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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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개된 성서로는 “면류관”을 못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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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1년 12월호>

『이기려고 애쓰는 사람은 누구나 모든 일에 자제하나니 이제 그들은 썩어질 면류관을 받으려 하지만 우리는 썩지 않을 면류관을 받고자 함이라』(고전 9:25).


학창 시절에 중간고사나 기말고사 같은 “시험”을 쳐 본 사람은 누구나 “시험”이 주는 “긴장감”을 기억할 것이다. 또한 시험에 반드시 출제될 것 같아서 잘 준비해 놓은 부분도 막상 시험 직전에는 잘 생각이 나지 않아 당황해하면서 급하게 다시 책장을 이리저리 넘겨 확인해 보던 경험도 있을 것이다. 하물며 시험 직전까지도 잘 기억해 두었는데, 막상 시험지를 받고 나니 시험 시간 내내 기억이 나질 않아 답을 못 쓰는 때도 있다. 그래서 “시험”은 언제나 “조금만 더 잘 준비했더라면 좋았을 텐데.”와 같은 아쉬움을 남기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시험”의 중요한 의의는 정해진 기간에 학생으로서 얼마나 성실하게 공부했는가를 “평가”받는다는 데 있다. 좋은 평가를 받는 학생들은 “상”을 받는다. 그런데 어떤 학생이 시험이 있는 줄을 몰랐고, 또 “시험 과목”이나 “시험 범위”를 몰랐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어느 날 갑자기 준비도 안 했는데 시험을 보게 된다면, 그 순간 그는 “낭패”라는 단어의 의미를 제대로 실감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들도 “그리스도인”으로서 얼마나 제대로 일했는지에 대해 “시험”을 치르는 날이 온다. 『각 사람의 일한 것이 나타나게 되리니 그 날이 그것을 밝힐 것이라. 이는 그것이 불로써 드러나고 또 그 불은 각 사람의 일한 것이 어떤 종류인지를 시험할 것이기 때문이라』(고전 3:13). 『일한 것』, 즉 “행한 것”이 불에 의해 시험받는 일은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있게 된다. 『이는 우리 모두가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 나아가서 선이든지 악이든지 각자 자기가 행한 것에 따라, 자기 몸으로 행한 것들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라』(고후 5:10). 또한 성경은 『일한 것』에 따라 “상”이 있다고 분명히 말씀하신다. 『만일 어떤 사람의 일한 것이 세운 그대로 있으면 그는 상을 받을 것이요, 만일 어떤 사람의 일한 것이 불타 버리면 그는 손해를 당하리라』(고전 3:14,15)


성경이 증거하는 바와 같이 장차 그리스도인들은 휴거되어 셋째 하늘에서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 서게 되며, 거기에서 『일한 것』에 대한 “시험”을 치른다. 성경에서 『그리스도의 심판석』은 두 번 언급된다. 그런데 한글개역성경, 개역개정판, 공동번역 등은 고린도후서 5:10의 『그리스도의 심판석』을 「그리스도의 심판대」로 변개했고, 로마서 14:10의 『우리가 모두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 서리라.』라는 말씀을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라고 변개했다.
“심판석”과 “심판대”는 비슷한 것 아니냐고 반문할지 모르겠지만, “심판석”은 심판하시는 분께서 심판자로 앉으시는 자리이고, “심판대”는 심판받는 자가 심판받기 위해 올라서는 자리이다. 흔히들 “그가 역사의 심판대 위에 올랐다”와 같이 표현하지 않던가? 그러므로 “심판대 위”에 선 사람은 심판을 받는 것이고, “심판대 앞”에 선 사람은 심판을 구경하는 사람인 것이다. 우리가 심판대 앞에 서서 심판을 구경한다는 게 말이 되는가? 더욱이 심판하시는 분은 어디에 계신가? 심판대 뒤쪽인가? 정말이지 “심판대”는 말도 안 되는 번역인 것이다. 변개된 영어 성서들인 NASB(1963)와 NIV(1973)조차도 “judgment seat,” 곧 “심판석”이라고 제대로 번역한 것을 유독 한글 성서들만 “심판대”라고 변개했다. 변개에 변개를 더한 “한글 성서들”이로다!


