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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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프란치스코교황 프란치스코의 “다른 복음”의 기쁨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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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14년 09월호>

교황은 매스 미디어가 발달한 오늘날 한 번의 행차로 “온 세상”의 관심을 받는다. 땅의 왕들도 머리를 조아려 경의를 표한다. 알려진 인류의 역사에 이런 직위의 인물은 없었다. 오직 현대의 교황이 그렇다. 그에게 온 세상의 시선을 모아 주는 매스 미디어의 힘이 느껴진다. 교황의 권세가 과학의 진보와 더불어 함께 “진화”한 것이다. 가까운 미래에 등장할 한 인물도 그런 대우를 받을 것인데, 바로 “짐승”이라 불리는 적그리스도이다. 『또 내가 보니, 그의 머리들 가운데 하나가 상처를 입어 죽게 된 것 같았으나, 그의 치명적인 상처가 나으니 온 세상이 기이히 여겨 그 짐승을 따르더라』(계 13:3). 참된 신약교회사에서 재침례교도들을 비롯한 모든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교황”을 “적그리스도”라고 불렀다. 1378년 교황 우르반 6세와 클레멘트 7세가 동시에 “교황”이었을 때에는 두 교황이 서로를 가리켜 “적그리스도”라고 불렀다.

교황 프란치스코가 한국을 다녀갔다. 그도 한 인간일 뿐인데 사람들의 반응은 “숭배” 수준이다. 『이는 사람들 가운데서 크게 높임을 받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는 가증스러움이니라』(눅 16:15). 그는 어딜 가나 화제였다. 한국 교회는 이번 방문으로 그들의 영향력이 약화돼 교인들이 이탈하지 않을까 고심한다. 서로 교인 빼앗기에 여념이 없던 그들이 되레 다른 데로 빼앗길 위기에 처했다.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카톨릭으로의 교인 이동에 관심이 없다. 그것은 물소 떼가 풀을 찾아 대이동 하는 아프리카 초원의 이야기보다도 흥미를 끌지 못한다. 우리의 관심은 온 세상의 추앙을 받는 교황이 하나님 앞에 매우 가증한 이단의 수장이라는 것을 밝힘으로써, 이 시대에 참된 진리를 따르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누구인가를 제시하는 데 있다. 그래서 집어든 책이 프란치스코가 쓴 <복음의 기쁨>(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이었다. 교황은 복음을 전하지 않는 사람인데 그가 복음을 이야기하니 관심이 갔다. 지금부터 책의 핵심 부분을 발췌하여 프란치스코의 “복음”을 해부해 보도록 하자.

첫째, “구원”에 관해서이다. 『복음의 기쁨은 예수님을 만나는 모든 이의 마음과 삶을 가득 채워 줍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죄와 슬픔, 내적 공허와 외로움에서 벗어나게 합니다』(p.11). 『주님, 저를 다시 구원해 주소서』(p.12). 교황은 구원의 영원한 보장이 아닌 행위 구원을 가르친다. 구원을 받았다가 잃어버리면 다시 구원받아야 한다. <카톨릭 교회 교리문답>(1994) 제1257항은 “세례가 구원에 필수적임을 주님께서 확증하셨다. 영원한 지복으로 들어가는 길을 확증해 주는 데 세례 외에 다른 길이 있음을 교회는 알지 못한다.”라고 되어 있다. 교황은 『하느님 백성의 모든 구성원은 그들이 받은 세례에 힘입어 선교하는 제자가 되었습니다(마태 28,19 참조)... 새로운 복음화는 세례 받은 모든 이의 주도적인 참여를 촉구하고 있습니다.』(p.102)라고 했다. 즉 마태복음 28:19의 지상명령을 “세례를 주어 모든 민족들을 구원받게 하라.”는 것으로 왜곡했다. 교황의 복음화란 세례를 통한 구원을 전파하는 것이다. 성경에는 그런 내용이 없다. 카톨릭의 세례와는 다르지만 침례에 관해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침례를 주게 하려고 나를 보내신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게 하려고 보내셨노라.』(고전 1:17)고 기록했다. 복음은 침례가 아니며, 침례는 복음이 아니다. 복음과 세례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복음을 믿고 구원받은 성도가 자신의 믿음을 외적(“모형”)으로 간증하는 것이 성경에서 말씀하는 침례이다.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인하여 이제 우리를 구원하는 모형이니, 곧 침례라. (이것은 육체의 더러움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응답이라.)』(벧전 3:21).

