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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론 신봉자들의 교활한 공격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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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05년 03월호>

진화론 신봉자들의 교활한 공격들

지난 1월 23일과 24일에 미국의 <뉴욕 타임즈>지와 <워싱턴 포스트>지는 각각 “진화론에 대한 교활한 공격들,” “하나님과 다윈”이라는 제목의 사설에서 창조론 교육 시도에 대해 반대하는 주장을 실었다.

우선 분위기를 파악하기 위해 창조론과 진화론의 대립에 관한 미국의 역사를 간략하게 살펴보겠다.
미국은 모두가 익히 알듯이 성경과 더불어 시작된 나라였고, 유럽 교회가 거의 진화론과 타협한 20세기 초에도 미국은 대부분의 주에서 성경을 문자 그대로 인정했으며, 창조론을 가르치는 것도 법률로 정해져 있었다. 법률로까지 정해 놓는 것은 물론 반대에 부딪힐 소지가 충분한 것이었다. 이로 인해 1925년 테네시 주에서는 미국시민자유연맹(ACLU)과 결탁한 한 고등학교 교사가 고의적으로 진화론을 가르치고서 고발되어 벌금형을 선고받아, 그런 것을 법률로 정해 놓은 문제를 부각시킨 일도 있었다. 1960년대까지도 미국 생물교과서에는 대부분 진화론을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법은 불합리하다는 판단 아래, 1968년 대법원은 반진화론법의 위헌 판결을 내렸다. “교회와 국가의 분리”를 천명한 헌법을 들어 미국 정부는 교실에서 종교를 가르치는 것을 금지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섭섭한 일이지만, 반대로 만일 불교나 힌두교 같은 종교들이 교실에서 가르쳐지는 상황을 상상해 본다면 그 조치는 나름대로 합리적인 일이라고 인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문제는 이로 인해 진화론은 “과학”이라는 미명하에 공립학교에서 당당히 가르쳐질 수 있게 되었고, 창조론에는 “종교”라는 딱지가 붙어 학교에서 가르칠 수 없게 되었다는 점이다. 창조론자들이 창조론을 진화론과 동등한 학문으로 가르치도록 하는 법을 입법화하려 시도했지만, 1987년 대법원은 헌법의 원리를 들어 그 법을 폐지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인들이 대다수를 이루는 많은 주에서는 창조론자들의 영향력이 있어, 진화론은 생명의 기원에 대한 해석 방식 중 하나일 뿐이고 교사들은 진화론을 하나의 이론일 뿐이라는 꼬리표를 붙인 상태에서 가르쳐야 한다고 했다. 1995년 앨라배마 주의 교과서는 진화론은 “사실로 인정되어서는 안 되는, 이론(異論)의 여지가 많은 이론(理論)”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스티커를 첨부했다. 루이지애나와 애리조나 주에서는 교사들로 하여금 진화론에 대한 경고를 읽고 나서 가르치게 했다. 캔자스 주에서는 창조론을 비학문적이라고 가르친 교사가 해고되었다. 1990년대 말 캔자스 주에서는 교육위원회 위원들이 과학 교육 정책을 수정하기로 결정했는데, 진화론에 관한 내용은 시험을 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마지막 사건은 전국적으로 진화론자들의 격렬한 항의를 불러일으켰고, 다른 주의 대학교수들은 캔자스 주 고등학생들의 과학 지식이 심각하게 결여되어 있을 것이므로 대학입학 자격이 안 된다고 선언했고, 과학 단체들은 캔자스 주에서는 학회를 개최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결국 결정은 주민들의 투표를 통해 다시 번복되었고, 진화론 교육을 둘러싼 규정은 폐지되었다.

