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신학논단 분류

사랑에 관한 사악한 오해

컨텐츠 정보

본문

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0년 01월호>

사도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했다고 그의 서신에서 네 번 기록했는데(고전 15:9, 갈 1:13, 빌 3:6, 딤전 1:13), 특히 그런 자신을 가리켜 『죄인들 중에서 내가 우두머리라.』(딤전 1:15)라고 고백했다.

바울은 자기처럼 극악한 죄인에게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더불어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딤전 1:14)라고 하면서 그 은혜에 감탄했다. 그는 자신에게 베풀어진 헤아릴 수 없는 은혜 안에서 주님의 측량할 수 없는 사랑을 깨달았던 것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일 4:16). 사람들은 바울에게 주었던 사랑을 도로 가져갔지만(고후 6:12), 하나님께서는 한 번 주신 십자가의 사랑을 결코 되가져가지 않으셨다(롬 5:5; 8:39).

세상은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을 거부한 채 "사랑"에 취해 있다. 그들은 "음행"을 사랑이라고 부르지만(잠 7:18), 사랑이란 말 자체가 지니는 포괄성을 악용한 것일 뿐이다. 그들은 곧잘 "사랑"(love)이라고 말하지만, 성경에서 말씀하는 사랑은 단연코 "주는 것"(베풂, 자선, 곧 "charity")을 뜻한다. 『사랑[Charity]은 오래 참고 친절하며 사랑은 시기하지 아니하고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고 무례하게 행하지 아니하며 자신의 유익을 추구하지 아니하고 급히 성내지 아니하며 악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를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뎌 내느니라』(고전 13:4-7). 성경에서 "사랑"이란 단어가 처음 등장하는 곳은 "창세기 22:2"인데, 그곳에서 주님은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향해 가지고 있던 사랑, 곧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을 언급하셨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네 아들, 곧 네가 사랑하는 네 독자 이삭을 이제 데리고 모리야 땅으로 가서, 산들 중에서 내가 네게 알려 줄 한 산에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하시더라』(창 22:2). 이와 관련하여 피터 럭크만 목사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첫 언급의 법칙"에 따라서 성경에서 일차적으로 정의된 "사랑"이라는 것은 결코 남자가 여자를 사랑하는 것이나 여자가 남자를 사랑하는 것, 심지어 여자가 자기 자식을 사랑하는 것에 적용되지 않는다. 이사야 49:15을 읽어 보라. 님롯의 시대 이래로 수만 명의 작가들에 의해 쓰인 할리우드 영화 이야기나 슬픈 오페라 혹은 그 어떤 러브스토리들과는 반대로 절대적인 사랑은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이다. 그래서 본문 2절에 나타난 사랑에 대한 "첫 언급"은 향후 1,700년 뒤에 다시 나타난다. 그것은 요한일서 3:16; 4:7-10,14-16 등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이다』(<럭크만 주석성경>, p.37).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그의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그분께 번제로 바칠 것을 요구하셨고, 사랑하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 주심으로써 그 예표를 완성하셨지만, 여기에는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위대한 사랑이 내포되어 있다. 그것은 타인을 위해 내가 가장 사랑하는 아들을 아낌없이 내어 주는 사랑이다. 하나님께서는 의인도, 선한 사람도 아닌 죄인들을 위해 그분의 아들을 죽이셨고, 이로써 위대한 사랑이 무엇인가를 친히 입증해 주셨다. 『우리가 아직 연약하였을 때 그리스도께서 때가 되어 경건치 아니한 자들을 위하여 죽으셨느니라. 의인을 위하여 죽으려는 사람이 거의 없고 선한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무릅쓰는 사람이 간혹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한 그의 사랑을 나타내셨느니라』(롬 5:6-8).

아브라함은 무려 100세에 얻은, 그의 눈동자 같은 독자를 하나님께 번제로 바침으로써, 그가 이삭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한다는 차원 높은 사랑을 입증해야 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아들을 향한 사랑(요 17:23)보다 더 높은 차원의 사랑을, 『내 사랑하는 아들』(마 3:17)을 한순간 포기하고 "죄"로 삼아(고후 5:21) 십자가에 내어 주심으로써 보여 주셨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그의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크고 높은 차원의 사랑을 갖고 있었듯이,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독생자를 사랑하신 사랑보다 더 위대한 사랑을 갖고 계셨던 것인데, 그것이 바로 갈보리 십자가의 피 흘리신 사랑이었던 것이다. 갈보리의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의 극치였다!

