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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을 성경적으로 제시하지 못하는 조용기 목사의 "전인구원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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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07년 10월호>

지난 호에서는 중생의 복음에 치유의 복음이 필연적이라는 순복음은 죄인에게 구원을 줄 수 없는 다른 복음임을 살펴보았다.
이번 호에서는 순복음식 신유론의 근본이 되는 “전인구원론”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이 역시 순복음식 중생의 복음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에, 그들의 ‘치유의 복음’이 그리스도의 복음과는 무관한 비성경적인 교리임을 입증하는 데에 더없이 중요한 교리이다. (필자가 인용하는 성경은 <한글킹제임스성경>이다.)
마태복음의 “천국”과 누가복음의 “하나님의 나라,” 그리고 신유
『예수님께서는...열두 제자와 칠십 인의 제자들을 파송하실 때도 병든 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며... 하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라고 명령하셨다(마 10:7,8, 눅 10:9). 하늘 나라의 복음은 인간의 영과 혼과 육의 구원인 “전인구원”이다.』1)
조용기 목사가 그의 “전인구원론”을 증명하기 위해 예로 든 마태복음 10:7,8은 치유의 표적과 함께 “천국”을 언급하고, 누가복음 10:9은 치유의 표적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언급한다.
성경은 마태복음에서는 “천국”(the Kingdom of Heaven)을, 누가복음에서는 “하나님의 나라”(the Kingdom of God)를 전한다. 하늘(Heaven)과 하나님(God)은 엄연히 다른 의미이다. 조목사는 서로 다른 두 왕국을 셋째 하늘에 속한 “하늘 나라”(Heavenly Kingdom)(딤후 4:18)에 합쳐 넣고서 ‘복음’을 이끌어낸다. 그는 이 세 왕국을 하나로 보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이 셋이 다른 왕국이라고 말씀한다.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유대인적 계보로 시작하는 마태복음은 유대인을 초점으로 하여 실제적인 지상왕국, 즉 “천년왕국”을 다룬다. 마태복음에서는 이것을 “천국”이라고 표현하는데,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에서 보듯 지상에 임할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왕국”이다(마 6:9,10). 이 왕국이 지상에 임함이 가까웠음을 침례인 요한이 마태복음 3장에서 전파하기 시작했고, 이후로 4장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전파하기 시작하셨다. 그것은 신약 시대의 ‘은혜의 복음’이 아니라 땅에 임할 천국을 전하는 ‘천국복음’이었으며, 그 내용은 『너희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 3:2; 4:17)였다. 당시 유대인들은 그들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그들의 왕으로 받아들이면 천년왕국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이것이 유대인들에게 주어졌던 ‘복음’이었으며, 이 천국복음을 전파할 때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들에게(고전 1:22) 병을 고치고 마귀를 쫓아내는 것과 같은 표적들을 행하는 권세를 제자들에게 주셔서 유대인들이 천국복음 메시지의 증거를 눈으로 확인하여 믿을 수 있게 하신 것이다. 마태복음 10:7,8의 표적들은 신약 교회 시대의 ‘그리스도의 복음’과는 무관하다.
누가복음은 서신의 대상이 ‘데오빌로’(1:3)라는 한 로마인이다. 이 점을 통해서 누가복음이 ‘이방인’을 대상으로 한 서신임을 알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져오시려고 했던 지상의 실제적인 왕국은 물리적인 부분만 충족되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면도 충족되어야 했다. 마태복음은 유대인들의 메시야가 가져오실 천년왕국에 초점이 맞춰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왕국복음을 전하시는 주님께서는 유대인들이 왕국으로 들어가기 전에 먼저 영적으로 회복될 것을 요구하셨다. 『오직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를 구하라』(마 6:33). 주님은 천국에 들어가기에 앞서 그 왕국에 합당한 영적 상태, 즉 “도덕적으로 영적으로 온전한 상태”를 먼저 갖춰 놓아야 함을 가르치신 것이다.2) 원래 천국은 하나님의 나라와 함께 임하기로 되어 있었다.
