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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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의 자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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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0년 04월호>

1. 『주가 이같이 말하노니 현명한 자는 자기 지혜를 자랑하지 말며 용사는 자기 힘을 자랑하지 말고 부자는 자기의 부를 자랑하지말라. 그러나 자랑하는 자는 이것을 자랑할지니 그가 깨달아 나를 알아서 내가 이 땅에서 자애와 공의와 의를 행사하는 주임을 아는 것이라. 이는 내가 이 일들을 기뻐함이라. 주가 말하노라』(렘 9:23,24). 하나님께서는 지상에 살고 있는 모든 인간들에게 『내일을 자랑하지 말라.』(잠 27:1)라고 언명하셨다. 하지만 이 말씀에 경청하여 이행하는 사람은 극히 소수이다.

지구상의 인간들은 먹고사는 일에만 관심을 가질 뿐, 죽는 일에는 관심이 없을 뿐만 아니라 자기는 늘 죽음에서 열외되는 존재로 간주하려고 한다. 지상에 사는 동안 “삶” 자체에만 관심을 갖고 희망을 설계하기에, “죽음”이 다가오고 있다는 현실을 유념하는 데는 단 얼마의 시간도 할애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한 인간의 속성이 그 사람의 생애를 주관하고 있다면, 그는 막상 죽음의 순간에 다다랐을 때 “나는 이제 끝이구나!”라고 토로하기도 전에 죽게 되고, 또한 그렇게 죽음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엉겁결에 덮치는 영원한 지옥의 삶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그 순간깨닫게 된다. 사람이 죽으면 “몸”은 썩고 “영”은 사라져서 하나님께로 가지만, 불멸하는 “혼”은 지정의가 멀쩡한 상태로 영원히 고통을 받게 된다.

누가복음 16:19-31에는 “부자와 나사로에 관한 일화”가 소개되어 있다. 이 이야기는 “실화”이며,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삶과 죽음을 하나의 예시로서 제시하고 있다. 거지 나사로가 죽었고, 부자도 죽었다. 그런데 부자의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생명의 책”에 이름이 등재되지 않은 사람은 지옥의 자식이기에 그 이름이 아무리 거창했다 해도 기억되지 않는 것이다.

본문은 “지하 세계”에 아브라함의 품으로 불리는 “낙원”과 “지옥”이 있음을 보여 준다. 지옥은 그 낙원에 갈 수 없는 혼들이 가는 장소로서, 그들은 이 뜨거운 용광로 같은 곳에 들어가 뜨겁다고 울부짖으면서 고통을 받는다. 하루나 한 주, 한 달, 한 해 정도가 아니라 영원히 끝나지 않는 저주와 형벌이 가해지는 장소에서 고통당하는 것이다.

또한 이곳의 구조는 마치 큰 “도넛” 모양처럼 생겼다. 낙원에 들어갈 자격을 상실한 사람들이 지옥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여기에는 집권당의 장관들, 국회의원들, 정부와 야합하는 모리배들, 국가를 적에게 팔아넘기고 자신만 홀로 잘 살아 보겠다고 하는 무자격자 좌파 대통령들도 포함된다.

부자와 거지 나사로가 죽은 이후 지하 세계로 내려갔을 때, 그들은 서로를 볼 수는 있어도 서로에게 건너갈 수는 없었는데, 이는 낙원과 지옥이 “커다란 구렁”을 사이에 두고 분할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때 부자는 건너편 아브라함의 품에 나사로가 있는 것을 보고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사정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저를 불쌍히 여기셔서 나사로를 보내시어 그가 자기 손가락 끝에 물을 적셔 내 혀를 식히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통을 받고 있나이다』(24절). 1995년 6월, 삼풍백화점이 붕괴되었을 당시 그 밑에 깔려 있었다가 극적으로 구조된 한 청년도 “누군가가 손가락에 물을 적셔서 자기 혀를 적셔 주었으면 했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 부자를 향해서 이렇게 말했다. 『아이야, 너는 네 생전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나쁜 것을 받았음을 기억하라. 그러나 이제 그는 위로를 받고 너는 고통을 받느니라. 이 모든 것 외에도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커다란 구렁이 놓여 있어서 여기에서 너희에게로 건너가고자 하여도 갈 수 없고거기에서 우리에게로 건너오고자 하여도 올 수 없느니라』(25,26절).

