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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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천년주의적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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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00년 10월호>

우리는 지금까지 전천년주의 또는 세대주의에 관한 여러 면들을 살펴보았다. 하나님의 경륜에 따른 그분의 언약과 각 시대들의 차이점들 및 그 시대들에 따른 구원의 차이점들, 또 모형과 원형, 교회와 왕국의 차이점들, 무엇보다도 성경의 문자적 해석과 예언에 대한 분명한 적용들을 통한 성경해석 방법들을 살펴보았다.
필자는 이 코너의 글들에서 세대주의와 전천년주의를 거의 동일시하였는데, 이는 전천년주의도 여러 가지가 있지만, 세대주의야말로 진정한 전천년주의이기 때문이다. 전천년주의라는 것은 단순히 “천년왕국 이전에 주님께서 오신다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전천년주의가 후천년주의 또는 무천년주의와 구별되는 가장 중요한 점은 예수님의 재림의 시기가 아니라, 예수님의 재림이 갖는 의의에 대한 차이점에 있다. 즉 전천년주의는 후천년주의나 무천년주의와는 달리,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세상은 점점 더 악으로 치달아, 더 이상 갈 데가 없고 더 이상 희망이 없는 상태에까지 이르다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이 회복된다고 말한다. 이것은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한 모든 인간들의 노력은 헛된 것이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 그분 자신의 힘으로만 하실 수 있는 일인데, 주님은 재림하시면서 세상의 모든 악한 것들을 심판하신 후 온전히 의로운 그분 자신의 왕국을 세우실 것이다. 이것이 전천년주의의 역사관이고 성경적 세계관이다.
실제로 후천년주의와 무천년주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이러한 의의를 두지 않는다. 그들은 성경에서 예수님이 재림하신다고 하니, 재림한다고 입으로라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는 것뿐이지, 그분이 재림하셔서 해야 할 일들을 그들 스스로 지금 해 내려고 노력하는 자들이다. 즉 세상의 개혁을 위해 노력한다는 말이다. 물론 말로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도우심으로”라고 하지만, 결국은 그들의 노력으로 이 땅에 왕국을 가져오려는 것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전천년주의가 강조하는 것은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께서 언제 재림하시는가 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분의 재림 이전에 어떤 일들이 있을 것이며, 예언은 어떻게 성취되어 가는가 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성경의 예언을 문자적으로 연구하게 되고, 그 안에서 하나님의 경륜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또 율법 이전과 이후에 관한 모든 교리적 차이점과, 유대인들의 심판으로서의 대환란과, 대환란 후에는 유대인이 그 땅에서 회복된다는 것과,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완성하실 왕국과, 또 그분의 몸이며 신부인 교회의 위치와 그 교회를 어떻게 데려가시는가 하는 것들이 정확하게 제시된다. 따라서 전천년주의라 하면서도 율법과 은혜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한다든가, 교회와 왕국을 구분하지 못한다든가, 대환란과 유대인의 회복, 그리고 성도의 소망인 휴거에 대해 믿지 못하는 사람은 절대로 전천년주의자가 아니다.

