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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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가 갖는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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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0년 01월호>

새해만 되면 이곳저곳에서 들뜬 마음에 "희망"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많이 본다. "새해에는 복 많이 받으세요."라든지 "소원하는 바가 성취되기를 바랍니다."와 같은 덕담을 서로 주고받기도 한다. 사람들의 이런 마음을 잘 간파한 세상 교회들은 새해를 맞는 시점에서 소위 "송구영신예배"를 드린다. 여기에는 상당히 많은 문제가 있는데, 특히 "기복 신앙"을 부추긴다는 점이 그렇다. 교인들은 이 예배를 한 해 동안 복 받을 수 있는 수단으로 여기고 있기에, 무슨 일이 있어도 이때만큼은 참석을 해야 한 해가 잘될 것으로 믿는다. 그런데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롬 14:5) 여기면서 특별한 의미와 효력을 부여하는 것은, 로마카톨릭에서 미사나 의식들에 의미를 두고 효력을 부여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하나님보다 어떤 날이나 의식을 더 신뢰하는 "미신적인 행위"인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계명들을 교리로 가르치는 자들을 『그들이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마 15:9)라고 하면서 책망하셨다.

송구영신예배의 또 다른 문제는 헌금을 거둘 목적으로 예배가 이용된다는 점이다. 예배 시간에 목사들은 교인들에게 기도 제목을 헌금 봉투에 써내게 하는데, 결국 축복 기도를 받고 싶은 사람은 헌금을 내야만 하는 것이다. 기도를 돈과 연관시키는 이런 작태는 거짓 종교에서나 볼 수 있는 악하고 가증한 짓이다. 마치 점쟁이에게 복채를 내고 점을 보듯이 헌금을 내고 축복 기도를 받는 일은 샤머니즘의 한 형태이다. 특히 교황과 사제들이 부를 축적하기 위해 그런 사악한 짓을 자행해 왔다. 『위선자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아, 너희에게 화 있으리라! 이는 너희들이 과부들의 집을 삼키며 남들에게 보이고자 길게 기도하기 때문이라. 그러므로 너희는 더 큰 심판을 받으리라』(마 23:14). 변개된 개역성경과 개역개정판에는 이 구절이 삭제되고 없다.

언제 하나님께서 돈 없는 사람들은 나오지 말라고 하셨던가? 『아, 너희 목마른 자들은 누구든지 물들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으라. 정녕, 와서 돈 없이 값없이 포도주와 젖을 사라』(사 55:1). 헌금에 "이기적인 타산"이 결부되면 그것은 더 이상 헌금이 아니다. 헌금은 하나님께 무엇을 받아 내기 위한 수단이나 뇌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런 불순한 생각을 갖게 하는 것이 바로 세상 교회들의 송구영신예배인 것이다.

성경대로 믿는 교회는 이런 헛된 예배를 드리지 않는다. 물론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으면서 금년에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새로운 내년에도 하나님의 선하신 손길을 기대하며 소망하는 일은 아름다운 일이다. 이제 올해도 지나가고 어김없이 새해가 밝는다. 그렇다면 이 새해가 세상 사람들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고,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또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인가?

우선 세상 사람들은 새해를 "희망"의 의미로 바라본다. 12월 31일 어두운 밤에 출발해서 1월 1일 새벽녘에 정동진역에 도착하는 열차는 사람들로 북적이고, 해돋이로 유명한 다른 명소들도 인산인해를 이룬다. 그들이 몰려든 목적은 오직 새해에 떠오르는 "첫 해"를 보기 위함이다.