부자가 아브라함으로부터 처음 들은 말은 낙원과 지옥이 이론적으로만 나뉘어 있는 장소가 아니라 실제 “현실”이라는 점이었다. 그것은 분명 세상과는 판이하게 다른 현실이었다. 현 세상에는 돈이나 든든한 배경 또는 변호인이 있어서, 사람들은 그런 것들을 적절히 이용하여 법망을 교묘하게 빠져나간다. 이런 식으로 우리 대통령이라는 자도 소위 개표가 완료되지 않은 부정 선거를 통해 대통령직을 수행하고 있는 것인데, 그가 취임 단상에 서서 손을 들고 선서했을 때 그것은 자기 혼자 떠든 선서였기에 그는 그 어느 것 한 가지도 이행해야 할책임감도 느끼지 못한 채 모두 내팽개쳐 버리고 국민들을 개돼지처럼 여겼다. 그의 하수인 김경수도 경남도민을 개돼지로 여겼는데, 현재 그가 드루킹 사건에 파묻혀 1심에서 징역 2년의 실형을 선고받았음에도 경남도민 중 어느 누구도 그를 향해 꽥 소리 못하고 있는 것이다. 과거에 무슨 죄를 억수같이 졌다고 입 한번 뻥긋하는 경남도민이 없단 말인가?

이제야 아브라함의 존재를 알게 된 죽은 부자는 갑자기 형제애가 생각났는지 생전에 그가 다섯 형제에게 해 줄 수 없었던 “사후의 생”과 관련하여 그들이 이 고통의 장소에 오지 말게 해 달라고 아브라함에게 간청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만일 그들이 모세와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비록 누가 죽은 자들로부터 살아난다 해도 그들을 설득할 수 없을것이니라.』(31절)라고 답변하면서 그의 명설교를 끝냈다.



2. 인류 역사에서는 대량의 사망자를 낸 “세계 전쟁들”이 있는가 하면 “전염병들”도 있다. 국가들은 인구가 많아야 강대국이 될 수 있다는 선입견을 갖고 있기에 “출산 장려론”을 펼치고 있다. 인류 역사에서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전쟁은 제1차 세계대전(1914-1918년)으로서 1,500만 명 이상의 희생자를 냈다. 전쟁은 인간이 살아 있는 동안에 겪는 지옥이다. 그렇다면 전염병은 어떤가?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에 인한 스페인 독감으로 약 5,000만 명의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전쟁은 언제나 두 가지 재앙을 몰고 왔으니, 곧 “기근”과 “전염병”이다. 사람이 모이면 호흡이나 배설물을 통해 병균이 전염되고, 또는 설치류 등에 의해 전염되기도 한다. 인간은 먹고 마시고 잠자고 배설하는 일이 매우 중요한데, 불결한 환경, 특히 전쟁이 일어나거나 전염병이 창궐하는 국가적인 비상 시기에 적절한 치료를 기대하기란 쉽지 않다. 삶과 죽음의 자리가 매 순간 반복되는 위기 속에서, 인간이 살아야 한다는 급박한 현실보다 더 나은 현실을 바랐다면 그것은 분명 사치일 것이다.

하나님을 믿으면 무조건 이생에서 죽지 않고 육신의 생명을 연장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억지와 무지의 소치이다. 이것이 거듭나지 않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갖고 있는 지상 생명에 관한 편견이다. 전쟁이나 전염병 앞에서 속수무책인 인간의 삶은 하루살이의 삶과 하나도 다를 게 없다. 『너희가 내일 일어날 일을 알지 못하나니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잠깐 보이다가 사라지는 안개니라』(약 4:14).

모든 인간 앞에 놓인 운명은 설령 전쟁이나 전염병이 아니더라도 예측 불허이다. 따라서 예기치도 않게 모텔이나 목욕탕에서 일어난 불로 죽은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차량 사고나 각종 암으로 죽은 사람들도 있다. 또한 병원에서 장기간 치료를 받았어도 언제 나을지 기약이 없는, 그야말로 의사도, 약사도, 환자 자신도 그 원인을 모르는 질병으로 인해 죽어 가는 사람들도 있다. “생로병사”는 태어난 인간이 늙고 병들고 죽음으로 생을 끝낸다는 원칙을 말해 주는데, 여기에서 제외되는 인간은 아무도 없다. “종교”는 인간이 늙고 병들고 죽는 문제를 결코 해결해 주지 못한다.