누가복음은 영적인 면을 강조하기에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일들을 ‘하나님의 나라’의 관점에서 다룬다. 하나님의 나라의 관점으로 데오빌로라는 이방인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가, 그분이 어떻게 일하고 가르치셨으며, 그분이 어떻게 죽으셨고 또 부활하셨는가를 알려 줌으로써 궁극적으로는 그에게 복음의 진리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3) “이방인”인 데오빌로에게 필요한 것은 유대인을 위한 천국복음이 아니라 영적인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복음이었다(롬 14:17). 그는 이전에 이미 “배운 것들”이 있었고, 누가는 데오빌로가 이전에 알게 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이 확실함을 서신을 통해 서사적(敍事的)으로 증명하려 한 것이다(눅 1:4).
누가복음 10:9의 병 고치는 권세는, 열두 제자 이외의 다른 칠십 명에게 그 권세를 주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고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신약 교회 시대를 위한 신유가 아니다. 당시에는 어떤 신약 지역 교회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성취될 수도 있었던 천국을 준비하기 위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는 것과 관련이 있었다. 그것은 본질상 하나님의 나라와 융합된 천국에 관한 복음을 증명하기 위한 표적이었다.
조목사는 이처럼 성격이 판이한 천국과 하나님의 나라를 셋째 하늘의 “하늘 나라”와 동일시하여 ‘하늘 나라의 복음’이라는 새로운 복음을 제시했다. 주님은 그것을 전파하라고 명하신 적이 없다. ‘하늘 나라의 복음’은 성경에 존재하지도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유와 사도들의 행적에 나타난 신유
『따라서 신유는 예수님의 구원의 메시지와 분리시켜 생각할 수 없다. 사도들의 행적을 보아도 그들은 신유를 구원의 메시지에서 분리한 적이 없다. 이 구원은 죄를 용서받고, 질병에서 놓임 받고, 범사에 강건하게 되는 우리의 영·혼·육 전체의 구원을 의미한다.』4)
조목사는 예수님의 구원의 메시지와 사도들의 행적에서 신유를 분리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유는 천국복음을 증명하기 위한 유대인들을 위한 표적으로, 신약의 그리스도인들과는 무관하다. 사도들의 행적을 다룬 사도행전은 유대인의 경륜과 교회의 경륜 사이에 놓인 과도기적 서신으로, 신약 교회 시대의 교리서가 아니다. 현존하는 4대 이단 그룹, 즉 칼빈의 교리 및 극단적 칼빈주의, 극단적 세대주의, 카톨릭 및 그리스도의 교회(침례에 의한 중생), 은사주의(신유와 방언)는 자신들의 이단 교리를 정립하는 데 이 책을 사용하였다. 사도행전은 성경을 나누어 공부하지 않는 이들에게는 매우 위험한 서신이다(딤후 2:15). 사도행전 28:17에서 바울이 유대인 지도층 인사들을 만나 28절에서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원을 이방인들에게 보낸 것과 그들이 그것을 들을 것을 너희가 알라.』며 그들의 완악함을 꾸짖고 복음을 들고 이방인들에게로 돌이키기까지는 유대인의 경륜에 속한 부분이 많기 때문에 그때까지의 과도기적 상황에 일어난 일들로 신약 교회 시대의 구원론을 논할 수 없다.
부연하자면, 주님은 마태복음 10:5-7에서 열두 제자를 보내시면서 『이방인들의 길로도 가지 말고, 또 사마리아인의 성읍에도 들어가지 말고, 다만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가서 전할 때,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말하고』라고 하셨다. 천국이 가까이 왔으니 메시야이신 그리스도를 영접하라는 천국복음에는 늘 치유의 표적이 동반되어 그 사실을 증명했으며, 치유의 표적은 처음부터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곧 유대인들과 관련이 있었다. 사도들의 손을 통해 많은 표적과 이적이 백성 가운데서 일어나고 믿는 사람들이 더 많이 주께 더해진 사도행전 5:12-16과 같은 상황 역시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위임하셨던 천국복음과 관련이 있다.
