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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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을 마주한 그리스도인의 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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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년 월호>

조원일 / 킹제임스성경신학교 강사

절망적인 결과만을 기다리는 극한의 상황에서 한줄기 빛처럼 주어진 작은 희망이 오히려 자신을 더욱 괴롭히는 것을 “희망 고문”이라 한다. 이 표현은 19세기 프랑스 소설가 빌리에 드릴라당(Villiers de L'Isle-Adam)의 단편 소설인 <희망이라는 이름의 고문>(La torture par l'esperance)에서 나왔다.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면 모든 기대를 접고 깔끔히 손을 뗄 수 있겠지만,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보이면 그 가능성에 모든 것을 걸고 어떻게든 절망에서 벗어나려고 애쓰는 법이다. 세상 모든 일에는 성공과 실패의 가능성이 상존하는 법인데, 희망 고문은 실패의 가능성이 압도적인 상황에서 일어난다. 그것은 지금까지 믿고 매달린 마지막 희망마저 완전히 박살이 난 상태가 되어야만, 곧 모든 기대와 노력이 물거품이 되어야만 완성된다. 차라리 매달리지 않았더라면 깨끗이 물러날 수 있었을 상황에 괜스레 매달렸다가 더욱 큰 상처만 남게 된다.

“안 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알면서도” “될 것 같다”는 “거짓 희망”을 안겨 주며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마귀의 계략이다. 희망 고문은 거듭나지도 않았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도 믿지 않는 세상 죄인들에게나 어울리는 용어라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거듭난 그분의 자녀들인 우리에게 시련을 통해 원하시는 것은 우리로 희망 고문이 아닌 “참된 소망”을 갖게 하시려는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서도 즐거워하나니 환난은 인내를 이루고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라』(롬 5:3,4). 그러므로 성도는 자신에게 닥쳐온 숱한 시련을 희망 고문을 들먹이며 회피하지 말고 소망 가운데서 온전한 인내를 통해 열매를 맺어야 한다. 성도들이 고난을 마주할 때 유념해야 할 세 가지 성경적 원칙은 다음과 같다.

1.고난이 닥칠 때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라.

인생은 70이요 강건하면 80이다. 기껏해야 100년도 못 사는 인생을 살아가는 인간의 좁은 안목으로는 하루가 천 년 같으신 하나님을 이해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주님께서 약속하신 열매는 반드시 때가 되어야 맺힌다는 사실이다. 주님께서 사람을 다루시는 과정에서 이렇듯 시간을 두고 일하시는 까닭은 주님을 신뢰하고 인내로 기다릴 때 비로소 주님께서 주시는 열매를 얻을 수 있고, 또한 이를 통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늘 좋은 것을 주시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언제나 우리의 필요를 아시고 늘 우리보다 앞서서 움직이시며, 그 필요들을 예비해 두고 계신다. 문제는 이 사실을 우리가 믿지 않는다는 데 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을 카나안 땅으로 인도하실 때, 주님께서는 그들이 어느 길로 가야 할지 보여 주시려고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밤에는 불 기둥으로 그들보다 앞서서 행하셨다. 주님께서는 이 일이 마치 “사람이 자기 아들을 감당한 것과 같다.”(신 1:31)라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그러하신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32절). 이스라엘의 이러한 믿음 없음은 항상 모든 것이 불가능해 보일 때 여실히 드러났다. 앞에는 홍해가 가로막혀 있고 뒤에는 땅을 뒤흔드는 이집트 군대의 말발굽 소리가 들릴 때 그러했고, 먹을 것과 마실 것이 없는 광야에서 곧 죽을 것만 같은 위기의 상황에서 그러했다. 이스라엘 민족은 그때마다 주님과 그분께서 약속하신 땅을 바라본 것이 아니라, 롯의 아내처럼 그들이 나왔던 이집트를 뒤돌아보았다. 도저히 불가능해 보이는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훈련은 우리의 믿음이 연단받고 자아가 죽어가는 과정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만 성도 각인을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주님의 구체적인 뜻이 실현될 수 있다. 그렇기에 성경은 우리에게 초조하거나 조급해하지 말고 『주 안에서 쉬고 인내하며 그를 기다리라.』(시 37:7)라고 권면하신다. 주님께서는 자신을 온전히 신뢰하는 성도를 완전한 화평 속에 지키시겠다고 약속하고 계시는 것이다(사 26:3,4).

