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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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주의자의 신앙상담 <신앙생활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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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14년 10월호>

제목을 보아하니 <신앙생활119>(더드림)는 한국 교회 교인들의 “불난” 신앙에 불을 꺼 주고자 출간된 책인 듯싶다. 자고로 소방관이란 신고를 받고 출동한 곳에 가서 불을 꺼 줘야 소방관이다. 불난 곳에 물이 아닌 기름을 퍼붓거나 부채질을 해대고 있다면 그는 소방관이라 할 수 없다. <신앙생활119>라는 제목만으로는 한국 교회 신앙의 소방관 역할을 할 것 같지만, 그 속을 펼쳐 보면 기름을 붓고 부채질을 하는 것임을 알게 된다. 그 책은 박종순 원로목사(충신교회)가 국민일보에 기고했던 것을 모아 책으로 펴낸 것이다. 몇 가지 핵심적인 부분을 성경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천국에도 남녀 성 구별과 가정생활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박 목사는 『마태복음 22장 30절을 핵심 답으로 먼저 드립니다.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성별, 건강, 학벌, 결혼, 가정, 재물, 이런 것들은 세상살이에 필요한 것들일 뿐 영원한 천국 생활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천국은 성별도, 빈부의 차별도, 신분의 높낮이도, 결혼도 불필요합니다.』(p.63,64)라고 했다. 박 목사가 사용한 천국이라는 표현은 마태복음에 나오는 유대인들을 위한 천국을 말한 것이 아니다. 그가 말한 천국은 죽으면 가는 곳으로 여겨지는 천국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을 성경적인 표현과 연결시킨다면 주님 계신 셋째 하늘의 『하늘나라』(딤후 4:18)라 할 수 있겠다. 다른 모든 부차적인 것까지 다루자면 지면이 심히 모자라므로 하늘나라에서의 “성별”에 대해서만 이야기하자면 박 목사가 틀렸다. 하늘나라에서 성별이 없다면 그곳에서 모두 무성으로 살아간다는 얘긴데, “성경”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는다. 『부활 때에는 그들은 장가도 시집도 가지 아니하고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천사들과 같으니라』(마 22:30). 이 말씀은 부활한 그리스도인들과 하나님의 천사들이 무성이란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부활 때에는 장가도 시집도 안 가고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천사들과 같다고만 말씀하셨을 뿐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천사들은 어떠한 성을 가지고 있을까? 성경에 나오는 모든 천사는 젊은 “남성”이다. 아브라함이 마므레 평지에서 보았던 『세 사람』(창 18:2)은 “three men” 곧 “세 남자”였다. 세 남자 중 한 분을 아브라함은 『내 주여』(창 18:3)라고 불렀는데 이는 그중 한 분이 여호와께서 땅에 내려오실 때의 모습인 “주의 천사”이심을 의미한다. 하나님도 천사들도 모두 “남성”이다. 요한계시록 21:17에서는 새 예루살렘 성벽을 측량하는 천사를 『그』(he)라고 칭하고 있다. 신구약에 나오는 모든 천사는 “남성”이다. 그리스도인이 부활할 때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몸과 똑같은 서른세 살 반의 건장한 남성의 모습을 지니게 되어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과 일치하게 된다(롬 8:29, 요일 3:2). 박 목사는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모르기에 오해한 것이다(마 22:29).

