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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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왜곡하는 억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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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0년 03월호>

성경은 "역사책"이다. 세상에서 유일무이하게 오류가 없고, 전혀 왜곡되지 않았으며, 어떤 편견도 없는 "참된 역사책"이다. 따라서 우리는 참된 역사책인 성경을 근거로 "올바른 역사관"을 정립해야 한다. 독일의 역사학자 레오폴트 폰 랑케(Leopold von Ranke, 1795-1886)가 "역사가의 임무"를 "어떤 역사적 사실이 스스로 말하게 하는 것"이라고 규정한 반면, 영국의 역사학자 에드워드 카(Edward. H. Carr, 1892-1982)는 "역사가의 주된 임무가 단순히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해석하고 평가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오늘날에는 이 후자의 주장이 더 설득력을 얻고 있는데, 이로써 역사가들에게는 역사적 사실을 나름대로 해석하고 평가해서 "모종의 결론"을 이끌어 내야 할 임무가 주어지게 되었다. 결국 선지자적인 임무까지 맡게 된 역사가들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너 나 할 것 없이 "언젠가 아득히 먼 미래에, 어느 누구도 규명하지 못할 애매모호한 '유토피아'(이상향) 또는 '지상 낙원'이 도래할 것"이라고 "예언"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에드워드 카는 "필연적으로 역사는 진보(진화)한다."라고 주장했는데, 이런 그의 명제는 헤겔의 변증법적 유물사관을 채용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주장과 일치한다. 특히 그가 사용한 "필연적인"이라는 이 단정적인 용어는 전체주의자들이나 공산주의자들에게서 볼 수 있듯이 "선동"을 위한 "이데올로기"(이념)로 이용되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그들은 공산주의자 스탈린처럼 언어의 올바른 개념을 혼란시킴으로써 대중을 선동했고, 선동된 대중을 전체주의자 히틀러처럼 그들이 꿈꾸고 있는 망상의 세계로 이끌어 갔다. 히틀러는 이렇게 말했다. "나의 상상이 곧 너희의 세계이다!" 결국 그의 꿈은 "필연적으로" 현실이 되었고, 그 현실은 유럽 내 모든 이들의 악몽이 되었다.

에드워드 카는 나치즘으로 무장한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독일"을 제1차 세계대전의 패전 이후에 맺어진 베르사유조약의 희생자로 여겼고, 나치즘의 수장인 "히틀러"를 경제적인 정의를 위해 투쟁하는 지도자로 칭송했다. 히틀러가 죽은 이후에는 그가 옹호하는 대상을 스탈린으로 바꿨는데, "소련은 스탈린의 '선의'(善意)에 의해 발전하고 있다."라고 주장했으며, 공산주의 국가 소련을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자들을 향해서는 "눈먼 소경" 또는 "치유가 불가능한 환자"라고 강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이처럼 현대의 역사가들 대부분은 진화론자들임과 동시에 변증법적 유물론자들이다. 말하자면 "참된 역사책"인 성경과는 정반대의 입장에서, 멸망해 가고 사라져 가는(고전 7:31) 이 세상이 점점 더 좋아질 것이라고 주장하는 후(무)천년주의 역사관 또는 진화론적인 역사관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이들이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거듭나지 못한 대중이 미래 역사에 관한 한, 일종의 "환각제" 같은 것을 원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치 · 종교 지도자들이 국민들의 표를 얻고 대중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는 그들의 아비이자 『거짓말의 아비』(요 8:44)인 마귀처럼 미래 역사에 대해 "거짓말"을 해야 한다. "왜곡된 역사관," 곧 성경과는 정반대되는 "긍정적인 역사관"을 대중에게 심어 주어야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피터 럭크만 목사는 이렇게 말했다.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해피 엔딩'을 생각한다. 왜냐하면 병원 침대와 무덤만을 대중에게 주는 것은 인간성을 거스르는 범죄 행위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성경에 입각한 "부정적인 역사관"에 따라 미래 역사에 관해 부정적인 결론을 도출하는 것 자체를 "범죄 행위"로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가들의 "긍정적인 역사관"에 따른 기본적인 가정과 전제는 완전히 틀렸다. 그러한 가정과 전제는 "객관적인 역사적 사실들"에 기반을 두고 있기보다는 "주관적인 편견"의 결과물이다. 사실 지난 수 세기 동안 모든 역사가들이 남긴 증거들과 기록들을 보면, 그들이 주관적인 편견을 가지고 역사를 기록하고 해석했으며, 그들 나름대로 역사를 완전히 새롭게 재구성하거나 각색하고 미화시켜 왔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런 정직하지 못한 역사가들의 기본적인 가정과 전제는 객관적인 역사적 사실에 충실하다거나 그것이 옳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야말로 그것은 완고한 고집에 따른 "억측"에서 비롯되었을 뿐이다. 그렇다면 역사가들의 이러한 억측은 어디에서 나왔는가? 진실을 왜곡하기를 좋아하는 "거짓말쟁이," 곧 "사탄"이 내세운 진화론자 "찰스 다윈"의 가설에서 나왔다.

