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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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에게 진주를 던져봤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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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1995년 04월호>

마태복음 7:6에는 이런 말씀이 있다.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또 돌아서서 너희를 공격할까 함이라.』 지금 필자는 이 구절을 교리적으로 적용하려는 것이 아니다. 단지 가치있는 것이 그 가치를 모르는 사람에게 주어졌을 때 얼마나 무가치하게 되는가를 보여주기에 충분할 것이다.

얼마전 <교회와 신앙>이라는 기독교 월간지에서 장운철 기자라는 사람이 말씀보존학회를 취재한 일이 있었는데, 1995년 2월호에 「말씀보존학회의 대도전」이라는 「포커스」 특집기사에서 말씀보존학회를 위험집단으로 규정해 놓았다.
이보다 한달 앞선 1월호에서는 PC통신에 흐르는 “이단” 정보들을 다루면서 말씀보존학회의 주장을 여호와의 증인이나, 안식교, 구원파 등등의 이단의 대열에 자연스럽게 끼워놓은 일도 있었다. 본 학회는 취재 기자에게 성의껏 답변해 주었고, 기자이기 이전에 한 영혼으로서의 그에게 올바른 말씀을 제시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 기자는 “집단”이나, “본부”라는 단어를 사용하면서 대부분의 사이비 이단 집단과 같은 위험단체로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을 몰아세우고 있었다.
필자가 여기서 평하고자 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만약 정말로 사이비 이단 집단을 취재한다면 그 잡지의 타이틀처럼 바른 신앙을 수호하기 위해서 올바른 성경적 기준을 가지고 그 집단의 이단성을 분명하게 제시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기자들이 대중들의 지지를 얻으려고 그들의 흥미를 돋우는 내용들을 부각시켜 여론을 형성하듯이 장 기자도 예외는 아니었다.
어떤 기자가 기사를 쓰려면 공정하게 객관적인 사실만을 보도할 것인지, 아니면 사건의 진상을 규명해 올바른 길을 제시하든지 둘 중의 한 가지 방식을 택해야 한다.
그러나 <교회와 신앙>의 그 기사는 그 두 가지 방식에서 너무 거리가 멀다. 그 기사가 공정하게 사실만을 전달하려 했다면 기자의 판단이 들어가지 않은 상태에서 “말씀보존학회가 이런 일을 하고 이렇게 말한다.”라고 말했어야 한다. 그러나 그 기사에 개입된 기자의 ‘판단’은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을 이단으로 규정하는 것이었다.
만약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여 한국교회에 올바른 길을 제시하고자 하는 것이 그 기사의 목적이었다면(아마도 장 기자는 그러한 의도로 기사를 썼을 것이다.) 그러한 판단에는 근거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문제는 그 기자의 판단근거가 너무도 희미했다는 것이다. 그는 성경말씀으로 판단했어야 했다. “그들은 이렇게 주장하는데 성경에는 이렇게 되어 있으므로 그들의 주장은 틀리다.” 이렇게 전개가 되어야 식견있는 독자들도 신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기사는 「말씀보존학회의 대도전」이라는 제목처럼, 말씀보존학회가 기성교회에 반대한다라는 식으로만 전개하여 여론을 조장시키는 느낌을 주고 있다.
“대부분의 사이비 이단 집단들이 자신들의 정체를 드러내기 전에 이와 같이 기성교회를 향해 극단적인 입장을 취했던 것을 볼 때, 이들의 활동이 심상치 않음을 느낄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말보회측의 행동은 성경 번역을 볼모로, 결국 반 기성교회화를 주장, ‘유사집단’을 형성하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낳게 한다”(교회와 신앙, 1995년 2월호, pp.124,125).
이러한 주장에 대해서 그 기사에는 어떠한 성경적 근거도 제시하고 있지 않다. 다만 계속적으로 “기성교회”만을 외치고 있을 뿐이다. 결국 그 잡지의 판단 근거는 “교회”지 성경이 아니다. 그것도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몸된 교회가 아니라 “기성교회”, 즉 “교계”일 뿐이다.
그같은 관점은 95년 1월호에서 PC통신에 대해 다룬 기사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지난 여름 PC통신 내 <컴퓨터 선교회>의 토론장에서는 성경에 관한 토론이 있었는데, 그때 <한글 킹 제임스 성경>을 사랑하는 한 자매가 올바른 하나님의 말씀인 <표준원문>과 <킹 제임스 성경>과 <한글 킹 제임스 성경>에 대해 여러 측면으로 소개하며, 올바른 성경과 변개된 성서들의 차이를 설명해 주었을 때 많은 사람들에게서 긍정적인 반응과 부정적인 반응이 나타났다.
