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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오경에 대한 속임수 (그라프-벨하우젠 이론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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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05년 04월호>

모세오경에 대한 속임수
그라프-벨하우젠 이론을 중심으로


마귀가 사람들을 공격하는 방법들 중에는 육신적인 감정을 건드려 우발적으로 혹은 의도적으로 죄를 짓게 만드는 것도 있지만, 때로는 사람에게 잘못된 지식을 집어넣음으로써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 자체를 흐리게 만드는 것이 있다. 이것은 마귀가 지성을 공격하는 것인데, 오늘날 수많은 학자들은 마귀의 이 계략에 속아 넘어가 있다. 소위 고등교육을 통해서 악한 지식들이 침투되는데, 진화론이나 인본주의 철학 사상들을 통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 그 대표적인 내용들이다. 특히 성경에 대한 잘못된 지식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절대 권위를 무너뜨리는 결과를 낳았다. 그래도 과거에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은 성경에 기록된 내용들을 옳은 것으로 믿었고,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바는 따라야 한다고 생각했으나, 이제는 성경의 내용들을 불신하고, 더 나아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고까지 생각하게 되었다.
일이 이렇게 되기까지에는 많은 성경학자들, 특히 신학교 교수들의 지대한 ‘공헌’(?)이 있었는데, 그들은 비평주의적 관점으로 성경을 판단하여, 성경의 저자들, 성경 사본의 전승 과정, 성경의 서술 양식 등에 대해 새로운 해석을 내림으로써 성경의 권위를 떨어뜨린 것이다. 그리하여 오늘날은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기록되었다는 것을 믿는 학자들은 극소수에 불과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것이 아니라면, 성경은 다른 책들과 마찬가지로 인간들의 문화 유산 중 하나에 불과하게 된다.
그러면 이러한 일이 일어나기까지 어떤 과정이 있었는가? 어떤 구체적인 일이 일어났기에 사람들이 성경을 불신하게 되었는가?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본격적인 발단은 비평주의적 성경 연구1) 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문헌 비평의 내용과 그 허구


소위 “문헌 비평”이라는 이름 아래 행해진 비평적 연구는 모세오경이 모세의 글이 아니라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이는 성경의 영감설을 믿지 못하는 학자들이 성경에서 약간의 다른 묘사들을 가지고 제기한 문제이다. 예를 들어 창조 기사에 대해서 창세기 1:1-2:3의 기록과 2:4 이후의 기록이 서로 다른 관점으로 기록되었다는 것, 신명기 34장에서 모세의 죽음을 다루는 기사를 모세가 쓸 수 없다는 것, 창세기 6장과 7장에서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장면이 약간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는 것, 창세기 36:31에는 아직 왕이 없었음에도 왕의 제도를 당연시하고 있다는 것 등이다.
이러한 내용들로 인해 모세오경은 후대에 누군가가 기록한 것인데, 그것도 한 명이 아니라 여러 명의 저자가 쓴 기록들이 후대에 편집된 것이라는 이론이다. 물론 이것은 전적인 가설이며, 성경 기록의 미묘한 차이들을 필요 이상으로 확대시킨 것에 불과하다. 이 가설을 처음 말한 사람은 비터(B. Witter)라는 목사인데, 그는 창세기를 구성하는 적어도 두 개의 자료층을 주장했고(1711년) 이어서 아스트룩(J. Astruc)이라는 의사는 그 두 자료를 “엘로힘 문서”와 “여호와 문서”로 구분했다(1753년). 그후 이 이론은 벨하우젠(J. Wellhausen)에 의해서 상당히 체계화되었는데, 그는 그라프(K.H. Graf)의 이론을 받아들여 결국 “J-E-D-P”설 2)을 확정지었다. (그래서 이 이론을 “그라프-벨하우젠 이론”이라고도 한다.)
학자들 간의 이견이 조금씩 있기는 하지만 대략 이 이론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오경의 내용은 솔로몬 시대 이전까지 여러 전승들과 설화들로서 “구전” 형태로 내려왔다.
2. 솔로몬 이후 이 구전은 각각 문서 형태들로 기록되었는데, 분열 후에 이 전승들은 남북 왕국에서 각각 다른 형태로 발전되었다. 이때 남왕국에서 발전된 문서가 “J” 문서층이고, 북왕국에서 발전된 문서가 “E” 문서층이다.
3. 유다의 요시야왕 때 성전 보수를 하면서 율법책이 발견되었는데(왕하 22:8-10), 이것이 “신명기 원전”(신명기의 율법 핵심 부분, 보통 신 12-26장을 말함)으로, “D” 문서를 이룬다.
4. 바빌론 포로기 때 유대인들의 민족적 종교심을 고취시키기 위해서 일단의 레위인들이 제사법을 구체화시켰는데, 이것이 “P” 문서층이다.
5. 이 모든 문서들이 다섯 권의 정돈된 오경을 이룬 것은 적어도 에스라 시대 이후이다. 그러므로 모세에게 주어진 율법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유대인들의 신정국가 개념은 포로기 이후에야 드디어 생겨났다.