둘째, “성인”(성자, saint)에 관해서이다. 『십자가의 요한 성인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또 이레네오 성인처럼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p.19,20).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은... 가르쳤습니다』(p.40). 카톨릭에서 성인, 곧 성자는 그들 안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 이들은 살아 있을 때의 선행으로 사후에 성자로 선언된 소수의 선택된 자들을 말하며, 신약의 그리스도인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카톨릭의 교리문답은 “우리는 그들(성자들)에게 우리와 온 세상을 위해 중보해 줄 것을 간청할 수 있으며, 또한 간청해야 한다.”(제2683항)고 가르친다. 카톨릭의 죽은 성자들이 살아 있는 교인들의 기도를 듣고 중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는 그런 내용이 없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죽기 전에 이미 “성도들(saints)로 부르심을 받았으며”(고전 1:2), 심지어 “로마에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성도들로 부르심을 받았다.” (롬 1:7)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성경에서 중보기도는 성도 안에 계신 성령님(롬 8:26)과 하나님의 오른편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롬 8:34, 딤전 2:5)와 살아 있는 성도 자신(딤전 2:1, 엡 6:18)이 할 수 있다. 카톨릭의 성자들이 산 사람들을 위해 중보한다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셋째, “성찬례”와 “성체”에 관해서이다. 『성찬례는 성사 생활의 충만함이지만 완전한 이들을 위한 보상이 아니라 나약한 이들을 위한 영약 이며 양식입니다』(p.48). 『나는 나의 죄를 언제나 용서받을 수 있도록 언제나 성체를 받아 모셔야 합니다. 내가 계속 죄를 지으니 치료 약을 늘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이 몸을 먹는 사람들은 그들의 죄를 용서받게 될 것입니다 』(p.48, 성 암브로시오의 ‘성사론’ 인용 부분 재인용). 교황은 성찬례와 성체에 사용되는 빵을 “죄의 치료 약”으로 제시한다. 이것은 카톨릭이 성찬례의 빵과 포도주를 그리스도의 실제적인 몸과 피로 여기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성찬 의식의 핵심은, 그리스도의 말씀과 거룩한 성령의 간구에 의해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된 빵과 포도주이다.”라고 그들의 교리문답은 가르친다(제1333항).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실제적인 몸과 피가 되어 죄를 실제적으로 치유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매주 미사 때마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실제적인 살과 피라고 여기는 것을 먹고 마심으로써 자신들의 죄가 용서받게 된다고 생각한다. 교황은 『성체 조배를 하고 기도 안에서 말씀과 만나고 주님과 성실한 대화를 나누는 데에 더 많은 시간을 쏟지 않으면, 우리의 활동은 쉽게 무의미해지고, 우리는 노고에 지치고 열정도 사그라지고 맙니다.』(p.199)라고 했다. 성체 조배(聖體朝拜)란, 태양 형상의 철판 속에 빵을 끼워 놓고 그 빵이 예수님이라고 여기며 “성체 안에 살아 계신 예수님을 찾아 열렬한 존경심과 애정을 가지고 기도하며 주님과 대화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인간의 썩은 전통이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고난 이전, 겟세마네 동산에서 붙잡히시기 이전에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쪼개진 나의 몸이니 받아 먹으라.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라.』(고전 11:24)고 하셨다. 그때 주님의 몸은 그 빵 앞에 계셨다. 주님 손에 들린 빵은 주님의 몸이 아니었다! 주님은 채찍에 맞아 몸이 찢겨지시기 전임에도 그 빵 조각을 가리켜 “너희를 위하여 쪼개진 나의 몸”이라고 하셨다. 쪼개지기 전인데 쪼개졌다고 하셨다. 이것은 앞으로 일어날 일을 두고 말씀하신 “상징”인 것이다! 주님은 빵을 뗌으로써 『나를 기억하라.』고 하셨지, “나” 곧 “주님”을 “먹으라”고 하지 않으셨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누구든지 영원한 생명을 가졌나니 내가 그를 마지막 날에 살리리라.』(요 6:54)고 했을 때 주님은 “실제적으로 살을 먹고 피를 마시라.”는 뜻이 아니라 “주님을 믿으라.”는 의미로 말씀하셨다. 주님의 이 말씀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인 많은 제자들이 실족하여 주님을 떠나갔지만(66절), 베드로는 그 “상징적인” 의미를 정확히 알고 다음과 같은 위대한 고백을 하게 된다. 『우리는 주께서 그 그리스도, 곧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으며 또 확신하나이다 』(69절). 프란치스코를 비롯한 모든 카톨릭교도들은 그들의 “초대 교황”과 왜 믿음이 다른 것인가!

