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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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화를 말할 자격 없는 성령운동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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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15년 02월호>

지난 1월 12일 한국조직신학회가 서울신학대학교 백주년기념관에서 개최한 제56차 신진학자 학술발표회에서 "건강한 성령운동의 발전을 위해서는 성령의 체험적 은사들과 함께 성화로 드러나는 열매가 융합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의견이 개진되었다고 한다. 언론에 따르면, 그날 유근재 박사(믿음의승리교회 협동목사)라는 이가 ‘오순절주의와 은사주의 신학의 비교연구'를 주제로 한국교회 성령운동이 지향해야 할 과제를 설명했다고 하는데, 그의 주장은 다음과 같았다. "오순절주의 신학과 은사주의 신학을 구분하기는 매우 애매모호하지만 서로 동일시하기는 더욱 어렵다. 오순절 교단은 나름의 신학을 발전시키며 성장했고, 은사주의 신학자들은 침례교나 장로교, 감리회 등 교단의 소속감이나 신학적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들 교단들의 전통을 존중하며 오순절주의를 발전시켰기 때문이다. 오순절주의자들과 은사주의자들의 가장 큰 차이점은 성령체험의 방식인데, 전통적인 오순절 학자들은 ‘오직 방언'이 성령세례의 필수 불가결한 일차 증거라고 보는 반면, 은사주의 신학자들은 방언 외에도 신유나 예언, 영분별의 은사들이 성령세례의 증거로 나타날 수 있다고 인식한다 ." 그는 또한 성령운동의 영적 성숙을 위한 과제에 대해서는 " 성령세례 현상에 너무 치중하다 보면 기독교 체험의 극단적이고 기능적인 측면만을 강조하는 경향이 나타날 수도 있다. 성령의 은사들과 열매들이 반드시 잘 융합되는 것이 중요하다. 체험만을 강조하는 극단의 성령운동은 영적 성숙이나 성화는 외면하면서 성령의 내적 은혜를 개발하고 깊은 신학적 성찰을 하기 어려울 수 있다. 끊임없는 영적 성숙과 성화, 자기성찰이 없는 부흥 운동은 마침내 소멸하기 마련이다 . 균형적인 성령운동을 통해 오순절과 은사주의 신학이 한국 땅에서도 깊은 신학적 성찰과 자기반성을 토대로 성장을 넘는 성숙과 새로워짐을 경험했으면 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오늘날의 성령운동에서 과연 체험과 성화의 융합이 가능한 일인가?"하고 묻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이 가능한 일일까?

먼저 우리는 성령운동에서 주장하는 "체험"의 본질을 알아야 한다. 흔히 성령세례(원래는 "성령침례")라 일컬어지는 이것은 기본적으로 그 증거가 "방언"으로 제시된다. 앞서 언급되었듯이, 전통적인 오순절주의자들은 방언만을 성령세례의 필수 불가결한 일차 증거로 보는 반면, 일반 은사주의자들은 방언 외에도 신유나 예언, 영분별 등이 성령세례의 증거로 나타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이 두 주장 가운데 무엇이 맞느냐고 묻는다면,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은 "둘 다 틀렸다. 그 어떤 것도 성경적인 교리가 될 수 없다."고 답변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중생 이후의 체험으로서 중생과 분리시키는 성령세례는 성경에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 교회에서 성령세례라고 잘못 불리는 성령침례는 중생과 분리되는 개별적인 체험이 아니다. 그것은 "죄인이 중생할 때 성령님에 의해서 받는 영적 침례"로,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 잠겨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한 성령에 의하여 우리 모두가 한 몸 안으로 침례를 받았으며 또 모두가 한 성령 안으로 마시게 되었느니라』(고전 12:13). 죄인이 거듭날 때 성령님에 의해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 침례를 받으면 그는 그 순간부터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된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2:13에서 성령침례를 언급한 이유는 "그리스도의 몸 안에 주어진 은사들"에 관해 논하기 위함이었다. 바로 앞 절인 12절은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한 몸에 지체는 많아도 모두 한 몸인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도 그러하시니라.』면서 그리스도의 몸 안에 있는 "많은 지체"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고, 이 "중생한 지체들"이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갖는 다양한 은사들이 그 앞 절들에서 언급되고 있다.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을 통하여 지혜의 말씀을 주시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또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들을, 또 어떤 사람에게는 기적들을 행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을 분별함을, 또 어떤 사람에게는 여러 가지 방언들을 말함을 ,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들을 통역함을 주시느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은 한 분이신 같은 성령께서 역사하시어 그분께서 원하시는 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느니라』(고전 12:8-11).