최근에 미국의 유명한 일간지들에 실린 사설도 이런 분위기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 문제의 발단은 두 가지 사건 때문이다.
조지아 주 콥 카운티 교육부는 진화론 교육을 강화하고자 시도하고 있었고, 이 일은 학부모와 시민들의 반대에 부딪혔다. 그러자 콥 카운티 교육부는 그 교과서에 다음과 같이 쓰인 스티커를 집어넣어 논쟁을 잠재우려고 했다. “이 교과서는 진화론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진화론은 생명체의 기원에 관한 사실이 아니라 하나의 이론입니다. 이 문제는 열린 마음으로 접근해야 하고, 주의깊게 연구해야 하며, 비평적으로 숙고해야 합니다.” 조지아 주의 연방 판사는 그 스티커가 진화론에 대해 오랫동안 지속된 종교적 도전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종교를 위헌적으로 승인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판결했다. 그러나 법원의 결정은 또 항소 중에 있다.
또 펜실베이니아 주의 도버 교육 지구에서는 행정담당자들이 9학년(중3) 학생들에게 진화론은 사실이 아니라 하나의 이론이며, 진화론에는 증거가 없는 결함들이 있고, 지적설계론(Intelligent Design; 세상은 “지적인 누군가의 설계”로 만들어졌다는 것으로, 창조론을 말함)은 생명의 기원에 관해 달리 설명하는 이론이고, 관심있는 학생들을 위해서 지적설계론을 다루는 책을 사용할 수 있다고 단언하는 짤막한 진술문을 읽어 주었다. 도버의 학부모들은 이에 법적 소송을 제기했다. 위스콘신, 사우스캐롤라이나, 캔자스, 몬태나, 아칸소, 미시시피 같은 여러 주에서는 “지적설계론”을 그들의 과학 교육과정 속에 포함시킬지 말지를 두고 논의하고 있다.
이 두 사건은 진화론의 학문적인 체계를 우상처럼 숭배하는 자들의 기분을 씁쓸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뉴욕 타임즈>는 “진화론을 비평하는 사람들은 해가 갈수록 더욱 교활해지고 있다”며, 진화론이 사실이 아니라 하나의 이론이라고 한 교과서 스티커에 대해 “그것은 실제로 과학 교육을 음해하는 교활한 노력”이라고 이를 갈았고, 진화론에 대한 “모욕”이라고 분개했다. 진화론을 담은 교과서가 음란 영화를 담은 비디오나 되는 것처럼 경고문 스티커를 붙였다고 힐난하고, 과학에서 “이론”이란 것은 단순한 추측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변호하고 나서는, 미국의 국립과학아카데미가 진화론을 극찬한 말들을 인용했다. 그 사설을 쓴 사람 자신도 진화론에 대해 계속해서 입에 침이 마를 정도로 칭송했다. “지배적인 이론... 극도로 효과적인 과학적 도구... 현대 생물학에서 가장 근거가 확실한 이론... 현대 과학의 최고의 이론들 중 하나...”
<워싱턴 포스트>는 최근의 지적설계론 주창자들이 “옛날의 창조론자들보다도 더 불순해졌다”며, 그들이 “학부모들을 설득시켜 자녀들의 [진화론을 담은] 교과서를 의심하도록 만든” 것에 대해 분개했다. 또 “공립학교에서 지적설계론을 과학으로 가르치는 것은 교회와 국가의 분리의 원칙에 대한 명백한 위반”이라고 강조하고, “뿌리깊은 종교적 본성이 지식에 대해 갈급해 하고 과학을 추구하는 길을 막아서도록 허용해서는 안 된다”며, 그렇게 되면 오래지 않아 “미국의 과학계가 세계를 이끌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조로 말했다.

미국이나 한국이나 진화론은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생명의 기원에 관한 무슨 절대적인 사실이라도 되는 듯이 가르쳐지고 있다. 과학교과서에 생명의 기원 문제를 다루며 진화론만이 제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유명한 두 일간지의 사설도 그런 가정에 세뇌된 사람들이 쓴 것이다. 진화론이 일간지들에서 침이 마르게 칭송하고 옹호하는 것만큼 과학적이기만 하고, 창조론이 일간지들에서 열을 올리며 비난하는 것만큼 종교적이기만 한 것인가? 정말로 그렇다면 과학 교과서에서 진화론만 다뤄지고 그것만 절대적으로 다뤄지는 것이 옳을 수 있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어떤 “이론”이 현재 관측 가능하고 가정에 의해서 결과도 분명하게 확인 가능한 범주를 넘어섰을 때, 그것이 과연 과학적인 것인가, 종교적인 것인가? 무생물에서 생물이 나옴을 분명히 입증하는 확인 가능한 증거나 실험 결과가 있는가? 한 종에서 다른 종으로 변화됨을 분명히 입증하는 확인 가능한 증거나 실험 결과가 있는가? 그 일간지 사설을 쓴 사람들은 그런 절대적인 증거도 제대로 없이 진화론을 “최고의 과학적 이론”이라면서 절대시하고 있다.
생물에는 수많은 종(species)이 있다. 누군가 그 종들의 기원에 대해 말한다면, 종들이 다른 종에서 변화 가능했든지, 변화 불가능했든지 둘 중 하나다. 이것은 가능, 불가능의 문제이므로 논리상으로 양자택일의 문제다. 진화론은 종들이 다른 종에서 변화 가능했다는 생각에서 출발해서 모든 종들이 바로 그렇게 변화되어 생겨난 것이라고 결론짓는 것이고, 창조론은 종들이 다른 종에서 변화 불가능했다는 생각에서 출발해서 모든 종들은 원래부터 그렇게 생겨난 것이라고 결론짓는 것이다. 한 종에서 다른 종으로 변화됨을 분명히 입증하는 확인 가능한 증거나 실험 결과가 없다면 창조론이 진화론보다 과학적으로 못할 것은 전혀 없다. 실제로 우리가 주변에서 “확인 가능한 일상의 모든 증거들과 실험 결과들”은 세대가 거듭되면서도 종이 그대로 유지되는 것을 보여 준다. <종의 기원>을 쓴 찰스 다윈(Charles Darwin)은 정상적인 사람이었고, 그의 아버지 로버트 다윈은 꼬리 달린 사람이었고, 그의 할아버지인 에라스무스 다윈은 아가미를 가진 사람이었다든지 하는 식의 경우는 찾아볼 수가 없다. 눈으로 볼 수 있는 거시적인 차원이 아닌 미시적인 DNA 차원에서도, 생명체의 후손이 퍼져나갈 때 유전적인 변이가 생길지라도 곧 정상으로 되돌리는 DNA 교정 장치가 있어서 변이를 막아주는 사실이 밝혀졌다고 한다. 그런데도 창조론이 진화론보다 꼭 과학적이 아닌가?
창조론은 원래부터 종들을 그렇게 만든 창조주로부터 모든 것이 생겨났을 것이라고 한다. 진화론은 어쩌다가 아마도 무에서 유가 생겨났을 것이고, 또 어쩌다가 아마도 무생물에서 생명체가 생겨났을 것이며, 또 어쩌다가 아마도 하등생물에서 고등생물로 종들이 변화되어 나왔을 것이라고 한다. 창조론자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과학적으로 증명하지 못했지만 하나님이 계실 것이라고 하고, 진화론자들은 한 종에서 다른 종으로 변화됨을 입증하는 결정적 증거를 찾아내기 위해 백 년이 넘게 갖은 노력을 기울이고도 아직 발견하지 못했지만 한 종에서 다른 종으로 변화될 수 있었을 것이라고 한다. 만에 하나 그런 사례를 발견했다 해도 또 모든 경우가 그랬다고 단정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아직 입증되지 않은 것을 그랬을 것이라고 믿고서 인정하고 나가는데도 진화론이 창조론보다 꼭 종교적이 아닌가?
창조론은 “하나님”을 언급하기에 종교적이고, 진화론은 “우연히,” “아마도,” “어쩌다가”를 실컷 언급할 뿐 “하나님”을 언급하지 않기에 과학적이라는 것은 우스갯소리에 불과하다. 그리고 과학으로 “하나님”의 부재를 입증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무조건 “하나님”을 배제해 두고 생명의 기원을 추측하는 것은 과연 진실한 것인가?