이 이론에 따르면 모세는 율법의 극히 일부만 기록했고, 나머지 내용들은 구전으로 내려온 것이기에 신뢰할 수 없으며, 재판관들이나 왕들의 시대에는 율법을 알지 못했고, 그들이 행하던 제사 제도는 오직 전통에만 근거했다고 여겨야 한다. 무엇보다 모세오경은 하나님께서 영감으로 쓰신 것이 아니다. 구전 설화가 묶여진 이스라엘 건국 신화에 불과하며, 인간 문화의 소산일 뿐이 된다. 율법의 법적 구속력이나 교리적이거나 영적인 진리는 전혀 얻을 수 없는 소설일 뿐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이렇게 주장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각 자료들이 모세오경에 흩어져 있다면, 오경 내에 어떤 부분이 J-문서이고 어떤 부분이 E-문서인가? 그 내용은 무엇이고, 그것들은 어떻게 구분되는가?
아스트룩은 단지 여호와(『주』)라고 써 있으면 여호와(J) 문서, 엘로힘(하나님)이라고 써 있으면 엘로힘(E) 문서라고 했다. 창세기 1장에는 여호와라는 단어가 나오지 않고 엘로힘이라는 단어만 나온다. 그러나 2:4에서 여호와(『주』)라는 말이 나오는데, 마침 1장의 창조 기사와 2:4부터 시작되는 인간 창조 기사가 약간 달라 보인다. 그러므로 1장은 엘로힘 전통을 가진 기자에 의해 기록된 것이고, 2장은 여호와 전통을 가진 또 다른 기자에 의해 기록된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단지 이것으로 구분하는 것은 너무 근거가 희박하다. 왜냐하면 여호와와 엘로힘이 열결되어 나오는 본문이 많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창세기 6장만 해도 1,2절은 E-문서가 되고, 3절은 J-문서가 되며, 다시 4절은 E-문서, 또 5-8절은 J-문서, 그리고 9절부터 E-문서로 돌아간다. 창세기를 편집한 사람이 이렇게 짜집기했다는 것을 믿을 수 있겠는가? 또 한 구절에서 동시에 여호와와 엘로힘이 함께 나오는 수많은 구절들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창 7:16; 14:22; 16:13 등)
그래서 학자들은 이 이론을 수정하여, J-문서에도 때로는 엘로힘이 나올 수 있고, E-문서에도 때로는 여호와가 나올 수 있다고 한다. 그들이 말하는 바, 네 문서의 특징은 대략 다음과 같다.
(1) 여호와 문서(J) - 하나님을 인격화시키는 신인동형적 표현들이 많다. 하나님을 제사 제도 안에 묶어 두지 않는다. 우주적인 “원역사”를 다룬다. 문체가 명료하며, 남왕국의 전통을 반영한다. 세계주의적이다. B.C. 9세기 작품.
(2) 엘로힘 문서(E) - 하나님을 덜 인격화시키며, 절대자요 전능하시며 엄격한 하나님을 강조한다. 모세의 율법적 전승을 더 많이 반영했다. 역사를 아브라함에게 소급해, 족장들을 강조한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선지자를 두며, 북왕국의 전통을 반영한다. 민족주의적이다. B.C. 8세기 작품.
(3) 신명기 문서(D) - 율법을 말한 부분으로, 이스라엘의 종교성과 경건성을 강조한다. 예루살렘 중심의 경배 사상이 나타난다. 축복과 저주의 역사관이 드러난다. B.C. 7세기 작품.
(4) 제사장 문서(P) - 제의적, 의식적 규례들을 강조한다. 신인동형적 표현(하나님의 인격화)이 없다. 하나님의 계시나 현현이 없고, 제사장적인 족보, 하나님의 위대함 등이 강조된다. B.C. 6세기 작품.

