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은사주의 분류

당신도 방언을 하고 싶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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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1995년 09월호>

은사주의자를 ‘캐리스매틱’ (Charismatic)이라고 한다. 다른 사람에게 없는 은사를 자신은 갖고 있다는 의미이다. 다른 사람에게 없는 은사를 가졌다고 자랑하지만 그것이 거짓 은사라면 그 사람은 위선자가 되는 것이다.
은사주의가 기독교계에 등장하면서 방언이 교회 내에 침투하여 마치 방언을 말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일부인 것처럼 오도되고 있는 것을 볼 때 그 심각성을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 방언은 성령의 열매가 아니라, 유대인들에게 주어진 표적이었다. 『그러므로 방언들은 믿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믿지 않는 사람들을 위한 표적이지만』(고전14:22). 성경에서 말하는 방언은 모두가 외국어를 말한다(행 2장; 10:34-48; 19:1-7).

더 깊이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필자가 그리스도인 독자 여러분에게 솔직하게 묻고 싶은 질문이 있다. 당신은 방언을 할 줄 아는가? 당신도 방언을 말하고 싶은가? 그 이유는 무엇인가? 방언으로 말해서 신앙 생활에 어떤 유익을 얻었는가? 주님을 섬기는 데 방언이 꼭 필요한 것인가? 성령님으로부터 진리를 깨닫는 데 필요한 조명을 방언을 통해서 받았는가? 아니면 방언을 통해 성도들의 영적 각성을 위해 무슨 책을 썼는가?
필자는 방언에 대해 상담을 요구하는 여러 사람을 만났고 그때마다 방언을 할 줄 아느냐고 묻는다. 할 줄 안다고 하면 한번 해보라고 청한다. 한 번은 어떤 장로교 목사와 이야기하는 가운데 그가 방언으로 몇 마디 말을 하였다. 필자가 묻기를 지금 한 말이 무슨 뜻이냐고 했더니 모르겠다고 했다. 의미없는 말은 소리이지 말이 아니라고 했더니 좀 머쓱해 하였다. 또 한번은 어떤 젊은이가 방언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전화로 물어 왔다. 그 젊은이에게도 한번 방언을 해보라고 했더니 역시 몇 마디 알 수 없는 소리를 내었다. 그 방언이 무슨 뜻이냐고 물었더니 모른다는 것이었다.

방언, 그리스도인에게 필요
한 것인가?
언어는 의사소통의 수단이다. 의미없는 말은 ‘소리’이지 언어가 아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방언은 모두 외국어인데 외국어를 말할 때 듣는 사람이 알아들을 수 없으면 은사주의자들이 말하는 ‘방언’이 된다. 이런 방언은 받은 은사가 아니라 배우는 은사이다. 이 방언이 왜 그리스도인에게 필요한 것인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며 왜 이 방언이 교회와 신학교와 성도들 사이에 관심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리스도인은 내주하시는 성령님께서 일깨워 주심으로써 해야 될 일과 하지 말아야 될 일을 알 수 있다. 그리스도인에게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성령으로 채워져 있지 않은 사람은 다른 영, 즉 혼미한 영(악령)으로 채워진다는 것이다. 만일 방언이 성령으로 충만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신실한 그리스도인들 모두가 방언을 말했을 것이다. 그런데 1900년 토페카(Topeka), 켄사스(Kansas)에 있던 벧엘성경학교(Bethel Bible School) 이전의 신실한 주의 종들, 루터(Luther), 칼빈(Calvin), 웨슬리(Wesley), 케리(Cary), 죠나단(Jonathan), 테일러(Taylor), 휫필드(Whitfield), 무디(Moody), 피니(Finney), 선데이(Sunday), 토레이(Torrey) 중 아무도 방언을 한 적이 없다. 1900년 이후의 스코필드(Scofield), 라킨(Larkin), 샤우어(Sauer), 펨버(Pember), 럭크만(Ruckman), 밥 존스(Bob Jones Sr.), 노리스(Norris), 하일스(Hy- les) 중에 그런 방언을 한 마디라도 했던 사람은 없다.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은 방언을 마귀가 자리잡고 있는 결과라고 하는 반면 오순절 교파, 천주교, 성결교, 장로교, 일부 침례교, 감리교 등에서는 성령의 은사라고 말하고 있다. 어떤 것이 옳다고 생각하는가?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과 제도 교회 교인들과 비교할 때 어느 쪽이 더 말씀에 신실하다고 믿어지는가?

