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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파, 그들은 무엇을 모르는가 2 - 구원파, 그들은 과연 무엇을 모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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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05년 09월호>

구원파, 그들은 무엇을 모르는가 2 - 구원파, 그들은 과연 무엇을 모르는가?

(지난 호)
첫째, 그들은 참된 경배(예배)를 전혀 모른다.
둘째, 그들은 최종권위에 대하여 전혀 무지한 상태이다.
셋째, 그들은 기도의 방법과 기도의 능력에 대해 무지하다.

넷째, 그들은 참된 교제의 의미를 왜곡하고 있다.
구원파는 교제 만능주의자들이다. 교제로 경배를 대신하고, 교제로 성경 말씀을 대신하고, 교제로 기도를 대신하며, 교제로 성경공부와 성장을 대신하고, 교제로 구령을 대신한다. (실제로 그들의 교제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른 영적인 교제가 아닌 육신적인 교제이다.) 교제만 하면 하나님께서는 알아서 경배를 챙겨 받으시고, 성경은 잘 몰라도 교제 가운데 있기만 하면 주님은 깨달음을 주신다고 믿고 있다. 기도하지 않아도 교제를 나누고 있는 성도들의 필요를 주님께서 알아서 챙겨 주시고, 교제를 통해서 모임 일(그들은 모임 일을 주의 일이라고 혼동한다)을 하고 있다는 착각 속에 빠져 있는 것이다.
경배와 기도를 통한 주님과의 정상적인 교제가 우선되지 않은 채 성도가 모여 대화하는 그 교제가 과연 정상적인 교제이겠는가? 교제에 참여하고 있는 각 개인이 주님을 밖에 세워 두고 자기들끼리 모여서 하는 교제는 결국 인간적인 자랑과 자기 만족적인 내용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심지어는 사업을 의논하고 일을 의논하는 것이 마치 교제이고 기도인 양 착각하고 있다. 섬김의 생활보다는 이익이 개입되고 순수하지 못한 교제로 일관되어 있다.
또한 구원파의 그 교제에 참여하고 있는 자들만이 하나님의 뜻을 이룰 몸된 교회라고 막연히 생각하면서 영적 자만에 빠져 있다. 교제를 지나치게 강조하고 개인의 거룩함을 추구하는 생활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 보니 성도 개개인은 영적인 능력과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자긍심마저 상실하고 만 것이다. 그렇다 보니 2004년부터 주님이 아닌 세상의 교단총회(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에서 <정통과 이단>이라는 책을 통해 구원파가 이단이 아니라고 하자 반색하면서 교회 홈페이지를 통해 대대적으로 홍보하고 있다. 세상 교단에서 이단이라고 할 때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우리가 고난받고 있다고 하던 그들이 이제는 세상의 교단에서 이단이 아니라는 말에 기뻐하니, 이들의 정체는 변질되고 부패하지 않았다고 할 수 없다. 신실한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세상으로부터 이단으로 지목되어 오지 않았던가? 이것은 성경과 지난 2,000년의 교회사가 증명하고 있다.


다섯째, 그들은 거리설교와 구령(Soul Winning)을 할 줄 모른다.
우리 나라의 제도권 교회는 한결같이 교인을 교회에 출석시키는 전도는 하지만 그를 거듭나게끔 구령은 하지 않으며, 또 기회가 주어져도 구령할 줄 모른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거리설교가 무엇을 말하는지, 구령이 무엇을 말하는지조차도 모른다.
구령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다. 만일 우리 자신의 힘으로 마귀에게 속한 누군가를 구원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어려울 뿐만 아니라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복음이 무엇인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완성해 놓으신 그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피흘리심으로 인한 죄 용서와 그분의 부활하심으로 인한 의롭게 됨을 믿고 받아들이면 되는 것이 아니던가? 비록 죄의 대가는 엄청난 죽음이었지만 우리는 단지 그 공로를 힘입어 은혜로 구원을 받는 것이기에 어려운 것이 아니다. 듣는 사람이 마음 문을 열고 그분이 해 놓으신 그 사실이 바로 자신을 위한 것임을 인정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세주로 영접하게 되면, 그 죽음이 곧 자신의 죽음으로 간주되기에 구원은 결코 어려운 것이 아니다.
신약 시대의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은 모두 다 왕 같은 제사장들이다(벧전 2:9). 그러므로 누구든지 구령(전도가 아님)할 수 있다. 이것은 또한 주님의 명령이다. 그런데 구원파는 구원을 어렵게 만들었다. 1주일 정도의 전도집회를 통해서 전도인이라는 특정인만이 마치 복음을 풀어주는 열쇠라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전하고 있다.
그들은 또한 밖으로 나가서 전하지 않는다. 즉 데려온 사람에게 주로 전도인이 복음을 풀어서 전도한다. 거리설교가 무엇인지, 전도지가 무엇인지 잘 모른다. 그래서 평신도는 구령의 열매가 거의 없으며, 거리설교와 구령을 통해 얻어지는 성령충만한 생활이나 그 상태를 유지하는 비결을 배울 수 없다.