물론 모세오경에는 여러 가지의 주제가 있다. 그 중에는 제사를 강조하는 부분이 있고, 하나님의 절대적인 모습을 말하는 부분과 인간과 함께 역사에 개입하시는 부분이 있다. 종교적 의식을 강조하는 부분이 있는가 하면, 축복과 저주의 경고를 말하는 부분이 있다. 예컨대 이러한 부분들을 주제별 성경 연구의 방법으로 각각 묶는다면 문제가 달라질 것이다. 분명히 신명기 신학에서 축복과 저주가 강조되는 것은 사실이다. 이것은 신명기 28장뿐 아니라 11장에도 등장한다. 반면 이 주제는 레위기 26장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이 경우, “축복과 저주에 대한 주제가 레위기와 신명기에 모두 나타난다.”라고 말하는 것과, “이 신명기적 주제가 레위기 26장에 나타나는 것을 보니 레위기 26장은 원래 신명기 문서의 것인데 후대에 레위기로 편집되었다.”라고 말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후자와 같은 관점으로 성경을 비평해 놓은 것이 바로 문헌 비평, 즉 JEDP설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직접 “동산을 거니시고”(창 3:8) 바벨탑을 세우는 것을 보시려고 “내려오셨다”(창 11:5)는 구절들과, “주의 천사”나 모세라는 ‘중재자’를 통해 말씀하시거나(창 21:17, 출 32:34) 꿈이나 환상이라는 매개로 말씀하시는(창 20:3,6) 구절들이 왜 다른 저자의 작품으로 간주되어야 하는가? 비평학자들은 전자가 하나님을 “신인동형적 표현”(하나님을 인간처럼 묘사하는 것)으로 설명했으니 J-문서요, 후자가 하나님을 인간에게 접근하지 않으시는 절대적인 존재로 설명했으니 E-문서라 말한다.
그러나 생각해 보라. 하나님께서 나타나시는 상황을 다르게 묘사했다고 해서 왜 서로 다른 저자가 되어야 하는가?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직접 나타나시기도 했고, 매개체를 통해 나타나시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선지자를 통해서도 말씀하셨고, 지성소에서도 말씀하셨다. 히브리서 1:1은 하나님께서 “여러 번에 걸쳐” “다양한 방법으로” 말씀하셨다고 설명한다. 모세가 이러한 상황들을 모두 알지 못했겠는가?


비평가들의 한결같은 질문은 “오경의 저자가 모세 한 사람이라면 그가 어떻게 하나님의 이름을 여러 가지로 사용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역으로 묻는다. “왜 모세가 하나님의 이름을 여러 가지로 사용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가?” 모세는 이집트 왕궁에서 40년 동안 교육을 받았다. 그는 이집트의 수많은 신들의 이름을 알았을 것이다. 모세가 이방 신들의 이름은 많이 알면서도 하나님의 이름은 한 가지밖에 몰랐을까? 그것이 상식적인 생각인가?
그들의 주장이 얼마나 비상식적인 생각인지 살펴보기 위하여 창세기 37장을 보자. 본문은 요셉이 형들에게 미움을 받아 팔려가는 장면을 그리는데, 26,27절에서는 유다가 요셉을 죽이지 말고 팔아 버리자는 제안을 한다. 그런데 21,22절에서는 르우벤이 요셉을 살리려는 의도로 구덩이에 던지자는 제안을 하며, 또 29,30절에서는 르우벤이 요셉을 위해 슬퍼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 두 경우, 즉 유다의 선행과 르우벤의 선행이라는 두 기사를 보고 비평학자들은 두 자료층을 주장하는 것이다. 전자에 대해서는 왕권을 가진 유다를 강조했기에 남왕국의 전통에서 형성된 J-문서라 말하고, 후자에 대해서는 르우벤 지파가 있는 북왕국적 전통에서 형성된 E-문서라 말한다. 이 두 문서가 같은 장, 같은 상황에 짜집기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창세기 37장은 같은 날 있었던 사건을 시간 순서적으로 기록해 놓은 것뿐이다. 모세가 유다와 르우벤 모두를 언급할 수 없었단 말인가?
오늘날 그라프-벨하우젠 이론은 같은 비평가들 내에서 약간의 공격을 받는다. 서로가 이견을 제시하고는 있다. 그래서 “JEDP설”도 한갓 “이론”일 뿐이라고 스스로 말한다. 하지만 그들 모두가 확실히 동의하고 있는 한 가지 가설이 있으니, 곧 “오경은 여러 문서들을 짜집기한 결과물이다.”라는 것이다.


성경은 무엇이라 말씀하시는가?

