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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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그리스도들의 광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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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2년 11월호>

경기 침체로 경제가 어려워지면 국민들의 경제활동은 위축된다. 이러한 상황이 지속될 때 나타나는 현상은 첫째, 젊은 세대들이 결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둘째, 결혼을 해도 자녀를 하나로 국한시킨다는 것이다. 자기번식이라는 생물학적 욕구에 따라 후손을 남기려 해도 제 목숨 하나 건사하기 힘든 현실에 국가적으로 저출산이 유행하고 급기야 “지방 소멸”이란 말까지 나돌게 된다.


지방 소멸은 출산율 감소와 직결된다. 지방의 출산율 감소는 15-29세의 청년층이 생계를 위해 서울로 유입됨으로써 일어난다. 청년층이 지방을 떠나면 그 지방의 인구가 감소됨은 물론, 출산율 또한 자연스레 감소되기 때문에 인구 감소의 악순환을 피할 수 없다. 그리하여 지방은 “돈 벌 곳도 없고 쓸 곳도 없는 곳”이 된다. 이러한 출산율 감소의 여파가 전국적이라고 하는데, 필자가 자라난 고향만 해도 어렵사리 귀향해 보면 인적이 드물다. 아이들이 보이지 않고, 어른들도 시장이나 상가에 들어서야 눈에 띈다. 한적한 시내를 걷다 보면 “이곳 사람들은 무엇을 해서 먹고 사나” 하는 의문이 들곤 한다. 언론에 따르면, 출생아가 줄어들면 어린이집과 같은 보육시설과 의료기관이 먼저 문을 닫는다고 한다. 이와 같은 보육기반시설 감소는 일자리 감소로 이어지고, 일자리 감소로 인해 청년층은 고향을 등지고 대도시로 떠난다. 그렇게 되면 지역 내 소비 인력이 감소하여 지방 경제가 나빠지고, 그로 인해 생산 시설과 상업 시설이 줄면 또다시 일자리가 줄어들어 청년층의 대도시로의 유출이 가팔라진다. 이러한 현상이 반복되면 병원과 교통시설 같은 필수 기반시설까지 사라지는데, 그렇게 되면 그 종착지가 바로 지방 소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교회들은 어떠할까? 지방 소멸의 위기와는 별개로, 교회들도 교인 수 감소에 몸살을 앓고 있다. 언론은 한국 교회의 주요 장로 교단들의 교세 현황을 분석한 결과 합동 교단이 9만 명 감소하고, 통합 교단이 3만 명 감소했다고 보도했다. 통합측 통계위원회는 2028년에 이르면 196만 명까지 감소할 것이라는 예측을 내놓았는데, 다음 세대의 감소폭은 더 심각하여 최근 2년 동안 3분의 1로 줄었다고 한다. 즉 영유아부, 유치부, 초등부, 중고등부, 대학청년부가 공히 그 수가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이는 저출산이라는 인구 감소 현상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어찌되었든 “한국 교회 주요 장로 교단의 교인 수가 끝을 모르고 추락하고 있다”고 안달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 교인 수는 줄어도 교회와 목회자의 수는 늘어났다. 우리는 이 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너나할 것 없이 목사를 하고 교회를 차리려고 하기에 이런 개탄스러운 일들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겠는가! 『만일 어떤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원하면 그가 선한 일을 사모한다는 그 말은 참되도다. 그러므로 감독은 비난받을 일이 없어야 하고, 한 아내의 남편이어야 하며... 가르치기를 잘하고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고, 더러운 이익을 탐내지 아니하며, 오직 잘 참고, 다투지 아니하며, 탐욕스럽지 아니하고 자기 집안을 잘 다스려서 온전한 위엄으로 자기 자녀들을 순종케 하는 사람이어야 하리라. (사람이 자기 집안을 다스릴 줄 모르면 어떻게 그가 하나님의 교회를 돌볼 수 있으리요?) 초신자여서도 아니되나니, 이는 그가 교만으로 높아져 마귀의 정죄함에로 빠질까 함이라. 또한 외부 사람들로부터도 좋은 평판을 받아야 할지니, 이는 그가 비방과 마귀의 올무에 빠지지 않게 하려는 것이라』(딤전 3:1-7). 목사의 직분을 사모하는 것은 지극히 성경적이지만, 그들은 그 다음 단계가 잘못되었다.

