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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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의 소통을 꿈꾸는 언더우드 학술강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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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08년 10월호>

요즈음 정치적, 사회적으로 종교 간 갈등이 심해져 가는 가운데 지난 9월 6일(토)과 7일(일) 이틀에 걸쳐 새문안교회에서는 "세상과 소통하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주제로 제45회 언더우드 학술강좌가 개최됐다. 언더우드 학술강좌는 1957년 이래로 1년에 한 번씩 세상과 관련하여 민주화와 전도, 민중, 분단, 세계 선교 등을 주제로 토론해 오던 모임인데 1977년부터 1980년까지, 또 1987년부터 1989년까지는 정부의 탄압으로 중단되기도 했기 때문에 올해로 45회를 맞았다. 올해의 언더우드 학술강좌는 "기독교와 사회와의 소통 상황을 진단"하고 "사회적 책임을 감당하기 위한 현실 참여의 방향을 모색"하기 위해 열렸다.
첫날 숭실대 기독교학 교수인 김회권 교수가 주제 강연을 한 데 이어서, 둘째 날에는 일본 아오야마가쿠인대학교의 시마다 마사요시 교수가 "일본 사회와 소통하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주제로, 중국 북경대학교의 정안덕 교수가 "중국 무신론 전통과의 소통"이라는 주제로, 장로회신학대학교 임성빈 교수가 "한국 교회와 사회의 소통을 위한 신학적 반성"이라는 주제로 각기 세부적인 강연을 진행했다.
이 중에서 가장 핵심적인 강연이었고 또한 기독교 언론을 통해서도 자세히 보도된 바 있는 김회권 숭실대 교수의 주제 강연의 내용을 분석해 보면서, 교회가 세상과 소통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그들의 주장 중 어떤 부분이 옳고 어떤 부분이 그른지 성경과 비교하며 살펴보기로 하겠다.
김교수는 우선 독일 신학자 몰트만의 주장을 인용하면서 오늘날 기독교는 두 가지 위기에 직면해 있다고 했다. 첫째는 교회가 세속화되고 거룩함을 잃어버린 "정체성의 위기"이고, 둘째는 교회가 효과적으로 믿음을 전하여 세상을 복음화하지 못하는 "상관성의 위기"라고 했다. 그리고 이 "상관성의 위기"에서 교회는 "세상과 어떻게 소통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고 했다. 그는 교회가 세상과 소통하는 방식을 3가지로 구분하여 "복음전도적 소통," "중보자적 소통," "변증적 소통"이라고 명칭을 붙였다. 이것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김교수의 강의안을 인용해 보겠다.

1. 복음전도적 소통
『복음전도적 소통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알리고 가르치고 경험케 하고(치유사역과 축사사역), 청중들로 하여금 그것에 대하여 회개로 응답하도록 만드는 소통이다.』
김교수는 메시야 통치자께서 이 땅에 왕국을 이루시려고 오셔서 선포하셨던 『그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도다.』(막 1:15),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 4:17)는 선포를 교회가 동일하게 하면서 병을 고치고(치유사역) 마귀를 쫓아내며(축사사역) 청중이 회개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김교수가 말한 바,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알리고 치유와 축사를 하며 회개로 이끄는 것은 성경에서 『왕국 복음』이라고 지칭되어 있으며(마 4:23), 『왕국 복음』의 내용은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는 내용으로서(마 24:13,14) 그 복음은 과거 메시야 통치자께서 땅에 내려오셔서 이스라엘에 왕국을 막 도래시키려 하셨던 그때에 전해졌고(마 4:25; 10:6-8,22), 미래에 이 땅에 전무후무한 『대환란』이 펼쳐지고(마 24:21) 선지자 다니엘이 말한 적그리스도가 나타나 활동하게 될 그때에(마 24:15) 다시 전해질 복음이다. 이것은 왕이 거부당하여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왕국이 먼 미래로 연기되면서 주어진 복음, 곧 교회가 전할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행 20:24)과는 다른 것이다. 교회가 전할 복음은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가 아니라 『너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구원을 받았으니』(엡 2:8)라는 말로 특징지어진다. 교회가 전할 복음의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말미암은 완벽한 죄 용서이며(고전 15:1-4, 눅 24:46,47), 이 시대에 다른 복음을 전하는 것은 스스로 저주를 부르는 일이다(갈 1:8,9). 왕국 복음과 교회가 전할 복음은 청중을 회개로 이끄는 것은 동일하더라도 복음의 내용은 전혀 다르다.