물론 수평선 위로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는 일은 즐거운 일이다. 『참으로 빛은 달콤하며 눈으로 태양을 바라보는 것은 즐거운 일이라』(전 11:7). 하물며 새해에 첫 해가 떠오르는 모습을 바라보는 일은 얼마나 더 즐겁겠는가! 하지만 아무리 그 해를 바라보며 즐거워한다 해도, 또한 해를 바라보며 간절히 소원을 빌어 본다 할지라도, 그 해가 처음 떠오르는 날로부터 마지막 지는 날까지의 전 인생을 돌아보면 어두운 날들이 훨씬 더 많다. 그리고 그 어두운 날들은 해를 거듭할수록 더하면 더하지 덜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사람이 여러 해를 살고 그 모든 것들을 즐거워한다면, 그에게 어두움의 날들을 기억케 하라. 이는 그 날들이 많을 것임이라. 장래 일은 모두가 헛되니라』(전 11:8). 말하자면 세상 사람들에게 있어서 또다시 새해를 맞는다는 것은 고생으로 가득 찬 "어두운 해"를 한 번 더 맞는 것 외에는 아무 의미도 부여할 수 없는 것이다.

성경은 사람이 고생하려고 태어났을(욥 5:7) 뿐만 아니라 해 아래서 하는 모든 수고가 헛되다고(전 1:14) 말씀하는데, 이는 지극히 "부정적"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새해가 되었다고 마냥 "희망"만 이야기할 게 아닌 것이다. 교회들 역시 그저 기복 신앙만을 부추기고 긍정의 힘이나 적극적인 사고 따위를 권장할 때가 아니다. 한번 지난해를 돌아보라! 그때도 사람들은 희망을 안고 새로운 한 해를 시작했을 것이다. 그런데 마주한 현실은 어떠했는가? 1년 365일 중에서 마음 편히 속 시원하게 웃을 수 있었던 날이 얼마나 되었던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사건 사고들이 계속되면서 대부분 근심과 걱정, 두려움, 고통 등의 나날들을 보내 왔을 것이다. 그런 가운데 또다시 한 해가 저물고 말았다. 한숨이 절로 난다! 그러다가 또다시 새해를 맞았고 또다시 희망을 이야기하며 즐거워한다.

이처럼 마냥 즐거워할 일만이 아닌 이유는, 그렇게 한 해가 가고 또 다른 한 해가 오는 것은 자신을 향한 심판의 날이 그만큼 더 가까이 다가왔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오 청년이여, 네 젊음을 즐거워하라. 네 마음은 네 젊은 날들을 기뻐하며 네 마음의 길들과 네 눈의 보는 대로 걸으라. 그러나 너는 알지니 이 모든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너를 심판하시리라』(전 11:9). 2020년 새해에도 세상 사람들은 각기 자기 눈에 보기 좋은 대로 쾌락과 즐거움을 추구하며 자기의 길을 걸어갈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절대 간과해서는 안 될 일이 있으니, 곧 하나님께서 그 모든 길들을 심판하실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처럼 구원받지 못한 세상 죄인들에게는 새해를 맞는다는 것이 자신의 인생에 대해 결산을 보는 날, 곧 심판의 날이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왔음을 의미하게 된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가 아직 구원받지 않은 상태라면, 먼저 새해가 밝아오는 이 시점에 여전히 살아 있다는 사실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아직은 하나님께서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를 주고 계시니까 말이다. 『말씀하시기를 "기뻐 받아들여진 때에 내가 네 말을 들었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도다." 하였으니, 보라, 지금이 기뻐 받아들여진 때요, 보라, 지금이 구원의 날이라』(고후 6:2).

구원받는 일만큼은 절대 나중으로 미루어서는 안 된다. 지금 당장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해야 한다. 『너는 이제 너의 젊은 날에 곧 재앙의 날이 이르지 않고 "나에게는 즐거움이 없다."고 말할 해가 가까워 오기 전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해나 빛, 달이나 별들이 어두워지지 않은 때, 비 뒤에 구름이 다시 돌아오지 않은 때에 그리하라』(전 12:1,2). 그러므로 구원받지 않은 사람에게 주어진 새로운 한 해는 창조주를 기억하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고 구원받아야 할 해인 것이다. 새해에 진정으로 복을 받기 원한다면 "복음"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보다 더 큰 복은 없기 때문이다. 『말하기를 "죄악들이 용서받고 죄들이 가려진 사람들은 복이 있고 주께서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라고 하였느니라』(롬 4:7,8).

