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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와 침례가 다른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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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00년 00월호>

세례인가 침례인가? 아마도 이 문제만큼 기독교 역사 가운데 논쟁이 되어 왔던 주제는 없을 것이다. 이 용어의 문제뿐 아니라, 이에 대한 실행방법이나 교리적 지침 또한 매우 중요한 논쟁거리였다. 얼마나 중요한 논쟁거리였냐 하면, 이 문제 때문에 수백만의 침례교도가 다름 아닌 “기독교인들”의 손에 죽을 만큼 큰 쟁점이었다.
이것이 왜 이토록 중요한 문제인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았으면 됐지, 물이야 뿌리면 어떻고 잠그면 어떤가? 어린이들에게 주면 어떻고 안 주면 또 어떤가? 서로 다른 교리들이 도대체 무엇이 중요하다고 이 문제 때문에 목숨까지 버려야 하는가? 이 문제가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가?
하지만 이것은 우리의 현실이다. 우리 나라만 해도 침례교가 처음 들어올 당시 침례교는 거의 이단시 되었다. 지금은 침례교회들이 명목만 침례교회일 뿐이지 다른 교회들과 별반 다를 것이 없어서 서로 한 제도권 안에 들어있지만, 그래도 아직 침례교도들을 보는 눈빛은 뭔가 어색하다. 침례교회들도 마찬가지다. 자기들이 다른 교회들보다 더 특별히 다른 것은 없지만, 그래도 침례를 준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자부심을 느끼는 사람들이 꽤 있다.

세례와 침례의 차이

이러한 일련의 문제들을 다루기 전에 먼저 그 용어부터 정리해 봐야겠다. 침례나 세례는 어떻게 구분되는가?
영어에서 “baptism”이라고 불리는 이 용어는 “침례”가 정확한 번역이나, 일반적으로 이 용어는 세례나 침례에 있어서 다 사용되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책을 번역하는 사람들이 침례교인이면 “침례”로 다른 교인들이면 “세례”로 번역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영어를 사용하는 사람들 중 실제로는 물뿌림 받아 세례를 받은 사람들도 자기는 “baptism”을 받았다 라고 말하는 것이다. 로마 카톨릭에는 세례를 받아야 구원받는다는 교리가 있다. 이때 이 교리를 “baptismal regeneration”이라 한다. 또 유아세례라는 말도 영어로는 “infant baptism”이라 한다. 유아에게 침례를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그래도 그 말은 “baptism”이라 한다. 그러므로 우리말에서 침례나 세례라는 용어는 단순히 물에 잠기느냐 물을 뿌리느냐 하는, 방법에 따라 분류된 용어이기도 하지만, 거기에는 더 깊은 의미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먼저 “세례”라는 말을 자세히 보자. 한자로 이 말은 “洗禮”라 하며, 이 “洗” 자는 “씻을 세” 자이다. 결국 세례는 물로 “씻는 예식”이라는 말이다. 그러면 무엇을 물로 씻는다는 말인가? 죄를 씻는다는 것이다. 그러면 세례가 참으로 죄를 씻을 수 있는가? 머리에 물을 뿌리면 죄인들의 죄가 씻겨지는가? 이에 대해 성경은 무엇이라 말씀하시는가 보자.『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인하여 이제 우리를 구원하는 모형이니, 곧 침례라. (이것은 육체의 더러움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응답이라.)』(벧전 3:21). 보는 바와 같이 물은 “모형”일 뿐 절대로 누군가의 죄를 씻어주지 못한다. 성경이 제시하는 바, 누군가의 죄를 씻어줄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뿐이다. 그러므로 물을 뿌리는 것도 불경스런 것이거니와, 거기에다가 “씻을 洗” 자까지 붙여 “세례”라고 명명하는 것은 참으로 불손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그러면 “침례”라는 말은 무엇인가? 여기서 “浸” 자는 “담글 침” 자로서, “침례”를 정의하면 단순히 “물에 잠기는 의식”이다. 앞에서 제시한 베드로전서 3:21 말씀에서도 보듯이, 이 침례에는 죄를 씻는다든가 하는 의미는 전혀 없다. 단순히 잠기는 것이다. 침례를 뜻하는 헬라어 “밥티조”라는 말은 옷감을 물감에 푹 적셔서 물들이는데 사용되었던 말이며, 또한 군인들이 전쟁을 하기에 앞서 칼을 피(또는 피를 의미하는 붉은 물감 등)에 푹 담글 때 사용되기도 했던 말이다. 그러면 잠기는 것이 왜 중요한가? 우리는 잠김으로써 무엇인가를 분명히 드러내게 되는데, 이는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었다는 증거를 사람들 앞에 고백하는 것이다. 침례를 받지 않아도 구원에는 지장이 없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기만 하면 그분과 하나가 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이 일을 간증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침례이다.