사실 전천년주의는 복잡한 신학 이론이기 이전에 우리의 신앙 자세다.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한 교리는, 여러 가지 복잡한 교리들이 많지만, 그러한 것들은 교리이기 이전에 우리의 신앙 자세인 것이다. 우리는 휴거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언제 이루어지는가 등에 대해서 지식적으로 아는 것에 그치지 않으며, 그것을 진정으로 소망한다. 지금 당장이라도 이루어질 수 있다고 믿는 것이 진정한 성도의 자세다. 또한 우리는 이 세상이 곧 멸망해 버릴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기에 세상의 개혁에 대해서 어떠한 행동도 취하지 않는다. 세상과는 물론이고, 진리를 더럽혀 버린 어떤 교회나 단체들과도 연합하지 않는다. 예수님께서 천년왕국 이전에 오신다 안 오신다를 논쟁하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주님의 재림만이 세상의 모든 문제들의 해결책임을 알기 때문에 재림을 기다리는 소망을 가장 숭고한 소망으로 여긴다. 그래서 전천년주의는 신학 이론이기 이전에 신앙 자세라는 것이다.
실제로 전천년주의라 하면서도 사실은 전천년주의가 아닌 교회들이 너무나 많다. 우리 나라의 경우는 장로교의 많은 교회들이 말로는 전천년주의를 표방한다. 물론 대부분은 “역사적 전천년주의”로서, 말하자면 휴거는 대환란 7년 이전에 있는 것이 아니라, 환란의 전 3년 반이 지난 이후에 있게 되는데, 그것도 모든 성도가 다 휴거되는 것이 아니라, 부분적으로 휴거되고 남은 사람들은 대환란을 통과하는 가운데 구원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어쨌든 이들은 전천년주의를 표방한다고 하는데 그렇다고 그들이 정말 전천년주의자들이냐 하면 그렇지 않다. 그들은 말로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세상을 이롭게 하는 일을 주로 한다. 그들은 자기들의 확장된 교세로, 교계에서는 세력을, 세상에서는 인정을 받으려 하고 있으며, 사회 복음으로 치닫는 정도가 날로 더 심해지고 있다. 진정한 전천년주의자는 세상의 인정을 받으려 하지 않고 사회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 또한 그들은 율법과 은혜를 거의 구분하지 못하는데, 구약 율법 시대에도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받았다고 하며, 주일 성수를 안식일 준수의 개념으로 지키고, 십계명이나 산상설교를 신앙의 지표로 삼는다. 즉 언약신학이라는 말인데, 세상 어디에도 언약신학이면서 전천년주의인 경우는 없다.
잘 아는 바와 같이, 원래 칼빈에서 시작한 장로교는 그 신학상 무천년주의이다. 그런데도 우리 나라 사람들이 표면적으로 전천년주의라 말하는 것은, 과거 선교 초기에 들어온 전천년주의적 신앙이 평범한 성도들의 저변에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영미 교회들에 가득 차 있던 라킨의 <세대적 진리>나 스코필드의 주석성경 등의 영향이 그나마 건전한 신학으로 유입되었던 것인데, 특히 암울한 일제 시대나 전쟁 등의 어두운 현실 가운데서 재림을 기다리는 신앙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필자가 어릴 때만 해도 부흥회에 다녀보면, 라킨의 도표를 비슷하게 그려가며 강의했던 목사들이 종종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언제 그러한 일이 있었냐는 듯이 모든 것은 바뀌어 버렸다. 말만 전천년주의지 실제로는 무천년주의, 후천년주의를 표방하는 것에 도를 넘어서, 아예 전천년주의니 후천년주의니 그런 말을 하는 것 자체가 생소하게 되어 버린 것이다. 지금 교회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세상과 연합하고 있다. 교회는 세상을 품에 안으라고 설교하고 있다. 이것에 대해 누구하나 제대로 비판하지 않는다.

이와 연관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휴거와 대환란에 관한 성도의 믿음과 자세이다. 성경의 예언들이 이루어져 가는 정도를 보건데, 휴거는 거의 임박해 있다. 하지만 극단적인 종말론자들처럼 몇 년, 몇 월, 몇 일에 휴거가 된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중요한 것은 휴거가 우리가 사는 세대 가운데 이루어질 수 있을 정도로 매우 임박해 있으며, 그 후에는 대환란이 펼쳐질 것인데,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환란 전에 휴거된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부분 휴거설, 즉 믿는 자들 중에 신실한 자들만 휴거된다는 설을 신봉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것처럼 불안한 이론도 없다. 차라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환란을 통과한다면 그러려니 하면 되겠지만, 신실한 일부만 올라간다면 우리는 과연 그 일부에 포함될 것인가 말 것인가? 얼마나 신실해야 휴거될 수 있으며, 그 기준은 무엇인가? 한동안 신실하다가도 믿음이 식어지거나 퇴보할 수도 있는데, 그러면 휴거될 수도 있었던 사람이 탈락되기도 하는가? 무엇보다 이러한 부분 휴거설은 성도의 구원의 영원한 보장이라는 지극히 기본적인 교리를 무너뜨리는 교리이다.
어떤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을 받았다. 그 사람은 구원을 받는 즉시 영원한 보장을 얻는다. 자기의 노력으로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는 비록 믿음이 식고 죄를 범하고 심지어 타락했어도 정말로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죽어서 하늘 나라에 간다. 그는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가 믿음이 많이 식어져 휴거되지 못하고 지상에 남았다 치자. 대환란 기간에는 적그리스도가 통제하고 짐승의 표를 받지 않으면 상거래를 할 수 없기 때문에 믿음을 지키기가 무척 힘들다. 자칫해서 짐승의 표를 받기라도 한다면 그는 지옥행이다. 이 시대에도 온갖 유혹을 이기지 못해 죄를 짓던 사람이 그 시대가 되면 순교할 수 있겠는가? 그는 십중팔구 짐승의 표를 받을 것이고 지옥에 갈 것이다. 그러면 교회 시대에 구원의 영원한 보장을 받은 사람이 그 보장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사람들이 불안해 하는 이유 중 하나는 대환란 때에 믿음을 버려 지옥에 가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지금 죽으면 하늘 나라에 갈 수 있다고 하면서도, 환란 때 남으면 자신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얼마나 모순된 말인가?
그러므로 교회의 휴거는 분명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받은 모든 성도들이 그 대상이다. 이것은 성도들이 지상 삶을 살 때 당하는 모든 고난과 시험들에서 이기는 힘이 되며, 큰 위로가 되는(살전 4:18) 위대한 복된 소망이다(딛 2:13). 또한 대환란과 심판으로부터 보호받는다는 안전한 소망이기도 하다. 참으로 대환란은 그리스도인들과는 관계가 없다. 그것은 “야곱의 고난의 때”(렘 30:7)이다. 혹 “이스라엘의 고난의 때”라고 되어 있다면, 그 이스라엘을 영적 이스라엘이라고 생각하여 교회의 고난의 때라고 오해할 지 모르나, 성령님께서는 분명하게 “야곱의 고난의 때”라고 기록하셨다. 교회를 ‘영적 이스라엘’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있지만 ‘영적 야곱’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없기 때문이다.
무천년주의자들은 교회 시대 전체가 대환란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천년왕국이라는 것 자체가 실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대환란이라는 것도 구체적인 기간이 필요없다. 성도들이 하늘로 들림받기는 하겠지만, 그것도 언제인지 모르는 주님이 오시는 때에 동시에 우리는 하늘로 올라가고 주님은 내려오신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대환란에 대한 개념이 없고, 교회 시대 전체가 실상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박해받았던 기간이므로 결국 대환란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대환란만이겠는가? 구약 시대에도 하나님의 백성들은 주로 박해를 받았다. 그렇게 본다면 인간의 타락 이래로 인류 역사 6,000년이 모두 대환란의 기간인 것이다. 그러면 왜 예수님께서 대환란이라는 유사 이래 가장 큰 심판의 때를 구체적으로 말씀하셔야만 했는가?(마 24:21) 결국 무천년주의자들이 대환란의 개념을 없애버리는 것은, 휴거도 없애버리고 그리스도의 지상 재림도 무의미하게 만들어 버리며, 궁극적으로는 성도들에게서 소망을 앗아가 버리고 믿음을 없애버리기 위한 극악무도한 거짓 교리인 것이다. 우리는 대환란이 어떤 것인지 알수록 휴거를 더욱 소망하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신학 이론이기 이전에 우리의 신앙인 것이다.

