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신학논단 분류

요한계시록에 눈뜬장님인 무천년주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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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19년 10월호>

성령님께서 주시는 조명으로 말씀을 해석하는 사람과 성령님께서 빛을 꺼 버리셔서 육신의 생각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는 사람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전자는 성경을 바르게 깨달아서 성경 해석에 오류가 없다는 것이고, 후자는 성경의 진리를 혼잡케 하여 그에게서는 진리에 관한 한 어떤 것도 배울 수 없다는 것이다. 『욕망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분리된 사람은 모든 지혜를 찾아 혼잡케 하느니라』(잠 18:1). 인간의 욕망은 몹시도 이기적이어서 욕망의 주체인 스스로를 분리시키고, 자신이 욕망했던 모든 지혜를 찾아 닥치는 대로 혼잡케 한다. 욕망은 하나님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게 하고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 욕망하는 자가 추구하는 지혜는 하나님의 뜻을 실행하는 것과 무관하며, 자신만의 육신적인 세계를 구축하여 사람들의 관심과 선망의 대상이 되려는 것에 그 목적이 있다. 말하자면 거미가 자기 손으로 왕궁을 지탱하듯이(잠 30:28), 그와 같은 작은 세계의 군주가 되어 거미줄에 걸려든 무지하고 눈먼 먹잇감을 어느 누구의 간섭도 없이 낚아채려는 데 인생을 쓰는 것이다. 『오 주여, 악인의 욕망들을 허락하지 마시고 더욱이 그의 악한 꾀는 허락하지 마시사 그들로 자고하지 못하게 하소서. 셀라』(시 140:8).

필자는 최근 모 기독교 신문에 요한계시록을 가르친다는 어떤 사람의 기사가 게재된 것을 보았다. 신문에 따르면, 30년 이상 요한계시록에 깊은 관심을 갖고 공부한 사람이었는데, 처음엔 세대주의적인 해석을 붙들었다가 그것을 완전히 버렸고, 그 후 개혁신학을 개인적으로 공부하면서 요한계시록에 관한 해석 방법으로 세대주의적 해석 외에 다른 해석법이 있음을 알게 되어 성경 전체와 요한계시록에 관한 관점을 새롭게 형성했다고 한다. 한 개인이 선택한 길이 진리의 길을 대변하는 것이 아님에도, 신문은 그의 인생을 마치 진리를 찾아낸 천로역정처럼 소개했다. 사람에게 옳게 보이는 길이 있으나 그 끝은 죽음의 길들임을 모르는가?(잠 16:25)

