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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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형과 원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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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00년 08월호>

보통 모형론을 다룰 때면, 흔히들 “구약은 모형이고 신약은 원형이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구약성경에 나타나 있는 많은 감추어진 것들이 신약에서 밝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유대인들은 출애굽을 기념하며 유월절 어린 양을 먹었지만, 요한복음과 히브리서를 통해 볼 때 그 어린 양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그러므로 천국에 관한 교훈을 받은 모든 서기관들은 마치 자기 보물 창고에서 새 것들과 옛 것들을 꺼내 오는 집주인과 같으니라.』(마 13:52)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면서, 구약(옛 것들)과 신약(새 것들)의 비교를 해 주셨다.
실제로 구약의 많은 부분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모형이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장면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적 죽으심과 부활에 대한 모형이고, 멜키세덱이 아브라함에게 빵과 포도주를 제공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살과 피를 주신 것의 모형이다. 아담과 이브가 에덴에서 쫓겨날 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가죽 옷도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에 대한 모형이고, 성막의 각종 기명들도 하나같이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사역에 대한 모형들이 된다. 로마서 5장이나 고린도전서 15:22 등에서는 아담과 그리스도를 비교하면서 아담이 그리스도의 모형임을 밝히고 있다. 모세가 광야에서 놋뱀을 들어 올려 백성들이 그것을 보고 치유되었던 것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것에 대한 모형이고, 요나가 사흘 낮과 사흘 밤을 고래 뱃속에 있었던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같은 시간 동안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사건에 대한 모형이다. 이처럼 모든 모형들은 실제적인 사건들 가운데 앞으로 이루어질 어떤 특별한 인물이나 사건들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 일어날 어떤 인물이나 사건을 미리 보여준다는 의미에서 각 모형들은 예언들과도 연결된다. 하지만 모형이 예언과 구별되는 것은, 예언들은 성취되기 전에도 앞으로 나타날 분명한 사건들을 구체적으로 믿을 수 있다는 것임에 반해, 모형들은 그것의 원형이 성취되거나, 적어도 구체적으로 그 원형이 언급되기 전까지는 그것이 모형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모세가 광야에서 놋뱀을 들어 올린 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는 것에 대한 모형이 분명하지만, 이것은 예수님께서 니코데모에게 그 사실을 알려주시기 전까지는 그것이 그것에 대한 모형인지 어느 누구도 알 수 없었다. 요나가 고래 뱃속에서 사흘 밤 사흘 낮을 죽어 있다 살아난 것도, 예수님에 의해 밝혀지기 전까지는 그것이 결코 모형인지 알 수 없었다는 것이다.
반면 예언은 분명하다. 예를 들어 신명기 18:15에서 모세는 백성들에게 『주 너의 하나님께서 네 가운데로부터 네 형제들 가운데서 나와 같은 한 선지자를 네게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에게 경청할지니라.』고 예언한다. 이 경우 모세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다. 예수님께서는 “모세와 같은” 선지자로 나타나셨다. 모세도 표적과 이적들을 행하면서 백성들에게 나타났고, 예수님도 표적과 이적을 행하시면서 백성들에게 나타나셨다. 히브리서 3장에서 모세는 하나님의 온 집에서 종으로 신실했다고 말하는데, 같은 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자기 자신의 집에서 아들로서 신실했다고 말씀하신다(히 3:5,6). 여러 모로 예수 그리스도는 모세의 원형이시다. 그러나 여기 신명기 18장에서는 그 사실이 분명하고도 구체적인 예언으로 등장하였다. 그러므로 이 모형은 성취되기 전에도 알 수 있었으며, 유대인들은 이 예언과 모형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원형이 있어야만 드러나는 모형