둘째, 직장 사정상 담임목사가 강조하는 새벽기도회에 못 나간다는 질문에 대해 박 목사는 『전문가들의 견해에 따르면 하루 가운데 뇌 활동이 가장 건강하고 활발한 시간은 새벽 4~6시 사이라고 합니다. 성경 역시 새벽 시간을 중요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와 이스라엘 민족을 추격하던 바로와 그의 군대를 어지럽게 하신 시간이 바로 새벽이었고(출 14:24), 모세가 홍해 위로 손을 내밀고 하나님이 애굽 사람들을 바다 가운데 엎으신 시간 역시 새벽이었습니다(출 14:27). 여호수아와 백성들이 여리고성을 일곱 번 돌고 무너진 시간도 새벽이었고(수 6:15), 예수님이 부활하신 시간도 안식 후 첫날 새벽이었습니다(눅 24:1). 예수님도 새벽 미명에 한적한 곳으로 나가 기도하셨습니다(막 1:35)... 새벽기도는 한국 교회만 가능한 저력입니다... 새벽기도회에 참석하시고 낮 시간에 쉬는 시간을 갖도록 해 보십시오... 현재 상황에서 새벽기도를 드릴 수 있는 믿음과 용기, 건강과 결단을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기도(새벽기도)해야 된다는 목사님의 목회 방침을 수용하고 따를 수 있는 겸손과 믿음을 주시라고 기도하십시오.』(p.135,136)라고 했다. 박 목사는 성경에 나오는 온갖 “새벽”의 예를 가져다 붙이며 새벽기도회 참석을 그 역시나 강조했는데, 심지어 예수님께서 새벽에 나가 기도하신 것까지 예로 들며 질문한 독자를 옭아매었다. 한국 교회의 새벽기도는 성경의 그런 구절들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이 나라 교회들에 새벽기도회를 확산시키고 고착시킨 장본인은 故 길선주 목사였다. 그는 선도(仙道)의 삼영군신(三靈神君)에게 새벽에 기도드리던 이교도였는데, 그가 기독교로 개종한 뒤 그것이 교회의 새벽기도회로 전환되었던 것이다. 길선주는 기독교로 개종한 후 자신의 선도식 수행을 계속했고, 특히 새벽기도를 하고 선도식 체조를 했는데, 이 선도식 체조는 선도 수행의 필수 과정이었다고 한다. 1) 새벽 미명(未明)이 토속신앙에서는 신령한 존재들과 영적 교류를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시간으로 여겨졌기에 우리나라의 옛 여인들은 새벽마다 정화수를 떠 놓고 간절하게 비는 종교행위를 해 왔는데, 이를 본 길선주가 한국의 토속신앙의 모습을 교회로 가져와 그대로 실행했던 것이다. 2) 1906년 가을 평양의 장대현교회에서 길선주가 개인적으로 하던 새벽기도에 박치록이라는 인물이 함께했고, 한 달 후에는 수차례 당회에 청원한 결과 당회의 결의로 전 교회가 새벽기도회를 공식적으로 실행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교회의 정기적인 집회로 자리 잡은 첫 번째 사례였으며, 이렇게 시작된 새벽기도회가 1907년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던 것이다(월간 <성경대로믿는사람들> 통권 142호, 특집 『새벽기도회, 비성경적인 종교행위』, p.11 참조). 가뜩이나 잠이 부족한 피곤한 인생들을 비성경적인 새벽기도회로 끌어들이는 것이 성경적인 상담인 것인가? 책 표지 상단에 “막힌 가슴이 뻥 뚫리는 박종순 목사의 신앙상담”이라고 써 있는데, 박 목사의 상담을 받고서 “씻고 자리에 누우면 도저히 새벽 5시 새벽기도회에 나갈 수가 없다”는 피상담자가 그의 피곤한 몸을 이끌고 기도회로 발걸음을 옮길 때에 그의 막힌 가슴이 뻥 뚫리겠는지, 더 막혀서 질식해 버리겠는지 스스로 판단해 보도록 하라.

셋째, 기도원에서 방언을 강요한다는 질문에 대해 박 목사는 『방언은 성령님이 주시는 여러 가지 은사 중의 하나임엔 틀림없습니다. 방언은 유익한 은사입니다. 그러나 구원의 조건은 아닙니다.』(p.169)라고 했다. 방언과 신유에 관한 다른 질문에 대해서는 『성령님의 은사 중에서 방언은 가장 빨리 본인이 영적으로 체감할 수 있는 좋은 은사입니다. 방언은 구원의 확신과 하나님의 임재를 뜨겁게 확인시켜 줍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맺어 주고 기도의 시간과 깊이를 더해 줍니다. 그러나 방언을 못하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든지 성령 체험을 못했다고 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p.297), 『신유란 내가 고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로 고치는 특별한 은사입니다.』(p.299)라고 했다. 박 목사는 사도들 시대 이후로 중단된 방언과 신유를 여전히 피상담자에게 강조했다. 방언과 신유는 “믿지 않는 유대인들을 위한 표적”이었다(고전 1:22; 14:22). 사도들 시대 이후로는 중단되었다는 것을 사도 바울의 예를 통해서 발견할 수 있다. 사도 바울은 다른 사도들과 동일하게 『사도의 표적들』(고후 12:12)을 행했었는데, 방언들을 말하고(고전 14:18), 뱀들을 집으며 독에 대해 면역력을 갖고(행 28:3-5), 병자에게 안수하여 치유하는(행 19:11,12; 28:8,9) 표적이 그의 사역에 동반되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바울이 표적을 행하는 일에 문제가 발생했다. 『이제부터는 물만 마시지 말고 네 위장과 자주 앓는 질병을 위하여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딤전 5:23). 디모데에게 건강 회복을 위해 포도주를 약으로 사용할 것을 권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에게 주어졌던 신유의 표적에 문제가 생겼던 것이다. 이뿐 아니라 디모데에게 보내는 또 다른 서신에서 자신의 신유의 표적에 문제가 있음을 한 번 더 드러낸다. 『에라스토는 고린도에 머물러 있고, 트로피모는 몸이 아파서 밀레토에 남겨 두었느니라』(딤후 4:20). 사도 바울이 트로피모를 밀레토에 남겨 둔 이유는 트로피모가 “몸이 아파서”였다. 신유의 은사를 지녔던 “사도”인데 트로피모를 치유할 수 없었다. 사도의 표적들이 사라져가고 있었던 것이다. 유대인들의 거부에 부딪힌 “하나님의 구원”이 결국 이방들에게로 보내졌을 때, 그와 더불어 믿지 않는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했던 표적들 또한 더 이상 필요 없게 된 것이다. 따라서 현 교회 시대에 방언과 신유를 실행한다면 비성경적인 실행이 된다. 지금 그 두 은사를 가르친다면 그 사람은 거짓 교사가 된다.