"다윈의 가설"은 기만과 속임수 그 자체인데, 그것을 받아들인 사람은 역사 인식을 올바르게 가질 수 없다. 과거는 물론 현실조차 제대로 직시할 수 없다. 특히 그가 만들어 낸 미래는 결국 전쟁이고, 땅 속 무덤이며, 구더기가 갉아먹는 썩은 시체요, 궁극적으로는 "영원한 불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의 지도자들은 <종의 기원>이라는 다윈의 책을 받아들여 장밋빛 미래를 계속해서 꿈꾼다. 하지만 그 결과는 항상 "비극"이었고 "악몽"이었다! 이는 다윈의 가설을 취하는 순간 그 어떤 지도자라도 누군가를 죽여야 할 명분과 책임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적자생존"이다. 그래서 그들은 역사 속에 나타나는 모든 전쟁과 전투들을 인류의 자연적인 "발전(진화) 과정"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 모든 과정을 지나고 나면 "이상향"에 도달할 수 있을 것으로 착각하는데, 결국 그러한 "이상향"이 마르크스의 공동체나 플라토의 황금시대, 사회주의적인 기독교 공동체, 로마카톨릭의 하나님의 나라 등으로 구현된다고 가르친다. 하지만 이것이 얼마나 역사를 왜곡하는 억측인지는 몇 가지 역사적 실례만 살펴봐도 분명해진다.

우선 구소련의 레닌과 스탈린, 중국의 모택동, 캄보디아의 폴 포트, 쿠바의 카스트로, 북한의 김가 3대 등과 같은 모든 공산주의 독재자들은 "적자생존의 법칙"과 "살아남기 위해서는 투쟁해야 한다."라고 하는 다윈의 가설에 심취해 있었고, 그들의 잔인한 정책에 대한 과학적인 합리화와 윤리적인 정당성을 위해 "진화론"을 장려했다. 한 통계에 따르면, 20세기에 전 세계 각 정권에 의해 자행된 시민 학살로 죽은 희생자들의 수는 1억 7,400만 명이라고 한다. 그중에서 마르크스주의 공산 정권하에서 죽은 사람들의 수는 무려 1억 4,800만 명이었다. 이것은 전쟁으로 죽은 3,410만 명의 4배 이상에 달하는 수치이다. 정말로 그것이 "유토피아"로 나아가는 과정이 맞는가? 망상도 이런 망상이 없는 것이다!

