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신학논단 분류

반(反)성경 종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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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19년 11월호>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다. 『너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또한 "복음"을 통해 받는다. 『만일 너희가 내가 전한 복음을 굳게 잡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다면 복음을 통하여 너희도 구원받은 것이라』(고전 15:2). 그리고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경대로 죽으시고 장사되셨다가 셋째 날에 다시 살아나신"(고전 15:3-5) "사실"(fact)에 근거하고 있다. 성경의 사실을 믿는 것이 올바른 "믿음"(faith)이다. 사실에 근거하지 않는 믿음은 잘못된 믿음이고, 사실에 근거해서 자신의 생각을 수정하지 않는 태도는 잘못된 마음이다. 이런 잘못된 태도를 취하게 되는 주된 이유는 사실 자체를 숙고하기보다는 자신의 "감정"에 치중하기 때문이다. 잘못된 믿음에서 비롯된 감정이 이후에 올바른 사실들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이 되는 것이다.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을 다하여 믿으면』(행 8:37) 『단번에』(히 7:27) 이루어지게 된다는 "사실" 그대로의 『하나님의 말씀』(살전 2:13)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지 상황에 따라 변하는 "감정"에 달려 있지 않다. 마귀는 성도의 믿음을 빼앗기 위하여 "육신의 감정"을 선동한다. 그 목적을 위해서 "거짓의 아비"인 사탄은 그저 단편적인 사실들만 말할 때도 있다. 100%의 거짓말보다는 1%의 사실이 섞여 있는 거짓이 미혹하는 데 있어서 더욱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너희가 반드시 죽지는 아니하리라』(창 3:4). 마귀가 이브를 미혹했을 때 했던 이 말은, 금지된 나무의 열매를 먹었던 그날 "몸"이 죽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사실이었지만, "영"이 죽었다는 점에서는 거짓이었다. 결국 "거짓말"이었던 것이다. 이브는 이 거짓말에 속았고, 아담은 그것이 거짓임을(창 2:17) 알았으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을 저버렸다. 왜냐하면 아담에게 있어서 그의 "살과 뼈"인 이브는 "육신의 감정"을 일으키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얼마 전 <반일 종족주의>라는 책이 몇 주 동안 베스트셀러 1위를 차지했던 적이 있다. 이 책의 제목에서 저자가 굳이 "민족"이 아닌 "종족"이라는 단어를 선택한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즉 일본에 대한 객관적인 자료와 논리적인 평가에 의해 형성된 합리적인 반일 감정과 그에 따른 민족주의적 이념을 나타내는 용어인 "반일 민족주의"와 대비해서, 일본에 대한 객관적인 자료와 논리적인 평가 없이 맹목적인 적개심에 의해서만 형성된 비합리적이고 파괴적인 이념을 나타내는 용어로 "반일 종족주의"를 사용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 책에서 개념화한 이 "종족"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면, 일본에 대한 맹목적인 적개심만을 가진 사람을 가리켜 "반일 종족"이라 칭할 수 있게 된다.

과거 독일은 "반유대 종족주의"를 가지고 유대인들을 박해했었다. 그때 독일은 유대인에 대한 맹목적인 적개심을 국민들에게 주입하고자 했었다. 그런데 역사에서 드러난 국가적이고 민족적인 수준의 맹목적 적개심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한 개인도 맹목적 적개심을 가지고 상대를 대할 수 있다. 그 누구라도 어떤 대상에 대해 올바른 평가를 하지 않고 무조건 반감만 가지는 것은 정당성이 없는 무가치한 태도로서 맹목적 적개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러나 성경은 『모든 일을 시험하여 보고 선한 것을 붙잡으라.』(살전 5:21)라고 말씀한다.

한국 기독교계는 이런 관점에서 보면 "반성경 종족"이라고 볼 수 있다. 오늘날 그들의 생각 속에는 "완전한 성경"이 존재해서는 안 된다는 인식이 짙게 드리워 있다. 그렇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사실"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주의 말씀들은 순수한 말씀들이라. 흙 도가니에서 단련되어 일곱 번 정화된 은 같도다. 오 주여, 주께서 이 말씀들을 간수하시리니 주께서 이 세대로부터 영원토록 그것들을 보존하시리이다』(시 12:6,7).