이처럼 전천년주의적 신앙은 우리 삶의 자세와 방향을 분명하게 해 준다. 앞서 언급했지만, 진정한 전천년주의자는 세상을 이롭게 하자는 어떠한 운동에도 관여하지 않는다. 더욱이 교회의 이름을 걸고는 절대로 하지 않는다. 우리는 성경의 예언을 문자 그대로 믿기에, 날이 갈수록 세상이 악해지면 악해졌지 좋아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안다. 그래서 우리가 행할 하나님의 일이란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 멸망할 세상에 복음을 전해 한 명이라도 더 구원받도록 하는 것이다.
그래서 전천년주의적 신앙은 분리주의적인 신앙이기도 하다. 세상으로부터 성별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어떠한 형태의 교회 연합에도 관여하지 않는다. 많은 설교자들은, 세상으로부터는 분리해야 하지만 교회들끼리는 연합해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서도 교회들에게 연합하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다. 요한복음 17:21에서 성도들을 하나가 되게 해 달라고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내용도 있지만, 그것은 그분 안에서 한 몸을 이룬다는 것이며, 또 진리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왜 교회들끼리의 연합도 반대하느냐 하면, 많은 교회들이 이미 진리에서 멀리 떠나 있기 때문이다. 서로 교리가 다르다는 것만 봐도 둘 중 하나는 진리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현대의 교회들은 “에큐메니칼”이라는 깃발 아래서 교단도 교리도 초월해서 사랑으로 하나가 되자고 한다. 말이 초월이지, 그것은 비진리와 섞겠다는 말이다. 아니, 이처럼 연합 운동을 하는 교회들은 이미 자신들이 진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한 셈이다. 그러므로 진리를 소유한 교회는 그들과의 연합을 거부하고, 따라서 그 거대한 교회 연합으로부터 미움과 박해를 받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연합의 움직임은 교회들의 독자적인 움직임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정치, 사회 단체들의 연합의 물결과 발맞춰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궁극적으로는 교회 연합도 세상 연합들과 함께 합쳐질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게 되어, 사랑과 평화를 가장한 적그리스도의 길로 치닫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에큐메니칼 운동은 적그리스도를 맞아들이기 위한 발판이 되고 있다.

성경에 대한 절대적 믿음, 예언에 대한 철저한 문자적 해석, 그리스도의 재림과 천년왕국에 대한 믿음, 또한 휴거에 대한 소망과 더불어 성별하는 신앙, 이런 것들이 바로 전천년주의적인 신앙이다. 우리는 말로만 전천년주의자라고 해서는 안된다. 전천년주의니 세대주의니 하는 것을 한낱 신학 이론으로만 전락시켜서도 안된다. 이것은 우리 선배들이 목숨을 걸고 지켜왔던 신앙이며, 우리의 믿음의 길이고, 성도들을 세워줄 수 있는 믿음의 자세이다. 우리가 이 믿음 가운데 있으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바를 정확히 알고 행하여 그날, 곧 우리가 들림받아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 섰을 때 풍성한 상급을 받는다는 것은 얼마나 기쁜 일인가? 그때 우리는 하나님께 인정받는 부끄럼 없는 일꾼으로 발견될 것이며, 주님과 함께 그분의 왕국을 아름답게 다스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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