사람은 흙으로 형성된 몸에 하나님께서 입김을 불어넣으셨을 때 혼이 되었다. 『주 하나님께서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의 콧구멍에다 생명의 호흡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살아 있는 혼이 되었더라』(창 2:7). 이처럼 사람의 “몸”은 흙으로 빚어졌다. 그래서 사람이 죽으면 한 줌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영”은 하나님의 숨결이고, 공기 또는 바람과 같다. 인간의 참된 자아인 “혼”은 불멸이기에 영원히 죽지 않는다. 이 나라 개신교인들은 “혼”이 아닌 “영”이 영원히 사는 것인 줄로 착각하고 있지만, 영은 바람과 같아서 이 땅에서는 사라지게 된다. 『예수께서 대답하시기를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에게 말하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신으로 난 것은 육이요, 또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라. 내가 너에게 ‘너희는 거듭나야만 한다.’고 말한 것을 이상히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어서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듯이 성령으로 난 사람은 모두 그와 같으니라.”고 하시더라』(요 3:5-8).

그런데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5절)라는 말씀에서 대부분의 개신교인들은 “물”을 세례나 침례로 알고 있지만 그것은 완전히 틀렸다. 물은 문자 그대로 그냥 물이다. 구원받기 이전의 생명은 물로 태어난 생명인데(육신적인 출생), 그 생명은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그것이 바로 “거듭난 생명”이다. 영이 거듭나야 혼이 구원을 받는다. 인간의 혼은 불멸이기에, 죽지도 않고 불에 타지도 않으며 영원히 산다.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라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영원히 거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이는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사람의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며, 풀은 마르고 꽃은 져도 주의 말씀은 영원토록 남아 있음이라. 이것이 너희에게 복음으로 전해진 말씀이니라』(벧전 1:23-25).

우리의 처음 생명은 우리의 조상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해 영이 죽은 채로 태어났다.

① 우리는 모두 허물과 죄들 가운데 영이 죽어 있었다(엡 2:1).

② 우리는 악령, 곧 마귀의 영을 따라서 행했다(엡 2:2).

③ 우리는 본래 진노의 자녀로서 마귀에게 속해 있었다(엡 2:3).

④ 그러나 자비가 풍성하신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하여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선물이다(엡 2:4-8).



3. 이번 우한 코로나 바이러스는 중국발 바이러스였다. 중국을 제외하고 코로나 확진 환자가 가장 많이 발생한 나라는(3월 23일 기준) 이탈리아로서 59,138명이고, 미국이 33,073명으로 그다음이다. 한국 역시 8,961명으로 아시아에서는 중국 다음으로 확진 환자가 가장 많이 발생했다. 이렇게 우리나라에 발병 환자가 많아진 원인은 순전히 우리 대통령 때문인데, 그가 중국 시진핑의 기분을 맞추어 그의 방한을 4월 선거에 이용하려는 꼼수를 부렸던 것이다.

문 대통령은 중국인의 입국을 관대하게 허락함으로써 코로나 병원균이 그대로 들어오게 만들었다. 그런 가운데 중국 유학생들이 마음 놓고 입국하게 되어 이 나라가 쑥대밭이 되고 말았다. 방역에는 두 단계의 전략이 있는데, 첫 번째가 “봉쇄”(containment)로서 감염병의 유입 자체를 처음부터 차단해야 한다. 그 후에는 소수의 감염자들을 대상으로 감염 경로와 밀접 접촉자를 추적하여 더 이상 번지지 못하게 해야 한다. 하지만 중국인들에게 “호의적으로” 문을 열어 줌으로써 병균이 이 땅에 대량으로 유입되도록 허용한 것이다. 매우 매우 어리석은 판단이 대통령에게서 나왔다. “질병관리본부”에 의하면, 감염증이 본격적으로 번지기 이전에 중국 전역에 대해 입국 제한을 해야 한다고 요청했지만 우리 외교부, 보건복지부, 행정안전부 등이 거부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들 관련 부처가 그랬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청와대가 그런 결정을 내린 것으로 봐야 한다고 했다.