『나사렛 예수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는... 인격, 제도와 법, 정치 경제 및 종교 및 문화의 모든 요소에 위기를 불러일으키며... 모든 사람들을 "결단"으로 소환한다... 이런 복음전도적 소통이 일어나지 못하면 기독교인의 신앙표현은 주로 교회라는 건물 안에 제한된다. 신앙이 가장 좋은 사람들은 충무로, 을지로, 세종로, 테헤란로 등 세상의 중심무대를 떠나 신학교로 선교사로 목회현장으로 투신한다. 세상은 하나님 없는 사람들의 독무대가 된다. 대중예술, 정치 등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투신하고 도전해 봄직한 영역이지만 복음주의적 청년들 중 이런 영역에 투신하려는 사람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김교수가 말하는 "복음전도적 소통"은 세상의 중심무대에서 세상이 만들어 놓은 분야에서 활동하며 개혁하는 것이었다. 김교수는 복음에 대해 왜곡했기 때문에 실천사항에 대해서도 왜곡한 것이다. 성경이 권면하고 본보기를 제시하는 "복음전도적 소통"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중심무대에 나가는 것을 배제하지 않는다. 그러나 세상이 만들어 놓은 분야에서 활동하며 개혁하는 것은 아니다. 성경이 제시하는 "복음전도"는 세상의 구석진 곳뿐만 아니라 세상의 중심무대에도 나가서 말씀을 전파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집에서, 산에서, 바닷가에서 그리고 반대 세력들의 본거지가 되어 버린 성전 뜰에서, 총독의 관저에서 말씀을 전파하셨다. 베드로 사도는 집에서, 행각에서, 성전에서, 유대교 공회에서 말씀을 전파했다. 바울 사도는 유대교의 중심지인 회당들에서, 강가에서, 감옥에서, 시장터에서, 우상 숭배의 중심지에서, 학교에서, 로마 군대의 병영에서, 재판정에서 말씀을 전파했다. 성경적 "복음전도"의 본이 되는 그 누구도 세상이 만들어 놓은 어떤 영역에 투신함으로써 세상과 소통하지 않았고, 그런 것이 그리스도인이 해야 할 일인 것처럼 행동하거나 가르치지 않았다. 김교수가 말하는 "복음전도적 소통"과 성경이 말씀하는 "복음전도"는 이처럼 전혀 맥락이 같지 않다.