그는 소위 요한계시록에 관한 해석 방법으로, 예언이 성취되는 시점을 기준으로 "과거주의"(모두 과거에 일어난 일), "미래주의"(재림과 재림 후에 일어날 일), "역사주의"(재림 이전에 일어날 일), "상징주의"(선악 간의 투쟁을 상징적으로 묘사) 해석이 있음을 언급했다. 그러면서 미래주의 해석법은 요한계시록이 예수님의 재림과 관련된 종말에 대한 사건임을 상기시킴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고 준비하는 데 도움을 주는 장점이 있다고 했지만, 요한계시록을 일방적으로 미래의 종말론적 사건으로 한정함으로써 요한계시록이 가지는 1세기 당시의 역사적인 문맥이나 교회사 전체에 대한 관심을 약화시키는 단점이 있다고 말했다. 이것이 그가 "세대주의를 완전히 버린" 이유였는데, 사실 요한계시록의 구조에 관한 전적인 무지로 인해 그런 어리석은 결단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요한계시록을 해석할 때 중요한 것은 그 책이 기록될 당시인 A.D. 91-96년경의 역사적 문맥이 아니다. 왜냐하면 사도 요한이 그 1세기에 팟모 섬에 유배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성령님에 의해 초자연적으로 이동하여" 이르게 된 시점은 "미래의 주의 날"이기 때문이다. 『내가 주의 날에 성령 안에 있었으며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내 뒤에서 들었는데 말씀하시기를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그러므로 네가 보는 것을 책에 써서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 곧 에베소와 스머나와 퍼가모와 두아티라와 사데와 필라델피아와 라오디케아에 보내라." 하시더라』(1:10,11). 사도 요한은 "미래의 주의 날"로 초자연적으로 이동하여 『그러므로 네가 본 것들과 현재 있는 일들과 이후에 일어날 일들을 기록하라.』(1:19)라는 명령을 들었다. "주의 날"은 성경에서 대환란과 재림과 연관된 두려운 날이기에, 사도 요한이 성령님에 의해 미래의 재림 때로 이동한 것이 분명하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미래로 이동한 요한에게 『 네가 본 것들 과 현재 있는 일들 과 이후에 일어날 일들 』 세 가지를 기록하라고 지시하셨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① "네가 본 것들"은 미래의 그 시점에서는 지나간 "과거"가 되고(1-3장,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로 대변되는 교회 시대), ② "현재 있는 일들"은 요한이 가 있는 그 미래에 "현재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말하며(4-19장, 대환란과 재림), ③ "이후에 일어날 일들"은 "재림 이후에 있을" 천년왕국과 영원 세계를(20-22장) 뜻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도 요한에게 기록하라고 지시하신 내용이다. 하나님의 주된 관심은 분명 "미래의 주의 날"에 있기 때문에, 자연히 요한계시록이 기록될 당시인 1세기와 교회 시대에 관한 내용과 해석은 그 비중이 약한 것처럼 보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은 몰지각한 그의 오해와 다르게 2장과 3장에서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를 통해 교회 시대의 행로를 영적으로 정확하게 계시하고 있으며, 그 2천 년의 기간에 교회들에서 일어날 일들에 관해 풍성한 진리를 깨우쳐 주고 있다. <피터 럭크만의 주석서 요한계시록>을 읽어 보라. 성경에서 요한계시록보다 교회 시대를 현실적으로 잘 계시한 책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성경을 읽는 사람이 그 책의 주인공이신 예수 그리스도보다 높을 수는 없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관심을 가지신 것보다 해석자 자신의 관심을 우위에 둘 수는 없는 것이다. 주님께서 주의 날에 관심을 가지셨다면, 그분의 책을 읽는 사람 역시 주의 날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주의 날은 요한에게 그와 같은 명령을 내리신 주님 자신의 재림과 연관된 날이 아니던가? 그분께서 주의 날, 곧 그분의 날에 관심을 더 두시고, 더 많은 관심을 요구하신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그날"은 구약 시대부터 줄곧 예언되어 왔던 날이다(사 2:12; 13:6,9, 겔 30:3, 욜 1:15; 2:11; 3:14 등). 그렇기에 성령님께서는 교회 시대(1-3장)나 천년왕국 및 영원 세계(20-22장)에 비하여 주의 날(4-19장)에 대해 "다섯 배"나 더 많은 지면을 할애하신 것이다!

본 논단에서 다루고 있는 문제의 인물은 "네 가지 천년왕국설의 공헌"이란 것에 관해 이렇게 정리했으니, 즉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예수님께서 천년왕국 전에 오심)은 종말론에 대한 관심을 일으켰고, "역사적 전천년설"(교회가 환란을 통과하여 예수님의 재림을 맞이함)은 하나님의 주권과 능력을 강조했으며, "후천년설"(예수님께서 천년왕국 후에 다시 오심)은 세계 복음화에 대한 관심과 노력에 공헌했고, "무천년설"(문자적인 천년왕국은 없음)은 영원한 천국,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강조와 역사에 대한 균형 잡힌 실제적 관점을 제공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신의 견해는 "무천년설"인데, 후천년설과 전천년설은 둘 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일어나는 일을 너무 앞당겨서 적용한다는 점에 동일한 문제점이 있다고 지적했다.

필자는 지면 관계상 개혁신학(칼빈주의)을 공부했다는 이 어리석은 무천년주의자의 말을 그 일부만 인용했다. 사실 그가 추종하는 존 칼빈은 요한계시록을 해석하지 못했다. 칼빈은 요한계시록에 있어서 눈뜬장님이었던 것이다. 그가 문제시한 후천년설과 전천년설 중에 "전천년주의"가 성경적인 관점인데, 분명 주님께서는 천년왕국 이전에 재림하셔서 그분의 왕국을 수립하실 것이다. 무천년주의자들은 천년왕국의 "천 년"을 문자적으로 보지 않고 상징적으로 보기 때문에, 그들이 말하는 천년왕국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이후로 재림 때까지 펼쳐지는 사실상의 "무한정한" 막연한 기간을 의미한다. 그가 "전천년주의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일어나는 일을 너무 앞당겨서 적용한다."라고 말한 것은 바로 이와 같은 해석상의 오류에서 기인한다. 전천년주의적 세대주의는 천년왕국의 천 년에 관해서 문자적인 해석을 고수하기 때문에 그 기간이 "고작 천 년"밖에 안 되어 미래에 있을 일을 너무 앞당기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 그에게 필자는 전천년주의자들의 성경 해석이 "왜"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있을 일을 너무 앞당겨서 적용하는 것인지 묻고 싶다. 도대체 "무엇을 근거로" 그런 소리를 하는 것인가? 미래에 일어날 일들의 시점을 직접 계산해서 대충이라도 잡아 놓았다는 얘긴가? 참으로 대단한 사람이다. 그 일이 "언제" 일어날는지 "그 날과 시간"을 한번 이야기해 보라!