<교회와 신앙>은 부정적인 반응을 한 사람들 중에서도 김덕수 목사의 반박이 과학적 비평방법에 근거한 가장 설득력있는 글이라고 생각했는지, 그 잡지는 성경을 소개하는 그 자매의 글을 부분인용하여 그 목사의 글과 대조시켜 독자들에게 제시하여 놓았는데, 제시했던 김덕수 목사의 글은 그 자매의 글을 반박한 것이 아니었고, 더우기 필자가 김덕수 목사의 글에 대해 성경적으로 잘못된 것을 지적한 내용은 제시하지도 않았다. 다시 말해서 그 기사는 공정성이 결여된 채 결론을 설정해 놓고, 그 결론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것처럼 보이는 자료만을 제시해 여론을 조장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들의 주장이 신뢰를 두고 있는 근거는 성경이 아니다.
그들이 진정으로 외쳐야 할 “교회”는 무엇이고 “신앙”은 무엇인가? 건물을 크게 짓고 십자가를 달고 있으면 모두 교회가 되는 것은 아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 거듭난 사람들의 모임을 말한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며(롬8:9), 하나님께서는 이 시대에 사람이 지은 건물 안에는 계시지 않으므로(행7:48; 17: 24), 사람이 지은 건물 안에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이 모인 것은 동물원이지 교회가 아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양무리여야 하는데, 이러한 동물원에는 개와, 돼지와, 이리들이 있다(마 7장).
마찬가지로 “신앙”도 새벽기도나 철야기도에 잘 나가고 구제와 선행을 잘 하며 교단 교리에 충실한다고 신앙이 되는 것이 아니다. 성경적인 신앙은 종교적인 열성과 다르다. 참다운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데서 시작되므로(롬10:17) 그리스도인이 올바른 믿음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올바른 말씀이 있어야 한다.
만일 올바른 말씀을 공급하여 믿음을 강성하게 하는 대신 종교적인 열성과 교단 교리만을 강조하는 목사가 있다면 그는 가짜 목사이다. 안타깝게도 <교회와 신앙>은 그 신앙의 근거를 하나님의 말씀에 두지 않고 교단 교리에 근거한 기성“교회”에 두고 있는 것이다. <교회와 신앙>의 글에서는 성경말씀의 인용은 단 한 구절도 찾아볼 수 없다.
그들의 신앙의 근거가 교회라는 것은 그 잡지의 이름인 <교회와 신앙>에서도 잘 나타난다. 그 잡지는 이단을 판별하여 한국교회를 이단으로부터 보호한다고 하는데, 그 판단 근거는 “교회”이기 때문에 자연히 그들의 눈에는 기성교회에 동조하지 않고 반대를 하는 사람들이 이단으로 보일 수 밖에 없다.
이러한 방식으로 이단이라고 판단된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은 교회사에서 수 차례 찾아 볼 수 있다. 4세기의 도나티스트는 신앙의 근거를 카톨릭 “교회”에 두고 있는 어거스틴에 의해 “이단”으로 몰렸고, 중세기간 동안 끊임 없이 성경을 지키며 올바른 신앙을 전수해 온 왈덴시안들도 카톨릭 “교회”에 의해 이단으로 몰렸고, 종교개혁시대에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이었던 재침례교도들도 칼빈파 등 개혁“교회”에 의해 이단으로 몰렸었다. 이러한 교회들이 내세우는 것은 “진리와 성별” 보다는 “화합과 타협”이었다.
거듭난 성도들로 이루어진 진정한 교회는 성경에서 그리스도의 몸(고전12:27, 엡4:12), 그리스도의 신부(엡5: 25), 순결한 처녀(고후11:2) 등으로 불리고 있으나 이러한 기성교회, 즉 교계(christiandom)는 이런 명칭들로 불리지 않는다.
성경에서 교계에 대해 잘 말해주고 있는 부분은 마태복음 13장인데, 거기에 나오는 일곱 가지의 천국의 비유는 “천국의 신비”로 말해지는 신비적인 형태의 천국, 즉 이 땅에 천국이 임하기 이전에 교묘하게 천국과 비슷하게 보이는 다른 세계, 즉 “기독교계” (Christiandom)에 대해 잘 설명하고 있다(이에 대해서는 성경대로믿는사람들 95년 3,4월 호의 「마태복음 연구-15,16」을 보라).
이 기독교계에는 알곡과 독보리가 함께 있고(마13:24-30), 공중의 새들이라고 묘사되는 마귀의 세력들이 함께 하며(마13:32), 좋은 물고기와 나쁜 물고기가 함께 있다(마13:47-50). 여기에는 거듭난 성도들과 마귀의 자식들이 함께 있고, 진리와 오류가 함께 뒤섞여 있는데, 이러한 “교계”의 입장을 기준으로 삼아 신앙의 뿌리를 내리고 이단을 분별하며 교회의 개혁을 외친다면 영적 혼란이 있을 뿐이다. 사실 이것이 한국 교계의 모습이다.
