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신학논단 분류

종교 개혁가 루터 vs. 사도 바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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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17년 11월호>

독일 작센안할트 주 비텐베르크에 있는 루터의 집을 "루터하우스"라고 부른다. 그곳은 종교 개혁가 마틴 루터와 그의 가족이 살았던 집으로, 원래는 아우구스티니안 수도원 자리였다고 한다. 루터는 바로 이곳 수도사로 있었던 것인데 그가 종교 개혁을 일으키자 그곳은 이내 그의 차지가 되었고, 그곳에 살면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설교하며 종교 개혁의 열정을 불태울 수 있었다. 오늘날 이 "루터하우스"는 종교 개혁의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으며, 루터의 방과 책상, 설교단, 옷, 집필 초고 등이 전시되어 있다. 그런데 독일의 또 다른 곳, 튀링겐 주 아이제나흐에 가면 루터의 종교 개혁을 기념하기 위한 "박물관"이 또 하나 있다고 한다. 이 목조 건물 역시 "루터하우스"라 불리는데, 루터는 1498년부터 1501년까지 이곳 아이제나흐의 집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으며, 또 그곳의 한 방에서 독일어 성경을 번역했다고 전해진다.

자고로 박물관이란 고고학적 자료나 미술품, 역사적 유물, 자연, 인문, 민속 등 학술적 자료를 수집, 보관하고 진열하여 일반인들로 하여금 전람하게 하는 시설을 말한다. 하지만 아무리 마틴 루터의 물품들을 수집, 보관, 진열했다 해도 그의 "믿음"까지 전람할 수 있겠는가? 믿음은 마음에 있는 것이며, 그 마음의 소유자는 셋째 하늘 낙원에 진즉 가 있는 것이다. 루터가 그의 믿음으로 바랐던 것들, 또 그가 증거했던 보이지 않는 것들은 박물관에 실물로 전시될 수 있는 성질의 것들이 아니다. 『이제 믿음은 바라는 것들에 대한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증거니』(히 11:1). 바울에게 계시된 이 믿음의 원리는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예수』(히 12:2)께로부터 주어진 것이며, 주님은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것들의 실상을 증거하시기 위해 친히 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이셨다(딤전 3:16). 주님께로부터 믿음의 원리를 계시받은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처럼, 너희는 나를 따르는 자가 되라.』(고전 11:1)라고 말함으로써 우리 신약 성도들에게 흐트러짐 없는 믿음의 발걸음을 촉구하고 있다. 루터는 바로 이 명령에 순종하기 위해 개혁의 횃불을 높이 치켜들었던 것이다.

따라서 루터와 그가 따랐던 바울의 생애를 관찰해 보면 이 두 성도에게서 유사점들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것은 루터를 "기념"만 하는 마지막 때의 배교한 교회들에게 그들이 진정으로 바라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 준다.

첫째, 루터와 바울은 둘 다 인생의 행로를 "급변"하게 한 계기가 있었다. 바울은 다마스커스에 있는 성도들을 붙잡으러 가던 길에 하늘로부터 빛을 비추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었다. 『그가 길을 떠나 다마스커스에 가까이 왔을 때 갑자기 하늘로부터 한 줄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그가 땅에 엎드려 그에게 말하는 음성을 들으니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고 하시더라. 그러자 그가 말하기를 "주여, 당신은 누구시니이까?"라고 하니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가시채를 걷어차는 것이 네게 고통이라."고 하시더라』(행 9:3-5). 바울의 회심은 이처럼 전혀 예상치 못한 갑작스런 사건에서 비롯된 것이다. 마찬가지로 루터는 부모의 권유로 변호사가 되기 위해 에르푸르트 대학에 입학해 교양 과정을 마치고 법률 공부를 시작했지만, 어느 날 친구와 들판을 걷다가 난데없이 내려친 번개에 맞아 루터 자신은 그 자리서 쓰러지고 옆 친구가 죽는 사건이 발생했다. 친구의 죽음을 가까이서 지켜본 루터는 큰 충격을 받았고, 그 일로 수도사로 헌신하여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로 들어가게 되었다. 루터의 인생행로 역시 그렇게 갑작스럽게 변경되었던 것이다.

