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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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우시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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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2년 07월호>

요한복음 11:35은 영어 성경에서 가장 짧은 구절이다. 한글과 헬라어로는 『항상 기뻐하라.』(살전 5:16)라는 말씀이 가장 짧다. 영어와 한글에서 가장 짧은 성경 구절을 연결하면 “예수께서 우셨으니 항상 기뻐하라.”라는 말이 된다. 예수님께서 우셨다는 말씀은 과거에 일어난 사실을 기록한 것이고,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명령이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왜 우셨고 그리스도인들은 왜 항상 기뻐해야 하는 것인가? 예수님께서는 사랑하는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우셨다. 하나님께서 육신으로 나타나신(딤전 3:16)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시면서 또한 사람이셨다. 『슬픔의 사람이요 질고에 익숙한 사람』(사 53:3)이셨던 주님께서는 평범한 사람들처럼 감정을 지니신 것이다. 마리아와 마르다와 주변 유대인들이 나사로의 죽음 때문에 울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우셨다(요 11:32-35).

하지만 예수님의 눈물에는 이보다 더 심오한 의미가 있었다. 즉 사랑하는 나사로의 죽음을 보시고서 나사로뿐 아니라 모든 사람이 죄와 사망의 법에 매여 있는 안타까운 현실에 예수님은 슬퍼하셨던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이제 곧 십자가에서 이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하려고 하시는 하나님의 크신 자비와 놀라운 은혜와 깊은 사랑의 구원 계획으로 인해서 감격의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으셨을 것이다. 이러한 예수님의 순종으로 죽음을 보지 않고 값없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 사람이라면 항상 기뻐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눈물로 인하여 항상 기뻐해야 할 강력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친구이시고 신랑이시면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이 예수님께서 우신 것처럼, 성경에는 친구가 사랑하는 친구와 헤어지면서 울고, 남편이 아내와 헤어지면서 울며, 아버지가 아들과 헤어지면서 우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말씀들을 보면서 예수님의 눈물의 의미를 생각해 보도록 하자.

첫째, 사람은 사랑하는 친구와 헤어질 때 운다. 『그 소년이 가자마자 다윗이 남쪽을 향한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얼굴을 땅에 대고 세 번 절한 후에, 그들이 서로 입맞추고 함께 울었으니, 다윗이 더욱 심하더라』(삼상 20:41). 성경에 나오는 가장 위대한 우정 중의 하나는 바로 요나단과 다윗의 우정이다. 이들은 전장에서 전투를 지휘하는 지휘관들로서 강하고 담대한 군인들이었다. 이런 그들이 서로 부둥켜안고 울고 있는 이유는 헤어짐 때문이다. 인간은 이별의 무게를 스스로 감당할 수 없는 연약한 존재인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곧 이 세상과 헤어질 것이고 이 세상에 속해 있는 구원받지 못한 모든 사람들과도 헤어질 것이다. 요나단은 다윗과 헤어지기 전 다윗에게 아버지 사울의 반응에 따라 두 가지 가능성이 있음을 말해 주었는데, 하나는 평안 가운데 함께 살게 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다윗이 사울을 피해 도망가야만 목숨을 부지할 수 있게 되는 것이었다. 다윗의 입장에서는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하기 위해 당연히 도망갈 마음의 준비도 했겠지만, 한편으로는 떠나지 않고 평안 가운데 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기대가 좌절되어 요나단과 헤어져야만 하자 다윗은 요나단보다 더 심하게 울었던 것이다.