불확실한 성경구절로 교리를 정립시키면...
여호와의 증인들을 위시하여 이단 종파들에게 하나의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불분명한 성경구절 위에 교리를 정립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은 더 분명한 성경구절을 제시해서 일깨워 줘도 그것을 거부하고 그들 교파들이 전용하는 성경 구절들로 교리를 정립시키고 그들이 정해놓은 전통을 따라 행하고 있다. 그 한 예로 “세례”를 들 수 있다. 침례인데도 이들은 굳이 세례라 읽고 침례에 순종했는데도 불구하고 세례를 받았다고 한다. 예수님께서 요단 강에서 세례를 받았다고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침례를 받으러 요단강에 가셨다. 세례를 받으려면 굳이 요단강에까지 가실 필요가 있겠는가? 성경에는 세례라는 어휘가 없다. 그들은 카톨릭 전통에 따라 행하면서 성경대로 믿고 있다고 한다.

성경에서 방언을 언급한 곳은 고린도전서이다. 바울이 왜 고린도 교회에 방언을 언급했는가? 만일 이것이 신약교리로 신약교회에 필요한 것이었다면 왜 신약교회의 모범 교회인 데살로니가 교회와 갈라디아 교회에서는 언급하지 아니하였는가? 또 왜 베드로, 요한, 야고보 등 다른 사도들은 방언을 언급하지 아니하였는가? 고린도 교회가 신약교회의 모델인가? 고린도 교회는 육신적 교회의 표상이다. 자기 아버지의 아내와 간음한 교인이 있었으며(고전5:1), 주의 만찬을 술 먹는 자리로 만들었던 교회였다(고전11: 29).

왜 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방언을 언급하지 않았는가?
고린도 교회는 오늘날 오순절 교파 같은 교인들이 있어 알지 못하는 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 흉내를 내는 교인들을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며,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은 어린 아이의 행동밖에 못한다(고전3:1,2). 고린도전서가 기록된 것은 A.D. 57년경이었는데 그때까지 기록된 신약성경은 마태복음과 마가복음, 데살로니가전후서 네 권이었다. 신약성경에서 방언을 언급한 책은 사도행전과 고린도전서뿐이다. 사도행전은 A.D.65년에 기록되었고 세 번 방언을 언급했는데 모두 외국어를 말한다. 그것도 유대인에게 관련된 것이다. 방언은 믿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믿지 않는 사람들을 위한 표적이었던 것이다. 그러면 사도행전에서 방언이 등장하는 각각의 예를 살펴보자.

1. 사도행전 2:6-11에서는 16개국에서 온 사람들이 예루살렘에서 갈릴리 사람들이 16개국 언어로 말한 메시지를 들었다. 그 때 외국어를 말하는 것 외에 아무도 알아 들을 수 없는 그런 방언의 은사를 받았던 사람은 없었다. 오순절 때 갈릴리 사람들이 말했던 방언에는 두 가지 목적이 있었다. 첫째, 그 외국어들은 믿지 않고 표적만을 보기 원하는 유대인들에게 표적이 되었다(고전1:22). 둘째, 예루살렘의 명절에 찾아온 외국에서 태어난 유대인들에게 진리의 복음을 들려주기 위한 것이었다.

2. 사도행전 10:34-48에서, 오순절 사건 후 3년이 지난 뒤, 베드로는 로마 군대의 백부장인 코넬료와 그의 가족에게 복음을 전하게 되었고 그들은 믿고 구원받았다. 그 순간에 그들은 성령의 선물을 받고 방언으로 말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행10:45,46). 이들은 방언을 원하지도 않았고 받으려고 기도하지도 않았다.