모형이라는 말은 다른 말로 해서 “그림자”라는 말이다. 두말할 나위 없이 그림자란 실체가 있어야만 의미있는 것이며, 그림자 자체로는 아무 의미도 없다. 석양에 비친 긴 그림자가 우리 눈앞에 나타난다면 우리는 그 그림자 끝에서 사람이든 물체든 어떤 구체적인 형상을 보게된다. 이처럼 모형이란 무엇인가를 드러내기 위해 존재하는 그림자일 뿐이다. 그렇다면, 구약의 많은 것들이 신약에 나타나는 어떤 것들에 대한 모형이라면, 구약에 존재했던 그 자체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말인가? 그것들은 모두 그 자체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단순한 그림자일 뿐이란 말인가? 그들은 모두 그림자 이외에는 아무런 가치도 없는 삶을 살았단 말인가? 결코 그럴 수 없다. 그래서 우리가 분명히 알고 넘어가야 할 사실은, 모형이란 그것의 실체와 연관될 때만 모형일 뿐이라는 것이다.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사람들은 이 사실을 잘 모른다. 이삭이나 요셉이나 모세가 예수님의 모형이라니까 그의 모든 삶이 그리스도의 모형인줄 안다. 그래서 구약성경을 볼 때 무엇이든지 신약의 관점으로만 해석하는 것이다. 또 모세의 율법이 그리스도의 법에 대한 모형이라고 하니까, 율법을 대할 때도 항상 신약적인 복음의 관점으로만 해석하는 것이다. 그러나 각각의 모형들은 그 원형과 관련지어서만 그림자일 뿐이다. 다시 말해서 아브라함은 아브라함이었을 뿐이고, 이삭은 이삭일 뿐이고, 모세는 모세였을 뿐이라는 말이다. 더욱이 모형이란 실체가 제시되기 전에는 절대로 모형이라고 알려지지 않았다. 아브라함 당대에 누가 아브라함이나 이삭을 보고 “당신은 누구의 모형이오,” “당신을 보니 앞으로 누구를 보는 것같소.”라고 말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율법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제시되기 전까지는 결코 복음의 모형으로 알려지지 않았었다. 율법은 율법 자체로 효력을 발휘했던 것이다. 사람들은 여전히 죄를 지으면 동물을 바쳐 피를 흘려야 했다. 어느 누구도 성막에서 흘려지는 동물의 피를 보고, “아, 나의 죄를 용서하시는 그리스도의 피여!”라고 말할 수 없었다. 사람들은 여전히 율법을 범했을 때 동물의 피를 통해서 용서를 받았고, 따라서 그것으로 구원을 받았던 것이다. 율법이 복음의 그림자라고 생각한 나머지, 구약 시대의 사람들도 모두 십자가의 피로 구원받았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들에게 십자가란 알려지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율법에 따라” 피를 흘림으로써 용서를 받았던 것이다(히 9:22). 신약의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흘려 죽으실 때부터 효력을 발휘했다. 율법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제시되었기 때문에 모형이라고 알려진 것뿐이다. 그러므로 율법은 모형이라고 말하기 이전, 구약 시대에는 그림자가 아니라 그 자체가 의미있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롬 7:12).
그러나 이것이 실체와 마주치게 되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림자일 뿐이다. 그것은 촛불이 태양빛을 만나게 되면 아무 힘도 없어지는 것과 같다. 그리스도의 피의 복음을 받은 우리에게 율법은 그림자 이외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그것은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이요(롬 7:7), 우리를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선생일 뿐이다(갈 3:24). 우리는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게 될 수도 용서받을 수도 구원받을 수도 없다. 우리가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오직 십자가의 피를 의지해야만 할 뿐이다.

모형은 부분적이다.
모형에 대해 또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모형은 부분적으로만 모형이라는 것이다. 이삭이 예수님의 모형이라면 이삭의 모든 생애가 그리스도의 모형이었는가? 아브라함은 그의 평생이 여호와 하나님의 모형이었는가? 모세나 다윗은 예수님의 모형인데, 그들의 평생이 모두 그리스도의 모형이었다면, 그들이 죄를 지은 것도 예수님의 모형이란 말인가? 그럴 수는 없다. 그들은 그 자체로 의미있는 삶을 살았다. 그들의 삶에는 모형과 관계없는 부분들이 너무나 많다.