둘째, 루터와 바울은 바른 구원의 교리를 알았을 때 이전의 잘못된 종교를 버리고 참 종교를 택했다. 바울은 유대교를 믿는 일에 누구보다도 열성적이었지만, 바울을 태로부터 선별하여 은혜로 부르신 하나님께서는 그를 통해 이방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시기 위해서 그에게 하나님의 아들을 계시해 주셨다(갈 1:14-16). 바울은 이 은혜의 복음을 전파하는 일을 가리켜 그가 『주 예수로부터 받은 사역』이라고 했다(행 20:24). 이후로 바울은 행위 구원의 유대교가 아닌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구원을 받는 신약의 구원 교리를 전파했던 것이다. 이 점은 루터도 매우 흡사한데, 루터는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수도회에 들어가 사제가 되었고, 비텐베르크 대학에서는 신학 박사가 되어 성서학 강의를 맡았으며, 또한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 열 곳을 감독하는 위치에까지 서게 되었지만,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로마서 1:17의 말씀으로 복음에 눈을 뜬 뒤로는 행위 구원의 카톨릭 신앙을 버리고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구원받는 신약의 구원 교리를 믿고 전파했던 것이다.

셋째, 루터와 바울은 바른 구원의 교리를 알았을 때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변론과 설득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했다. 바울은 회당에서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토론했으며, 시장터에서도 만나는 사람들과 토론했다(행 17:17). 안식일에는 회당에서 변론하며 유대인들과 헬라인들을 설득하기도 했고(행 18:4), 완고한 사람들로부터 제자들을 분리시켜 투란노 학교에서 날마다 토론하기도 했다(행 19:9). 루터의 경우, 그는 바른 구원의 교리를 알았을 때 "95개조 반박문"(95 Theses)이라 불리는 "논제"(論題)로 로마카톨릭의 이단 교리와 맞붙었다. 교황 추종자들은 성 바울 대성당 건축을 완성하는 데 필요한 막대한 자금을 모으기 위해 "돈을 받고 죄를 면해 주는" 면죄부 판매 행위를 하기 시작했는데, 바로 이 일로 루터의 경건한 열성에 기름이 부어진 것이다. 루터는 1517년 만성절(All Saints' Day) 전날 밤(10월 31일) 비텐베르크 성당 문에 면죄에 관한 자신의 주장을 공개적으로 붙여 놓았고, 그 글 서두에 그의 주장에 반대하는 모든 이들에게 글로든 논쟁으로든 한번 붙어 보자는 도전장을 내걸었다. 그때 면죄에 관한 루터의 주장에 대해 도미니크회 수사이자 면죄부 판촉 위원인 테첼 신부가 반박 논문을 발표했는데, 그는 한술 더 떠서 그의 수도회 성직자들을 부추겨 루터를 대적케 했고, 그를 아주 질 나쁜 이단이라고 비난하면서 설교단으로부터 파문시켰다. 심지어 루터의 논문을 프랑크푸르트에서 공개적으로 불태우기도 했다.

넷째, 루터와 바울은 이전 종교인들에게 박해를 받았고, 박해받는 동안 "성경" 작업에 헌신했다. 바울이 유대인들의 박해로 생명의 위협을 느끼면서 14권의 신약성경을 기록했듯이, 루터도 카톨릭교도들에게 박해와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가운데 독일어 성경을 번역했다. 그뿐 아니라 되도록 많은 사람들이 교황 세력의 권위를 경멸하도록 하기 위해 교황의 교서를 대적하는 책과 주교들의 거짓 성직위계에 대항하는 책 등을 집필하기도 했다.