미국은 방역 실무 책임자가 결정하면 대통령도 그 의사 결정에 함부로 개입하지 않는다고 한다. “대한의사협회”도 그간 정부에 여섯 차례나 같은 권고를 해 왔지만, 정부는 방역 전문가나 자문가, 의사협회의 의견을 번번이 묵살했다고 한다. 그런 와중에 문 대통령은 2월 20일에 시진핑에게 일부러 전화를 걸어 “중국의 어려움은 우리의 어려움”이라고 말했고, 시진핑의 방한 문제와 관련해서는 두 정상이 “금년 상반기 방한을 변함없이 추진하는 것”으로 논의했다고 청와대 대변인이 밝혔다. 이것은 시진핑 방한이 더 중요하니 방역 당국은 입 다물고 있으라고 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박승후 보건복지부 장관은 이렇게 말했다. “중국에서 들어온 관광객보다 중국을 다녀온 우리 국민들이 더 많이 감염시킨다.” 정세균 국무총리는 “우리가 어떤 조치를 취하면 상호주의가 작동되는 경우도 있다.”라고 말했다. 국민의 안전을 지키는 일에 왜 “상호주의”가 필요한가?

한 일간지 논설 고문은 2월 29일자 논설에서 이렇게 썼다. “1월 20일 첫 코로나 확진자가 나왔다. 37일 만에 1,000명 선을 넘어서더니, 단 2일 만에 2,300명을 돌파했다. 28일 하루 확진자가 571명 폭증했다. 완전히 둑이 터졌다. 감염 및 전파 속도가 하도 빨라서 한 시간 전 숫자는 벌써 구문(舊聞)인 터라, 코로나 바이러스가 지금 어디를 유린하고 있는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 대구에서 들려오는 뉴스는 문명국 소식이 아니다. 6 ․ 25 전란 때도 이러지는 않았다. 2월 18일 첫 확진자가 확인되고 나서 열흘 만에 1,500명 선을 넘었다. 지역적인 발생으로는 우한 다음이 대구이다. 확산을 막는 바리케이드는커녕 과속 주행 방지 턱도 없다. 음압 병실은 넘치는 환자로 바닥났고, 중증 환자조차 병상이 없어 집에서 차례를 기다리다 숨지는 사태가 발생했다... 대구 시민 244만 명이 코로나에 갇혔다.”

3월 23일 시점에 세계 136개국이 한국인의 입국을 금지했고, 40개국은 입국 절차를 강화했다. 자국민 철수 계획을 세우고 있는 나라들도 여럿 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중국에서 우리나라로 직접 번졌는가? 우리나라 대통령은 중국의 아픔을 우리의 아픔으로 느낀다고 말했다. 대통령의 사람들은 “한 ․ 중운명공동체론”을 폈다. 방호벽, 라텍스 장갑, 보호경, 마스크도 중국 각지에 막대한 양을 우선적으로 보냈다. 중국은 자기들이 우한 코로나의 발원지이면서도 한국에서 온 여행객들을 맨 먼저 격리했고, 한국을 다녀온 교민들 집에 출입 통제 딱지를 붙였다. 이것이 “전염병 공동체”로서 취할 행동인가? 중국인들은 우리와 고통을 나누지 않겠다는 의도인데, 우리나라 정부는 그런 중국의 아픔을 우리의 아픔이라고 넋 빠진 소리나 해 댔던 것이다.

우리나라보다 열 배나 작은 섬나라도 코로나 발생 직후 발생 국가 국민들의 입국을 차단했는데, 정작 이 나라 정부는 국민들의 자존심을 순식간에 잃게 만들었다. 그에 대한 해명을 대통령과 대통령의 사람들이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들은 반드시 국민들에게 사과해야 한다. 전염병이 창궐할 때 “병균”이 높은 사람과 낮은 사람을 가리겠는가?

성경을 믿는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믿고 거듭난 사람이기에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알지만, 성경을 믿을 수 없는 사람은 마귀의 자식이기에 살아 있는 동안에 마귀의 종으로 살다가 죽으면 지옥에 가서 영원히 불타게된다.

『주가 이같이 말하노니 현명한 자는 자기 지혜를 자랑하지 말며 용사는 자기 힘을 자랑하지 말고 부자는 자기의 부를 자랑하지말라. 그러나 자랑하는 자는 이것을 자랑할지니 그가 깨달아 나를 알아서 내가 이 땅에서 자애와 공의와 의를 행사하는 주임을 아는 것이라. 이는 내가 이 일들을 기뻐함이라. 주가 말하노라』(렘 9:23,24).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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