독일의 히틀러도 그의 전쟁을 정당화하기 위해 다윈의 가설을 이용했는데, 영국의 사회학자 벤저민 키드는 그의 논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다윈의 가설이 독일에서 정치적이고 군사적인 목적으로 쓰이는 교본 속에 공공연하게 등장하더니, 그들은 전쟁을 독려하는 것은 물론, '힘이 곧 권리'라는 이론을 국가 정책에 반영하려는 고도의 조직적인 계획을 대대적으로 내세웠다." 실제로 히틀러는 "인종을 개량하는 우생학적인 정책"을 내세운 인물로서, 순수 독일 사람들을 잘 교육시켜서 순수 독일인의 위대함을 보여 주자고 주장했다. 그는 "건강한 독일인"이면서도 결혼해서 아기를 낳지 않는 사람을 반역자로 취급했다. 반대로 "허약한 독일인"이 결혼해서 아이를 낳아도 반역으로 간주했다. 그래서 그는 "선별적 종족 번식," "우생학적인 정책," 더 나아가서는 "국가 지상주의"와 "이상적인 사회 건설"을 주장했는데, 이런 모든 것들이 플라토의 철학에 기반을 둔 황금시대와 잘 연결된다. 결국 히틀러는 "적자생존"의 법칙에 따라 유대인들을 향한 극렬한 증오를 정당화했고 그들에 대한 대대적인 대량 학살을 자행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는 약 450만 명의 유대인들이 살해되었고, 트레블링카 수용소에서는 13개의 가스실 안에서 30분마다 약 2,600명의 유대인들이 죽어 나갔다. 당시 수용소에 갇혀 있던 유대인들 중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10분의 1도 채 안 되었다고 한다. 역사를 왜곡하는 억측에 사로잡힌 나치 인종 청소의 주동자들은 히틀러, 카를오토 코흐, 하인리히 힘믈러, 헤르만 괴링, 요제프 괴벨스, 루돌프 회스, 율리우스 슈트라이허 등이었는데, 이들은 모두 미치광이 진화론자들이자 카톨릭교도들이었다.

로마카톨릭 역시 왜곡된 억측에 따라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룩하기 위한 "헛된 이상"을 실현하려고 십자군 전쟁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것은 수많은 군인들을 의미 없는 죽음으로 몰아넣고 말았다. 한번은 제1차 십자군 전쟁 당시 정규 군대가 편성되기 전에 "민중 십자군"이 먼저 출병한 적이 있었다. 프란체스코 수도회 출신의 어떤 수도승이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예루살렘 성지를 구하자,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자."라고 설교하면서 "성지를 구하는 이 거룩한 전쟁에서 싸우다가 죽으면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라고 외치자, 이 설교가 효과가 있었는지 군사 훈련을 받지도 않은 오합지졸의 평민들 상당수가 전쟁에 참여하기 위해 모여들었던 것이다. 물론 결과는 대패였고, 애꿎은 사람들만 무의미하게 죽고 말았다.

이후 정규 군대가 출병하여 제1차 십자군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예루살렘을 탈환했지만, 그런 과정에서 그 거룩한 이상을 실현하겠다고 나선 이들은 그야말로 끔찍한 대학살을 자행했다. 즉 무장하지 않은 어린아이나 여인들까지도 죽였던 것이다. 당시의 기록에 의하면 예루살렘에 있던 유대인들과 이슬람교의 터키인들이 회당에서 불타 죽었다. 항복하면 자비를 베풀겠다는 약속을 믿고 투항한 300명의 터키인 포로들은 잔인하게 살해당했다. 또한 그들은 모슬렘 여인들과 아이들의 목을 잘랐고 그들의 내장을 끄집어내서 성읍 바깥으로 내던졌다. 과연 이것이 진보이고 발전인가? 이것이 유토피아이고 그들이 말하는 거룩한 이상향인가? 과연 다윈의 가설대로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진 것인가?

