸우시는 곳이다. 20:7에서도 『아내와 정혼하고 그녀를 취하지 못한 자가 있느냐? 그는 자기 집으로 돌아갈지니...』라고 말씀한다. 이러한 말씀들은 군사인 백성들을 배려하고 보호하는 말씀임과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군사 숫자에 의존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보여 주는 말씀이기도 하다. 신명기 20장은 심지어 겁나고 두려워하는 사람들도 돌아가라고 말씀한다(20:8). 하나님의 군대는 하나님께서 싸우시는 군대이기 때문이다. 단지 군사들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께 대한 굳은 신뢰일 뿐이다.

(3) 가난한 형제들을 향한 법 (24:6-22)
이외에도 신명기 율법은 다양한 경우의 가난한 형제들에 대해서 구체적이고도 세밀하게 보호하고 있다.
① 맷돌은 윗판이든 밑판이든 저당잡을 수 없다(6절).
② 이스라엘 백성을 노예로 삼거나 파는 행위는 금지되며, 그러한 경우는 사형에 해당된다(7절). 레위기 25:39-46에 따르면 이스라엘 백성은 같은 이스라엘 백성을 품꾼으로는 삼을 수 있으나 노예로 삼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모두 “형제”이며, 하나님께서 이집트의 종 된 상태에서 데리고 나오신 “자유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대의 모든 국가들은 「귀족-평민-노예」라는 신분제도가 있었지만, 유독 이스라엘에는 그런 것이 없었다. 적어도 율법에 따르면 그렇다.
③ 누군가의 물건을 저당잡을 일이 생기면, 직접 집에 들어가서 저당물을 가져오지 말고, 채무자가 저당물을 가지고 나올 때까지 밖에서 기다려야 한다(10-11절).
④ 채무자가 가난한 경우, 그 저당물을 해가 질 때에 다시 돌려줘야 한다(12-13절).
⑤ 품꾼들에게 품삯은 그 날 반드시 줘야 한다(14-15절). 품삯을 미루는 노동력 착취로 인해 품꾼이 주께 부르짖을 때 그것은 주 앞에 죄가 된다. 야고보서 5:4은 바로 그 죄를 책망하고 있다. 특별히 야고보서는 마지막 때의 부자들에 대한 경고의 말씀이다.
⑥ 아비들은 자식들로 인하여 죽임을 당하지 않을 것이며 자식들도 그 아비들로 인하여 죽임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16절).
즉 율법은 연좌제를 배격하며, 이것은 율법의 공정성을 보여 주는 것이다. 한편 로마서 5장은 한 사람(아담)의 범죄 때문에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전달되었다고 하는데(롬 5:12), 이 말씀은 신명기 본문 말씀과 모순되는 것이 아니다. 로마서 말씀은 아담의 범죄로 인류는 죄의 노예가 되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아담의 죄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잃게 되었으며, “죄인”이 되었다. 모든 인간은 죄인의 상태로 태어나게 된 것이다. 즉 로마서 5장은 인류의 본질적 범죄를 보여 준다. 반면 신명기 24:16은 개별적 범죄들에 대한 말씀이다.
⑦ 타국인과 아비 없는 자들과 과부들에 대해서는 특별히 배려해야 한다(17-22절). 이 세 부류는 그 땅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상징한다. 본문은 다음과 같은 경우에 있어서 이들을 불쌍히 여기라고 말씀하신다.
첫째, 가난한 자들의 재판을 왜곡하지 말고, 그들의 옷을 저당잡지 말라(17절).
둘째, 곡식 밭이나 올리브 나무나 포도원에서 수확을 거둘 때, 모든 수확물을 철저히 거둬들이지 말고, 그 땅의 가난한 자들을 위해 조금 남겨 두어야 한다(19-21절).
보아스는 이러한 일들을 아름답게 행한 훌륭한 예다. 보아스는 이삭을 주우러 온 룻을 위해 일부러 이삭을 한 줌씩 더 떨어뜨리라고 그의 일꾼들에게 말하기까지 했다(룻 2:15,16). 룻은 타국인이기도 했고, 아비 없는 자이기도 했고, 과부이기도 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 타국인들을 선대하라고 하신 이유는 이스라엘 역시 이방 땅에서 타국인이었기 때문이다(18,22절). 이스라엘이 노예였을 때 하나님께서 그들을 돌보시고 구속하셨듯이, 이들 타국인들도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신다. 하나님께서는 압제를 싫어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2. 재판에 대한 문제와 씨를 세우는 문제 (25장)
(1) 재판에서의 자비 (25:1-3)
재판은 공정하게 옳고 그름을 가려야 하되, 죄인이 맞을 만한 죄를 지었다면 응당 때려야 할 것이다. 그런데 40대 이상을 초과해서 때리면 안 된다(3절). 이것은 죄인에 대한 최소한의 자비이며, 그보다 더 때리면 비열한 사람으로 취급받을 것이다.
유대인들은 신명기의 이 말씀을 지키기 위해서 40대 이상은 때리지 않았다.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로부터 “사십에 하나 뺀 매”를 다섯 번이나 맞았다(고후 11:24). 하지만 이것은 이들이 율법을 잘 지켰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잘 지킨 척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여 줄 뿐이다. 율법은 분명 40대까지 허용한다. 그러나 이들은 40에서 하나를 뺀 39대까지만 때렸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자신들이 율법보다 더 자비로운 사람들임을 보여 주고자 했다. 그들의 모든 행위는 율법에 따른 것이 아니라 “장로들의 전통”(막 7:5)에 따른 것으로서, 자신들이 율법보다 더 의롭다는 것을 보여 주는 일종의 위선이었다. 그러한 위선적인 모습으로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박해했던 것이다.