특히 『그리스도의 심판석』을 「하나님의 심판대」로 변개한 것은 “교회 시대에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이 다 함께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 선다”는 진리를 가리기 위한 “사탄의 작품”이다. 『그리스도의 심판석』이라는 하나의 심판을 「그리스도의 심판대」와 「하나님의 심판대」로 각각 서로 다르게 변개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심판석”이 마치 “하나님의 심판대”와 같은 것처럼 만들었고, “하나님의 심판대”를 요한계시록 20:11-15의 “백보좌 심판”과 연결하게 해서 “그리스도의 심판석”이 “큰 백보좌 심판”과 같은 것인 양 생각하게 했다.


실제로 심판에 관한 올바른 진리를 모르는 목사들은 이 “세 구절”을 연결해서 “그리스도의 심판석”을 그로부터 1,000년 이후에나 있을 “백보좌 심판”과 같은 것처럼 가르친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심판석”이 마치 “불못”에 던져지는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심판인 것처럼 만들어 버렸다. 심지어 환란 시대의 교리인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마 10:22; 24:13, 막 13:13)라는 말씀까지 가미해서 “행위 구원론”으로 교인들의 믿음을 파괴하고 “행위”의 올무를 씌우기까지 한다. 이것은 심각한 교리적인 오류로서, 천년왕국 이후에 있을 “백보좌 심판”에 가서야 그리스도인들의 “구원”이 결정되는 것처럼 만들어 “구원”과 “구원의 영원한 보장”을 믿지 못하게 하고 천년왕국의 통치자들이 누구인지 모르게 만드는 누룩을 퍼뜨리고 있다. 『그들은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는 자들이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마 15:14).


신실하게 일한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면류관”을 받게 된다. “면류관”은 “왕이 즉위식 등의 공식적인 행사에서 쓰는 왕관”이다. 즉 왕의 통치권을 가장 돋보이게 만드는 왕관인 것이다. 천년왕국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공동 상속자”(롬 8:17, 엡 3:6)로서 통치권을 받아 이 땅을 통치하게 될 것이다(계 20:6). 그때 우리는 면류관을 쓰고 통치할 것인데, 특히 자신의 『일한 것』에 따라 “다섯 가지 면류관”을 받게 된다.


① “생명의 면류관” - “순교자”(계 2:10)와 “심한 시련을 잘 견뎌 낸 성도”(약 1:12)가 받는 면류관.
② “영광의 면류관” - “헌신적으로 하나님의 양 무리를 잘 돌본 목회자”가 받는 면류관(벧전 5:2-4).
③ “자랑의 면류관” - “구령자”가 받는 면류관(살전 2:19).
④ “의의 면류관” -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가 받는 면류관(딤후 4:7,8).
⑤ “썩지 않을 면류관” - “죄의 유혹에서 승리한 성도”가 받는 면류관(고전 9:25).


