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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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아, 네가 혼을 아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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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2년 10월호>

신학 논단
인간아, 네가 혼을 아느냐


한승용 / 킹제임스성경신학교 교수

얼마 전 필자는 한 여인에게서 상담 전화를 받았다. 지인에게 요한계시록을 알고 싶다고 했더니 <한글킹제임스성경>을 추천해 주었다고 했다. 그녀는 요한계시록의 궁금한 부분들을 묻기 시작했는데, 그에 조목조목 정확하게 답변해 주니 그녀의 입에서 “멘붕”(정신상태 붕괴)이란 말이 터져 나왔다. 그런 지식은 지금껏 처음 접해 보았다며, 목사들에게 물어보면 대답을 못하더라고 했다.
필자와 전화 상담을 하던 여인은 요한계시록을 알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었고, 나는 그녀에게 우리 신학교에서 공부하면 잘 배울 수 있다고 답해 주었다. 그러나 그녀는 ‘신학은 목사가 되려는 사람만 공부하는 것’이라는 한국 교회의 고정 관념에 사로잡혀서인지 신학 공부에 대해서는 강한 주저함과 거부감을 보였다. 그래서 <한글킹제임스성경>과 성경침례교회의 사역을 소개할 겸 해서 우리 교회에 한번 방문하는 게 좋겠다고 했더니 그녀는 흔쾌히 수락했다. 약속 날짜를 잡고서 전화를 끊었는데, 막상 비가 내리는 주일 오후 그녀를 만났을 때에는 그야말로 필자가 “멘붕”이 되고 말았다.


오후 예배 때 찾아온 그녀는 작심한 듯 예배를 드리지 않았다. 교회 예배용으로 비치한 <한글킹제임스성경>을 주었더니, 그 성경을 예배 시간 내내 이리 뒤적거리고 저리 뒤적거리기만 했다. 간혹 성경 말씀을 읽으면서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내가 그녀와 상담 약속을 잡은 것이 몹시도 후회되었다. 그런 사람을 위해서 귀한 시간을 낭비할 것을 생각하니 분노가 치밀기도 했다. 그래도 우리 교회를 찾아온 이상 예의는 갖춰야겠다는 생각에 예배가 끝난 뒤 킹제임스성경신학교의 강의실로 데려가 상담을 시작했다. 그녀에게 굳이 요한계시록을 가르쳐 줄 마음은 없었다. 그럴 마음은 싹 사라져 버렸고, 간단히 대화한 후 서둘러서 보내고 싶었다. 그녀는 자신을 기독교 상담심리학을 하는 사람으로 소개했는데, 교회 내에서 자살하려는 이들을 상담을 통해 도와주는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그녀와의 대화는 기독교 상담심리학 쪽으로 기울었고, 필자는 그 학문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을 피력했다. 세상의 상담심리학이 교회 안으로 들어온 것이며, 그런 것으로는 자살을 막을 수 없다고 했다. 그녀는 세상 학문이라 해도 하나님의 말씀을 도울 수 있지 않느냐며 반론을 제기했다. 나는 그 즉시 요한일서 2:15을 펼쳐서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세상도, 세상에 있는 것들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를 사랑함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요일 2:15). 나는 그녀가 이렇게 반론해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이댔고, 저렇게 반론해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이댔다. 코너에 몰린 그녀는 대뜸 “그러면 교수님은 율법을 완전히 지키세요?”라고 물었다. 인간의 불완전성으로 필자를 주눅 들게 하려는 의도였다. 그렇게 성경 말씀으로 완벽함(?)을 과시하고, 우울증에 걸려 자살하는 사람들을 믿음 없는 자로 여기는 당신도 부족한 인간 아니냐는 것이다. 얼떨결에 수세에 몰린 필자는 잠시 고민에 빠져들었다. 그런데 순간 나도 모르게 로마서 8장을 펼쳐서 3절을 가리키는 것이었다(필시 성령님의 인도하심이었을 것이다). 『율법이 육신을 통하여서는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것이므로 하나님께서 죄 때문에 자신의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 그 육신에 죄를 선고하셨으니』. 이 말씀을 읽어 주고는 그녀에게 “나도 연약한 육신을 가지고 있기에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나와 똑같은 육신의 모양으로 그분의 아들을 보내셔서 내 죄를 그분의 아들께 전가시키셨고 그 아들께서 완벽하게 지키신 율법의 의를 나에게 주셨다. 완벽하지 않은 나는 그 하나님의 의를 믿는 믿음으로 살고 있다.”라고 했더니 이번에는 그녀가 수세에 몰리기 시작했다.