영적 침례의 의미

그런데 무언가를 간증한다면 그 간증의 내용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 내용은 무엇인가?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내가 하나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 사실을 굳이 침례라는 방법으로 간증하는 이유는 침례만큼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묻히고 부활했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다른 행위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로마서 6:3,4에서 이러한 침례의 모습을 본다.『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침례받은 우리가 그의 죽으심 안으로 침례받은 것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죽음 안으로 침례를 받아 그와 함께 장사되었으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인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켜지심과 같이 우리도 또한 생명의 새로움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롬 6:3,4). 즉 내가 구원받을 때 그분과 함께 죽었고 묻히고 부활했다는 것이다. 여기 로마서 6장에서 말하고 있는 침례는 절대 물침례가 아니다. 본문을 아무리 읽어도 “물”이라는 말은 발견할 수 없다. 이 침례는 물침례로 간증하기 전에 먼저 경험해야 할 “영적 침례”인데, 우리가 그리스도 안으로 침례받았다는 것은 그분의 몸 안으로 푹 잠겼다는 것이다. 나는 그분의 몸의 일부가 되었고, 그래서 그분의 죽음도 내 죽음이 되고, 그분의 부활도 내 부활이 되었다. 이것을 모형으로 간증하는 것이 바로 물에 잠겼다가 나오는 것이다.
골로새서 2:12도『너희가 침례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고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들로부터 살리신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너희도 그와 함께 살아났느니라.』고 말하여, 로마서 6장과 동일한 영적 침례를 제시하고 있고, 갈라디아서 3:27에서는 이것을『그리스도 안으로 침례』받았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침례는 고린도전서 12:13에 따라서 “한 몸 안으로” 들어간 침례이고, 이것이 또한 한 성령에 의해 받은 것이기에, 에베소서 4:5에서는 “한 침례”라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침례를 집례하는 목사는 침례를 받는 사람에게 먼저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받았습니까?” 등의 질문으로 그 사람이 구원받은 것을 분명히 확인한 다음, 그를 물에 잠그면서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라고 말하고, 그가 물 속에 있는 상태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묻혔고...”라고 말하며, 그를 일으켜 세우면서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났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누가 침례를 받는가

그러므로 침례는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만 받아야 한다. 만약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침례를 받게 되면 그에게 전혀 무익한 것이 될 뿐만 아니라, 매우 불경스런 것이다. 그래서 지역 교회의 목사들은 그가 구원받았다는 것을 직간접적으로 확인하게 된다. 그 사람은 회중 앞에 나아가 자기의 구원간증을 할 수도 있고, 회중들 사이의 교제 가운데서 자기의 구원을 간증할 수도 있다. 그런데 어떤 방법으로든 구원의 간증이 되지 않은 가운데, 일괄적으로 모아 놓고 교리 문답에 따라 형식적으로 몇 마디 물은 다음 마구 세례를 주는 것은 그야말로 비성경적인 것이 아닐 수 없다. 한국 교회는 세례교인들로 말하면야 1200만의 교인을 자랑하지만, 그들 중 수많은 사람들이 이처럼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임을 생각할 때 실로 통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또한, 구원의 간증이 있는 사람들만 침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은 유아 세례를 줄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왜냐하면 유아들은 자기의 구원 간증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개인에 따라 다르겠지만, 적어도 자기의 구원을 분명히 인식하고 간증할 정도의 나이는 되어야 침례를 줄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이 침례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받게 된다(마 28:19). 간혹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는 교회들도 있으나, 이는 잘못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는 경우는 사도행전 2:38과 8:16, 그리고 19:5 뿐인데, 뒤의 글에서 언급하겠지만, 이는 유대인들이 받는 침례이다.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은 여러 모로 달리 취급되는데, 그중 하나가 침례의 문제이다. 이방인들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받는다. 이는 마태복음 28:19에서 예수님께서는『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가르치고...』라고 하셨는데, 이때 “모든 민족”은 이방인들을 말하며, 따라서 이방인들에게 전파되는 복음 가운데 받는 침례는 분명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받아야 한다. 사도행전 10:48에서는 베드로가 이방인인 코넬료에게 침례를 명령하는데, 이때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아니라 “주”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으라고 명했다. 여기서 “주”의 이름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포함한다. 이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모두 “주”라고 불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글개역성경>은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변개시켜 놓아, 이방인들이 누구의 이름으로 침례받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도 바꾸어 버린 것이다.