(2) 수고의 대가 (25:4)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면 안 된다. 이것은 일꾼에게 그 합당한 소득을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말씀은 신약에서 두 번 인용되었는데(고전 9:9, 딤전 5:18), 그때마다 주님의 일을 하는 사람은 주님께서 먹여 주신다는 내용이다. 하나님께서는 제사장들을 백성들의 헌물로 먹여 주셨듯이, 신약의 목자들도 교회를 통해 먹여 주시는 것이다. 그러나 이 원리는 주의 일을 하는 사역자뿐 아니라 일반적인 일꾼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본문이 “형제 사랑의 법”의 문맥 가운데 있음을 기억하고, 또 24:15에서 품꾼의 경우와 비교해 보라.

(3) 수혼제도 (25:5-10)
본문에는 율법 가운데 매우 특이한 법 중 하나가 제시되는데, 바로 “수혼제도”(嫂婚制度, levirate marriage), 혹은 “형사취수제”(兄死娶嫂制)라 불리는 것이 그것이다. 형제들이 함께 거할 때, 어떤 형제가 자식 없이 죽은 경우 그 미망인은 그 형제들 중 하나와 결혼을 해야 한다. 이 제도의 목적은 죽은 형제의 집안을 세우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를 취한 형제는 그녀를 통해 낳게 될 첫 아들로 하여금 죽은 형제의 이름으로 가문을 세우게 해야 한다. 만약 그 사람이 형제의 미망인을 취하기 싫어하면, 그녀는 장로들 앞에 그를 데리고 가서 그의 발에서 신을 벗기고 그 얼굴에 침을 뱉으며 수치를 주게 된다(9절). 이것은 형제의 유업을 중시해 주는, 매우 중요한 “형제 사랑의 법”이다.
룻기에 이와 유사한 내용이 나온다. 보아스는 룻을 사랑하지만, 룻을 취하기에는 자기보다 권리가 우선인 사람이 있기에 그에게 먼저 의중을 묻는다. 그리고 그 사람이 권리를 보아스에게 양도하자 보아스는 룻과 결혼한다(룻 4:3-10). 이때 권리를 양도한 그 사람은 자기 신을 벗어 보아스에게 주었는데, 이것은 신명기 25:9이 약간 변형된 상태다. 룻기 상황(재판관기 시대)에서 신을 벗는 행위는 단순히 유업을 포기, 혹은 양도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어쨌든 보아스는 룻의 남편인 킬리온과 친척이었기에 이 제도에 따라서 룻과 결혼하였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룻의 상황은 신명기 25장의 수혼제도가 약간 변형된 것이다. 왜냐하면 신명기 25:5에 따르면 수혼제도는 “함께 거하는” 형제들, 즉 친형제들에게 적용되는 제도이다. 친척에게는 이 의무가 없으며, 친척의 경우에는 “유업을 차지하는 권리”라는 의미가 좀더 강하다. 보아스가 자기보다 더 가까운 친척에게 권리에 대해 물었을 때, 그는 룻이라는 여인에 대한 권리보다는 룻과 나오미에게 속한 유업, 즉 “엘리멜렉의 소유였던 토지”에 대한 권리를 먼저 물었었다. 보아스는 그 유업을 값주고 산 것이다(룻 4:3,4).
보아스는 수혼에 대한 직접적인 의무는 없었으나, 유업을 다시 산다는 의미에서 수혼제도의 개념을 친족까지 확장하여 이 일을 행했다. 유업을 “다시 산다”는 것은 “구속”의 개념인데, 그래서 보아스와 룻의 관계는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예표하게 되는 것이다.

