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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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 목사의 위대한 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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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년 월호>

한승용 / 킹제임스성경신학교 교수

사유피 인사유명(虎死留皮 人死留名), 곧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이 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통해 기억되고, 사람은 그의 이름을 통해서 기억된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의 이름이 후대에 기억되는 것일까? 자기 인생을 헛되이 살지 않고 주변인들의 삶에 유익한 업적을 남겼을 때 그의 이름이 후대의 기억 속에 남게 된다. 그러나 이름 자체가 유산이 될 수는 없다. 이름은 유산이 아니다. 유산은 그 사람의 이름과 관련해서 우리가 붙잡을 수 있는 것을 가리킨다. 유산은 사람이 죽었을 때 그 후대의 손에 쥐어지는 구체적인 것이다. 물질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유용하고 가용 가능할 때 그것을 유산이라고 부를 수 있다.

물질적인 유산은 탕진될 수 있으나 정신적인 유산은 탕진되지 않는다. 흔히 탕자의 비유로 알려진 누가복음 15장의 “잃어버린 아들의 비유”에서 작은 아들은 아버지가 죽으면 자기에게 돌아올 몫을 미리 챙겨서 방탕하게 살다가 그것을 탕진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제 내가 일어나서 내 아버지께로 가리라. 그리고 이렇게 말하리니, 아버지여, 내가 하늘을 거역하여 아버지 앞에 죄를 지었나이다. 나는 더 이상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할 만한 자격이 없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삼아 주소서 하리라.』(눅 15:18,19)라고 회개의 결심을 했을 때 둘째 아들은 자기도 모르게 아버지와 함께 살면서 미리 물려받은 영적 유산을 꺼낸 것이었다. “신앙”이라는 유산은 비물질적인 유산이기에 바른 분별력만 있다면 언제든지 사용할 수 있다는 특징이 있다.

한 시대를 이끌었던(?) 한국 교회 목사들이 하나둘씩 죽어가고 있다. 교회에 “경배와 찬양”을 도입했던 하용조 목사는 2011년 8월 2일에 사망했고, “삼박자 구원론”의 조용기 목사는 2021년 9월 14일에 사망했다. “베뢰아 귀신론”의 성락교회 김기동 목사는 2022년 10월 22일에 사망했다. 인간의 죽음은 안타까운 일이므로 죽음 자체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겠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들에게 정해진 것이므로...(히 9:27) 그러나 그들이 남겨 놓은 영적 유산이 무엇인가? 한국 교회는 여전히 세속 음악을 가져와서 경배와 찬양을 하고 있다. 오순절은사주의자들은 거짓 방언과 신유를 행하고 있으며, 성락교회 사람들은 여전히 귀신론에 빠져서 “귀신놀이”를 하고 있다. 이것이 그 유명하다고 하는 목사들이 자신들의 믿음(?)의 후손에게 남겨 놓은 영적 유산인 것인가? 그들의 신앙적 후손들은 어떠한 영적 분별력도 없이 여전히 그 목사들의 비성경적인 교리를 실행하면서 비진리의 수렁에서 헤어나올 줄을 모른다.

그 세 목사들이 교회에 끼친 해악은 필설로 다 표현할 수 없다. 그중 가장 최근에 죽은 김기동 목사는 그의 사망 소식이 들리는 둥 마는 둥 지나갔는데, 그것은 그의 영향력이 그만큼 현격히 줄어든 결과이다. 요즘 교인들은 “귀신 이야기”에 귀 기울일 만큼 한가하지 않다. 교회 안에 들어온 세상이 너무도 현란해서 고리타분한 한국 교회의 작고한 목사들이 남긴 영적 유산은 그것을 물려받은 교인들을 여전히 죄의 수렁에서 허우적대게 한다. 그들은 여전히 세속 음악을 교회에 가져와서 경배와 찬양을 하고, 거짓 방언과 신유도 변함없이 실행하고 있다. 성락교회 김기동 목사의 귀신론을 유산으로 이어받은 사람들은 지금도 밤낮없이 “귀신놀이”에 빠져 있다. 그릇된 영적 유산이 혼들을 망치고 있는 것이다.

저 옛날의 “전설의 고향” 같은 것은 그들의 관심 밖에 놓여 있다. 그래도 김기동 목사가 구축한 거짓 교리들을 다뤄야 하는 이유는, 그래야만 그가 왜 기독교계에 소란을 일으킨 “문제아”였는가를 지금의 그리스도인들이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김기동”이라는 이름에 묻어 있는 “으스스한” 영적 유산은 무엇인가?