넷째, “성경 해석”에 관해서이다. 『분명히 성경 본문이 지닌 핵심 메시지의 의미를 올바로 이해하려면, 교회가 전해 준 성경 전체의 가르침과 연관시켜 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성경 해석의 중요한 원칙입니다』(p.121). 이것은 카톨릭의 교리문답 제100항을 반복한 것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해석하는 일은 순전하고도 유일하게 교회의 판결에 맡겨져 왔다. 즉 교황과 그와 교통이 있는 주교들에게 맡겨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내용은 성경에 없다. 성경은 위로자이신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어 우리를 모든 진리로 인도하실 것이라고 말씀하며(요 14:26; 16:13), 또 우리가 『성령께서 가르치시는 말』 곧 “하나님의 말씀”을 “영적으로 비교할 때”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라고 말씀한다(고전 2:13). 『이는 우리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값없이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2:12). 여기서 『우리』는 세상의 영을 받은 교황과 그의 주교들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온 영을 받은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을 말한다. 『우리』는 그들 “카톨릭 선생들”에게서 성경에 관해 배울 것이 아무것도 없다.

다섯째, “성령론”에 관해서이다. 『성령께서 모든 사람 안에서 활동하고 계심을 믿는 것은 성령께서 모든 인간의 상황과 모든 사회적 관계에 파고 들어가려 하신다는 것을 깨닫는다는 의미입니다... 복음화는 또한 이러한 해방을 가져다주시는 성령의 활동에 협력하고자 노력합니다』(p.144). 교황 프란치스코는 성령께서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 안에서 활동하고 계신다고 거짓되게 가르친다. 그러나 성경은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함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하시거니와』(롬 8:16)라고 말씀한다. 여기서의 『우리』 또한 『하나님의 자녀』 곧 성령님의 인도를 받는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을 말한다(롬 8:14). 성령님께서 구속의 날까지 인치신 그리스도인들이다(엡 4:30). 성령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아닌 거듭나고 말씀에 순종하는 그리스도인들 안에서 역사하신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 안에 역사하는 영은 성령이 아니라 『공중 권세의 통치자, 곧 지금 불순종의 자녀들 안에서 역사하는 영』(엡 2:2)인 마귀이다. 『이 세상의 신』인 마귀이며, 성경은 그가 『믿지 않는 자들의 마음을 어둡게 하여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복음의 광채가 그들에게 비치지 못하게 하느니라.』(고후 4:4)고 말씀한다. 그는 프란치스코의 입을 통해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복음이 아닌 『다른 복음』(갈 1:8)으로 죄인들의 마음을 어둡게 했다.