우리의 대화는 그렇게 흘러갔고, “사사건건” 성경 말씀을 들이대자 결국 그녀가 하는 말이 필자와 자기 사이에는 “벽”이 있다고 했다. 인간의 생각을 대항해서 “하나님의 생각”을 들이대니 몹시도 답답했던 것이다. 하지만 별 수 없었다. 그것이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사람들을 대하는 성경적 방식인 것을 어찌하랴! 『주가 말하노라.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다르니 하늘들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이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이 너희 생각보다 높음이라』(사 55:8,9). 『영적인 사람은 모든 것들을 판단하나 자신은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누가 주의 생각을 알았다고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생각을 가졌느니라』(고전 2:15,16).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다(?)고 하는 그 이상한 여인이 인간의 구원에 관해서 제시한 구절은 야고보서 1:8이었다. 『두 마음을 품은 사람은 그의 모든 길에 안정이 없느니라.』 그녀는 이 구절의 “두 마음”을 강조하면서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면 영은 거듭났어도 혼이 의의 부분과 죄의 부분으로 양분되어 있기에(그래서 영이 거듭난 뒤에도 죄를 여전히 짓는다고 했다.) 혼의 구원은 아직 이뤄지지 않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것이 필자가 그녀에게서 느낀 두 번째 “멘붕”이었다. 혼의 구원은 영이 거듭날 때 동시에 이뤄지는 것이고, 야고보서에서 말씀하는 두 마음은 하나님과 세상, 하나님과 재물 사이에 양다리를 걸치는 위선을 지적하는 것이라고 알려줘도 그녀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혼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을 때 그 구원이 즉시 완성된다. 『이는 너희 믿음의 결과, 곧 너희 혼들의 구원을 받음이니라』(벧전 1:9). 혼의 점진적인 구원은 성경에 없다. 하나님께 무언가를 구했으면 그것을 받을 때까지 믿음을 유지해야 하며, 중간에 의심하고 세상과 재물을 의지해서 문제를 해결하려 하면 바로 그것이 하나님께 정죄받는 두 마음임을 그녀는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 여인은 필자에게 어떤 학자와 그의 책을 언급했는데, 그녀는 교회 안의 거짓 교사에게 잘못 배운 것이 분명했다. 인간의 혼을 모른 채 섬기겠다고 나서는 자들은 한국 교회는 물론 전 세계에 부지기수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신의 혼을 잃는다면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 또 사람이 자기 혼을 무엇과 바꾸겠느냐?』(마 16:26)라고 하셨건만, 예수님을 섬긴다는 자들이 혼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혼의 영역에 무모한 도전을 하고 있다.


날 때부터 영이 죽은 채로 태어나는 인간은 아담이 타락한 이후 혼이 몸에 붙어 버렸기에 혼이 잘못되어 있다. 초림 당시 예수님께서는 사람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아셨기에 사람들에게 자신을 맡기지 않으셨으며(요 2:24,25), 날 때부터 마음의 상상이 잘못된(창 8:21) 인간은 그 속, 그의 마음에서 악한 생각과 간음과 음행과 살인과 도둑질과 탐욕과 악의와 사기와 방탕과 악한 눈과 하나님을 모독함과 교만과 어리석음이 나오며, 이런 모든 악한 것이 속에서 나와 그 사람을 더럽힌다고 하셨다(막 7:21-23). 바로 이것이 혼이 죄의 몸에 붙어 버린 인간의 속에서 나오는 것들이고, 주님께서는 그런 인간을 조금도 신뢰하지 않으셨다. 그 외에 인간 속에 들어 있는 것의 둘째 목록은 로마서 1:21-31에 31가지가 제시되어 있다. 셋째 목록은 로마서 3:10-18에 목구멍과 혀, 입술, 입, 발, 길, 눈이 잘못되어 있다고 6가지가 제시되어 있다. 디모데후서 4:3,4에서는 인간의 “귀”가 잘못되어 있다고 말씀한다. 디도서 1:15에서는 인간의 마음과 양심이 다 더럽혀졌다고 말씀한다. 고린도전서 6:9,10과 갈라디아서 5:19-21은 또 어떠한가? 찾아보라. 인간은 겉과 속이 총체적으로 부패해 있으며, 이런 인간에게 주님께서 자신을 맡기신다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 몸에 붙어 버린 혼은 지옥에 가지 않기 위해 그 몸에서 분리되어야 했다.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순간 성령님께서 그 죄인 안에 들어가셔서 그의 죽은 영을 되살려주시고 혼을 몸에서 도려내는 영적 수술을 행하시는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영접』했을 때(골 2:6) 우리는 『신격의 모든 충만함이 몸의 형태로 거하시』는(9절) 분 안에서 “온전하게 되었는데”(10절), 이 일은 성령님께서 행하신 영적 할례로서 우리의 혼이 죄의 몸을 벗어 버렸을 때 일어났다. 『또한 너희가 그의 안에서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그리스도의 할례로 육신의 죄들의 몸을 벗어 버린 것이라. 너희가 침례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고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들로부터 살리신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너희도 그와 함께 살아났느니라』(골 2:11,12). 그렇다. 우리는 “살아났다!” 혼이 절반만 살아난 것은 살아난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자 죄의 몸에서 완전히 분리되어 “온전히 살아났다!” 『그 뜻에 따라 한 번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드리심으로 우리가 거룩하게 된 것이라.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똑같은 제사를 자주 드리지만 이것으로써는 결코 죄들을 제거할 수 없으나 이분은 한 번의 속죄제를 영원히 드린 후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으셔서 그후로는 그의 원수들을 자기 발판으로 삼으실 때까지 기다리시느니라. 이는 그가 한 번의 제사로써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기 때문이라』(히 10:10-14).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한 번의 속죄제로 영원히 온전케 되었다는 것은 우리의 구원에 주님의 십자가 외에 그 어떤 것도 첨가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은혜로 된 것이면 더 이상 행위가 아니라는 말씀을 왜 못 본 척 지나치는 것인가!(롬 11:6)