만일 그들이 정직한 사람들이라면 이런 사실을 알았을 때, 오늘날 하나님께서 섭리적으로 보존하신 온전한 성경이 존재해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했을 것이고, 뒤이어 그 성경이 어떤 성경인지 찾으려고 노력했을 것이며, 결국 <한글킹제임스성경>이 하나님께서 한국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최종권위로 주신 바로 그 성경임을 깨닫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마귀에게 이미 선동당한 그 마음은 이후에 새롭게 밝혀진 사실들을 알게 되었을 때 불편한 느낌을 갖게 되는데, 이는 그 사실들이 그때까지 자신이 믿고 있었던 사실들과 너무나 다르기 때문이다. 결국 그러한 감정에 종속된 나머지 새로이 알게 된 "사실들"을 쉽게 거부해 버리고 마는데, 이것이 바로 죄인들의 본성이다.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이 건전한 교리를 견디지 못하고, 그들 자신의 정욕에 따라 가려운 귀를 즐겁게 해줄 선생들을 많이 두리라. 또한 그들이 그들의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꾸며 낸 이야기로 돌리리라』(딤후 4:3,4). 그들은 "육신의 감정"만 만족시킬 수 있다면 "사실의 유무"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게 여긴다. 그러면서 그들의 가려운 귀를 즐겁게 해줄 "꾸며 낸 이야기"만 계속해서 찾아 양산해 낸다. 아무리 논리적이고 역사적이며 성경적인 많은 증거들을 제시해도 그들은 "목이 굳은 종족"으로 남아 있다. 하지만 정직한 사람은 그러한 객관적인 사실 앞에서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과감하게 내려놓기 때문에, 진실에 눈을 뜰 가능성이 높아지고, 또한 "거짓의 아비"의 미혹으로부터 구원받을 가능성도 높아진다. 이는 그가 정말로 정직한 사람이라면, 『내가 아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것은 무엇이나 영원히 있을 것이라는 것이라. 아무것도 거기에 첨가될 수 없고 또 아무것도 거기서 뺄 수도 없으니 하나님께서 그것을 행하심은 사람들이 그분 앞에서 두려워하게 하려 하심이라.』(전 3:14)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곧바로 자신의 잘못된 생각을 바로잡을 것이기 때문이다. 즉 그가 "반성경 종족"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모든 성도는 구원받기 이전에 마귀의 자녀였다. 『소망도 없고 세상에서 하나님도』 없었던(엡 2:12) 『멸망하는 짐승』(시 49:12,20)과 같아서 『육신과 마음의 욕망들을』(엡 2:3) 따라서 살았던 마귀의 "종족"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께서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우리를 흑암의 권세로부터 구하여 내셔서 그분의 사랑하는 아들의 나라로 옮겨』 주셨다(골 1:13).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으로서 그 시민권이 하늘에 있는(빌 3:20) "거룩한 민족"이 된 것이다. 거룩한 민족은 더 이상 육신의 감정에 따라 살아서는 안 된다. 『이방인들의 뜻을 행한 것은 지난날의 생활로 충분하도다』(벧전 4:3).

거듭난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 곧 이루어진 참된 사실을 믿음으로써 사는 사람이다. 물론 여전히 육신 안에는 죄가 거하고 때때로 "육신의 감정"이 솟구치기도 한다. 마귀는 바로 그 감정을 이용하는데, 우리가 그 감정에 집중함으로써 우리에게 주어진 "사실들," 곧 하나님의 말씀들을 기억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설령 그 사실들을 기억해 냈다 하더라도 이내 감정적으로 거부하게 만드는 것이다. 사실에 근거한 믿음을 사용하지 않고 감정에 치중하면 그렇게 된다. 때때로 그러한 감정은 잘못된 지식이나 옆에 있는 지체들로부터 받은 상처에서 나오기도 한다. 그래서 상처받은 감정에 기생하는 "쓴 뿌리"가 그렇게 무서운 것이다. 당신은 상처받은 감정을 부여잡고 쓴 뿌리를 곱십고 있지는 않은가? 그러면서 상처를 준 그 지체를 미워하는 것을 정당화하고 있지는 않은가?

이처럼 마귀가 우리의 쓴 뿌리를 이용하여 감정을 선동하려 할 때 반드시 기억해야 할 몇 가지 사실들이 있다. 첫째, 우리는 결코 "전지하신 하나님"이 아니라는 점이다. 지체들과의 관계에서 우리는 상대방에 관한 모든 것을 알지 못한다. 따라서 상대방에 관한 우리의 감정은 근본적으로 "불완전한 사실들"에 근거하게 된다. 그런 불완전한 사실들을 온전한 사실들로 착각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둘째, 다음의 말씀들을 진지하게 숙고해야 한다.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한 그의 사랑을 나타내셨느니라』(롬 5:8). 『그리스도께서 그를 위하여 죽으셨느니라』(롬 14:15). 이러한 사실들을 믿는 믿음으로 우리를 불편하게 만드는 잘못된 감정을 다스릴 수 있어야 한다. 셋째, 우리의 믿음을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께만 두어야 한다. 『주 예수를 믿는』(엡 1:15) 『너희의 믿음이 어디에 있느냐?』(눅 8:25) 당신의 믿음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우리의 모든 감정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서 비롯되어야 한다. 결코 우리의 감정이 주변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좌지우지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지체들을 "사랑과 인내의 대상"으로 삼아야 하지,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화평』(골 3:15)을 깨는 존재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감정에 의존하지 말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실들, 곧 "하나님의 말씀들"에만 집중해야 한다. 결코 우리의 감정을 마귀에게 노략질당하게 해서는 안 된다. 성경을 믿는 믿음보다 감정이 우세하게 되면 "반성경 종족"의 대열에 서게 된다는 점을 반드시 유념해야 한다!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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