이후 제4차 십자군 전쟁 때는 이보다 더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 지난 세 차례의 십자군 전쟁을 치르는 동안 유럽의 많은 사람들은 이미 전쟁으로 지쳐 있었고, 또 어차피 전쟁에서 승리하지도 못할 것을 알았기에 십자군 전쟁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려는 분위기가 잘 형성되지 않았다. 더군다나 전쟁으로 인한 사상자의 속출로 출정할 수 있는 사람 수가 많이 줄어들었기 때문에 참전자들을 모으기도 쉽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교황은 한 가지 "끔찍한 묘안"을 내놓았는데, 전쟁으로 인해 생겨난 8-17세 정도의 "사생아 소년들"을 십자군 원정대로 모았던 것이다. 특히 당시 프랑스의 사르트르 근처에 살고 있던 목동 하나가 이런 아이들을 모아서 지중해로 데리고 가면 하나님께서 출애굽 때 홍해를 가르시고 백성들로 하여금 마른 땅을 건너가게 하셨던 것처럼 지중해를 갈라 주실 것이라고 "예언"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아이들로 하여금 거룩한 십자가를 되찾도록 해 주겠다고 말씀하시는 그리스도의 환상을 보았다고 거짓말을 했다. 이에 13,000명 정도의 아이들을 모아 지중해로 데리고 갔지만 당연히 바다는 갈라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교황의 권력은 하늘을 찌를 듯했기 때문에 아무도 그것에 대해 교황을 비웃지는 못했다. 결국 아이들은 알프스산맥을 넘어 이탈리아로 되돌아갔고, 그런 고된 여정 속에서 많은 아이들이 죽었으며 그 수는 7천 명으로 줄어들었다. 뿐만 아니라 살아남은 6천 명의 아이들조차도 북아프리카로 가는 배에 태워서 "이집트인들," 곧 그들의 대적들인 "모슬렘들"에게 노예들로 팔아넘겼다. 그런데 사악한 교황은 이런 사실들을 철저히 숨기고, 사람들을 십자군 전쟁에 참여시키기 위한 정치적인 도구로만 이용했다. 즉 "어른들이 전쟁에 참여하기를 머뭇거리는 동안 연약한 우리 아이들이 십자군으로 참전했다가 결국 풍랑에 휩쓸려 죽었습니다. 아이들이 성지를 회복하기 위해 달려가는 동안 우리는 잠자고 있었습니다. 마땅히 우리 어른들은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과연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가 가만히 있어야 하겠습니까!"라고 말하면서 사람들을 선동했던 것이다. 이처럼 교황들은 "하나님의 나라"라는 거룩한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거짓말, 살인, 선동, 위선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불한당들"이었다.

과연 이런 것이 지상 낙원인가? 발전인가? 역사를 직시하라! 역사를 왜곡하는 억측에 사로잡힌 역사가들의 그럴듯한 말에 귀를 기울이지 말라! 다윈의 "적자생존," 곧 "적자"(適者)만 살아남는 "정글의 법칙"은 사람들로 하여금 세상이 좋아지고 있다는 착각 속에 빠지게 한다. 결코 세상은 좋아지지 않고 있다. 오늘날 21세기의 상황이 과거보다 나아진 게 무엇이 있는가? 정치, 경제, 음악, 미술 등 어떤 것도 나아진 게 없다. 슈트라우스나 스트라빈스키 등의 음악이 바흐나 헨델, 베토벤, 브람스의 음악보다 더 나아진 게 무엇인가? 록 음악이나 랩과 비교해 보라. 랩이 음악인가? 바로크 시대의 고전주의 화가들과 현대 미술가들의 그림을 비교해 봐도 마찬가지다. 고전주의 화가들에 비하면 소위 현대 미술의 거장이라 불리는 피카소의 그림은 애들 장난에 불과하다. 해 아래 새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모든 것이 퇴보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죄 없이 창조하셨지만, 죄가 들어오자 인간은 타락하고 말았다. 결국 인간은 태어나서 진화해 가는 것이 아니라 죽어 갈 뿐이다. 다윈은 지금 지옥에서 "나는 괜찮아, 뜨겁지 않아, 곧 괜찮아질 거야. 언젠가 이곳도 지상 낙원으로 변할 거야."라는 착각 속에서 고통으로 몸부림치며 울부짖고 있을 것이다. 그의 몸이 구더기 같은 "벌레"(막 9:44,46,48)로 변했는데도, "이것은 그저 선별적 종족 번식에 따른 진화의 과정일 뿐이야!"라고 외치고 있을 것이다.

『주의 말씀들이 들어가면 빛을 주며 그것이 우매한 자에게 명철을 주나이다』(시 119:130). 참된 역사를 기록한 주의 말씀들은 우리에게 순수한 생각, 곧 올바른 역사관을 일깨워 준다. 바로 여기에 인간의 본성 자체를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며, 인간이 그토록 열망해 왔던 참된 진보, 성장, 발전, 유토피아, 지상 낙원, 황금시대, 최고의 이상향에 대한 모든 답이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겸손히 무릎 꿇고 두려움과 떨림으로 다가설 때 진화론자들이 해결할 수 없었던 모든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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