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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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자녀를 “양육”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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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2년 08월호>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라, 그것이 아주 좋았더라. 저녁과 아침이 되니 여섯째 날이더라』(창 1:31).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고 아주 좋아하셨다. 실제로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은 사람에게도 아주 보기 좋다. 뭉게구름은 뭉게구름대로 보기 좋고 파란 하늘 역시 보기에 아주 좋으며, 땅에서 피는 꽃들도 어느 것 하나 미운 것 없이 모두 보기 좋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것은 그분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사람들이 보기에도 아주 좋기 마련인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들을 보며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뻐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아주 크게 기뻐하신다.

마찬가지로 사람도 자기 형상을 닮은 자녀들이 자신들과 같은 것을 보고 좋아하고 같은 곳을 바라보며 같은 이상을 추구하기를 원한다. 그래서 그리스도인 부모들 역시 자기 자녀들이 자기들처럼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께 밀착하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기 인생도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 인생이거늘 하물며 자녀들의 인생이 부모가 원하는 바와 얼마나 일치할 수 있겠는가?

현시대에는 다양한 지식과 정보의 풍요로움 속에 살면서도 올바른 정보를 선택하지 못하고 오히려 잘못된 지식과 잘못된 양육 방식을 선택함으로써 부모와 자녀 사이에 갈등과 오해를 키우고 있는 안타까운 가정이 몹시 많다. 이런 모습은 참으로 안타까운 마지막 시대의 모습이다. 그리스도인 가정에서는 부모와 자녀 관계에서 갈등과 오해가 커지기 전에 성경적 지식을 기반으로 올바른 관계를 형성하고 자녀를 가르쳐야 한다. 본 글에서는 그리스도인 부모가 아이를 어떻게 가르치고 무엇에 집중할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하는지 성경적 대안을 제시해 보고자 한다.

/ 외모에 집중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

『그러나 온 이스라엘에 압살롬처럼 그의 아름다움으로 그토록 칭찬받는 자가 없었으니, 그는 발바닥부터 머리 끝까지 흠이 없더라』(삼하 14:25). 다윗의 아들 압살롬은 발바닥도 잘생겼고 정수리조차 아름다웠던 청년이었다. 이 시대에 이런 사람이 있을지 확인할 방법은 없다. 왜냐하면 멋지고 잘생겼다는 사람들이나 아무리 유명한 연예인이라 해도 그들의 발바닥과 정수리까지 잘생겼는지 확인할 길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압살롬은 그의 발바닥부터 머리끝까지 흠이 없었다는 것을 성경이 보증하고 있다. 참으로 이상하지 않은가? 하나님께서는 외모를 보지 않으시는 분이신데 왜 압살롬의 외모를 기록하고 있는 것인가? 요한복음 21:25에서는 예수님의 일을 일일이 기록한다면 이 세상 자체에라도 그 책들을 둘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 또한 시편 12:6에서는 하나님의 말씀들은 일곱 번 정화된 은 같다고 말씀하신다. 외모를 보지 않으시는 분께서 자신의 아들의 일들도 다 기록하지 않으시고 일곱 번씩이나 정화된 순수한 말씀에 자기 아버지에게 반역하다가 살해된 사람의 외모를 기록하는 이유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사람은 사람의 외모를 보기 때문이다.

미국에 있는 어떤 대학에서 한 가지 심리 실험을 진행했다. 학생들 여러 명이 재판관 역할을 맡아 강간범에게 형을 언도하는 모의재판을 진행하는 실험이었다. 재판의 결과 피해자가 미녀일 때는 (미녀이기 때문에 유혹을 받았다는 생각에) 강간범에게 평균 2.8년의 징역이 내려졌고, 평범한 여자가 피해자일 때는 평균 5.2년의 징역이 언도되었다고 한다. 동일한 형량이 내려져야 하는 동일한 사건이었는데 피해자의 외모만으로 형량이 달라진 것이다. 이런 사례는 심리학 실험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을 만큼 많다. 사람의 외모를 보면 잘못된 판단을 하기 쉬운 것이다.