그리스도인들이 “시험”을 치르는 자리인 『그리스도의 심판석』을 변개해서 “시상식”을 엉망으로 만든 변개된 성서들은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그 시상식에서 “상”으로 받아야 할 “면류관”도 변개시킴으로써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면류관을 받는지 알 수 없게 만들었다. 한글개역성경과 개역개정판은 『썩지 않을 면류관』을 「썩지 아니할 것」으로 변개함으로써 “네 가지 면류관”만 제시하는데, 개역개정판은 여기에 더하여 순교자가 받게 될 『생명의 면류관』을 「생명의 관」으로, 헌신적인 목회자가 받는 『영광의 면류관』을 「영광의 관」으로 변개함으로써 “면류관 두 가지”와 “어설픈 관 두 가지”를 제시하고 있다.
하물며 공동번역은 『썩지 않을 면류관』을 「불멸의 월계관」으로, 『자랑의 면류관』을 「자랑할 수 있는 승리의 월계관」으로, 『의의 면류관』을 「정의의 월계관」으로, 『생명의 면류관』을 「생명의 월계관」으로, 『영광의 면류관』을 「영광의 월계관」으로 바꾸어서 다섯 가지 『면류관』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모두 「월계관」으로 변개시켜 버렸다. 하긴 공동번역을 쓰는 로마카톨릭이야 『면류관』을 받을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으니, 「월계관」이라고 바꿔 써 놓은들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마는, “천 년의 통치자들”인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며칠 후면 시들어 말라 버릴 월계관”을 상으로 받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공동번역의 변개의 심각성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공동번역은 어떤 사람이 『면류관』을 받는지에 관해서도 엉망으로 만들어 놓았다. “죄에서 승리한 성도”가 받는 『썩지 않을 면류관』을 「어려움을 이겨 내야」 받는다고 변개함으로써 『생명의 면류관』과 혼동하게 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 즉 “재림”을 사모하는 성도가 받는 『의의 면류관』을 「다시 오실 주님」을 사모하는 사람이 받는 것으로 만들어 “재림을 소망하는 것” 자체의 중요성을 가려 버렸다.
그렇다면 “누가” 『면류관』에 관한 진리를 왜곡하기 위해 성경에 이런 변개를 가했는가? 성도들이 『면류관』을 받는 것을 싫어하는 존재, 곧 사탄과 그 하수인들이다. 사탄은 이들을 통해 『그리스도의 심판석』을 「하나님의 심판대」로 변개하여 그리스도인의 “시험 시간”과 “시험 장소”를 속이는 것에 성공한 데 이어, 『면류관』의 명칭과 대상을 변개하여 “시험 과목”과 “시험 범위”를 속이는 데 성공함으로써, 변개된 성서들을 사용하는 모든 교인에게서 『면류관』에 대한 소망을 빼앗는 데 완전한 승리를 거두었다! 『그리스도의 심판석』과 『면류관』에 관한 진리를 선명하게 알게 해 주는 성경은 오직 <한글킹제임스성경>뿐임을 알라!
어떤 사람은 유독 『썩지 않을 면류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데, 변개된 성서들에 익숙한 그에게는 『썩지 않을 면류관』이라는 말이 면류관의 “명칭”처럼 생각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의도에 따라 어떤 식으로든 그분이 원하시는 “조건”과 “명칭”을 부여하실 권한이 있으시다. 성경을 차분히 읽어 보면, 이 면류관이 “독특한” 명칭답게 다른 네 가지 면류관과 구분되는 “독특한” 조건을 지닌 면류관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곧 이 면류관은 모든 일에 자제해야, 즉 죄의 유혹에서 승리해야 받을 수 있는 면류관인 것이다! 당신은 “죄의 유혹에서 승리”하기 위해 “모든 일에 자제하고” 있는가?


시험이 있는지를 모르는 사람이 시험을 대비하겠는가? 시험 보는 날이 언제인지 모르는 사람이 시험을 제대로 준비할 수 있겠는가? 시험 과목과 시험 범위를 모르는 사람이 “상”을 받을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의 심판석”을 모르는 사람이 심판을 대비하겠는가? “그리스도의 심판석”과 “백보좌 심판”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이 심판을 제대로 준비할 수 있겠는가? “면류관”을 잘 모르는 사람이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상”을 받을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인들은 “백보좌 심판”에서 심판받지 않는다. 오직 한 번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심판을 받는다. 그때 자신이 “일한 것”에 따라 “면류관”도 받게 될 것이다.
썩은 성서를 들고 “시험 준비”가 되겠는가? 한글개역성경, 개역개정판, 공동번역 등의 변개된 성서들로는 결코 “면류관”을 받을 수 없다. 모르는 것을 어찌 받을 수 있겠는가? “면류관”을 받고 싶은가? 그렇다면 <한글킹제임스성경>으로 “그리스도의 심판석”을 대비하라! “면류관”을 놓치지 말라!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붙들어서 아무도 너의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계 3:11).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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