이 구절들에서 특히 주목해야 할 부분은 그리스도의 몸 안에 있는 지체들 모두에게 방언의 은사가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방언의 은사는 본문의 성령침례를 받은 이들 가운데 『어떤 사람』에게 주어졌을 뿐이다. 오순절주의자들이나 은사주의자들은 "성령세례"의 외적 증거가 "방언"이라고 공통적으로 가르치지만, 정작 성령침례를 다루는 고린도전서 12장에서는 성령침례를 받았다고 해서 모두 다 방언을 하는 것은 아니라고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다 병 고치는 은사들을 가졌겠느냐? 다 방언들을 말하겠느냐? 다 통역하겠느냐?』(고전 12:30)

이 점이 증명하는 것은 그들의 성령세례와 성경의 성령침례, 또 그들의 방언과 성경의 방언이 그 근원부터가 완전히 다르다는 점이다. 성경에 없는 인간의 교리를 마치 성경에 있는 교리인 양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의 방언은 "믿지 않는 유대인들"을 위한 표적이었다. 『율법에 기록되기를 "주가 말하노라. 내가 이 백성 에게 다른 방언들과 다른 입술들을 가진 사람들을 통해 말할 것이지만 그들은 그 모든 것으로도 내게 듣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방언들은 믿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믿지 않는 사람들을 위한 표적 이지만 예언은 믿지 않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고 믿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고전 14:21,22). 성경은 『이 백성』 곧 "유대인들"에게 다른 방언들, 즉 다른 언어(외국어)로 말씀하실 것이라고 구약에 예언하고 있으며(『이는 그가 더듬는 입술과 다른 언어로 이 백성에게 말씀하실 것임이라』 - 사 28:11), 신약은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하고』(고전 1:22) 『방언들』은 『믿지 않는 사람들을 위한 표적』이다, 즉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 가운데 『믿지 않는 사람들을 위한 표적』이라는 점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성경의 방언은 이방인들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성경의 방언은 말하는 그 사람도 못 알아듣는 오순절ㆍ은사주의자들의 이상한 소리가 아니라 "외국어"였다. 사도행전 2장에서 사도들이 방언을 하는 것을 들은 천하 각국으로부터 온 유대인들은 『그런데 어떻게 해서 우리 각 사람이 우리가 태어난 곳의 고유 언어 로 말하는 것을 듣게 된단 말인가?』(행 2:8)라고 말했다. 즉 그들이 들었던 방언은 그들이 『태어난 곳의 고유 언어』였던 것이다.

성경의 방언은 "외국어를 배운 적이 없는 사람이 일시적으로 그 외국어를 초자연적으로 이해하고 말함으로써 하나님의 계시를 확증해 주던 사도들 시대의 표적"이었다. 사도행전 2장에서 성령침례를 받은 120명 가운데 방언을 한 사람들은 "베드로와 열한 사도"뿐이었으며(행 2:14), 그들의 방언은 모두 "외국어"였다. 이 사실은 누구나 성령세례를 받아야 하며 그 외적 증거가 방언이라는 거짓 주장을 반박하며, 말하는 그 사람조차도 못 알아듣는 오순절ㆍ은사주의자들의 방언(소리)이 성령께서 주신 은사가 아님을 증명한다.