마지막 때의 죄인들은 하나님의 이 위대한 사랑을 거부하고 육욕적인 사랑에 취해 비틀거리고 있다. 『음욕이 가득 찬 눈을 가지며 죄로부터 단절될 수 없고, 견고하지 못한 혼들을 유혹』하는 『그들은 마음이 탐욕으로 단련되었으니 저주받은 자식들』(벧후 2:14)인 것인데, 그들의 사랑은 가장 소중한 것을 헌신적으로 베푸는 것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 오직 자신의 욕정을 위해 외부의 것들을 흡수하여 이기적인 쾌락을 즐기는 데만 그 목적이 있을 뿐이다. 그렇기에 창조 때부터 하나님께서 의도하신(창 2:24) 정상적인 부부 간의 결합이 깨져 버리고 각자가 간음의 늪에 빠져 있는 것이 이 마지막 날들의 세태인 것인데, 이에 대해 필립 켈러는 그리스도인의 정상적인 부부 관계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더럽고 천한 세속적 관점에서 보자면 "성"이란 기껏해야 어떤 감정적 색깔로만 진하게 칠해진 욕정의 행위에 지나지 않지요. 하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자면, 성이란 인간의 영, 혼, 몸 전체를 포용하는 숭고한 기능에 속합니다. 하나님의 가족 안에서 보자면, 성은 우리의 몸에 하나님께서 특별히 부어 주시는 복과 은혜를 재확인하는 행동이고, 그 결과 우리의 몸이 더욱 활기를 얻고 한층 고결해지는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점에 있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에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도 우리와 함께 기쁨을 나누십니다. 『이제 몸은 음행을 위하지 아니하고 주를 위하며 주께서는 몸을 위하시느니라.』(고전 6:13)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하나님과 함께 걷는 길>, 말씀보존학회, p.201).

필립 켈러는 "충동적 본능으로 하나님과 함께 걷는 길"이라는 섹션에서 위와 같이 기술했다. 말하자면 성경은 우리의 몸이 『성령의 전』(고전 6:19)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으며,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몸인 자녀들 사이에 들어와 사실 뿐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 개인의 몸 안까지도 실제로 점거하고 계신 분이라는 것이다. 또한 육신적이고 관능적인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에게 보낸 서신에서 바울이 그렇게 언급하고 있다면서, 그리스도인의 몸과 몸의 행위에 관해 자세를 바꿀 것을 강조했다. 『하나님께서는 주를 살리셨으니 그분의 능력으로 우리도 살리시리라. 너희의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녀의 지체로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또한,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바 너희 안에 계신 성령의 전인 것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니라. 너희는 값을 치르고 산 것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의 것인 너희 몸과 너희 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14,15,19,20).

필립 켈러는 우리가 이 말씀을 조용히 묵상하고 진지하게 생각해 볼 때 우리의 몸이 "성령의 전"인 것을 깨닫게 되고, 몸과 몸의 행위와 관련된 여러 가지 면에서 지금까지의 자세를 바꾸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단순한 육신적인 행위에 대해서까지 대단히 깊은 관심을 갖고 계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 몸으로 행하는 모든 육신적인 일들은 새로운 조명을 받게 되고 우리의 관심을 끌게 된다는 것이다. 주님께서 우리의 삶의 전반에 총체적으로 개입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며, 흔히들 잘못 알고 있듯이 주님께서 관심의 영역을 비단 우리의 영과 혼에만 국한하고 계신 것이 절대로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몸에 욕구를 부여하셨는데, 거기에는 ① 영토 및 소유를 확보하기 위한 세력 기반 구축 욕구(영토를 차지하려는 충동), ② 소유물로부터 획득하는 먹이와 물과 주거를 확보하려는 욕구(생존에 필요한 먹이와 기타 수단들을 획득하려는 충동), ③ 여기에서 가능해지는 성적 재생산 능력을 발휘하려는 욕구(종족을 번식하여 지구상에서 불멸하려는 충동)가 있으며, 이상의 기본적인 충동들로부터 욕구, 식욕, 열정 및 기타 사소한 본능들 같은 수많은 충동들이 파생된다고 했다. 곧 이러한 충동들이 성령을 통해 제어되고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삶을 살 때 성도가 육신에 치우치지 않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너희가 육신을 따라 살면 죽을 것이나 성령을 통하여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라.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이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들이니라』(롬 8:13,14).

