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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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의 촛불을 밝히는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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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19년 12월호>

필자가 동료 그리스도인들에게 기도에 관해 이야기할 때면 그들에게서 한 가지 동일한 현상이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순간 그들 모두의 눈동자에 "갈망"이 서린다는 점이었다. 사람은 눈으로 많은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데, 그때 그 눈빛들은 속마음에 차오르는 갈망 그 자체였고, 그들의 눈가에는 말 못할 아쉬움이 흘러내리기도 했다. 안타까운 눈물처럼만 보였던 그 묘한 표정이 잠시 스쳐갔지만, 그들이 "기도"를 간절히 원하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했다. 왜일까?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이기 때문이다. "기도만 하면 만사형통"이란 말이 횡행하는 이 마지막 때에 찾아보기 힘든 진실함을 "그리스도인"에게서 읽을 수 있었던 것이다.

영이 거듭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기도는 "생명의 호흡"이다. 흔히 "영의 호흡"이라 불리는 기도, 그것이 없다면 비록 거듭났다 해도 죽은 시체와 같은 삶을 살 수밖에 없다. 구원은 받았지만, 그 자신도, 그를 지켜보는 성도들도 그에게서 생명의 약동을 느낄 수 없다. 신부인 교회는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솔 2:2)로 비유되는데, 기도하지 않는 신부는 메말라 시들어 가는 백합화처럼 생기와 향기를 잃어 가는 것은 물론, 가시나무(죄인) 같은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왜 기도를 갈망하는가? 그의 영이 거듭났기 때문이다. 기도는 영적 행위이다. 영이신 하나님께 나아가는 기도에 대한 갈망은 그가 영이 살아난 그리스도인이라는 증거가 된다. 『예수께서 대답하시기를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에게 말하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신으로 난 것은 육이요, 또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라』(요 3:5,6). 밤에 몰래 찾아온 니코데모에게 예수님께서 하신 이 말씀은, 아담의 타락의 결과로 죽게 된 "인간의 영"이 성령님에 의해 다시 태어나야만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음을 계시하고 있다. 그렇다면 영이 그토록 중요하다는 얘기인가?

사람은 "몸ㆍ혼ㆍ영"의 삼중 구조로 이뤄져 있는데(살전 5:23), 그중에서 "영"은 영이신 하나님을 인지하고 그분과 교통할 수 있는 최상위 기관이다. 『하나님은 한 영이시니 그분께 경배드리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경배드려야만 하리라』(요 4:24). 인간의 "몸ㆍ혼ㆍ영" 중에서 『한 영』이신 위대하신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부분이 바로 "영"인 것이다. 이 영이 죽어 있으면 생명의 원천이신 하나님과 교제할 수 없는 육신적인 삶을 살 수밖에 없다.

예수님께서는 우물가에서 만난 사마리아 여인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그러나 참된 경배자들이 아버지께 영과 진리로 경배드릴 때가 오나니 바로 지금이라. 이는 아버지께서 자기에게 경배드리는 그런 자들을 찾으심이니라』(요 4:23). 하나님께서 그분께 영과 진리로 경배드리는 자들을 찾고 계신다는 것은, 성령님에 의해 영이 거듭난 성도가 성령 안에서(롬 14:17)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라(롬 8:1,13,14) 진리의 말씀에 근거하여(요 6:63, 히 4:12) 경배드리는 것을 하나님께서 원하고 계신다는 뜻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사마리아 여인이 『우리 조상은 이 산에서 경배를 드렸는데 당신들은 경배드려야 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고 말하나이다.』(요 4:20)라고 했을 때 주신 말씀이다. "경배 장소"를 꺼내 들어 주님의 말씀을 이리저리 회피하려 한 그녀에게 경배 장소가 아닌 경배의 본질과 방법에 대해 말씀하셨던 것이다.