생명의 기원을 추론해 가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이미 “주제넘은 과학”이다. 진화론이나 창조론이나 둘 다 “과학적으로” 확정짓기는 아직 어려우며, 제각기 “가능성”을 주장할 수 있는 여지들이 있다. 그리고 진화론이나 창조론이나 둘 다 “과학적으로” 입증되지 못한 부분들이 있다. 그런데 일부 몰지각한 사람들이 진화론은 “과학”이고 창조론은 “종교”라고 단정짓는다. <뉴욕 타임즈>지의 사설 제목은 “진화론에 대한 교활한 공격들”이 아니라, “진화론 신봉자의 교활한 사설”이라고 썼어야 마땅하다. 미국에서는 성경을 문자 그대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상당히 많기 때문에, 창조론자들이 이런 진화론자들의 독단에 대해 압력을 가하여 계속해서 사회적으로 충돌을 하고 있는 것뿐이다.
두 일간지의 비평은 사실 진화론자들의 독단적인 생각을 기반으로 하고 있지만, 거기에 좀 귀담아 들을 부분은 있었다. 바로 창조론자들은 그 세력과 학문적인 기반이 튼튼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학문적인 기반이 튼튼하지 못하다는 것은 비논리적이라는 말이 아니라, 창조론을 연구하는 연구 기관들과 연구 참고 자료들, 유명 과학 저널에 기고할 만한 연구 논문들, 세부적인 연구 계획안들, 창조론을 기반으로 한 제대로 된 생물학 교재들, 잘 짜여진 교육과정들이 상대적으로 상당히 부족하다는 말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성경과 기독교 신앙은 과학으로 입증해야만 하는 대상이 아니라”고 한다. 그것은 맞는 말이다. 그러나 성경과 기독교 신앙을 과학으로 “반증”하는 분위기가 팽배한 상황에서 그것을 방관하기만 하는 것은 일종의 책임 회피와 같은 것이다. 성경에서 제시된 모범적인 그리스도인이었던 바울은 『여러 가지 구상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거역하여 스스로 추켜세운 모든 높은 것들을 무너뜨리며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서 그리스도께 복종케』 하는 것을 그의 임무로 여겼다(고후 10:5). 성경적 기독교 신앙이 한갓 지어낸 거짓말과 신화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학문적 입지가 강하고 다음 세대에게도 진화론을 통해 넌지시 그렇게 교육하고 있는 상황에서 최소한 『그들이 자랑하는 그 일에 대하여 그들이 우리와 동등하게 보이게』하는 일이(고후 11:12) 또한 그리스도인들의 임무가 아니겠는가?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들 중에 이런 일에 헌신하여 그 분야의 연구를 통해 하나님을 높이는 사람들도 많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말이다.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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