마지막으로, “복음화”에 관해서이다. 『복음화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적 죽음과 부활을 기쁨과 인내심을 갖고 점진적으로 선포하는 예언으로서 여러분께서 절대적으로 가장 먼저 하여야 할 일입니다』(p.94). 이 부분만 보면 교황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적 죽음과 부활을 믿는 사람처럼 보인다. 그는 『복음화는 교회의 과업』(p.94)이라고 했는데, 그것이 “어떤 교회”의 과업인지를 스스로 밝혀 놓았다. 『성모님께서는 복음화하는 교회의 어머니이십니다. 성모님이 안 계시면, 우리는 결코 새로운 복음화의 정신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p.216). 그것은 A.D. 431년에 에베소 공회에 의해 높임을 받기 시작했고, A.D. 600년에 가서야 인간들의 기도를 받기 시작했으며, A.D. 1854년이 되어서야 교황 피오 9세에 의해 죄 없이 잉태되었음(무염시태)이 선언되었고, A.D. 1950년에 교황 피오 12세에 의해 몽소승천(하느님의 부름을 받아 승천하여 “하늘의 여왕”이 되었음)이 선언되었으며, A.D. 1965년에 와서야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교회의 어머니”라고 선언된, 즉 스스로 신이 될 수 없고 인간의 말과 힘을 빌어야 신이 될 수 있는 『하늘의 여왕』(렘 7:18)의 교회이다. 『가난한 이들의 사회 통합』(p.151), 『공동선과 사회 평화』(p.172), 『평화에 이바지하는 사회적 대화』(p.183), 『신앙과 이성과 과학의 대화』(p.185), 『교회 일치를 위한 대화』(p.187), 『유다교와 맺는 관계』(p.189), 『종교 간 대화』(p.190), 『종교 자유 상황에 관한 사회적 대화』(p.194)를 프란치스코에게 “복음”이라고 가르치고, “토빗”과 “집회서”(p.157) 같은 성경도 아닌 외경을 경전으로 쓰게 한 이방 여신의 교회이다. 교황 프란치스코가 복음도 아닌 것을 위해 <복음의 기쁨>을 쓴 것은 『새로운 복음화의 별... 살아 계신 복음화의 어머니』(p.219)인 “성모 마리아”를 높이려는 데 있다. 이를 위해 『성모님께 기도합시다.』(p.221)라고 전 세계 카톨릭교도들에게 강권하여, 카톨릭식 우상 숭배 전파, 곧 그들의 거짓 복음화를 적극 추진하려는 그의 야망이 담겨 있는 것이다.

<복음의 기쁨>이란 책은 “마리아의 기쁨”을 이야기한 책이다. 성경대로 믿는 기독신앙과 단 한 군데도 닮은 데가 없는 이방 종교가 온 세상에 전파되어 “성모 마리아”가 높임을 받는 “기쁨”을 위한 책이다. 헬리의 딸이요(눅 3:23) 엘리사벳을 사촌으로 둔(눅 1:36), 인간 족보를 가진 한 순수한 여인의 이름을 사취하여 “하나님의 어머니” 행세를 하는 “가짜 마리아의 기쁨”을 위한 책이다. 그녀의 기쁨은 “다른 복음”의 기쁨이다. 프란치스코는 그 기쁨을 노래했다. 『그러나 우리뿐만 아니라 하늘에서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것 외에 어떤 다른 복음을 전한다면 그는 저주를 받으리라』(갈 1:8). 제아무리 “성모의 성모”라 해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아닌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게 된다. 저주받은 여인의 교황 프란치스코. 그가 이 땅에 남기고 간 것은 무엇인가? 청와대 연설, 성모승천대축일 미사, 아시아 청년대회 폐막미사, 시복식, 꽃동네 방문, 세월호 희생자 유족 세례, 광화문 카퍼레이드, 비바 파파(Viva Papa) “교황 만세,” 과연 그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드높이는 “복음”이 있었던가? 주의 모든 이름보다 크게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던가?(시 138:2) 죄인 프란치스코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안이 구원을 받으리라』(행 16:31).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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