“김기동 목사” 하면 단연 “귀신론”이다. 그래서 필자는 한때 그의 이름을 “김귀동”으로 알고 있었다. 착각은 자유지만 그럴듯하지 않은가? 만일 “귀동”이었다면 “귀신”론의 이미지를 더 크게 부각시켰을 것이다. 그나마 “기동”이어서 천만다행이라고 생각된다.

김 목사는 그의 <성서적 신학적 현상적 마귀론>이라는 책에서 귀신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역사에 의하면 거라사 지방은 예수 때로부터 약 70년 전에 로마 군병들이 집단으로 공격받아 죽은 곳이라고 한다. 젊은 시절에 죽은 군인들이 자기 수명을 다 살지 못하고 죽었기 때문에 군대귀신은 아직 무저갱에 들어갈 때가 안 된 것이다」(p.286). 누가복음 8:30에서 『군단』이라고 불리는 마귀들을 로마 “군대”의 병사들로서 읽어 낸 김 목사는 젊어서 죽은 “원한 맺힌 혼들”이 “군대귀신”이 되었다고 아주 그럴듯하게 주장했다. 만일 그 “귀신들”이 결국 끝없이 깊은 구렁(무저갱)에 들어갔다면 요한계시록 9장의 그 구렁에서 나온 “메뚜기들”은 무언가? 그 메뚜기들이 귀신들이란 말인가? 메뚜기들의 『머리카락은 여인들의 머리카락 같았으며, 그 이빨은 사자들의 이빨 같』으므로(계 9:8) 그들은 영락없이 “머리를 풀어헤치고 송곳니를 드러낸 귀신”의 모습이다. 그 “귀신들”에게는 『자기들을 다스리는 왕이 있으니 끝없이 깊은 구렁의 천사요, 그의 이름은 히브리어로 아바돈이며 헬라어로 그의 이름은 아폴루온』이라고 한다(11절). 자, 한국 토종 “귀신 신학”이라면 땅속 깊은 곳에서 귀신들을 다스리는 그 왕을 무어라고 해야 하는가? “염라대왕”이라고 해야 한다. 성경을 이런 식으로 해석하면 어떻게 되는가? 사람이 미쳐 버리는 것이다!

김 목사는 인간의 모든 병의 원인을 귀신으로 보았다. 「그러므로 우리도 병의 원인을 귀신으로 봅니다. 육안으로 보는 사람은 무좀의 원인을 곰팡이로 보지만, 우리는 영으로 보기 때문에 무좀이 생기게 한 영적 원인을 봅니다. 그 원인은 바로 귀신입니다」(p.335). 「성경은 병의 원인을 간단히 귀신이라고 합니다」(p.957). 「이 세상 의사들이 말하는 병명은 수만 가지이지만 예수께서 말씀하는 병명은 하나뿐입니다... 예수는 모든 병의 원인을 ‘귀신 들려서’라고 하셨습니다」(p.961,962). 김 목사는 무좀의 원인을 귀신이라 했는데 약국의 무좀약을 발라 무좀이 치유되었다면 무좀약이 귀신을 몰아낸 것인가? 김 목사의 주장이 도무지 말이 안 된다는 것은 성경의 세 가지 예로 살펴볼 수 있다.

첫째, 예수님께서는 날 때부터 소경 된 사람이 그 어머니의 태 안에 역사한 귀신 때문이 아니라고 하셨다. 『주의 제자들이 주께 물어 말씀드리기를 “선생님, 이 사람이 소경으로 태어난 것은 누가 죄를 지은 것이니이까, 이 사람이니이까, 아니면 그의 부모니이까?”라고 하니, 예수께서 대답하시기를 “이 사람이나 그의 부모가 죄를 지은 것이 아니요, 오직 그 사람 안에서 하나님의 일들을 나타내고자 함이라』(요 9:2,3). 이 사람의 소경 됨은 다른 데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었다. 하나님께서 그를 치유하셔서 영광을 받으시려고 주신 병이었던 것이다. 김 목사는 설마 “하나님”마저 귀신으로 보지는 않았을 것이다.

둘째, 사도 바울은 위장병을 앓는 디모데에게 “귀신”을 쫓아내라고 하지 않았다. 『이제부터는 물만 마시지 말고 네 위장과 자주 앓는 질병을 위하여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딤전 5:23). 바울이 디모데를 위해 내린 처방은 약간의 포도주가 전부였다. “디모데 네가 귀신 들렸으니까 귀신을 쫓아내야 한다”고 하지 않았다.