주님의 승천 후 사도행전 7장까지는 유대인들이 십자가에 못박아 버린 그들의 메시야를 회개하고 다시 받아들이기만 하면 여전히 천년왕국이 도래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사도행전 7장까지는 바울에게 계시된 “은혜의 복음”이 전파되지 않았음을 알아야 한다(딤전 1:11). “믿음과 능력이 충만하여 백성 가운데서 큰 이적들과 기적들을 행하던”(행 6:8) 스테판을 통해 주님이 사도행전 7장에서 유대인들에게 메시야를 받아들이라는 최후의 통첩을 하셨을 때(2-56절) 유대인들은 스테판을 돌로 쳐 죽이고서 예수 그리스도를 민족적으로 거부해 버렸다. 그들이 스테판의 설교를 받아들이면 재림하시려고 보좌에서 일어서셨던 예수 그리스도는 민족적 거부로 내려오시지 않았고(행 7:56), 재림은 천년왕국과 함께 교회 시대 이후로 연기된다. 그리하여 “병이 낫고, 표적들과 이적들이 주의 거룩하신 아들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는”(행 4:30) 사도들의 대유대적 표적 사역은 사도행전 7장을 기점으로 서서히 사라진다. 무엇보다도 스테판을 순교시킨 예루살렘에서는 그후로 아무런 기적도 일어나지 않게 되었다.
치유는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하나의 표적으로서(출 4:7-9) 모세와 함께 시작되었으며, 눈으로 봐야 믿을 수 있기에 표적을 구하는(마 12:39) 유대인의 민족적 특성을 고려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취하신 증거 방법이었다. 사도들의 구원의 메시지에서 신유가 분리된 적이 없다는 조목사의 주장은 여전히 천년왕국이 도래할 수도 있었던 사도행전의 성격을 이해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 것으로, 사도행전 28:27 이후로 시작되는 교회 시대의 신유론에는 적용할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의 “영·혼·몸”과 순복음의 “전인구원론”
조목사는 이와 같이 마태복음 10:7,8, 누가복음 10:9과 사도들의 행적을 근거로 『하늘 나라의 복음은 인간의 영과 혼과 육의 구원인 “전인구원”이다.』라고 주장한다.5) 다른 책들에서도 “전인구원론”을 강조하고 있다.6) “육체의 치유”가 구원에 필수적으로 포함되기 때문에 영과 혼은 물론, 몸까지 구속되는 “전인구원론”이 온전한 구원론이라고 가르치는 것이다. 그러나 죄인이 구원을 받을 때 인간의 삼중구조에 속하는 영, 혼, 몸(살전 5:23)에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성경은 다르게 말씀하고 있다.
‘영’에 관해서 보자면, 주님은 아담이 금지된 열매를 먹으면 죽으리라고 말씀하셨는데(창 2:17), 사람들은 대개 이것이 인간의 ‘육체적인 죽음’을 언급하는 것으로 오인한다. 그러나 『향락 속에 사는 여인은 살아 있지만 죽은 것이라.』는 디모데전서 5:6과 『죽은 자들로 그들의 죽은 자를 장사지내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는 누가복음 9:60에서 우리는 살아 있으나 “죽은 자”를 보게 된다. 죄인은 구원받기 전에는 살아 있어도 “허물과 죄들 가운데서 죽었던” 존재였으나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살림을 받은 사람이다(엡 2:1). 무엇이 살림을 받은 것일까? 주님은 『육신으로 난 것은 육이요, 또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라.』(요 3:6)고 하셨다. 그리고 『너희는 거듭나야만 한다.』(요 3:7)고 하셨다. “거듭난다”는 것은 “다시 태어난다”는 뜻이다. 즉 죽었던 영이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야 함을 말씀하신 것이다. 죄인의 영은 죄인이 구원을 받을 때 성령으로 다시 태어난다(거듭난다).