로마 카톨릭과 침례교도

한 가지, 유아 세례에 대해서 우리가 간과하면 안될 것은, 이 유아 세례를 구원의 수단이라는 명목하에 로마 카톨릭이 자기들의 교세를 넓히는 데 사용했다는 사실이다. 세례를 받으면 그 교회의 회원이 된다. 장로교회에서 세례를 받으면 장로교인이 되고, 감리교회에서 세례를 받으면 감리교인이 된다. 마찬가지로 카톨릭 교회에서 세례를 받으면 카톨릭 교인이 되는데, 이때 교세를 효과적으로 넓힐 수 있는 방법은 어릴 때 세례를 주어 버리는 것이다. 그러면 그는 원하든 원치 않든 평생동안 카톨릭 교인으로 살아가게 되고, 이렇게 반복되게 되면, 카톨릭은 그 사회와 국가를 완전히 장악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을 반대한 사람들이 바로 재침례교도들이다. 그들은 어릴 때는 자기도 모르는 상태에서 세례를 받았으나, 장성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받은 후 올바른 지각으로 보니, 그 세례가 잘못된 것이었음을 깨달았기에 다시 정식으로 침례를 받은 것이다. 그러니까 카톨릭 교회에서는 그들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고, 그들의 교세뿐 아니라 그들의 교리에도 타격을 입게 되자, 재침례교도들을 박해하고, 심하면 죽이기까지 한 것이다.
그래도 그들은 믿음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죽음을 불사하고 침례를 받았다. 그러한 암흑 시대에 침례를 받는다는 것은 참으로 담대함이 없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들은 몰래 믿을 수도 있었지만, 그리스도를 위해 담대하게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믿음을 고백했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침례교도라고 불렸던 사람들은 모두 반카톨릭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세례냐 침례냐 하는 문제는 카톨릭이냐 그리스도인이냐 하는 문제만큼 심각한 문제다. 개인적으로는 카톨릭을 반대할지라도 그가 세례, 특히 유아세례를 실행하거나 인정하고 있는 한, 그는 친카톨릭 교인인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오늘날 우리 교계는 대부분 친카톨릭 교회들이다. 그러면 많은 침례교회들은 정상적인 그리스도인들인가? 글쎄, 심히 의심스럽다. 왜냐하면 그들은 침례만 주었지, 다른 부분에서는 친카톨릭 교회들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친카톨릭 교회들이 침례교회들을 비판하면, 그들과 하나가 되기 위해 온갖 타협도 불사한다. (그들의 조상들은 카톨릭을 반대하기 위해서는 죽음도 불사했지만, 이제 그들은 카톨릭과 하나되기 위해 타협도 불사하는 것이다.) 모든 침례교회들이 다 그렇지는 않기를 바란다.
참으로 이 땅에 비진리와 조금도 타협하지 않고 성경대로 믿음을 실행해 나가기 원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그렇다면 그는 세례와 침례의 문제에 있어서부터 분명한 자세를 취해야 할 것이다. 단지 물에 잠길 뿐만 아니라, 침례의 본 의미를 깨닫고, 주님과 연합한 사람으로서 살아야 할 것이다. 모두가 카톨릭화되어 배교해가는 이때에 성경적 실행으로 분명한 믿음의 간증을 보여야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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