하나님께서 외모를 보지 않으시고 마음을 보시는 것과는 반대로 세상은 외모를 보고 마음을 보지 않는다. 그래서 하나님께 잘 보이려고 하는 사람은 외모보다 자기 마음에 신경을 더 쓰고 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사람은 마음보다 외모에 더욱 신경을 쓰게 된다. 서로 의식하는 대상이 다르기 때문이다. 당신은 사람을 의식하는가, 하나님을 의식하는가? 『사람을 두려워하면 덫에 걸리나, 주를 신뢰하는 자는 누구나 안전하리라』(잠 29:25).

사람을 의식하고 사람을 두려워하고 사람을 신뢰하는 사람은 잘못된 판단을 내리기 쉽다. 하나님을 의식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은 옳은 판단을 내릴 수 있다. 자신이든 다른 사람이든 외모에 집중하지 말고 내면에 말씀이 얼마나 효과적으로 자리 잡고 있는지 확인하고 교육해야 한다.

/ 비교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

『주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카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셨더라. 그러므로 카인이 몹시 격노하고 안색이 변하더라』(창 4:4,5). 인류 최초의 가족 안에서 인류 최초의 형제지간에 인류 최초의 살인 사건이 발생했는데 그 사건의 발단은 “비교하는 마음”이었다. 카인은 자신을 동생과 비교했고 그 결과 불만을 품었고 결국 살인이라는 죄를 저지르고 말았던 것이다. 인류 최초의 범죄가 비교하는 것에서 시작됐다면 우주 최초의 죄 역시 비교하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내가 하늘에 올라가서 내가 내 보좌를 하나님의 별들보다 높일 것이요, 내가 또한 북편에 있는 회중의 산 위에 앉으리라. 내가 구름들의 높은 곳들 위로 올라가, 내가 지극히 높으신 분같이 되리라』(사 14:13,14). 루시퍼 역시 하나님과 자신의 보좌를 비교했고 하나님같이 되리라고 마음먹었고 결국 반역했다.

비교하면 불행해지고 불행하면 행복하기 위해 불법과 편법을 생각하기 쉽다. 우주 만물을 보라. 비교할 필요가 있는 피조물이 있는가? 개나리는 노랑이면 그만이고 벚꽃은 분홍이면 충분하고 장미도 빨강이면 충분하다. 피조물은 지음받은 대로 각자 자기 색깔을 발현해 내면 그것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다. 꽃길을 걸어 본 적이 있는가? 연두색 풀과 노랗고 빨간 꽃들과 푸른 잎을 내고 있는 나무들을 보라. 모두가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지 않은가? 모두 자기 자신에게 집중해서 자기 색깔을 드러내면 그것이 곧 하나님을 찬양하는 오케스트라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개나리가 장미를 보고 나는 왜 빨갛지 않은지를 생각하면 그 피조물은 행복할 수도 없고 하나님을 찬양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부모들은 자녀들의 꿈과 열정이 어디서 시작됐는지 점검해야 한다. 비교에서 시작된 꿈이라면 힘들게 달성해도 행복할 수 없고 그 일로 하나님을 찬양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주님 안에서 행복하고 주님을 찬양하면서 주님을 영화롭게 해 드리고 싶다면 주님께서 나에게 심어 두신 내 색깔을 내가 발현해 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에게 주어진 시간에 나에게 온전히 집중해야 한다. 운동 시간엔 운동에 집중하고 미술 시간엔 미술에, 음악 시간엔 음악에 집중해야 하고 교과목 시간엔 교과목에 집중하면 된다. 진도나 성취도나 속도는 학생이나 부모가 신경 쓸 일이 아니다. 학생들은 집중하면 충분하다. 그렇게 주어진 시간에 그 일을 하는 나에게 온전히 집중하면 주님께서 심어 두신 나의 색깔이 우러나오게 된다. 나를 다른 사람과 비교할 필요도 없고 내 꿈을 빨리 찾으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다. 우러나오면 그것에 더 집중하면 되는 것이다.