2.고난이 닥칠 때 “하나님의 방법”을 따르라.

믿음이 없는 사람들의 특징은 항상 자신의 부족한 믿음은 생각하지 않고, 자기가 처한 어려운 현실만을 탓하며 불평한다는 데 있다. 심지어 하나님을 원망하기까지 한다. 하지만 성경은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방법대로 이루어지는 것이지, 인간의 생각과 방법대로, 또 그가 원하는 때에 이뤄지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 땅에 태어난 모든 죄인들이 구원받는 방법 역시 오직 하나님의 방법대로, 성경대로 믿을 때에만 가능하다(행 4:12, 고전 15:2-4, 롬 10:9,10). 그렇다면 우리가 걷는 믿음의 여정은 어떠한가? 이 또한 하나님의 방법대로 “정도(正道)”를 걸어가야 한다(요 14:6). 그러므로 믿음의 여정을 올바로 걸어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에 늘 경청하는 자세를 잃지 않는 데 있다. 그런데 씨에 대한 약속을 받은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이 아닌, 아내 사라의 그럴듯한 제안에 귀를 기울이고 말았다(창 16:2).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아브라함의 불신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귀를 돌이켜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경청하고 그 말씀을 부지런히 공부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깨달아 실행하기 위해서다. 제멋대로 삭제되고 변개된 “짝퉁 성경들”로는 결코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실행할 수가 없다. 무엇이 진리이고 무엇이 비진리인지 판단할 분별력도 얻을 수 없기에 인생의 현실적인 문제에 직면했을 때 믿음 없이 원망과 불평만을 일삼게 된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는 하나님의 약속이 주어졌음에도 여전히 자식을 낳지 못했다. 지금이야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지만, 과거에는 동서를 막론하고 여자가 자식을 낳지 못하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므로 자식을 갖지 못한 그녀의 현실은 분명 수치와 고통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처한 현실을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한없이 초라해지고 낙담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눈앞에 닥친 현실을 당장 모면하려는 조급함이 그녀의 마음을 끊임없이 충동질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약속의 씨를 주시겠다고 하신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침묵으로 일관하고 계셨다. 하나님의 때를 끝까지 기다리며 그분의 뜻대로 살겠다는 확고부동한 자세가 없다면, 누구든지 세상과 타협하거나 육신적인 욕망에 이끌려 엉뚱한 열매를 맺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에 끝까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던 사라와 아브라함은 이 점에 실패했고, 그 열매가 오늘날의 테러분자들의 조상인 이스마엘이다.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에 경청하고 그 말씀을 부지런히 묵상하고 공부해야 하는 이유는 그분의 뜻을 올바로 깨달아 실행하여 열매를 맺기 위함이다. 제멋대로 삭제되고 변개된 “짝퉁 성경들”을 통해서는 결코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실행할 수 없다. 더군다나 무엇이 진리이고 비진리인지 판단할 수 있는 분별력도 얻을 수 없다. 바른 말씀에서 믿음을 얻지 못한 사람들은 현실적인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 주어지지 않을 때 믿음 없이 원망과 불평만 일삼게 된다. 하나님의 뜻보다는 눈앞에 닥친 문제 해결에 온 마음을 기울이느라 하나님의 방법대로 성별된 삶을 사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그런 와중에 또 다른 어려움이 닥치기 시작하면,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는 악순환만 계속해서 반복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이 성도 자신을 통해 실현되려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곧 그분께서 원하시는 방법대로 사는 일을 최우선으로 해야 한다. 하나님의 방법은 심은 대로 거두는 것이므로, 당신이 만일 풍성한 열매를 원한다면 당신의 마음밭에 있는 잡초와 돌부리들을 말끔히 제거하고, 말씀의 씨앗을 부지런히 뿌려야 한다. 왜냐하면 말씀이 없이는 믿음의 열매를 맺지 못하기 때문이다(롬 10:17).