신약 교회 시대에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 혼의 구원은 단회적이고 영속적이며 온전하다. 자신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다고 하면서 그 뒤에 행위를 구원의 완성을 위한 요소로 생각하는 자들은 구원받은 뒤에 혼이 일으키는 “겉 사람과 속 사람 사이에서의 갈등”을 모르고 있다. 말하자면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을 때 우리의 혼이 옛 남편인 죄의 몸(겉 사람)에서 분리되어 예수님(속 사람)과 혼인하게 되었다(롬 7:1,2). 구원받는 순간 육신에서 분리된 혼은 “그 남편”의 법, 곧 “그 육신”에 역사하는 율법에서 벗어나 그리스도의 몸 안에 넣어졌기에(고전 12:13) 옛 남편인 육신에 역사하는 율법의 권세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나의 형제들아, 이런 연유로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인하여 율법에는 죽었나니 이는 너희로 다른 사람, 즉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켜지신 그와 혼인하게 하려는 것이요, 그리하여 우리로 하나님께 열매를 맺게 하려는 것이니라』(롬 7:4).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 우리의 혼은 그리스도의 의, 곧 하나님의 의를 소유했기에 더 이상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 몸에 붙잡혀 있던 혼이 그 몸에서 해방되었기에 율법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된 것이다. 『이는 우리가 육신 안에 있었을 때에는 죄들의 정욕이 율법을 통하여 우리의 지체 속에서 역사하여 사망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나 이제는 우리가 붙잡혔던 것에서 죽었으므로 율법에서부터 구제되었음이니 우리가 영의 새로움으로 섬길 것이요, 법문의 낡은 것으로 섬기지 아니할 것이라』(롬 7:5,6).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우리의 혼은 주님과 합하여 한 영이 되었기에(고전 6:17) 속 사람이신 예수님과 하나가 되었지만, 이전에 겉 사람에 붙어 있었기에 겉 사람에게 끌리는 경향이 있다. 구원받은 혼이 하나님의 법을 사랑하는 속 사람과 죄의 법을 사랑하는 겉 사람 사이에서 갈등을 일으키며 어떤 날은 속 사람의 뜻을 따르다가, 또 어떤 날은 겉 사람의 유혹에 넘어가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그리하여 내가 한 법을 발견하노니 그것은 내가 선을 행하고자 할 때 악이 나와 함께 있다는 것이라. 내가 속 사람을 따라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나 내 지체들 속에 있는 또 하나의 법이 내 생각의 법과 싸워 나를 내 지체들 속에 있는 죄의 법에게로 사로잡아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 나는 비참한 사람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구해 낼 것인가?』(롬 7:21-24) 이렇게 애통하며 고민하던 바울에게 계시된 해법은 육신을 따라 행하지 않고 성령을 따라 행하는 것이었다(롬 8:1). 육신을 따라 살지 않고 성령을 통하여 몸의 행실을 죽일 때(13절) 죄에 굴복하지 않고 승리의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영이 거듭나고 혼이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은 구원이 영원히 보장되었다 해도 결코 죄를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 죄에 대한 고뇌는 사도 바울뿐만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기초여야 한다. 어떤 성도의 신앙이 형식적인가, 실제적인가는 그가 죄의 실상과 죄가 성도 자신에게 미치는 영향을 얼마나 깊게 인식하고 있는가에 달려 있다. 죄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그의 신앙에 활기가 없다. 회개를 위한 부르짖음도 없고, 지옥으로 달려가는 죄인들을 향한 연민도 없다. 죄를 깊이 인식하지 못하면 죄의 유혹에 쉽게 흔들리는, 무기력하고 매우 피상적인 종교 생활에 머물게 된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싸워야 하는 것이 죄다!
『화평의 하나님 바로 그분께서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책망할 것이 없게 보존되기를 하나님께 기도하노라』(살전 5:23). 하나님께서 혼(아버지)과 몸(아들)과 영(성령)의 삼위일체이시듯, 그분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우리 또한 영, 혼, 몸의 삼중 구조를 갖고 있다. 이 기초적인 지식에서 더 나아가 “구원받기 전의 혼”과 “구원받은 후의 혼”에 대한 지식을 갖춰야 한다. 이 성경적인 지식이 부족하면 하나님을 성경대로 섬길 수 없고 구원의 확신도 가질 수 없다. 바른 성경이 없기에 진리의 지식이 전무한 교회들은 항상 배워도(딤후 3:7) 거짓의 온상만 될 뿐이다. 자기가 무얼 배웠는지도 모르면서 아무 말이나 지껄이면 거기에 마귀가 역사함을 알아야 한다.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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