2. 중보자적 소통
『중보자적 소통은 세상의 탄식과 아우성을 흡수하여 하나님께 도고하는 소통이다. 그것은 성육신적인 공감이요 체휼의 사역이다... 애가형 중보기도를 통해 하나님이 이 모순과 부조리로 가득 찬 세상일에 관여하시도록 촉구하는 것이다... 교회는 주일마다 공기도 시간에 이 땅에 넘치는 불의와 압제, 탐욕과 독점의 체제를 거룩하게 전복해주시도록 하나님께 중보기도를 드려야 한다.』
김교수는 소돔과 고모라를 위한 아브라함의 중보기도, 이스라엘 민족을 위한 모세와 사무엘의 중보기도를 예로 들면서 위와 같이 세상을 위한 중보기도가 그리스도인의 사명이라고 주장했다. 물론 그리스도인이 어떤 맥락에서 이 세상에 대한 기도를 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므로 내가 무엇보다도 먼저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중보와 감사를 하되 왕들과 권세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딤전 2:1,2). 그러나 그 기도는 교회 시대에 이 세상 체제에 하나님의 왕권을 가져오기 위한 기도가 아니다. 하나님의 왕권은 교회 시대에 이 세상에 임하지 않는다. 성경에 따르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으므로 그런 기도는 헛된 기도이며, 성경적이 아니다. 하지만 앞에서 성경을 오해하여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운운한 김교수는 여기서 하나님께서 이 땅의 "체제"를 "전복"해 주시도록 기도하는 것이라고 가르침으로써 그의 망상을 드러내었다.
성경에서 가르치는 중보기도는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위한 기도와, 하나님의 자녀들인 교회(그리스도인들)를 위한 기도와, 세상에 있는 사람들의 구원을 위한 기도다. 아브라함, 모세, 사무엘 등의 예들도 이 범주에서 전혀 벗어나지 않는다. 우리의 본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이 범주를 철저히 지키셨다. 『나는 세상을 위하여는 기도하지 아니하고 다만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나이다』(요 17:9). 비유하자면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을 위한 기도와 신약 시대에 교회를 위한 기도는 모두 하나님께 속한 "아군"을 위한 기도다. 하지만 구원을 위한 것 외에 세상을 위한 기도는 마귀에게 속한 "적군"의 유익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고, 세상에 속한 사람들의 구원을 위한 기도는 "적군"이 그 위치를 버리고 "아군"에 합류하도록 기도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중보기도의 범주가 지켜져야 하는 이유다.
앞에 인용한 "모든 사람, 왕들, 권세자들"에 대한 기도 역시 그 맥락은 그리스도인들의 활동이 제지당하지 않기 위한 것이며(딤전 2:2,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청렴함 가운데 평온하고 조용한 생활을 하려 함이라.』), 궁극적으로 그것은 죄인 대신 『몸값』(딤전 2:6)을 지불하신 구주 예수님을 『증거』(딤전 2:6)하고 『설교』(딤전 2:7)하는 활동이 방해받지 않음으로써 사람들을 『구원』(딤전 2:4)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올바른 범주 안에 든 기도다.
김교수는 자기 주장을 강화하기 위해 예수님의 신성을 드러내는 표적과 이적을 왜곡되게 해석하기도 했다. 『나사렛 예수의 치유 사역은 아픔 공감과 체휼 사역의 결과다. 신적 권능으로 쉽게 병든 사람들을 고치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명력이 100% 소진되는 경험을 한 후 발생하는 동정의 능력으로 고치신 것이다. 공감과 동정이 곧 능력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김교수가 아무리 누군가에게 공감과 동정을 한들, 그런 능력은 나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3. 변증적 소통
『마지막으로 세상의 철학과 세계관을 이용하여 기독교신앙 진리를 변증하고 옹호하고 소통하는 변증적 소통이다. 변증적 소통은 이미 세상 사람들에게 유포되어 있는 개념들이나 사상, 혹은 시행되고 있는 관습들과 제도들을 발판삼아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증거하고 체험케 하는 과업이다... 바울의 아덴 사역... 이 단락이 변증적 소통의 생생한 예를 제시한다... 일반계시의 가능성과 특별계시의 추가적 필요성을 도입하기 위한 토대를 놓기 위하여 감히 이방인들의 자료를 자유롭게 활용하고 있다.』
김교수는 사도행전 17장에서 바울 사도가 아테네 사람들이 한 제단에 『알지 못하는 신에게』(행 17:23)라고 새겨 놓은 것을 이용해서 말씀을 시작하고, 또 그들에게 속했던 한 시인이 『우리도 그분의 자손이라』(행 17:28)고 표현한 것을 이용해서 말씀을 전개한 사례를 가지고 "변증적 소통"의 예로 삼았다. 이 정도의 내용을 주장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적합한 주장이다. 목적된 누군가에 대해 복음을 전하고 선교를 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이 속한 처지와 배경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이 좋다. 그래야 예기치 않은 실수를 방지할 수 있고, 효과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상대방이 속한 배경에 대한 그런 정보들이 철학과 세계관, 사상, 관습, 제도에 관한 정보일 수도 있다. 그런 문제에 정통한 것은 그런 부분에 깊이 연루된 사람들을 대하는 데 있어서 도움이 될 수 있지만, 그것은 본질적이거나 필수적인 것이 아니다. 더구나 바울이 세상에 속한 아테네의 것을 두둔한 것처럼 주장하는 것은 사실을 왜곡한 것이다. 김교수는 세상에 속한 아테네의 것에 "일반계시"가 들어 있고, 복음이라는 "특별계시"가 추가로 필요했던 것으로 말했지만, 그렇게 존중하는 것은 변개된 성경에 근거한 것이다. 김교수는 이렇게 설명했다.
『30절은 이제 기독교적 케리그마의 서론을 도입한다... 아덴의 종교성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다. 알지 못하는 신에게 드린 제사로는 불충분하다는 것이다.』
바울 사도는 아테네의 종교성과 알지 못하는 신에게 드린 제사로는 "불충분"하다는 말을 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불충분"은 고사하고 "잘못된" 것이었다. 단지 불충분한 것이었다면 바울 사도의 영은 "몹시 괴롭지"(행 17:16) 않았을 것이다. 변개된 성경에서는 바울 사도가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religious)"라고 말한 것으로 오역되어 있으나, 바울 사도는 실제로 아테네의 문화에 호의적으로 말하지 않았다. 그가 했던 말은 이렇다. 『내가 보니 너희는 매사에 너무나 미신적[superstitious]이니라』(행 17:22, KJV). 김교수는 사도 바울의 "변증적 소통"을 너무 관대한 것으로 오해했다. 바울 사도는 아테네의 잘못된 "철학과 세계관"에 대해 단호하게 부정하면서 말씀을 시작했던 것이다.

이상에서 김회권 숭실대 기독교학 교수의 주제 강연 내용 중 핵심적인 부분을 훑어보았다. 그에게는 세상에 강력한 영향을 끼치는 교회의 모습을 꿈꾸며 그 길을 모색하고자 하는 열의가 있었으나, 성경적 지식이 많이 결여되어 있어서 엉뚱한 방향으로 해답을 제시하고 말았다. 이것이 새문안교회의 "언더우드 학술강좌"의 한계였다.
그 주제 강연의 마지막은 여전히 성경에서 왕국과 교회를 혼동하는 것으로 끝났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운동력에 힘입어 새로운 대안사회의 비젼을 제시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왕권이 온전히 관철되는 메시야 왕국에 "근사치적으로 접근하는" 사회를 이루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김교수의 꿈에 찬물을 끼얹고 있다. 『악한 사람들과 사기꾼들은 더욱 악해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리라』(딤후 3:13). 『인자가 올 때 그가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눅 18:8) 이제는 "언더우드 학술강좌" 참석자들의 "세계관"을 성경과 맞추어 바꿔야 할 때다.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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