한편 거듭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새해는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그리스도인도 "심판"이 가까워 오고 있다는 것은 세상 사람들과 똑같다. 다만 심판의 시기나 내용이 다르고, 심판을 기다리는 마음 또한 사뭇 다르다. 이는 거듭난 성도는 이미 이긴 경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이런 일들을 너희에게 말한 것은 너희가 내 안에서 화평을 지니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할 것이나 기운을 내라.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요 16:33).

물론 그리스도인의 인생 역시 불신자들과 마찬가지로 해 아래 있는 동안에는 해가 거듭될수록 "고생"하는 일에 더하여 "환난"도 더 많아진다. 하지만 그렇다고 "희망"까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이야말로 해가 거듭될수록 참된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들인데, 이는 "복된 소망"이 더 가까이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다. 『이뿐만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서도 즐거워하나니 환난은 인내를 이루고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라』(롬 5:3,4).

그리스도인에게는 심판이 가까이 다가온다는 사실이 오히려 기쁨과 즐거움이 될 수 있다. 운동 경기를 생각해 보라! 경기를 이기고 있는 팀의 입장에서는 심판이 호각을 부는 종료 시간이 가까워 오는 것을 보는 일이 분명 즐거운 일이다. 그래서 한시라도 빨리 종료 휘슬이 울리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종료 시간이 가까워진다는 것은 공의로운 심판주로부터 상을 받게 될 시간도 가까워진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또다시 새로운 한 해를 맞는다는 것은 그만큼 주님을 만날 날이 가까워졌다는 뜻이 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반드시 내가 속히 오리라.』(계 22:20)라고 말씀하신 대로 이 땅에 빨리 오시고 싶을 것이다. 마치 감독과 선수들이 경기를 마친 이후에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며 서로 얼싸안고 즐거워하는 순간을 기다리듯이 말이다! 이러한 순간을 기다리고 있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연히 『아멘. 그러하옵니다.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 22:20)라고 화답할 것이다. 주님께서 오실 때, 믿음의 경주를 끝까지 마칠 때까지 최선을 다해 멋진 경기를 펼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영광스러운 면류관들과 보상이 주어진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새롭게 맞은 한 해를 멋진 경기를 보여 줄 수 있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새해가 갖는 의미이다. 그러나 새해에도 여전히 세상 사람들처럼 육신의 쾌락과 즐거움을 위해 자신의 눈에 보기 좋은 대로 살아간다면 그 결말이 어떠하겠는가?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상은 고사하고 "수치"(요일 2:28)와 더불어 엄청난 "손해"(고전 3:15)를 당하게 될 것이다.

눈을 들어 밭을 보라! 복음을 통해 주님께로 이겨 와야 할 혼들이 너무나 많다. 그들을 그냥 내버려 두면 올해가 그들의 마지막 해이자 심판의 해가 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정녕 우리에게는 "화"가 있게 될 것이다!(고전 9:16) 새해는 밝았는데 아직 주님께서 안 오셨는가? 그렇다면 "상"을 받을 준비를 할 수 있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성경은 교회 시대를 "밤"으로(막 13:35,36), 주님의 오심을 태양이 솟아오르는(시 19:5, 말 4:2) "아침"(호 6:3)으로 묘사하고 있다. "새해"는 왔으나 아직 "아침"이 오지 않았다고 해서 실망하지 말라! 그날은 반드시 올 것이다. 다만 올 한 해에도 잃어버린 혼들을 구원하는 일에 있어서, 신실한 경주자들이 될 수 있도록 『화평의 복음을 준비한 것으로』(엡 6:15) 신발 끈을 단단히 동여매도록 하자!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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