특히 부모들은 아이를 비교하지 말아야 한다. 수박과 감자를 비교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수박은 수박이고 감자는 감자다. 옆집 아이는 옆집 아이일 뿐이다. 우리 아이를 옆집 아이와 비교하지 말아야 한다.

/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해야 한다 /

양육하는 것과 사육하는 것은 다르다. 물론 양육과 사육이 다르다는 것 정도는 알겠지만 두 단어의 정확한 차이점을 설명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필자가 국어사전의 도움을 받아 양육과 사육의 차이점을 설명해 보겠다.

국어사전에 따르면 “양육”은 “아이를 보살펴서 자라게 하는 것”이고, “사육”은 “어린 가축이나 짐승이 자라도록 먹여서 기르는 것”이다. 즉 양육은 보살펴서 자라게 하는 것이고, 사육은 먹여서 자라게 하는 것이다. 이런 국어사전의 정의에 따르면 밥을 굶기지 않고 키우고 있어도 보살핌이 없다면 자녀를 사육하는 꼴이 된다. 그렇다면 보살핌이란 무엇인가? 역시 국어사전에 정의된 “보살피다”의 뜻은 “정성을 기울여 보호하고 돕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녀를 보호하고 돕기 위한 방법은 무엇인가? 사립학교를 보내고 비싼 사교육을 받게 하면 되는 것인가? 좋은 대학에 진학하여 대기업에 취업할 때까지 물심양면으로 뒷바라지하는 것이 아이를 보호하고 돕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부모가 아이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은 아이를 돕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부모는 아이 옆에 영원히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아이를 진짜 돕고 싶다면 언젠가 부모 없이 아이 혼자 세상에 있을 때 그 아이가 스스로 자기 삶을 살아낼 수 있도록 훈련시켜 줘야 한다. 즉 하나님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아이로 키워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부모는 영원히 아이를 지켜 줄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가능하시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 아이가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기도하면서 살아 계신 하나님께 밀착하여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성경적인 양육이다. 자녀를 양육하고자 하는 부모라면 아이에게 가장 필요한 하나님의 말씀을 매일 공급해 주어야 한다. 이렇게 성경적인 양육을 받은 아이라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호받고 말씀에서 도움을 받아 건강한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할 수 있겠지만, 양육을 받지 못하고 사육을 당한 아이는 사육을 당했기 때문에 건강한 성인으로 자라기 어렵다. 오히려 사육을 당한 아이는 짐승이 될 수 있다고 성경은 경고한다. 『사람이 존귀에 처해 있어도 깨닫지 못하면 멸망하는 짐승들과 같도다』(시 49:20).

하나님의 말씀을 매일 제공해 주고 있다면 양육을 통해 사람을 키우고 있는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이 없이 따뜻한 밥만 주고 있다면 멸망하는 짐승으로 사육하고 있는 것이다. 소중한 나의 자녀가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귀한 사람이 될 것인지, 하나님을 대적하는 힘센 짐승이 될 것인지는 부모의 교육에도 책임이 있다.

성경은 말씀한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뜻대로 씨앗에다 형체를 주시되 씨앗마다 그 고유한 형체를 주시느니라』(고전 15:38).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은사를 주셨고 그것으로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뻐하며 하나님을 섬길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 부모들은 자녀들이 하나님께 받은 은사를 찾고 발견하여 개발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외모가 아닌 마음 밭에 집중하도록 해야 하고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못하게 아이 자체를 존중해 줘야 하며 아이에게 가장 필요한 하나님의 말씀을 매일 제공해 줘야 한다. 이렇게 정성을 들여 하나님께 밀착케 한다면 같은 믿음과 같은 소망을 갖고 주님을 함께 기다리는 참된 그리스도인의 가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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