진정한 교회는 구원받지 않은 많은 마귀의 자녀들을 하나님의 나라로 이겨와야 하며, 이처럼 혼탁한 “교계” 안에서 “새들”과 “독보리”들과 “나쁜 물고기”와 “누룩”을 분별하게 해 주어 성도들에게 올바른 길을 제시해 주어야 한다. 감사하게도 말씀보존학회는 후천년, 무천년주의 등의 잘못된 종말론, 극단적 칼빈주의, 오순절 은사주의, 반(反)세대주의 등 기독교계에 퍼져있는 “누룩”(거짓 교리)을 분별해 주고 있으며, 무엇보다 모든 것의 판단 근거가 되는 참된 하나님의 말씀인 <한글 킹 제임스 성경>을 펴내어 한국교회에 바른 길을 제시해 주고 있다.
판단이 모호하다는 것은 절대진리가 되는 올바른 하나님의 말씀이 부재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증명해 주는 것인데, 순수한 말씀은 성도들을 자라게 하는 젖이므로(벧전2:2), 올바른 말씀을 섭취하지 않으면 영적 아기들, 즉 육신에 속한 그리스도인으로 남아있게 된다(고전3:1).
고린도전서 2:15은 『영적인 사람은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신은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고 되어 있다. 구령하는 교회에 잘못하는 일이 있으면 구령하는 교회가 판단한다. 성경대로 믿는 교회에 잘못하는 일이 있으면 성경대로 믿는 교회가 판단한다. 구령하지도 않고 성경대로 믿지도 않는 교회들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다. 변개되지 않은 올바른 말씀을 갖고 있으며, 항상 구령하기에 힘쓰고(말씀보존학회 사역의 주체인 성경침례교회는 1년에 2,000명 이상 구령한다), 올바른 진리로 무장한 이러한 영적인 교회야말로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자신이 영적이지 않다면 특히 영적문제에 있어서만은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자신이 영적인지 아닌지는 올바른 하나님의 말씀으로 판단해야 할 것이다.
필자는 가끔 독자들로부터 “말씀보존학회가 좀 강하게 말하는 것이 아니냐?”는 질문을 받곤 한다. 그러나 우리가 말하는 것들은 항상 성경말씀을 근거로 정확히 제시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독자들이 조금만 진지하게 생각하고 판단한다면 올바른 방향으로 돌아오게 되는 것을 보아왔다.
그러나 <교회와 신앙>의 이번 기사를 포함해 다른 많은 주장들은 성경으로 정확히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기성교회의 입장과 일치하지 않는 것만을 비평하고 있다. 사람들은 <개역한글판성경>이 틀렸다는 주장에 대해서 “그렇다면 지금까지의 한국교회의 신앙은 잘못되었다는 말인가?” “30년동안 신앙생활해 온 내 믿음이 흔들리는 위험한 말이다.” 등으로 반응하곤 한다. 이처럼 사람들은 기존 질서에 기반을 둔 자신의 신앙이 흔들릴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지 자신의 신앙이 진리에 근거하여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떳떳할 수 있는지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사실 자신의 믿음이 흔들릴 것은 없다. 단지 올바른 것을 알았다면 그때부터 믿고 실행하면 될 뿐이다. 비록 자신이 평생을 믿어왔어도 잘못된 오류라면 과감히 던져버리고 진리를 향해야 한다. 한국교회가 잘못되었으면 과감히 무너뜨리고 올바로 세워야 한다. 이것이 바로 종교개혁자들이 외치던 것이 아닌가?
마태복음 7장의 말씀을 기억해 본다. 『판단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도 판단 받지 않을 것이라. 너희가 판단하는 그 판단으로 너희도 판단 받을 것이며, 너희가 재는 그 자로 너희도 다시 측정을 받으리라』(마7:1,2).
만일 누군가가 옳지 못하게 판단한다면 그는 다시 판단받을 것이다. 오류가 진리를 판단할 수 없고, 거듭나지 않은 사람이 거듭난 사람을 판단할 수 없으며, 성경대로 믿지 않는 사람이 성경대로 믿는 사람을 판단할 수 없다. 판단할 자격이 있는 사람은 고린도전서 2:15에 따라서 영적인 사람뿐이다. 마태복음 7장에서 판단하지 말라고 경고받는 사람들은 5절에서 위선자라고 불려지며, 6절에서 다시 개와 돼지로 취급된다. 이들에게는 아무리 좋은 것을 주고 가치있는 진주를 줄 지라도 발로 밟고 또 돌아서서 공격하게 된다. 지금 <교회와 신앙>이 바로 그 모습이다.
올바른 말씀을 제시했으나 단지 영적으로 성숙하지 못해서 받아들이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그 진리를 발로 밟고 돌아서서 공격하는 마태복음 6:7의 모습 그대로이다. 이들은 언제나 영적인 사람들이 되어서 모든 것을 진리로 판단하고 한국교회에 올바른 교회상을 심어줄 수 있을까?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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