안타깝지만 무천년주의자들에게는 그와 같은 지식이 없다. 그들에게는 "천 년"이 영적인 기간이고 초림과 재림 사이에 끼인 안개와 같은 기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오셔서 다스리실 천 년이 "문자 그대로 천 년"이라고 분명하게 선언하고 있다. 『또 내가 보니, 한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오는데, 그의 손에는 끝없이 깊은 구렁의 열쇠와 큰 사슬을 가졌더라. 그가 그 용을 잡으니, 곧 마귀요 사탄인 옛 뱀이라. 그를 천 년 동안 묶어 두니 그를 끝없이 깊은 구렁에 던져서 가두고 그 위에 봉인하여 천 년이 찰 때까지는 민족들을 다시는 미혹하지 못하게 하더라... 또 예수에 대한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목베임을 당한 사람들의 혼들도 보았는데... 그러므로 그들은 살아서 그리스도와 함께 천 년을 통치하더라. 그러나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 나머지는 천 년이 끝날 때까지 다시 살지 못하리라. 이것이 첫 번째 부활이라. 첫 번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는 복되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오히려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들이 되어 천 년 동안 그와 함께 통치하리라. 그 천 년이 끝나면 사탄이 그의 감옥에서 풀려나, 땅의 사방에 있는 민족들, 곧 곡과 마곡을 미혹하려고 나가서 그들을 함께 모아 전쟁을 일으키리니 그 수가 바다의 모래 같으리라』(계 20:1-8).

첫째, 위 말씀은 "천 년"을 "여섯 번" 강조하고 있다. 정신이 제대로 박힌 사람이라면 여섯 번이나 반복적으로 언급하는 천 년을 영적으로 해석할 수 없다.

둘째, 본문의 여섯 번의 천 년은 도합 "6천 년"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천 년 통치가 4절과 6절에서 두 번 강조되고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천 년 통치가 인류 역사 "6천 년"이 지난 후 7천 년째에 이뤄진다는 사실을 암시적으로 계시한다.

셋째, 주님께서 천년왕국 전에 재림하시면 사탄은 큰 사슬로 묶여서 끝없이 깊은 구렁에 천 년 동안 갇혀 있게 될 것이다. 그가 갇혀 있을 천 년을 2절, 3절, 7절에서 세 번 강조하고 있다. 이 "문자적인 천 년"을 가장 싫어할 존재가 누구겠는가? 바로 사탄이다. 천 년 동안 가둬 놓으신다고 하셨으니 그가 그것을 좋아하겠는가? 그렇기에 현재 믿지 않는 자들의 마음을 어둡게 하여(고후 4:4) 문자적인 천 년을 믿지 못하게 하고, 교회들 안으로 침투하여 자신의 실체를 가린 채 활동하면서 온갖 거짓 교리들로 주님의 재림과 문자적인 천 년 통치를 부정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이 문제의 인물은 평생아카데미의 대표 백금산 목사이다. 그는 지옥의 특징은 "불"과 "어둠"인데, 이것 역시 문자적인 불과 문자적인 어둠이 아니라면서 "불"은 지옥에서 영원한 형벌을 받는 자들의 외적인 고통, 곧 육체에 대한 고통을 강조하고, "어둠"은 내적인 고통, 곧 영혼에 대한 고통을 강조한다는 헛소리까지 했다. 몸과 마음의 가장 고통스러운 상태에 대한 대표적 이미지로서 "불"과 "어둠"이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성경을 영적으로 해석하는 어리석은 무천년주의자여, 그렇다면 대답해 보라. 하나님께서 도대체 무엇으로 죄인들을 벌주신단 말인가? "불과 어둠의 이미지"를 벗겨 내고 분명하게 설명해 보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을 불길 가운데서 벌하시리니』(살후 1:8). 이 불이 문자 그대로의 "불"이 아니라면,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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