3. 사도행전 19:1-7에 따르면 에베소에서 아폴로의 제자들은 성령에 관해서 전혀 알지 못한 사람들로 침례인 요한의 회개의 침례밖에 아는 것이 없었다. 바울의 설교로 구원받은 이들은 구원받은 순간에 바울이 안수하자 곧 성령이 임하였고 방언과 예언을 말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방언을 하려고 애쓴 적도 기도한 적도 없었고 심지어 성령의 존재조차도 몰랐었다.
A.D.60년 경에 기록된 로마서, 고린도후서, 갈라디아서에도 방언의 은사에 관한 언급이 없고, A.D. 64년 경에 기록된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에도 없고, A.D. 64년에 기록된 빌레몬서에도, A.D.65년에 기록된 디모데전후서, 디도서에도 없고 A.D.68년경에 기록된 히브리서에도 A.D.62년에 기록된 야고보서에도, A.D.60년에 기록된 베드로전서, A.D.66년에 기록된 베드로후서, A.D.66년에 기록된 유다서, A.D.90년에 기록된 요한일, 이, 삼서에도 없고, A.D.96년경에 기록된 요한계시록에도 없다.

방언에 대한 규제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편지했을 때까지 고린도 교회에서의 방언의 은사는 아직도 가능했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14장의 한 구절 한 구절을 살펴보면 방언을 권장하거나 방언하는 것이 좋다고 했던 것이 아니라 부정적으로 말하고 있으며 오히려 권장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오늘날 방언의 은사에 관해서 권장하는 편에 선 사람들은 주의력을 가지고 고린도전서 14장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① 1-6절 : 알지 못하는 방언보다는 예언을 권장.
② 7-17절 : 불확실한 소리를 내는 나팔이나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들은 이해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혼란만 조장시킴.
③ 19절 : 일만 마디의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들보다 다섯 마디의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 더 유효.
④ 22절 : 방언들은 믿지 않는 사람들을 위한 표적(고전1:22).
⑤ 23절 :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게 되면 미친 것으로 보일 수 있음.
⑥ 27-28절 : 방언하려면 통역하는 사람이 있어야 함.
⑦ 33절 : 하나님은 혼란의 창시자가 아니다.
⑧ 34-35절 : 여자들은 교회에서 방언하지 말라.
⑨ 38절 : 누구든지 무지하다면 무지하게 내버려 두라.
⑩ 40절 : 모든 일을 품위있게 하고 또 질서있게 하라.

오늘날 방언을 하려는 사람은 위의 사항들을 규모있게 지켜야 성경적인 방언을 할 수 있다. 이와 같지 않다면 그의 방언은 비성경적인 것이다.

왜 방언들이 그칠 것이라 했는
가?
『사랑은 결코 시들지 아니하나 예언들이라도 끝이 올 것이요, 방언들이라도 그치게 될 것이며, 지식도 끝나게 되리라. 이는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또 부분적으로 예언하지만 온전한 것이 오면 그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끝날 것이기 때문이라』(고전13:8- 10).
주님께서 승천하시면서 사도들에게 주셨던 은사들은 특별했다. 죄를 용서하는 특권과 병자들을 치유하는 능력, 방언들을 말하는 은사, 구령하고 성경을 가르치는 은사, 심지어 성경을 기록하는 능력까지도 주셨다. 사도들이 주님으로부터 받은 은사는 사도시대가 끝나면서 그친 것을 알 수 있다. 사도들의 은사는 카톨릭과 오순절주의자들의 말처럼 그들에게 위임된 적이 없다. 바울에게서 떠난 제자들도 있었고 동역자 트로피모가 몸이 아픈 관계로 밀레토에 남겨두고 떠나야 했으며(딤후4:20), 바울 자신도 몸이 아파 누가를 대동해야 했고(딤후4:11), 아들같이 여겨 온 사랑하는 디모데에게도 이제는 병의 치유를 위하여 포도주를 약으로 쓰라고 권고했다(딤전5:23).
이뿐만 아니라 사도들에게 주셨던 은사들, 방언들을 말하는 은사와 지식과 예언의 은사들도 그쳤던 것을 알 수 있다. 성경을 해석하는 데 불분명한 구절에 집착해서는 안된다. 성경은 성경으로 대조해서 해석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본의 아니게 잘못을 저지르게 된다.
신앙생활을 하려는 사람이 어떤 신비로운 체험이나 방언 같은 표적을 찾으려 한다면 그는 믿음에서 떨어져나가 멀리 표류하는 것과 같다. 그런 사람의 믿음은 진리에 근거하지 않고 그의 감정에 근거 하기 때문이다. 유대인은 표적에 의해 살아온 사람들이다. 그들은 말씀(계명)을 믿는 사람들이 아니라 표적을 보고 따른 사람이었기 때문에 표적을 보지 못하면 견딜 수 없는 사람이었다. 예수님은 표적을 보기 원하는 사람들을 책망하셨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찾으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밖에는 줄 표적이 없도다』(마12:39; 16:14, 막8:38).