특히 그들은 비성경적인 교단 교리로 무장되어 있기에 성경을 잘 가르칠 수도 없고, 또 항상 배우나 진리의 지식에는 결코 이를 수 없는(딤후 3:7) 그들은 영적 성장이 전혀 안 된 자들이다. 그런 자들이 교단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았다고 해서 함부로 남을 가르치려고 교회를 차리다 보니 오늘날과 같은 기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이것이 자신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피 흘려 죽게 하시고 지상에 그분의 교회를 세우신 하나님의 뜻이겠는가? 그런 어중이떠중이들을 목사로 세우시려고 자신의 아들을 무법자들의 손에 넘기시어 십자가에 처형되게 하셨을 거라고 생각하는가? 하나님의 아들께서 그런 자칭 목사들과 교회들을 세우시려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통곡하며 눈물을 흘리셨다면(히 5:7) 그분의 눈물은 식염수보다도 못하게 된다.


교인 수 감소는 전 세계적인 현상이다. 교인 수가 줄어드는데 목회자 수가 느는 것은 실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이보다 더 모순된 것은 저출산과 전 세계적인 교인 수 감소를 비웃듯, 오순절 교회들의 신자 수가 급증세에 있다는 것이다. 보도에 따르면, 오순절 교회는 올 초 신자 수가 6억 6,700만 명이던 것이 2025년에는 7억 400만 명으로 늘고, 2050년에 가서는 10억 300만 명으로 치솟을 것으로 추산된다고 한다. 카톨릭이 주류인 남미에서는 그곳 신자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 오순절 교회로 향하고 있다. 오순절 교단이 태동한 미국의 경우 2005년과 2019년 사이에 미국 양대 개신교단인 남침례교와 연합감리교회 성도 수가 각각 11%, 19% 줄어든 반면, 오순절 교단인 하나님의성회 교인 수는 16%가 늘었다. 영국 역시 성공회, 장로교, 카톨릭 등은 2000년 600만 명에서 2020년 480만 명으로 줄어든 데 반해, 오순절 교회는 2000년 2,500개에서 2020년 4,200개로 폭발적으로 늘었다.


경제 용어에 레드오션(Red Ocean, 붉은 바다)과 블루오션(Blue Ocean, 푸른 바다)이 있다. “레드오션”은 경쟁자가 많아서 포화 상태가 된 시장이나 산업을 “서로 치고받고 싸우느라 핏빛이 된 바다”에 빗댄 표현이다. 넓은 의미로는 경쟁률이 매우 높고 치열한 시장, 혹은 그러한 상황을 통틀어 일컫기도 한다. 반면 “블루오션”은 “현재 존재하지 않거나 알려져 있지 않아” 경쟁자가 없는 유망한 시장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아직 시도된 적이 없는 광범위하고 깊은 잠재력을 가진 시장을 비유한다. 오순절 교회는 레드오션화된 기독교계에 등장한 블루오션이다. 경제 용어의 본 취지와 직결되는 것은 아니나, 그만큼 그 교회는 기존 교회들에는 존재하지도 않았고 알려져 있지도 않은 “새로운 교리”로 등장하여 사람들을 끌어들인 것이다.


배교한 기독교계의 블루오션인 오순절 은사주의는 20세기 초에 “광적인 흥분”으로 시작되었다. 고대 바빌론 종교에서부터 유래하여 중세 카톨릭 수도원 등에 풍미하던 신비주의자들이 현대 기독교 안에서 그와 같이 다시 발흥하게 된 것은 1819년 영국에서 일어난 에드워드 어빙의 목회가 시초라고 알려져 있다. 이 신비주의 목회의 영향을 받은 오순절주의자들이 20세기 성령 운동이라고 일컫는 오순절 운동은 찰스 폭스 파함(Charles Fox Parham: 1873-1929)이라는 인물로부터 시작되었다. 신유를 체험한 파함은 그의 아내와 1898년 미국 캔자스주 토페카에 벧엘 치유의 집(The Bethel Healing Home)을 설립하였고, 그 후에 방언이 성령 세례의 기이한 교리와 광적인 흥분으로 시작된 20세기 성령 운동은 그 시초부터 광란의 집회 그 자체였다. 그들의 전통은 오늘날 오순절 교회들에서 정확하게 실행되고 있다. 믿음이 아닌 체험으로 하나님을 알려고 하는 자들의 집회는 곧 모습을 드러낼 적그리스도를 맞이하려는 미혹된 행위이다.