그리스도인 역시 요나단이 다윗에게 한 것처럼 “두 가지 결과”를 말해 주는 사람이다. 즉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으면 우리와 함께 하늘로 올라갈 것이지만, 복음을 믿지 않고 거부하면 하늘로 갈 수 없고 지옥으로 간다는 사실이다. 구원받지도 않은 채 교회에 다니면서 자신이 휴거될 것이라고 기대했던 사람들은 어느 날 자기와 함께하던 그리스도인들이 모두 사라진 뒤 자신만 땅에 남아 있는 것을 알고서 펑펑 울게 될 것이다. 이런 경우에는 휴거된 그리스도인 또한 하늘에서 울게 될 것인데, 이는 함께 하늘나라로 올라올 것으로 믿었던 사람들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라. 얼마나 큰 상실감을 느끼겠는가!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먼저 자기 주변에 있는 가까운 이들에게 복음을 전해서 구령해야 한다. 가족, 친척, 친구, 지인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며, 만일 그들이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여 구원을 받는다면 그들과 결코 헤어지지 않고 영원히 함께 살 수 있게 된다. 영원한 행복을 소유한 그리스도인이라면 나와 상관없는 지나가는 사람들에게라도 이 기쁜 소식을 전해 줘서 그들도 영원한 생명을 소유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의 가장 소중한 친구가 되어 주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복음을 맡겨 주신 뜻이다. 주님께서는 하나님과 세상의 화해를 위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화해의 직분을 주셔서 복음을 전파하게 하셨다(고후 5:18,19).

둘째, 남편은 아내와 헤어질 때 운다. 『다윗이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에게 사자들을 보내어 말하기를 “내 아내 미칼을 내게 돌려 달라. 그녀는 내가 필리스티아인들의 포피 일백으로 정혼한 여자니라.” 하니라. 이에 이스보셋이 보내어 그녀의 남편, 즉 라이스의 아들 팔티엘로부터 그녀를 데려오니 그녀의 남편이 그녀 뒤에서 울면서 그녀를 따라 바후림까지 오더라. 그때 아브넬이 그에게 말하기를 “가라, 돌아가라.” 하니, 그가 돌아가더라』(삼하 3:14-16). 다윗에게는 사울의 딸인 미칼이라는 아내가 있었다. 다윗이 사울을 피해 도망다니는 동안 사울은 다윗에게 아내로 준 미칼을 다른 남자에게 혼인시켜 버렸다. 그러나 전쟁에서 승리한 다윗은 그 아내를 다시 찾아온다. 다윗은 아내를 되찾았지만 팔티엘이라는 남자는 하루아침에 아내를 빼앗기고 말았다. 팔티엘은 2년간 혼인 생활을 유지하며 미칼과 한 몸이 된, 그녀의 실제적인 남편이었다. 아내와의 원치 않는 이별 앞에 차마 집에 앉아 있을 수 없었던 팔티엘은 멀리까지 울면서 그녀 뒤를 따라왔던 것이다. 남편은 사랑하는 아내와 헤어질 때 눈물을 흘리며 슬퍼한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정결하게 된 그분의 신부이다. 하지만 한 번 구원받았다고 해서 죄가 없는 것은 아니다. 구원받은 후에 죄를 지을 수 있다. 그래서 매일 자백하고 용서받아 정결함을 계속 유지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구원받았기 때문에 죄를 짓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무리가 있는데, 이것은 혼인을 위해 한 번 단장한 신부가 혼인식을 치를 때까지 씻지 않은 몸으로 사는 것과 같다. 화장을 지우지도 않고 세수도 하지 않은 채 혼인식을 기다리는 것이다. 그 상태를 계속 유지하고 있다면 그 여인은 향기가 아닌 악취를 풍기는 신부가 될 것이다. 육신은 시간이 흐를수록 썩고 쇠하므로 날마다 씻는 일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이와 같은 우리가 주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근거는 주님의 보혈이다. 사람은 하루만 씻지 않아도 냄새가 나고 지저분해지는데, 며칠씩 말씀의 물로 씻지도 않고 일상 속에서 지은 죄들을 자백해서 용서받지도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 사람은 마귀의 사랑과 관심을 듬뿍 받게 될 것이고, 마귀는 그런 성도를 육신적이고 세상적인 것들로 눈을 가리고 귀도 막아 버려서 결국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도 못하게 할 것이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과 멀어지면 예수님 입장에서는 자신의 피로 정결케 한 신부가 마귀에게 점유당하는 상황이 벌어지는데, 예수님의 신부가 그렇게 되는 것은 주님이 무능력해서도 아니고 마귀가 유능해서도 아니다. 예수님의 신부가 마귀에게 점유당하는 것은 그 신부가 더 이상 죄를 씻지 않고 자신을 불결하게 방치했기 때문이다(사 59:1,2).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지상 삶이 되어서는 안 된다. 휴거되면 신랑이신 예수님과 영원히 함께하겠지만 휴거 전까지 마귀에게 사로잡힌 채 살면 안 되는 것이다. 자신의 신부가 지상에 사는 동안 마귀의 포로가 되어 있는 것을 보신 예수님께서 왜 슬퍼하시지 않겠는가? 신랑을 사랑한다면 신부는 자신을 죄에 방치하지 말고 거룩함으로 단장하고 있어야 한다.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신부는 매일 말씀의 물로 자신을 씻음으로써 언제라도 자신을 데리러 오실 신랑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한다.