마지막으로, 구원받을 자는 미리 정해진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박 목사는 『구원받을 자와 구원받지 못할 자가 예정되어 있다는 것은 맞습니다... 아무리 택한 사람들을 위해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지만 여기에는 반드시 ‘믿음’이라는 조건이 붙어 있습니다. 선택받았어도 안 믿으면 구원받지 못한다는 논리가 성립합니다... 선택하고 믿는다는 개념은 서로 상반되는 것이 아니라 보완적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이해하면 되겠습니다. 즉, 선택받은 사람은 모두 믿는 사람이 될 것이고, 믿는 사람은 모두 선택받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 그러므로 선택은 하나님 편에서만 알고 계시는 것이며, 우리는 오직 믿음을 갖고 또 믿음을 갖도록 사람들을 인도하면 되는 것입니다. 누가 선택받고 안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만이 아시는 것입니다. 』(p.192,193)라고 했다. 박 목사는 칼빈주의자인데 자신이 믿는 그 “모순덩어리”를 누군가에게 가르치려 하니 혼란에 빠진 모습을 보여 주었다. 말하자면 그는 “선택받았어도 안 믿으면 구원받지 못한다는 논리가 성립합니다.”라고 해 놓고서는 “선택받은 사람은 모두 믿는 사람이 될 것이고, 믿는 사람은 모두 선택받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라고 한 것이다. 이게 무언가? 칼빈의 교리에 따르면, 인간이 구원받기 위해 구원의 조건인 믿음은 전혀 필요 없게 된다(무조건적인 선택). 하나님께서는 “죄인이 의지까지 타락하여(전적 타락)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없기에” 창세 전에 그들을 강제적으로 미리 택하여 구원받도록 예정해 놓으셨다(저항할 수 없는 은혜). 그렇기에 믿든 안 믿든 구원받기로 정해진 자들은 자동적으로 구원받게 된다. 여기에 “믿음” 운운하며 다른 설명을 곁들여 칼빈의 교리가 성경적인 것처럼 치장한다면, 그것은 그의 교리를 옹호하기 위한 말장난에 지나지 않게 된다. 박 목사가 바로 그 일을 한 것이다. 말이 안 되는 것을 되는 것처럼 설명하려고 하니 매우 혼미한 상담을 해 버리고 말았다. 칼빈주의자는 결코 성경적인 신앙상담을 할 수 없다.

이외에도 박 목사는 그 책에 비성경적인 상담을 해놨는데 지면 관계상 모두 다룰 수가 없다. 한국 교회에는 신앙상담을 받아야 할 사람들이 참으로 많지만, 누구보다도 먼저 상담을 받아야 할 사람들은 목사들이다. 성경을 가르쳐서는 안 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도 아닌 변개된 성경으로 진리가 아닌 것을 진리인 양 가르쳐 왔기 때문에 교인들의 신앙이 늘 불이 난 것처럼 지옥의 위험에 처해 있다. 바로 그 잘못된 신앙의 불을 끄기 위해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이 말씀의 물을 가지고 도착했다(엡 5:26). 우리가 뿌리는 말씀을 받으면 불난 한국 교회도 정신을 차리고 올바른 신앙으로 주님을 섬길 수 있게 된다. BB

(각주)--------------------------

1) 이덕주, 한국 토착교회 형성사 연구, (서울 :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01), p.284.

2) 이덕주, 초기 한국 기독교사 연구, (서울 :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02), p.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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