인간의 ‘혼’은 죄인의 구원과 직접적으로 관계 있다. 혼은 그 사람의 몸의 형태(bodily shape)를 지니고 있다(눅 16:23,24, 계 6:9,10; 20:4). 성경은 죄인이 구원을 받을 때 그의 혼이 구원을 받는다고 말씀한다. 『이는 너희 믿음의 결과, 곧 너희 혼들의 구원을 받음이니라』(벧전 1:9). 창세기 2:7은 인간이 지음 받을 때 “살아 있는 혼”(a living soul)이 되었다고 말씀한다. 그후 혼은 살아 있으며 결코 죽지 않는다. 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죽으면 혼이 지옥에 가서 영원히 고통당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몸’에 관해서는, 죄인이 구원을 받기 전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혼이 몸에 달라붙어 있었다. 우리는 구약성경에서 혼(soul)이 ‘사람’을 나타낼 때 사용되는 것을 볼 수 있다(레 22:3, 겔 18:20). 구약 시대에는 혼이 몸에 붙어 있어 몸과 혼이 동일시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을 때 이 둘을 분리시키는 영적 대수술이 일어난다. 죄가 거하는 몸(롬 7:22,23, 골 2:11)에 달라붙어 있어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혼을 몸에서 분리시킨 것이다. 성경은 이것을 “그리스도의 할례”라 하며, 이것은 “육신의 죄들의 몸을 벗어 버린 것”이다(골 2:11). 그것은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행하신 “수술”(the operation of God; 12절)이다. 이 할례를 받지 못한 죄인들은 “육체의 무할례” 가운데서 죽어 있는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한다(골 2:13).
거듭난 그리스도인인 바울은 자신의 몸을 “사망의 몸”(롬 7:24)이라 했다. 성경은 이 “사망의 몸”의 구속을 죄인이 구원받는 시점으로 잡지 않고, 미래의 어느 날로 설정한다.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고 있느니라』(롬 8:23). 이것은 조목사가 몸의 구속이라고 주장하는 ‘병 고침’과 관계가 없고, 고린도전서 15:50-53에서 말씀하는 “부활의 몸”을 말하며, 모든 창조물이 간절히 기대하는(롬 8:22,23) 만물의 회복 시점과 관련이 있다. 즉 7년 대환란 끝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상에 재림하시고 그분이 치유의 표적을 보이시며 초림 때 가져오시려 했던 천년왕국을 세우실 때에야 비로소 구속받은 몸으로 병도 죽음도 없이 살게 되며, 만물의 화평을 말하는 이사야 11장의 예언이 성취되어 모든 창조물의 신음과 고통이 끝나게 된다. 성도는 그의 혼이 구원은 받았지만 몸은 여전히 죄의 저주 아래 놓여 있다. 그래서 바울은 신유의 은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병으로 인해 의사인 누가를 늘 대동하고 다녔다(골 4:14, 딤후 4:11). 질병 없는 몸은 먼 훗날의 이야기인 것이다.
구속(redemption)이란 노예의 몸값을 지불해 그를 해방시키는 것을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몸값을 대신 지불하심으로써(마 20:28) 우리를 모든 죄악에서 구속하셨다(딛 2:14). 인간이 영과 혼과 몸의 “통합적이고 전체적인 하나의 전인(全人)”인 것은 사실이나, 죄인이 구원받을 때 그의 영, 혼, 몸 모두가 구속받는 것은 아니다. 죄인의 죽었던 영이 다시 태어나고(거듭남), 육신의 죄들의 노예가 되었던 혼이 구속받으며, 여전히 죄에 속박되어 있는 몸은 미래에 구속받아(죄에서 해방되어) 병도 죽음도 없이 영원히 살게 되는 것이다. 후자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적 고난을 통해 보장해 주신 “치유”이며, “몸의 구속”이다.
‘영의 구속’은 틀린 교리이며, ‘육의 구속’은 먼 미래의 일이다. 더구나 조목사는 가장 중요한 ‘혼의 구속’은 언급하지도 않는다. 7) 그렇기에 타락한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그의 영, 혼, 몸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가 성경적으로 정립되지 않은 “전인구원론”은 비성경적인 교리인 것이다. BB
주석)-----------------
1) 조용기, <신유론>, (서울: 서울말씀사, 2001), p.47.
2) 김기준, <아버지의 왕국이 임하옵시며>, (서울: 말씀보존학회, 1999), p.248.
3) Ibid., p.260.
4) 조용기, <신유론>, p.47.
5) Ibid., p.47.
6) Ibid., pp.70-71; 조용기, <오중복음과 삼중축복>, (서울: 서울말씀사, 2002), p.143.
7) Ib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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