예수님께서는 날 때부터 소경 된 사람을 매우 독특한 방법으로 치유하셨다. 주님께서는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기셨고, 그것을 소경의 눈에 바르시고는 “가서 실로암 못에서 씻으라.”라고 말씀하셨다. 가서 진흙을 씻은 소경은 눈이 열려서 보면서 왔다(요 9:6,7). 주님께서는 김기동 목사처럼 “귀신아(혹은 병아), 이 사람에게서 나가라.”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주님의 처방은 김 목사와 얼마나 다른 것인가?

셋째, 사도 바울 자신이 누가를 대동하고 다닌 것은 누가가 “귀신”을 쫓아내는 사람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누가는 단순히 의사였다(골 4:14, 딤후 4:11). 즉 마귀(귀신이 아님)가 주는 질병이 있는가 하면, 면역력 저하로 생기는 질병도 있어서 단순히 의사의 처방만으로 치유될 수 있는 병들이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앞서 첫 번째로 언급한 경우에 날 때부터 소경 된 그 사람을 독특한 방법으로 치유하셨다. 『이렇게 말씀하신 후에 주께서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 소경의 눈에 바르시고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가서 실로암 못에서 씻으라.”고 하시니라.(실로암은 해석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그러므로 그가 가서 씻고 보면서 왔더라』(요 9:6,7). 주님께서는 김 목사처럼 “귀신아(혹은 병아), 이 사람에게서 나가라.”라고 하지 않으셨다. 자신의 침으로 이긴 진흙을 눈에 발라 주시고는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셨다. 주님의 처방은 김 목사와 얼마나 다른 것인가? 「그래서 밥 먹고 체했다면 ‘병아, 물러가라.’ 하고 축사한 후에 약을 먹고 남은 것을 빨리 제거해 버리면 됩니다... 예를 들면, ‘병아, 예수 이름으로 나가라.’고 꾸짖어서 나갔지만 이 집을 빨리 파괴하지 않으면 귀신이 돌아다니다가 슬그머니 다시 들어옵니다. ‘집이 비어 있구나.’라고 해서 저보다 더 악한 것을 끌고 들어옵니다. 그래서 병은 더 심해질 수 있습니다... 약을 쓰는 것은 귀신의 집을 아예 없애 버리는 것과 같습니다」(<베뢰아원강>, p.960,961). 김 목사는 “병”을 “귀신의 집”이라고 하면서 귀신이 나가고 없는 그 병을 약으로 제거함으로써 그 집을 파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에 관한 글을 타이핑하다 보니 손가락이 저려온다. 이것도 귀신이 영향을 주는 것일까? “귀신아, 내 손가락에서 나가라!”

김기동 목사 같은 엉터리 인물이 등장한 이유는 그가 보던 성경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한글개역성경이 마귀를 “귀신”으로 변개시켜 놓은지라, 그런 구절들을 근거로 자신만의 “귀신 신학”을 체계적(?)으로 정립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필자가 보기에 김 목사의 베뢰아 신학이 마귀의 집이며, 그 집을 파괴하고 태워 버리는 길은 하나님의 바른 말씀을 사용하는 것뿐이다. 『주가 말하노라. 내 말이 불 같지 아니하냐? 바위를 부수어 조각내는 큰 망치 같지 아니하냐?』(렘 23:29) 김 목사 사후에 남겨진 베뢰아 교인들은 그 “귀신 들린” 베뢰아 신학을 유산으로 물려받아 오늘도 귀신이 두려워서 밤새 마음을 졸이고 있을 것이다.

“진리”는 목사가 남겨야 할 위대한 유산이다. 故 이송오 목사는 이 나라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바른 성경인 <한글킹제임스성경>과 거기서 나온 진리의 지식을 영원한 유산으로 남겨 주었다. 무서운 호랑이 같던 “이송오” 목사는 가죽이 아닌 이름을 남겼으며, 그 이름에서 우리가 “진리”를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이송오 목사 한 사람으로 인해 한국 교회의 “여우들”이 꼬리를 내리고 입을 다물었으며, 그가 없는 지금도 사역은 중단되지 않고 이전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진리에 눈을 떴다. 그들 “새로운”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이 한국 교회의 『우상으로부터 하나님께로 돌아서서 살아 계시며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 『또 하나님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살리신 그분의 아들, 즉 다가올 진노로부터 우리를 구해 내신 예수께서 하늘로부터 오심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살전 1:9,10).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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