셋째, 아버지는 아들과 헤어질 때 운다. 『그러나 왕은 자기 얼굴을 가리고 큰 소리로 “오 내 아들 압살롬아, 오 압살롬아,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고 부르짖더라』(삼하 19:4). 다윗은 반역자들과의 전쟁에서 승리했지만 그 전쟁에서 자기 아들 압살롬이 죽었기 때문에 차마 기뻐할 수 없었다. 다윗은 자신에게 반역한 아들이 죽었음에도 오히려 신하들을 부끄럽게 할 만큼 크게 울부짖었다. 그렇다고 해서 다윗이 자기 아들들을 유별나게 사랑했던 유난스러운 아버지는 아니었고, 압살롬을 다른 아들들보다 더 각별히 사랑했던 것도 아니었다. 다윗의 울음은 자식을 둔 아버지라면 갖게 될 지극히 정상적인 감정의 표현이었다. 자기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마음은 대개 다 이런 것이리라.

아버지인 자신을 죽이고 왕이 되려 했던 아들의 죽음도 이렇게 슬퍼하는데, 하물며 자신의 죽음으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해 드리려는 큰 효자가 있다면 그런 아들의 죽음은 아버지의 마음을 더더욱 아프게 할 것이다. 『내가 땅에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였으며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그 일을 완성하였나이다』(요 17:4). 이것은 불평도, 반항도 없이 온전히 순종하신 후에 공손히 사역을 완성했다고 아버지께 말씀드리는 예수님의 기도이다. 죄가 전혀 없으신 예수님께서 하늘의 모든 영광을 버리시고 친히 죄 그 자체가 되셔서(고후 5:21) 고난과 수치를 당하신 이유는 그 일이 아버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때문이었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그분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기쁘게 내어주신 것은 형용할 수 없이 큰 희생이었는데, 이렇게 큰 구원을 소홀히 여긴다면 큰 죄를 짓게 되는 것이다. 『만일 천사들을 통하여 하신 말씀이 확고하여 모든 범죄와 불순종이 공정한 보응을 받았다면 우리가 이처럼 큰 구원을 소홀이 여기고서야 어떻게 피할 수 있으리요?』(히 2:2,3)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신 이유는 죄인들을 지옥의 형벌에서 구원하기 위해서만이 아니었다. 죄인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크신 자비와 은혜와 깊은 사랑을 깨닫고서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기를 원하셨던 것이다(롬 12:1,2). 구원받은 것은 자연인으로서의 삶의 끝이요 영적인 삶의 새로운 시작이다. 구원을 소홀히 여겨서 육신적으로 사는 것은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주신 하나님의 눈물을 통 속의 한 방울 물보다도 못하게 여기는 죄임을 알아야 한다.

친구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친구이고, 신랑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신부이며, 아버지에게 가장 소중한 이는 아들이다. 친구에게나, 신랑에게나, 아버지에게나 그들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상황은 그들이 아무리 강한 군대 대장이고 왕이고 왕의 아들이라 할지라도 그들로 하여금 눈물을 흘리게 만든다.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하는 친구라면, 또 그분께 사랑받는 신부이고 그분의 자녀라면 예수님을 슬프게 해서는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매일 복음 전파에 힘쓰고, 매일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또 죄를 자백해서 용서받아야 하며, 하나님께 진실로 헌신함으로써 지옥의 형벌에서 구원해 주신 은혜에 보답해야 한다. 바로 이것이 곧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쁘게 맞이하는 길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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