(4) 씨에 대한 보호 (25:11,12)
두 사람이 싸울 때 한 사람의 아내가 자기 남편을 도우려고 상대방의 은밀한 부분을 잡으면, 그 여자는 손을 잘라야 한다. 싸움에 있어서 급소를 차는 것은 이기기 위한 수단이 될지는 몰라도, 이 경우는 악한 행동으로 간주된다. 여기서 여자가 그 일을 행했다는 것 때문에 음행의 관점으로 볼 것이 아니다. 여기에서 문제는 씨를 상하게 했다는 것이다. 여자의 그 행위로 말미암아 한 사람의 씨가 상했다면 그것은 크나큰 죄가 되는 것이다. 씨에 문제가 있는 사람은 주의 회중에 들어가지도 못한다(23:1). 이스라엘은 아브라함 이래로 씨가 강조된 백성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그 씨로부터 구별하셨다. 할례도 바로 그러한 이유로 행해진 것이다. 씨에 대한 문제는 유업에 대한 문제와 더불어 언약의 백성에게 매우 중요한 사항이었던 것이다.

(5) 상이한 저울추 (25:13-16)
본문은 상이한 저울추와 상이한 되를 금지하고 있다. 상인이 고객에 따라 어떤 사람에게는 큰 저울 추로 계산해 주고 어떤 사람에게는 작은 저울 추로 계산해 준다면 그것은 악한 일이다. 그것은 가증한 일이며(16절), 이는 잠언에서도 자주 강조되는 바이다(잠 11:1; 16:11; 20:10,23).
본문은 “완전하고 정확한 추,” “완전하고 정확한 되”를 가지라고 말씀한다. 그렇게 행하는 것이 그들이 그 땅에 오랫동안 거하게 되는 조건이다(15절). 속이는 저울은 누군가에게 거짓을 행함으로 탈취하는 것과 같다. 모든 면에서 공정해야 하는 것은, 단순한 상거래 윤리에만 한정되는 말이 아니다. 이것은 그들이 모두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모두가 언약의 백성인 그들이 상이한 추로 서로를 속인다면, 그것은 그 백성의 정체성을 붕괴시키는 일일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들은 그 땅에서 쫓겨나게 된다.
한편, 이것은 상거래에 있어서 속이지 말라는 말씀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재판에 있어서 공정하라는 말씀이기도 하다. 즉 모든 경우에 있어서 동일한 잣대로 판단하라는 것이다. 부자나 권력자라 해서 재판을 유리하게 해주고, 가난하다고 해서 재판을 왜곡해서는 안 된다. 반대로 가난하다는 이유로, 약자라는 이유로 유리하게 재판해 주어도 안 된다. 가난하다는 것은 불쌍히 여김받는 조건은 되지만 유리한 재판을 받는 조건은 되지 못한다. 재판은 절대적으로 공정해야 한다.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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