또 모형이 부분적이라는 말은, 관계된 모든 사건들이 연속적인 모형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무슨 말인가? 예를 들어 출애굽 상황을 살펴보자. 하나님의 인도로 모세는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데리고 나왔다. 이스라엘은 홍해를 건넜고, 이어서 시내 산에서 율법을 받은 후 40년 동안 광야에서 지냈다. 그리고 그들은 여호수아의 인도로 카나안, 즉 안식의 땅에 들어가게 된다. 많은 설교자들이 이 사건을 가지고 죄인의 구원의 모형으로 삼는다. 즉 이집트는 이 세상의 모형이므로 홍해를 건너 이집트를 탈출한 것은 죄인이 세상에서 구원받은 것이고, 광야 생활은 구원받은 성도들의 고난과 영적인 투쟁의 삶을 나타내고, 카나안 땅에 들어간 것은 성도들이 죽은 후 영원한 안식을 누린다는 것에 대한 모형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어쩌면 일관된 해석일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이집트가 세상에 대한 모형인 것만큼은 확실하니 이집트에서 나온 것이 성도의 구원이라고까지는 그렇다고 해 두자. 그러나 모형은 반드시 연속적이지는 않다. 이 연속적인 모형 해석에서 우리는 여러 헛점들을 발견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광야에서의 그들의 삶은 영적인 투쟁이라기 보다는 카데스 바네아에서 범죄한 것에 대한 대가에 불과했으며(민 13,14장), 광야 생활에서 많은 유대인들이 떨어져 나갔는데, 성도들은 아무리 잘못해도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나가지 않는다는 것과(구원의 영원한 보장), 당시 카나안은 안식의 땅이 아니라 전쟁의 땅이었다는 점에서 성도들의 죽음을 예표할 수 없다.
또 솔로몬도 예수님의 한 모형이 된다. 사무엘하 7:12-16에서 선지자 나단은 다윗 왕에게 그의 아들에 대해 예언하기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한 집을 지을 것이요, 나는 그의 왕국의 보좌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삼하 7:13)고 말한다. 이 예언대로 솔로몬은 위대한 성전을 지었다. 그러나 그의 왕국과 보좌가 영원하다는 말씀은 솔로몬에게 성취될 수 없다. 알다시피 솔로몬의 왕국은 분열되었다. 이 예언은 사실상 재림하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적용된다. 그러나 솔로몬이 이 예언의 일부를 성취시키는 것으로 보아, 솔로몬은 그리스도의 모형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솔로몬의 모든 삶이 그리스도의 모형은 아니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솔로몬은 죄를 지었다. 이방 여인들로 인해 우상숭배의 길을 열었다. 더욱이 열왕기상 10:14에는 아주 특이한 문구가 있는데, 그것은 『일 년 동안 솔로몬에게 들어온 금의 무게가 금 육백육십육 달란트였으며』라는 말이다. “육백육십육”(계 13:18), 이것으로 보아 오히려 솔로몬은 적그리스도의 모형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한 사람이 두 명, 그것도 예수 그리스도와 적그리스도라는, 전혀 상반되는 두 인물에 대한 모형이 될 수 있는가? 가능하다. 모형은 부분적이기 때문이다. 솔로몬은 그 자체의 삶을 사는 가운데, 몇몇 특정한 사건들이 몇몇 다른 특정한 사건들의 모형이 되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과 연관해서, 모형이란 반드시 원형과 연관이 되어 있어야 하지만, 원형보다는 한 단계 못한 것이어야 한다. 만약 원형과 같다면 그것은 이미 실체이기 때문에 모형이 아닌 것이요, 원형과 전혀 관계 없는 것이라면 그것은 별도의 사건이다. 따라서 어떤 사건이 모형이라고 했을 때, 그 사건이 실체가 되는 사건과 비교해 보아 몇몇 점들이 틀리다고 해서 모형이 아니라 해서는 안된다. 연관성이 있으면 그것은 모형이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요셉이 은 20에 팔렸고 예수님이 은 30에 팔렸다고 해서, 요셉이 예수님의 모형이 아니라고 말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어차피 모형이란 똑같은 것이 아니라 비슷한 것이다.