주님의 이 말씀으로 인해, 이제 경배는 장소의 문제가 아닌 영과 진리의 문제가 되었다.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영과 진리"로 나아갈 때 그것이 하나님께 드리는 경배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경배란 자신보다 더 우월한 존재에게 경의와 존경을 표하는 행위로서, 하나님은 그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이 단순한 이유로 인해 마땅히 경배를 받으셔야 할 대상이시다. 피조물을 하나님보다 더 숭앙하는 것을 우상 숭배라고 하는데, 그러한 경배 행위는 불길 가운데서 벌하시는 심판을 면할 수 없다. 오직 하나님만이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인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기도는 우리보다 우월하신 하나님께 경의와 존경을 표하는 개인적인 경배 행위이다. 신약의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기도는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언제 어디서든지 "성령의 능력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드리는 경배"이다(H.W. 프로스트). 사도 바울 역시 『나는 남자들이 성냄과 주저함이 없이, 어디서나 거룩한 손들을 들고 기도하기를 바라노라.』(딤전 2:8)라고 하지 않았던가. 따라서 매 주일 하나님께 경배하기 위해 자신이 소속된 지역 교회로 모이는 성도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먼저 자신이 개인적으로 드릴 수 있는 경배, 곧 기도에 있어서 매일 신실해야 한다는 점이다. 개인의 기도 생활에 소홀한 사람이 회중이 드리는 공적 예배에 꼬박꼬박 참여하려 하는 것은 종교적 위선에 불과하다. 하나님께서는 교회에서만 하나님이시고 개인의 생활 속에서는 하나님이 아니시란 말인가?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성령 안에서 기도하라."(엡 6:18, 유 1:20)라고 명령하고 있다. 『하나님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너희가... 성령 안에 있나니』(롬 8:9). 따라서 성령 안에서 드리는 기도는 우리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영의 인도를 받는 가운데 드리는 기도이다. 기도는 성령 안에서 드리는 기도와 그렇지 못한 기도로 나뉜다. 성령님께서는 『생명의 영』(계 11:11)이시기에, 성령 안에서 성령의 능력으로 드리는 기도는 성도의 "생명의 행위"가 된다. 그렇기에 기도는 기도하는 그 성도가 현재 영적으로 살아 있음을 증명하는 척도가 되는 것이다.

영이 거듭난 성도가 성령 안에서 드리는 기도가 중요한 이유는, 영과 성령과 하나님의 호흡, 이 셋이 상호 밀접한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사람 안에 있는 영은 하나님의 호흡이며(창 2:7), 이 호흡이 아담의 창조 때 생명이 없는 흙덩이에 들어가자 그 흙덩이가 생명을 갖게 되었다. 하나님의 호흡이 또다시 생명이 없는 몸속으로 들어가면, 성령님께서는 그 몸에 육체적인 생명을 주신다. 『주 하나님이 이 뼈들에게 이같이 말하노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숨이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리라. 또 내가 너희 위에 힘줄을 놓고 너희 위에 살을 자라게 하고 피부로 덮고 너희에게 숨을 넣으리니 너희가 살리라. 그리하면 너희는 내가 주인 줄 알리라." 하시니라』(겔 37:5,6). 이 말씀은 미래의 대환란 끝에 있을 구약의 유대인 성도들의 환란 후 부활을 다루고 있다. 그들의 죽은 몸에 숨을 불어넣어 생명을 넣으시는 분이 바로 바람과 같으신(요 3:8) 성령님이신 것이다. 『오 숨아, 네 바람으로부터 와서 이 살해된 자들 위에 숨을 넣어 주어 그들로 살아나게 하라』(겔 37:9).

성령님께서는 성경의 저자로서 성경을 살아 있는(히 4:12) 책이 되게 하셨는데, 이는 기록된 말씀에 "하나님의 호흡을 불어넣으셨기에"(영감) 가능한 일이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어진 것으로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훈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 3:16). 성경은 하나님의 호흡으로 주어진 것이기에 "생명의 책"이다. 이처럼 성경의 예언도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들이 성령으로 감동을 받아 말한 것이었다(벧후 1:21). 바로 이 『생명의 영』(계 11:11)에 의해 기록된 생명의 말씀, 곧 성경은 『생명의 말씀』(요일 1:1)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계시이다. 따라서 『생명의 말씀』이신 분을 성경으로 증거하려는 사람은 반드시 『생명의 영』이신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호흡으로 있게 된 "영"이 죄로 인해 죽게 되자 바람과 같으신 "성령"께서 들어오셔서 영을 거듭나게 해 주셨는데, 성령님의 주관하에 이뤄지는 바로 이 "영의 호흡"이 성령 안에서 드리는 기도인 것이다.