일차적인 증거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900년 개교한 벧엘신학교(The College of Bethel)에서 성령 세례의 표적으로서의 방언 체험에 관한 성경적 가르침을 발견할 수 있도록 해당 성구를 찾는 일을 학생들에게 촉구했는데, 헤롤드 스미스, 『오순절 운동의 기원과 전망』, p.27,44.
바로 이 파함이 오순절 운동의 이론적 근거를 제공했다.


오순절주의자들은 파함이 발단이 된 20세기 성령 운동의 본격적 시작 연도를 1906년으로 잡고 있다. 이 시기에 일어난 성령 운동을 흔히 “아주사(Azusa) 거리의 부흥”이라고 부른다. 그랜트 웨커(Grant Wacker)는 그해에 있었던 성령 운동의 태동에 대해 “기이한 교리와 광적인 흥분?”이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1906년 4월 어느 안개 낀 저녁, 몇몇 흑인 성도들이 성령 세례를 받기 위해 L.A.의 한 작은 집에 모였다. 저녁 무렵, 한밤이 되기 전에 그들은 노래하며 이상한 말로 외치고 있었다. 며칠 후 그들은 그 도시의 낡은 지역에 있는 아주사 거리의 한 버려진 창고로 옮겨갔다. 얼마 못가서 L.A. 타임지 기자의 눈에 띄게 되었다. 그 기자는 다음과 같은 기사를 썼다. “예배자들의 울부짖는 소리에 밤은 무서워지고... 기이한 교리의 신봉자들이 극도로 광적인 의식을 행하고 있었으며... 지극히 황당무계한 이론들을 설파하면서 자신들을 광적인 흥분 상태로 몰아갔다.”」 박명수, “근대 오순절 운동의 기원,” 『오순절 신학 논단』 제1호 (군포: 한세대 오순절 신학 연구소, 1998), p.15.

울고, 춤추고, 황홀경에 빠지며 뜻 모를 방언을 지껄이고, 노래하고, 통역하는 일들이 벌어진 이 “광란의 집회”의 두드러진 현상은 비성경적인 “성령 세례”와 “방언”을 받는 일이었다. 국제 신학 연구원 편, 『하나님의 성회 교회사』, p.114.
이 광란을 오늘날까지 이어받은 오순절 은사주의가 주장하는 성령 세례와 방언은 신약성경에서 가르치지 않는 이단 교리로서, 원래의 것들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중단된 뒤로 갑작스럽게 등장한 “돌연변이”였다. 오순절 은사주의의 영향을 받은 한국 교회가 성령 세례라고 부르는 성령 침례는 죄인이 거듭날 때 성령을 받은 뒤에 섬김의 능력을 받기 위해 성령을 또 받는 것이라고 주장되며 그 증거가 방언이라고 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성령 침례는 그 “침례”라는 표현에서 보듯이 죄인이 거듭날 때 성령님에 의해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 잠겨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한 성령에 의하여 우리 모두가 한 몸 안으로 침례를 받았으며 또 모두가 한 성령 안으로 마시게 되었느니라』(고전 12:13). 성경적인 성령 침례는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여 거듭날 때 일어나는 영적 사건이며, 거듭남 이후에 별도로 일어나지 않는다.


