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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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자와 성도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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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2년 11월호>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생명을 내어 놓으나』(요 10:11).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무엇을 이루느냐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누구를 만나느냐이다. 어떤 스승, 친구, 배우자, 목사, 지도자를 만나느냐에 따라 인생이 바뀐다. 그 가운데 성경에서 가장 귀하게 여기는 관계는 목자와 성도의 관계이다.


하나님께서는 관계를 통하여 일하신다. 성도의 성숙은 관계를 통하여 이루어지는데, 아무리 개인적으로 탁월한 사람이라도 목자와 양의 관계를 떠나서는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갈 수 없다. 신앙생활이란 정상적인 관계를 맺고 그 관계를 잘 지키며 위기를 극복하여 더 발전시키는 과정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온전하게 되고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목자와 성도 간에 건강한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목자와 성도는 서로 헌신해야 하는 사랑의 관계이다.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기 위해 오신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양들을 위해서 자기 생명을 내어 놓는 선한 목자로 설명하셨다(요 10:11). 그 선한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는 참된 양은 그 목자의 인도를 받음으로써 생명을 얻을 뿐만 아니라 그 생명 안에서 풍성한 삶을 누린다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도둑은 오직 도둑질하고 죽이며 멸망시키려고 오지만, 내가 온 것은 양들로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 함이라』(요 10:10). 주님께서는 이 목양의 관계를 발전시켜서 포도나무와 가지들의 비유를 말씀하신다. 가지의 목적은 열매를 맺는 것인데 이 열매 맺음은 가지가 포도나무를 떠나서는 불가능하다. 주님께서는 주님과 성도의 연합과 건강한 교제의 중요성에 대해 말씀하셨으며(요 15:5,6), 이 사역을 궁극적으로 목자에게 위임하셨다. 『그가 어떤 사람들은 사도로, 어떤 사람들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들은 복음 전도자로, 어떤 사람들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엡 4:11). 주님께서 과거에 사도와 선지자, 복음 전도자(부흥사들)로 일하셨다면, 교회 시대의 마지막 날들에는 “목사와 교사”를 통해 일하신다. “목사와 교사”는 두 사람이 아니라, 한 사람, 곧 교회의 목자를 일컫는다.


성도가 구원받은 목적인 “온전한 사람”이 되어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를 것인가(엡 4:13), 그렇지 못할 것인가는 전적으로 그 성도가 목자와 갖는 관계에 달려 있다. 목자에 대한 헌신적인 사랑은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을 통해 볼 수 있다. 바울이 갈라디아에서 복음을 전할 때는 안팎으로 최악의 상태였다. 박해로 인한 탈진 상태에 이르러 거의 죽게 된 데다가 건강까지 악화되었다. 게다가 변변치 못한 외모에 어눌한 말주변으로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하였는데, 이방인들로부터의 박해뿐만 아니라 동족인 유대인들로부터도 배척을 받았다.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은 그런 바울을 반대하거나 공격하지 않고 오히려 기쁘게 받아들였다. 그들은 바울을 조금도 외모로 판단하지 않았고 전혀 해롭게 하지 않았다. 『나의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을 사람들의 외모로 취하지 말라』(약 2:1).

갈라디아 성도들은 목자의 약함을 이해하고 사랑하여 바울을 영접했는데 그야말로 헌신적으로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가 처음에 육체의 연약함 중에도 어떻게 너희에게 복음을 전파하였는지 아느니라. 또 너희는 나의 육체 안에 있는 나의 시련을 무시하거나, 거절하지도 아니하였고 오히려 하나님의 천사같이 곧 그리스도 예수같이 나를 영접하였도다. 그렇다면 너희가 말한 복이 무엇이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다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서 내게 주었으리라』(갈 4:13-15).


갈라디아 성도들이 바울을 그렇게 헌신적으로 사랑했던 이유는 복음 때문이었다. 복음으로 맺어진 목자와 성도의 관계는 영적인 일치를 이루는 강한 결속의 관계이며, 극복하지 못할 문제가 없다. 갈라디아 성도들은 바울의 약점을 극복하였을 뿐만 아니라 바울을 하나님의 천사같이 영접했는데, 이는 마치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복음을 전하실 때 그분을 영접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바울을 영접했다는 뜻이다. 은혜의 복음에 순종한 갈라디아 성도들은 바울의 가르침을 존중했다. 결과적으로는 그런 관계가 그들에게 참으로 유익이 되었다. 『너희를 다스리는 자들에게 순종하며 복종하라. 그들은 너희 혼들을 위해 깨어 있기를 자기들이 마땅히 설명해야 할 것처럼 하느니라. 그들로 기쁨으로 하게 하고 슬픔으로 하지 않게 하라. 이는 그것이 너희에게 유익이 없음이라』(히 13:17).


목자와 성도는 서로 책임을 지는 관계이다. 그런데 그렇게 좋았던 갈라디아 성도들과 바울의 관계가 어느 날 변하게 되었다. 눈이라도 빼서 줄 것 같이 바울을 존경하고 사랑했던 갈라디아 성도들의 태도가 완전히 변한 것이다. 그들은 신뢰와 사랑을 잃어버린 정도가 아니라 대적하는 원수가 되었다. 무엇이 바울과 갈라디아 성도들을 원수 관계로 만들었는가? 바울은 자신이 진리를 말함으로써 그들의 원수가 되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너희가 말한 복이 무엇이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다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서 내게 주었으리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진리를 말함으로써 너희의 원수가 되었느냐?』(갈 4:15,16)