하나님께 쓰임을 받는 사람의 일생은 "기도의 일생"이다. 누군가가 말했듯이 "그 사람은 능력 있는 기도로 하나님과 동행하고, 하나님은 그 사람과 능력 있게 동행하신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생명의 말씀을 증거하는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으로 살려면, 반드시 기도에 능력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기도의 능력에 관한 한, 5만 번 이상의 기도 응답을 받은 조지 뮬러를 빼놓을 수 없다.

조지 뮬러가 퀘벡이란 곳에 토요일까지 도착해야 했을 때, 그가 탄 배가 짙은 바다 안개로 22시간 동안 꼼짝 못하고 있었다. 토요일까지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에서 뮬러는 선장에게 배 밑 선실에 가서 함께 기도하자고 했다. 선장은 이 심한 안개가 기도한다고 걷히겠느냐고 의심을 표했지만, 뮬러는 "아니오, 내 눈은 안개가 얼마나 짙은가보다는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보고 있소. 하나님은 나의 모든 환경을 주관해 주시는 분이오."라고 대답한 뒤 무릎을 꿇고 짤막하게 기도했다. "오, 주님! 주님의 뜻이라면 이 안개를 5분 이내에 걷히게 해 주십시오. 주님께서는 제가 토요일까지 퀘벡에 도착해야 된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 저는 그것이 주님의 뜻이라고 믿습니다." 이에 선장도 기도하려고 했지만 뮬러는 그의 기도를 막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기도할 필요가 없는 것은 첫째, 기도한 대로 하나님께서 해 주실 것이라고 당신은 믿지 않고 있기 때문이고, 둘째, 이미 하나님께서 나의 기도를 들어주셨다고 나는 믿기 때문이오. 선장, 나는 지금까지 75년 동안 하나님을 믿어 왔지만, 단 하루도 그분 앞에 나아가지 못했던 적이 없었소. 자, 일어나 문을 열어 보시오." 문을 열고 보니, 과연 안개가 말끔히 걷히고 없었다.

기도는 조지 뮬러와 같은 특정인의 전유물이 아니다. 기도의 문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으며, 기도의 무릎은 누구나 꿇을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능력 있는 기도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기도로 하나님과 생명의 관계를 "매일" 규칙적으로 유지하는 사람, 하나님께서 능히 응답해 주실 것을 "결코" 의심하지 않는 사람, 하나님께서 "이미" 응답하셨다고 온전히 믿는 사람만이 능력 있는 기도를 할 수 있는 것이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이 해서는 안 되는 일이 몇 가지가 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복음을 전해서는 안 된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목회를 해서는 안 된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집사가 되어서도 안 되고, 주일학교 교사가 되어서도 안 되며, 찬양대에 서서도 안 된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대표 기도를 해서는 안 되며, 회중 앞에서 간증을 해서도 안 된다. 성도들과의 교제는 그런 사람으로 인해 위험해진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교회의 어떤 사역에도 관여해서는 안 된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고 공언해서도 안 된다. 이 모든 일에 적격인 사람은 오직 기도하는 사람뿐인 것이다!

잠언 20:27은 『사람의 영은 주의 촛불이라.』라고 말씀한다. 이 말씀처럼 사람 안에는 빛이 있다(눅 11:35). 그것은 그 사람 속의 "등불"이며, 등불은 "영"을 언급하기도 한다(계 4:5). 사람의 영은 빛나거나 꺼진 촛불에 비유되는데(욥 18:6; 21:17), 그 빛이 빛나게 되면 눈을 통해서 드러난다(눅 11:33-35). 기도하는 사람은 그의 눈이 살아 있는 것이다! 성령 안에서 기도하면 영의 촛불이 밝아지고, 성도의 영이 환해지면 그것이 눈으로 드러나 온몸도 밝아진다. 『몸의 빛은 눈이라』(눅 11:34). 성도 각인이 자신의 기도로 밝힌 영의 촛불로 교회가 밝아지며, 그런 교회가 세상을 밝힐 수 있는 것이다. 기도하지 않는 교회는 죽은 교회이다. 기도가 뜸해지는 교회는 죽어 가는 교회이다. 당신의 교회는 살아 있는 교회인가? 아니면 죽어 가는 교회이거나 이미 죽어 버린 교회인가? 기도로 영의 촛불을 매일 밝히고 있으라. 어둡고 험난한 이 마지막 교회 시대에는 그런 성도들이 절실하게 필요하기 때문이다.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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