자, 이제 성화에 관해서 논의해 보도록 하자. 한국조직신학회는 금번 학술발표회에서 성령운동을 하는 이들이 추구해야 할 체험과 성화의 융합을 이야기했다. 그러나 "오늘날의 성령운동에서 체험과 성화의 융합이 가능한 일인가?"라고 묻는다면 "불가능하다."가 유일한 답변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추구하는 "체험"과 성경에서 말씀하는 "성화"는 서로 만날 수 없는 지옥과 하늘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성화란 "거룩하게 됨"이다. 성령에 의해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 들어감으로써 거룩하게 된(과거의 성화, 고전 6:11)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이 그 뒤 매일매일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을 투영해 보며 옛 사람의 모습을 제거하는 삶을 살다가(현재의 성화, 살전 4:3, 요 17:17) 주님께서 다시 오셔서 그의 몸을 주님의 부활하신 몸과 똑같이 변화시키시면 죄 없는 온전한 거룩함을 소유하게 되는데(미래의 성화, 살전 5:23,24) 이것이 성화의 3단계이다. 한국조직신학회가 체험과 성화의 융합을 말했을 때에는 "현재의 성화"를 언급한 것이 분명한데, 이 현재의 성화는 매일매일 주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죄의 능력으로부터 구원받는 일이기에 "하나님의 말씀," 즉 변개되지 않은 바른 성경을 가진 그리스도인들만이 가능한 일이다. 죄라고 하면 흔히 성품적인 면을 생각하기 쉽지만, 교회와 관련해서는 그것의 교리적인 면이 먼저 다뤄져야 한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어진 것으로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훈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이 온전하게 되며, 모든 선한 일에 철저히 구비되게 하려 함이니라』(딤후 3:16,17). 성경은 성도를 책망하고 바로잡고 의로 훈육하는 일보다도 "교리"를 먼저 언급하고 있다. 하나님의 사람이 온전하게 되고 모든 선한 일에 철저히 구비되는 것, 즉 "현재의 성화"에 관하여 성경은 "교리"를 최우선의 자리에 놓고 있는 것이다.

"교리"로 치자면, 표적으로서의 방언은 사도들의 시대가 저물면서 신유의 표적과 함께 중지되었다. 바울은 『방언들이라도 그치게 될 것이며』(고전 13:8)라고 말했다. 신유의 표적을 지녔던 그는 사역 말년에 가서 디모데(딤전 5:23)와 트로피모(딤후 4:20)를 치유하지 못했고, 자신도 의사인 누가를 데리고 다녔다(딤후 4:11).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자 복음은 이방인들에게로 전파되었고, 표적은 중단되고 표적이 아닌 "믿음"으로 행하는 시대가 펼쳐지게 된 것이다.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라』(고후 5:7). 이처럼 방언이 중단되었는데도 그것이 여전히 실행되는 것처럼 "거짓 교리"를 가르치는 이들이 "현재의 성화"를 논하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인데, 마치 자신들이 성화를 논할 자격이 있는 것처럼 그럴듯한 언변으로 학술발표회까지 가졌던 것이다. 『이제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권고하노니 너희가 배운 교리에 역행하여 분열을 일으키고 공박하는 자들을 주의하고 그들에게서 떠나라. 그러한 자들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배를 섬기는 것이니 정중한 말과 그럴듯한 언변으로 순진한 사람들의 마음을 미혹하느니라』(롬 16:17,18). 성경적인 교리에 역행하는 자들은 성경에 관하여 아무것도 논할 자격이 없다. 변개된 성경에서는 바른 교리가 나올 수 없다. 그들도 하나님의 이름을 언급하고 중생과 성화 같은 교리적 용어들을 말하지만, 그것은 무자격자들의 언어유희일 뿐 하나님과는 전적으로 무관한 일이다. 변개된 성경을 사용하는 한 교리적 성화는 물론, 성품적 성화 역시 불가능하다. 흉내는 낼 수 있어도 아무런 성화도 이룰 수 없다. 오로지 바른 말씀만이 한국 교회가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외침으로부터 귀를 돌이켜 『마귀들의 교리들』(딤전 4:1)로 가려운 귀를 긁고 있는 이상 성화는 물 건너간 일이다. 바른 말씀, 바른 교리! 오직 이것만이 참된 성화를 이룰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바로 그것만이 한국 교회의 문제를 해결할 유일한 해법임을 명심해야 한다.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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