재림에 맞춰져야 하는 모형
모형론을 다룰 때 또 하나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사항이 있다. 그것은 서두에서도 말했듯이 많은 모형들이 초림에 맞춰지는 것만큼, 많은 모형들이 역시 재림에 맞춰진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마치 무천년주의자들이 구약의 모든 예언들이 십자가에서 성취되었다고 믿는 것처럼 모형들도 이미 다 성취되어 버린 것으로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재림에 관한 모형들이 많다는 사실을 깊이 있게 인식해야 한다.
모형은 기본적으로 원형이 드러난 다음에야 알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재림이 이루어졌을 때, “아, 그것이 이것에 대한 모형이었구나.” 하고 알게 되는 것들 또한 많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재림이 이루어지기 이전에도 많은 모형들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재림에 관한 구체적인 예언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 예언들은 모두 문자적으로 정확히 성취될 것이기에 우리는 이미 원형을 본 것이고, 따라서 그에 대한 모형들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출애굽의 상황을 다시 한번 보자. 출애굽 때의 광야 생활에서 우리는 그들이 범죄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지속적으로 보호하시는 것을 본다. 더욱이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아주 초자연적인 방법, 즉 만나로 부양하셨다. 그런데 요한계시록 12:6을 보면 대환란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광야에서 특별히 부양하신다는 장면이 나온다. 『그 여인은 광야로 도망하였는데 그곳에는 그들이 그녀를 일천이백육십 일 동안 부양하려고 하나님께서 그녀를 위하여 마련해 놓으신 곳이 있더라.』 그렇다면 출애굽 때 만나를 먹이신 사건은 대환란 때 하나님께서 그들을 초자연적으로 부양하시는 것에 대한 모형이다. 물론 요한복음 6장에는 이 사건을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신 사건에서 모형으로 주님이 친히 설명해 주고 계시다. 이 경우 만나로 먹이신 것은 두 사건, 즉 초림 때의 사건과 대환란 때의 사건 모두의 모형이 된다. 이처럼 모형은 특별하게 두 개의 원형을 가질 수도 있다.
또한 모세와 여호수아의 지휘 하에서 이스라엘은 군대가 되어 아말렉과 암몬과 시혼과 바산 등과 전쟁을 하게 되는데, 사실 그들은 평안하게 안식의 땅을 얻은 것이 아니라 전쟁을 통해서 얻은 것이었다. 이것도 재림 때의 모형인데,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재림하실 때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로서, 아마겟돈 전쟁을 통해 천년왕국이라는 안식의 땅으로 진입하시기 때문이다. 그 전쟁 중 기브온 전투에서는 하늘에서 우박덩이가 내리기도 했었고, 태양이 멈추기도 했었다(수 10:11,12). 대환란 때에도 역시 하늘에서 우박덩이가 내릴 것이고, 하늘 현상들에 이변이 있을 것이다(계 8:7, 마 24:29). 또 광야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배교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받아 떨어져 나갔는데, 대환란 때에는 구원받은 사람도 배교하면 구원을 잃어버리게 되는 특별한 일이 일어나게 된다(마 24:13, 히 6:4-6). [그 외에도 재림에 관한 모형들은 수없이 많은데, 더 자세한 사항들에 대해서는 저자의 <아버지의 왕국이 임하옵시며>(1999)의 「제1부 구약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부분을 참조하라.]

이와 같이 모형론은 성경을 공부하는 데에 있어 핵심적인 부분이다. 모형을 통해 우리는 원형에 대한 더 확실한 모습을 볼 수 있다. 또한 그 모형이 예언과 함께 등장할 때 우리는 그 예언의 성취에 대한 더 분명한 기대감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모형을 그리스도의 초림에 대한 사건들에만 한정시키는 것은 모든 예언을 십자가에다가만 한정시키는 것과 같이 매우 위험한 것이다. 그것은 거짓 교리의 누룩으로 인해 성경공부 자체를 엉뚱한 방향으로 가게 할 위험이 있다. 또한 모형에만 집중한 나머지 지나간 과거의 시대를 향해 있었던 하나님의 분명하고 구체적인 경륜마져 우리 시대에 한정시키는 오류도 범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경륜이 각 시대에 따라 다르게 펼쳐져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이해해야 하며, 그것을 올바로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시대에 대한 더 깊은 은혜를 느끼게 하며, 오는 시대에 대한 더 확실한 소망을 갖게 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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