바울에게서 복음을 듣고 은혜를 받아 눈이라도 빼줄 것 같았던 갈라디아 성도들이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에 빠진 이후로 바울을 대적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바울에 대한 존경심과 사랑을 잃어버린 결과, 자신들을 향한 바울의 역할은 끝났기에 그가 이제 더 이상 필요 없다고 여긴 것이다.
이처럼 성도가 성장하지 않는 한 목자와의 관계에는 한계가 있다. 성장하지 않은 연약한 성도들은 무엇이 자신에게 유익이 되고 해가 되는지, 누가 진정으로 자신을 사랑하는지 분별하지 못할 때가 있다. 성장이 멈춘 그리스도인의 비참함이 여기에 있다. 누가 아군이고 누가 적군인지 구별하지 못한다. 누가 교회를 지키려 하는지, 누가 교회를 파괴시키려 하는지 구별하지 못한다. 그 배후에는 마귀가 사주하는 마귀의 종들이 있는 것이다. 『그들이 너희에게 열성을 내는 것은 좋은 의도가 아니고 다만 너희를 떼어내어 너희로 그들에게 열성을 내게 하려 함이니라』(갈 4:17). 이것이 마귀의 궁극적인 목표이다. 마귀는 목자와 성도의 좋은 관계를 이간질시킴으로 양들을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이다(요 10:10).


거짓 교사들이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다가간 것은 그 성도들과 친근한 인간적인 관계를 가짐으로써 바울과 갈라디아 성도들 간의 관계를 분리시키기 위해서였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얼마든지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교회의 모임이 인간적인 모임이 되다 보면 그 가운데 으뜸이 되기를 좋아하는 디오트레페 같은 “영향력 있는” 사람의 목소리가 목자의 말이나 성경 말씀보다 더 크게 들리게 된다. 『내가 그 교회에 편지를 썼으나 그들 중에 으뜸이 되기를 좋아하는 디오트레페가 우리를 영접하지 아니하니라. 그러므로 내가 가면 그가 행하는 일들을 기억하리라. 그가 악한 말로 우리를 헐뜯고, 그것으로도 만족하지 않고 형제들도 영접하지 아니하며, 그렇게 하고자 하는 자들을 방해하여 교회에서 내어쫓는도다. 사랑하는 자여, 악한 것을 따르지 말고 선한 것을 따르라.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나,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을 보지 못하였느니라』(요삼 1:9-11).


마귀는 우선적으로 목자의 인격을 흠집 내어 신뢰를 무너뜨리는데, 이는 에덴에서 이브를 시험할 때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신뢰를 실추시켜 믿지 못하게 했던 술책과 같다. 목자와 성도 간의 관계가 어려워지는 데는 목자의 책임도 다분히 있다. 영적 아버지로서의 자격을 갖추지 못한 채 아버지가 될 때 그 자녀는 불행해질 수밖에 없다. 목자와 성도 간에 발생하는 문제들 가운데 적지 않은 경우가 자격 없는 육신적인 목자 때문이다. 어느 시점부터 사역의 동기가 변질되어 부도덕해지거나 더러운 이익 때문에 하나님께서 맡기신 양무리를 마지못하여 돌보게 되고, 자신이 추구하는 유익을 얻기 위해 위로부터 부여받은 영적 권위를 악용하여 교회를 지배하게 될 때 성도들은 고통스럽다.


목자는 하나님의 피로 사신 그분의 교회를 돌보고 지도하는 영적 지도자이다. 주님께서 제시하신 목표로 성도들을 인도하기 위해서 『마치 아버지가 자기 자녀들에게 하듯이』(살전 2:11) 분명하고 확고한 가르침과 더불어 어머니와 같이 자녀들을 향한 온화한 친화력과 감화력이 있어야 한다. 『오히려 너희 가운데서 마치 유모가 자기의 친자녀들을 소중히 여김과 같이 온화하였느니라』(살전 2:7). 목자의 모본이 되는 바울은 정직한 마음으로 양무리를 먹이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과는 무관하게 사람들로부터 인기를 얻어 자신을 따르게 하는 인기주의자가 되려 하지 않았고, 사람들에게 높은 관심을 구걸하는 목사들처럼 더러운 농담도 하지 않았다. 또한 바울은 자신에게 관심을 집중시키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희화하는 수작들도 피하였을 뿐만 아니라, 거듭나지 못한 자들의 귀를 즐겁게 해 주고자 인문학, 심리학 등 인본주의에 호소함으로 진리를 희생시키는, 아첨하는 설교를 하지 않았다.


바울이 전했던 메시지는 간교가 없고 참으로 진실했다. 설교와 가르침을 통하여 자신이 추구하는 특정한 것을 얻어낼 목적으로 겉으로는 그렇지 않은 것처럼 숨기면서 설교하지 않았다. 사도로서의 권위를 가지고 있었던 바울은 그 권위를 자신을 위해 사용하지도 않았고 요구하지도 않았다. 오로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목적으로,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성도들을 섬기기 위해, 자기에게 주어진 권위를 사용했다. 이것은 바울이 그의 평생 동안 하나님의 양무리를 섬기는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분명한 인식을 갖고 살았음을 의미한다(살전 2:1-12).


교회의 목자가 목자로서 책임을 다하고 성도가 성도로서 책임을 다할 때, 그 둘은 서로가 뜨겁게 사랑하며(행 20:37, 벧전 1:22) 함께 위기를 극복해 나가는 성숙한 동역 관계를 이루게 된다.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듯 사람은 사람을 통해 성장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목자와 성도의 관계에 감사하고 그 아름다운 관계를 어떤 일이 있어도 결코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모든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과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화평의 띠 안에서 성령의 하나 됨을 지키도록 열심히 노력하라』(엡 4:2,3).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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