그리스도인인 당신도 표적을 원하는가? 우리는 지금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있지 않다. 우리는 표적을 필요로 하지 않고 말씀을 따라 믿을 뿐이다.
사도 시대가 끝남과 동시에 이적을 행했던 은사들은 더이상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 이제 믿는 사람들은 어떤 이적이나 표적을 보고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을 믿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열 한 사도들은 가장 비참하게 죽임을 당했다. 그들이 오늘날의 은사주의자처럼 기도할 수 없었는가? 다른 사람의 병을 고치고 죽은 사람들을 살려낸 그들이 자기의 죽음은 피할 수 없었던가?
표적과 체험으로 성경을 대신하려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령으로 인도받는다고 볼 수 없다. 성도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께서 우선적으로 하시는 일은 성도를 진리로 인도해 주시는 일이다. 다시 말해서 그렇게 믿는 것이 옳은지 그른지 알게 해 주신다(요16: 13). 성령님께서 도와주시지 않으면 필자는 설교할 수 없다. 설교를 준비할 수도 없다. 성경을 가르칠 수도 없다. 글을 쓸 수도 없다. 구령할 수도 없다. 성령님께서 가르치시는 진리에 반대되는 일을 하는 사람은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이 아니다. 방언을 한다고 거짓 은사를 주장하는 사람은 미혹의 영이 역사하도록 허락한 사람이다. 그리스도인은 성령의 역사와 악령의 역사를 동시에 받을 수 없다.
성령님께서는 『마지막 때에 어떤 자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들과 마귀들의 교리를 따르리라』(딤전4:1)고 분명히 밝혀 주고 계신다. 『그러한 자들은 거짓 사도들이요, 기만하는 일꾼들이요, 자신들을 그리스도의 사도들로 가장하는 자들이라. 이것은 놀랄 일이 아니니 이는 사탄도 자신을 빛의 천사로 가장하기 때문이라』(고후11:13,14). 『사랑하는 자들아, 모든 영을 다 믿지 말고 그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는지 시험하라. 이는 많은 거짓 선지자들이 세상에 나왔음이니라』(요일4:1). 자기 안에 역사하는 영이 어떤 영인 줄 모르고 따르면 마귀의 영을 따라 갈 수도 있다. 신실하게 믿었던 믿음의 선배들 중에 방언이 성령의 은사라고 말했던 사람은 2000년 신약교회사에 단 한 사람도 없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성경을 모르면 수치를 당하게 된다(딤후2:15). 성경을 올바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성경적 교리가 아닌 것에 현혹되었다면 얼마나 슬픈 일인가 생각해 보라.

방언을 하고 또 가르치는 곳들은 이런 곳이다.
① 성경을 올바로 가르치거나 배우지 않는 곳.
② 사람들이 진리의 지식은 필요로 하지 않고 신비한 체험이나 환상, 감정 등만을 찾는 곳.
③ 성경 말씀으로 심도 있게 설교하지 않는 죽은 정통주의, 사회복음을 전하는 신정통주의, 자유주의, 근대주의 교회들.
④ 구원받지 않는 사람들이 대부분 교회 회원인 곳.
⑤ 지옥도 설교하지 않고, 구원의 필요성도 강조하지 않고, 그 대신 율법의 성향을 가진 황금률이나 열성을 강조하는 곳.
⑥ 성경의 절대권위가 없이 목사나 학자가 최고 권위가 되는 곳.
⑦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소망하지 않는 곳.

바른 성경을 믿지 않고 체험이나 감정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려는 사람은 거듭나지 않은 사람이다. 오늘날 행해지는 방언과 비성경적인 일에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더 많이 읽고 공부함으로써 믿음이 진리에 뿌리내리는 일에 귀한 시간을 써야 할 것이다.

『진리의 영인 그를 세상은 영접할 수 없으니 이는 세상이 그를 보지도 못하며 또한 알 수도 없기 때문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이는 그가 너희와 함께 거하시며 또 너희 안에 계실 것임이라』(요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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