여섯째, 그들은 참된 신약 교회의 모범, 즉 교회의 정체성에 대하여 무지하다.
신약 교회는 보이는 교회인 지역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인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로 구분할 수 있다. 그런데 구원파는 지역마다 형성된 지역 교회를 지교회(독립 지역 교회가 아님)라 칭하고 전체를 하나의 교회로 하여 교단 교회를 형성하고 있으며, 중앙집권식 모임체계로 운영하고 있다.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교회의 촛대가 현재는 한국 땅의 구원파에 와 있다고 맹신하는가 하면 구원파에서 받은 구원만이 유일한 구원이라고 주장한다(이에 대하여는 추후 논하기로 한다). 교회는 한줄기라느니 운운하면서 설교도 국내뿐 아니라 해외 지교회까지도 한 사람의 설교를 듣고, 십일조도 각 지교회에서 쓸 수 없게 하고 중앙의 사무국으로 보내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 통합 운영형태를 취하고 있다. 즉 구원파의 교회관은 보이는 지역 교회와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정확히 구분하지 못하고 혼합하여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당신은 교회회사(?)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바로 구원파에 있다. 당신은 세상회사의 회장이 설교하고 그 내용을 DVD나 비디오 테잎으로 제작하여 국내의 전국 지교회와 해외의 지교회에 배포하여 주일에 경배 대신 그것을 시청하는 교회를 보았는가? 바로 구원파에서 그렇게 하고 있다. 마치 카톨릭 교황이 성경에도 없는 교회국가를 하면서 전권을 휘두르듯이 구원파는 회장이라는 직책을 만들어 놓고[성경에는 목사(감독 또는 장로)와 집사의 직분만을 인정하고 있음에도] 교회회사를 하면서 교회 위에 초월적인 권한을 행사하도록 운영되고 있는 것이다. 구원받았고 하나님의 종이라고 믿으면서 회사가 교회 위에 군림하고 있는 형태로 교회가 운영되고 있음에도 누구 한사람 그 그릇됨을 지적하지 못하고 있는 비양심적인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이 바로 오늘날의 구원파의 실상이다. 주님의 뜻을 나타내고 이루어가는 것이 아니라, 모임을 통해서 설교자 개인의 어릴적 꿈을 펼쳐가고 있는 모습이 아니고 무엇인가?
처음에는 복음으로 출발하는 것 같더니 1976년경 교회 내에 영리를 추구하는 사업체(회사)가 들어오면서부터 교회의 본질은 퇴색되었고, 이제는 교회가 회사의 시녀 정도로 전락되어 버렸다. 그리스도인 간에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이루어가기 위해 만든 회사가 목적과 수단이 전도되어 주님의 이름을 욕되게 만들었고(오대양사건, 다단계판매 등을 통해), 어느 때부턴가 형제자매들이 이익과 타산으로 만나게 되면서 교회가 온통 장사하는 강도의 소굴이 되었다. 그래서 회사 부도라는 주님의 징계가 있었음에도 아직 그러한 것을 깨닫지 못하고 지난날의 전철을 그대로 밟고 있는 것이다. 코르반, 즉 모임을 위해서라면 어떤 것이나 상관없는 것처럼 되어 있으며, 하나님의 뜻에 배치되어도 별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다(막 7:9-13). 다음의 성경 말씀이 얼마나 적절한 것인가? 『그때 제자들이 “주의 집을 위한 열성이 나를 삼켰나이다.”라고 기록된 것을 기억하더라』(요 2:17).
그리스도인은 물질에서 해방되어야 한다고 하면서 롯의 처가 되지 않게 한다는 명분 하에 각종 비성경적인 헌금이 기금이나 작정 형태로 강요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모임에 참여하여 듣다 보면 결국 자기 의사에 반하여 그 대열에 참여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수많은 성도들이 이 과정에서 물질적인 고통과 정신적인 고통은 물론이고 심한 경우에는 모든 것을 잃고 파산지경에 이른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한 헌금의 사용내역은 투명하게 공개되지 않으며, 따라서 어디에 얼마가 어떻게 쓰이고 있는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알 수가 없다. 대부분 부동산을 사거나, 회사를 운영하는 일로 사용되는 것으로 추정되지만 각 지교회에 소속된 사람들은 알 수가 없는 실정이다.

우리는 주님을 따르는 주님의 제자들이다. 그런데 구원파는 설교자 한 개인의 표적을 좇아가는 모임이다. 표적은 유대인에게 주어진 것이다(고전 1:22). 그런데 설교자가 보통의 평신도보다 여러 가지 면(세모 스쿠알렌, 장청소기 등 개발)에서 우월하다는 생각과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이에 대한 논증은 다음 기회로 미룬다)라는 잘못된 시각 때문에 주님을 좇아가는 것이 아니라 설교자를 좇아간다. 모든 문제는 주님(말씀)께 물어봐야 하나 그들은 설교자에게 묻고 처리한다. 순수하게 평신도 모임으로 출발하여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동일한 위치에 있다는 것을 강조하면서도 유독 한 사람만을 높이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정말 설교자가 주님이라도 된다는 말인가? 설교자는 어느 새 우상화(?)되어 있는 상황이다. BB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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