세상과 음행한 마지막 때의 교회들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일 4:16)라는 말씀을 차가운 육신적 충동처럼 남발하고 있다. 그 선한 말씀을 오용하여 지옥의 심판을 가려 버렸고, 교회들은 교리적 차이를 무시한 채 십자가 밑에 모여 에큐메니칼 운동을 벌이고 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라는 말씀이 악인들의 손에 들어가니 악독한 열매가 맺힌 것이다. 진리는 선한 성도들의 손에 있을 때 활력을 얻게 된다. 배교한 교회들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라는 말씀으로 진리를 위해 아무 일도 하지 못하며, 오히려 솔로몬이 우상 숭배를 정당화했듯이 사랑이란 말로 거짓 교리를 정당화하고 있을 뿐이다. 『주께서 민족들에 관하여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그들에게로 들어가지도 말고, 그들을 너희에게 들어오게도 말지니 이는 그들이 반드시 너희 마음을 돌려서 그들의 신들을 따르게 할 것이기 때문이라." 하셨으나 솔로몬이 사랑으로 그들과 결합하였더라』(왕상 11:2).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비성경적으로 오해한 집단은 "칼빈주의자들"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소위 창세전에 택함받았다고 하는 자들에게만 한정시킴으로써, 십자가의 피의 효력을 창세전에 구원으로 예정되었다는 자들에게만 국한시켜 버렸다. 하나님께서 택함받은 자들만을 편협하게 사랑하셨기에 택함받은 자들만을 위해 피 흘리셨다는 사악한 이단 교리가 지난 2천 년간의 교회사를 가장 추악하게 더럽혀 온 것이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라는 말씀은 창세전이 아니라 "갈보리 십자가"와 관련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이렇게 나타났으니, 곧 하나님께서 그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신 것은 우리로 그를 통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에 사랑이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그의 아들을 우리 죄들을 위하여 화목제물로 보내신 것이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가지신 그 사랑을 우리가 알고 또 믿었으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일 4:9,10,16). 칼빈주의자들이 말하는 창세전의 무조건적인 선택은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다. 창세전에 아직 존재하지도 않은 사람들을 지옥에 보내기로 영원히 판결했다는 것은 성경에 없는 거짓말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지금으로부터 약 2천 년 전에 갈보리 십자가에서 붉고 뜨겁게 흘러내렸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의 고난 때문에 천사들보다 조금 낮아지셔서(빌 2:7,8), 그분 안에서 모든 사람을 살게 하시려고(고전 15:22) 모든 사람을 위해 죽음을 맛보신 것이다(히 2:9).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지금 이 순간도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의 지식에 이르기를 간절히 원하고 계신다(딤전 2:4).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세상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내어 주셨다. 만일 칼빈주의자들의 주장처럼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내어 주실 만큼 사랑하신 세상"(요 3:16)이 "택함받은 자들의 세상"이라면, 그 독생자께서 "세상"을 위해 기도하지 않으신다고 하신 말씀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요 17:9) 어떻게 예수님께서는 "택함받은 자들의 세상"을 위해 기도하시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사실 하나님께서는 과거에 갈보리 십자가에서 "죄인들의 세상"을 "딱 한 번"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내어 주신 것이다. "사랑의 사도" 요한은 "하나님께서 그의 독생자를 보내신 세상"을(요일 4:9) 사랑하지 말라고 했으며(요일 2:15), 그 『온 세상은 악함 속에 놓여 있다』(요일 5:19)라고 단정했다. 이 진리를 깨달은 사람만이 악함 속에 놓인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이 악한 현 세상』(갈 1:4)으로 복음을 들고 나가 전파하게 된다.

창세전에 택함받지 못하고 지옥으로 예정되었다는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은 사랑이신가? 칼빈의 이단 교리를 "온전히" 따르는 자들에게는 결코 그럴 수 없다. 그렇기에 그들은 양심이 마비되어 복음 전파의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반면에 "온건한" 칼빈주의자들은 복음의 열정을 지니고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파했는데, 그 가운데는 필라델피아 교회 시대의 위대한 설교자였던 찰스 스펄전이 있다. 그는 침례교 목사임에도 칼빈주의를 표방했다. 하지만 그는 온건한 칼빈주의자였기에 복음의 열정을 지닌 위대한 구령자로서 살았던 것이다. 그의 설교에는 구원으로의 초청이 담겨 있었고, 주일 설교가 끝난 뒤인 다음 날에는 아침부터 구원 상담을 받으려는 사람들이 목사관 앞에 구름처럼 몰려들었다고 한다. 창세전에 택함받은 자들도 구원 상담을 받는가? 칼빈은 택함받은 자들이 성령님에 의해 저항할 수 없게 압도되어 강제로 거듭나기에 사람이 할 일은 전혀 없다고 가르치지 않았던가? 그러나 스펄전은 "모든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정확히 깨닫고 스스로 구령의 도구가 되어(고전 4:15) 복음 전파를 적극적으로 실행했다.

"칼빈주의"는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저주로 만들어 버린 엉터리 이단이다. 이 최악의 이단을 경계하라. 그리고 『많은 물들로도 사랑은 끌 수 없으며 큰 물들로도 잠기게 할 수 없나니』(솔 8:7), "모든 사람"을 향한 사랑의 복음을 담대히 전파하도록 하라! BB

신학논단 139 / 1 페이지
RSS
번호
제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