다섯째, 루터와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로 인해 법정에서 재판을 받았으며, 특히 "황제" 앞에서 자신을 변호했다. 바울은 『전염병자가 되어 세상에 있는 온 유대인 사이에 소요를 일으킨 자로서 나사렛 이단의 두목』(행 24:5)이라는 죄목으로 유대인들에게 재판을 받게 되었으나 그 일이 무산되어 펠릭스라는 한 이방인 총독에게로 재판이 넘겨졌다(행 24:10). 바울은 이 펠릭스의 후임자인 페스토 때 카이사에게 상소하여 바야흐로 로마 제국의 심장부에서 제국의 황제 카이사 앞에서 자신의 믿음을 변호했다(행 25:11,12, 딤후 4:16,17). 바울의 변호는 어찌나 직설적이고 위협적이었던지 그의 재판을 방청하던 "그리스도인들"이 바울과 자신들이 함께 엮여 들어갈까 봐 두려워 모두 "퇴정"해 버리는 일까지 벌어졌다. 『내가 처음 변호할 때에는 나와 함께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으며 모든 사람이 나를 버렸느니라. 그러나 그것이 그들의 탓으로 돌아가지 않기를 바라노라』(딤후 4:16). 루터 역시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으로 인해 당시 황제였던 카를 5세 앞에서 재판을 받았다. 종교 재판소 판사인 에씨우스가 "이제 황제의 질문에 답변하시오. 당신은 당신이 인정한 모든 책들을 그대로 간수하고 있을 테요, 아니면 그중 어떤 것을 파기하고 순순히 굴복할 테요?"라고 묻자, 루터는 다음과 같이 담대하게 답변했다. "황제 폐하와 여러 각하들께서 명백한 답변을 원하신다는 것을 고려해 볼 때, 나는 이것을 어떤 의심이나 궤변을 늘어놓지 않고 매우 단호하게 고백하는 바입니다. 내가 만약 성경의 증거들로 납득되지 못한다면, 나의 양심은 이 성경 말씀에 단단히 묶여 완전히 사로잡혀 있으므로, 어떤 형태의 것도 철회하지 않을 것이며 그럴 가능성 또한 없을 것입니다. 양심을 거슬러 무슨 일을 한다는 것은 경건하지도 합법적이지도 않다는 점을 사료해 볼 때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에 관해 나의 입장은 단호하며, 더 이상 드릴 말이 없으므로 증언을 마치겠습니다. 오 하나님,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여섯째, 루터와 바울, 이 두 성도에게는 동일하게 "생명의 면류관"이 약속되어 있다. 성경은 생명의 면류관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한다. 『시험을 견뎌 내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는 그가 시련을 거친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라』(약 1:12). 『죽기까지 신실하라. 그러면 내가 네게 생명의 면류관을 주리라』(계 2:10). 루터는 병으로 죽고 바울은 참수형을 당했지만, 이 두 성도는 그들의 생명을 아끼지 않고 시험과 시련을 견뎌 내며 죽기까지 신실했으므로 분명 생명의 면류관을 받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을 보면, 루터의 부르심과 사역이 주님의 섭리하에 바울의 본을 따랐던 것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주님께서 이 두 사람을 부르셔서 이루신 믿음의 혁명과 상호 중첩되는 생애는 우리에게 중요한 가르침을 던져 주는 것이다. 배교한 교회들은 500년 전의 종교 개혁을 "습관적으로 기념"하기를 좋아하나, 루터와 바울의 두 생애를 겹쳐 놓으면 결국 그 근본은 바울의 생애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처럼, 너희는 나를 따르는 자가 되라.』(고전 11:1)라고 했다. 그들은 루터의 종교 개혁을 기념하기보다는 바울의 변화된 생애에 집중하는 것이 옳으며, 그것을 알기 위해 "성경"으로 가는 것이 옳은 것이다. "성경"에 기록된 바울의 믿음의 발자취를 따른다면 교회에 개혁을 일으킬 수 있다는 말이다. 성경을 버리고 사람을 따르는 자들은 반드시 이 점을 명심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부르신 사건과 그 뒤의 행적은 물론(행 9-28장), 그때 기록한 서신들을 "신약성경"의 일부로 사용하고 계신다. 루터보다 앞서서, 그보다 온전히 예수 그리스도를 따랐던 바울이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해 어떻게 살았는가를 "성경"을 통해서 깨닫고, "오직 성경으로!" 그 일을 믿고 실행함으로써 교회의 개혁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모든 것을 온전히 보존해 놓은 <한글킹제임스성경>을 외면한 채 오직 루터만을 운운하는 것은 죽은 루터만큼이나 죽은 것이다. 루터의 믿음은 죽지 않았으나 죽은 그 사람을 기념하는 그들의 믿음은 죽은 것이다. 종교 개혁을 이끌었던 이를 기념하는 것에는 아무 의미도 없다. 오히려 "성경"을 기록했고, 그 "성경"에 믿음과 사역이 기록되어 있으며, "나를 기념하라." 하지 않고 "나를 따르라."라고 했던 바울을 따르는 것이 성도의 가장 기본이 되는 자세이며, 이 바울을 따르는 것이 곧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박물관에 있는 것들에 생명이 없듯이, 개혁을 기념하는 일에도 생명이 없다. 믿음은 박물관에서 나오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써 나옴을 알라!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오며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니라』(롬 10:17).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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