그런가 하면 방언은 신유와 함께 “믿지 않는 유대인들”을 위한 표적으로 주어진 것으로서(고전 1:22; 14:22),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 승천하신 뒤 『모두 갈릴리 사람』(행 2:7)인 『사도들의 손을 통해』(행 5:12) “유대인들”을 다룰 때 사용하신 한시적인 표적이었다. 사도행전 28장에서 유대인들이 그들의 메시아를 최종적으로 거부한(행 28:25-28) 뒤로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복음을 “이방인들”에게 전파되게 하심으로써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한 방언과 신유의 표적을 중단시키셨다.




방언과 신유는 믿지 않는 유대인들을 위한 표적이었다. 유대인들을 위한, 그 중단된 표적을 교회 시대에 이방인들을 대상으로 사용한다는 것은 분명 성령의 역사와 무관한 일이다. 그렇다면 거짓 방언과 신유를 실행하는 오순절 교회들에 왜 사람들이 모여드는 것일까? 그것은 믿음으로 말씀을 붙들 수 없는 “무신론자들”이 눈에 보이는 거짓 표적들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이성적으로 입증될 수 없는 것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는 무신론은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이자 대표적 무신론자인 셸리(Percy Bysshe Shelley, 1792-1822)의 글에서 명확한 실체가 드러난다. 「신앙의 강도는 다른 모든 감정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자극의 정도에 비례한다... 감각은 마음에서 모든 것을 인식하는 근원이다. 따라서 감각에 의한 증명이 가장 납득하기 쉽다. 이런 감각에서 얻어진 직접 체험을 토대로 하여 마음이 내리는 결정은 그다음으로 납득하기 쉽다. 직접 체험하지 않고 남에게 들은 것은 가장 납득하기 어렵다. 이성은 우리의 감각에 의한 증명에 토대를 두고 작동한다. 따라서 이성에 어긋나는 증언은 어떤 것도 인정되지 않는다」(무신론의 필연성, <셸리 산문집>, 이른비, p.16,17). 이처럼 무신론자들은 “체험”을 중요시한다. 체험이 아닌 말씀에 대한 믿음을(고후 5:7) 강조하는 교회 시대에 거짓 표적을 체험함으로써 신앙을 가지려고 하는 자들은 그 본질이 “무신론자”인 것이다.


말씀에 믿음을 결합시키지 못하고 감각적 증거로 믿고자 하는 자들이 오순절 교회들로 모여 들어 교세가 급증세에 있다는 것은 시대적 상황을 고려할 때 매우 의미심장하다. 재림 전 믿음을 찾아볼 수 없는 때에(눅 18:8), 즉 사람들이 교회들에서 떠나가는 시기에 일어나는 부흥은 적그리스도가 표적을 행하면서 등장할 토대를 마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악한 자가 오는 것은 사탄의 역사에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들과 거짓 이적들과, 멸망하는 자들 안에 있는 모든 불의의 속임수로 오는 것이니, 이는 그들이 진리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아니하여 구원을 받지 못하였기 때문이라. 이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강력한 미혹을 보내시어 거짓말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살후 2:9-12). 이 말씀에 따르면 대환란이 임박한 현 교회 시대에 표적을 통해서 믿고자 하는 무리는 “진리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아니하여 구원을 받지 못한 자들”이다. 하나님께서는 적그리스도의 거짓 이적과 표적으로 강력한 미혹을 보내셔서 그런 자들을 대환란 때 심판받게 하시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성도들을 『그리스도인』(행 11:26)이라고 부를 때, 적그리스도를 따르는 무신론자들을 부를 방법은 “적그리스도들”밖에 없다. 『어린 자녀들아, 이것이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올 것이라고 너희가 들었던 대로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이로써 우리가 마지막 때인 줄 아느니라』(요일 2:18). 배교한 기독교계에 오순절 은사주의가 나타난 것은 적그리스도의 등장을 위한 서막이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휴거될 때 지상에 남겨질 오순절 교회들은 적그리스도의 거짓 이적과 표적을 보고서 그를 영접할 것이다(계 13:3,12,13). 한마디로 그들의 부흥은 “적그리스도들의 광란”이다. 무신론자들이 교회에 모여서 춤추고 노래하고 시끄럽게 방언하는 것을 “광란”이라는 말밖에는 표현할 도리가 없다.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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