3. 고난이 닥칠 때 “남 탓” 하지 말라.

사람은 자기 뜻대로 일이 이뤄지지 않을 때 화를 내기 마련이다. 그러고는 자신의 욕망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은 전혀 깨닫지 못한 채, 모든 잘못을 다른 사람에게로 돌리기 시작한다. 이는 아담이 자기의 잘못을 이브에게로 돌리고, 이브가 마귀에게 자기 잘못을 전가시킨 것과 같다. 아이를 낳지 못하는 사라는 자기가 여종 하갈에게 받은 모독의 원인을 아브라함에게 돌리며 불평과 원망을 쏟아냈다. 『나의 모독은 당신이 받아야 하리이다. 내가 내 여종을 당신의 품에 주었거늘, 그녀가 자기가 임신한 줄 알고서는 나를 멸시하니, 주께서 나와 당신 사이를 판단하시리이다』(창 16:5). 그녀가 했던 이러한 말의 이면에는 그때까지 약속을 이행하지 않으신 하나님께 대한 불평과 원망, 분노가 담겨 있었다.

남편에게 친절을 베풀었다고 생각한 사라가 받은 수치와 멸시는 마음에 엄청난 상처가 되었다. 사라와 같은 상황에 직면하면 분노와 좌절, 원망과 비참함의 감정이 휘몰아치기 마련이다. 이때 그것을 붙들면 마음은 완고해지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된다. 그럴 때 특히 사람을 의지하면, 그가 주는 실망과 배신감으로 마음에 상처만 더욱 깊어진다. 하지만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쫓기는 신세가 된 다윗은 어떠했던가? 사울의 집안사람 중 하나인 “시므이”가 그를 계속 따라오며 저주하고(삼하 16:5) 심지어 다윗과 그의 일행에게 돌을 던지고 저주를 퍼부었을 때, 다윗은 자기에게 일어난 그 일을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는 믿음이 있었다(삼하 16:10-12). 그러므로 성도는 자신에게 일어난 고난에 대해 괜스레 나쁜 일을 당한 것처럼 치부하지 말고 항상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모든 일을 대하는 믿음을 지녀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우리의 믿음이 성장하고 영적인 풍요로움을 누리는 것이다. 믿음의 성장에는 연단이 필수적이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다양한 상황이나 인간관계를 통해서 우리의 믿음은 연단된다. 또한 주님께서는 성도 자신의 능력으로는 완전히 불가능해 보이는 한계 상황까지 이르도록 성도를 내몰기도 하신다. 그러나 이때에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것 역시나 믿음 없는 완고한 마음이 아닌, 사람을 의지하지 않고 주님을 더욱 신뢰하는 믿음이다. 이와 같이 연단된 믿음의 자세를 통해서만 하나님과의 교제를 공고히 할 수가 있다.

현실이 주는 두려움이 하나님보다 커 보일 때가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조급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지 못하고 하나님보다 앞서가면 반드시 육신의 열매를 맺게 된다. 그러다가 자기 뜻대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고 남 탓을 하고, 심지어 하나님을 원망하기까지에 이른다. 결국 불평과 완고한 마음으로 실낱같은 믿음마저 끊어지고 마는 것이다. 그러므로 몰아치는 고난의 폭풍 속에서 오직 주님을 배의 선장으로 모셔야 한다. 인생의 선장이신 주님을 믿는 굳센 믿음으로 인생의 대항해를 힘차게 해 나가는 성도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고난의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구해 낼 것이요, 너는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시 50:15).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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