하지만 성경은 분명히 말씀한다. 창세기에서 신명기까지의 다섯 권의 책, 즉 오경은 “모세의 책”이라고 말이다. 이미 우리는 그들의 주장이 비상식적 가설에 근거한 허구라는 것을 알았다. 이제는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바, 성경의 사실적 설명에 귀를 귀울여야 한다. 무엇보다 신약성경에서 율법의 내용들을 인용할 때면, 그것들을 모두 모세의 기록으로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마태복음 8:4에서는 예수님께서 “모세가 명한 예물”을 언급하신다(레 14장). 19:7에서는 바리새인들이 “모세”가 말한 이혼증서를 언급한다(신 24:1-4). 22:24에서는 사두개인들도 “모세”의 말을 인용하며 율법에 따른 결혼제도를 말한다(신 25:5). 또 마가복음 7:10에서 예수님은 “모세가 말하기를”이라 하시며 부모를 공경하라 하셨고(출 20:12), 12:26에서는 가시덤불에서 나타나신 하나님에 대해 언급하시면서 “모세의 책”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출 3:6). 누가복음 24:27에서는 율법에서 그리스도를 증거한 내용을 가지고 “모세”라고 확언하셨으며, 요한복음 1:45에서는 빌립이 그리스도를 “모세가 율법에 기록한 분”이라고 말했다(신 18:15). 그뿐 아니다. 사도행전 15:21에서는 회당들에서 율법을 가르치는 것을 가지고 “모세를 전파했다”라 말했고, 사도 바울도 “모세의 율법”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증명했으며(행 28:23), “모세의 글,” 즉 율법을 수건에 비유하기도 했다(고후 3:15).
이와 같이 성경은 여러 번에 걸쳐서 율법, 즉 오경을 모세의 저작으로 확언한다. 물론 모세가 개인적으로 기록한 것이 아니라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한 것은 자명하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것을 “성경”으로 인정하셨다. 여러 시대에 여러 사람들이 여러 환경에서 설화를 바탕으로 짜집기한 것을 왜 예수님께서 성경으로 인정하셨단 말인가? 만약 짜집기한 것을 성경으로 인정하셨다면, 그 기록은 언제 영감받은 것인가? 설화 상태에서 영감받았다는 말인가, 네 전승으로 존재했을 때 영감받았다는 말인가, 아니면 짜집기할 때 영감받았다는 말인가?

결국 비평학자들은 성경의 영감 자체를 부정하는 자들이다. 그럼으로써 성도들의 손에서 성경을 빼앗아 가고 성도들의 마음에서 믿음을 빼앗아 가려는 것이다. 그들은 거듭나지 않은 자들이며, 마귀의 일꾼들이다. 성경의 영감을 부정하면, 그의 믿음과 행동을 통제하는 최종권위요 절대 권위가 없어져 버린다. 그렇게 되면 그의 판단력은 마비되어 어떠한 죄도 지을 수 있게 되고 또 그 죄를 합리화시킬 수 있게 된다. 결국 마귀가 원하는 혼탁한 세상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이미 혼탁한 세상에 살고 있다. 이러한 비평 이론은 오늘날 대부분의 신학 대학에서 “정설”로 가르쳐지고 있다. 이 이론을 말하지 않는다면 구약학 교수로서 인정받지 못하는 세상이다. 이것이 오늘날의 교계이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학식있는 자의 말이 아니라 오직 성경 말씀에 귀를 귀울여야 한다. 성경만이 우리의 믿음을 뿌리박을 곳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만이 마귀의 공격을 이기는 무기가 될 것이다. 그래서 성경을 󰡔성령의 칼󰡕(엡 6:17), 즉 영적 전쟁의 무기라 말하지 않는가? BB



1) 비평주의적 성경 연구에서 크게 두드러지는 두 분야는 원문 비평(본문 비평)과 문헌 비평인데, 원문 비평이 성경의 보존 과정을 다루고 있다면 문헌 비평은 성경의 기록 자체와 그 편집 과정을 다루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비평들은 하나님께서 영감으로 성경을 기록하시고 섭리로 보존하셨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는 데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며, 따라서 이에 대한 학자들의 연구 결과들은 성경을 난도질하는 것으로 끝난다. 원문 비평은 별도로 다루어야 할 것이기에, 이 글에서는 주로 문헌 비평에 대해서 다룰 것이다.
2) 모세오경이 다음 네 문서의 조합으로 이루어졌다는 이론이다. 즉, J-문서는 여호와(Jehovah) 전승의 문서, E-문서는 엘로힘(Elohim) 전승의 문서, D-문서는 신명기(Deuteronomy) 문서, P-문서는 제사장(Priest) 전승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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