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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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죄를“지고 가는”하나님의 어린양.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 아직도 미완성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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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16년 12월호>

세상 죄를"지고 가는"하나님의 어린양

하나님께서는 이 땅의 배교한 교회들과 거짓 목사들 및 가짜 교사들에게 저주와 심판을 경고하신다. 『그들에게 화 있으리라! 이는 그들이 카인의 길로 갔고 또 상을 위하여 발라암의 잘못을 따라 탐욕스럽게 달려갔으며, 코라의 모반으로 멸망하였음이라』(유 1:11). 그들은 살인자 "카인"처럼(요일 3:12) 소경 된 수많은 교인들을 구덩이에 빠지게 하고 자기들보다 두 배나 더 악한 지옥의 자식으로 만들어서 그들의 영적 생명을 앗아 갔고, "발라암"같이 불의의 삯을 사랑하여(벧후 2:15) 마음에 탐욕을 품은 채 지어 낸 말로 무지한 교인들에게서 온갖 이득을 취했으며, "코라"의 모반을 따라(민 16장) 하나님의 권위 있는 바른 성경을 대적하여 그 위에 서서 제멋대로 말씀들을 변개시키며 사사롭게 해석하고 가르침으로써 진리의 길이 비방을 받도록 만들었다. 누군가 잘 지적했듯이, 그들은 "물 없는 샘이고, 비 없는 구름과 바람이며, 잠자는 파수꾼이요, 짖지 못하는 개요, 말 못하는 대사이고, 침묵하는 나팔이며, 전할 메시지조차 없는 전달자요, 등불이 없는 등대이며, 종교적 허례허식과 죄의 온상이고, 하나님께는 모독이요, 연약한 성도들에게는 걸림돌이요, 불신자들에게는 기쁨이며, 성경을 대적하고 부정하는 자들"이다. 『이제 그들의 심판은 예로부터 지체하지 않으며 그들의 멸망은 졸지』 않는다(벧후 2:3).

이런 거짓 일꾼들은 더러운 이익 때문에 "가르쳐서는 안 될 것들"을 수년 내지 수십 년 동안 우려먹으면서 가르치고 있는데, 철부지 교인들은 그들의 속임수에 계속 농락당하고만 있다. 무지한 군상들이 그런 거짓말에 속는 이유는 간단하다.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했기 때문이다(살후 2:10-12). 말하자면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사랑하면서 열심히 읽고 공부하고 부지런히 상고하며 지키는 성도에게는 거짓 교사들에게 속거나 농락되는 일이 쉽게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심심하다 싶으면 한 번씩, 일간 신문에 전면 광고를 실어 『성경 세미나』를 한다고 떠들어 대는 박옥수 목사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라든지 "죄사함 ㆍ거듭남의 비밀"과 같은 아주 그럴듯한 말들을 수년간 써먹으면서 성경의 온전한 진리를 왜곡하여 무지한 죄인들을 오도하고 있다. 어떤 설교자나 교회들에게서 무슨 긍정적인 요소 몇 가지를 발견했다 하여, 그들이 성경적으로 올바르게 하고 있다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더러운 쓰레기통도 뒤지다 보면 가끔씩 괜찮은 물건 하나를 건지게 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로마카톨릭에 의해 불빛이 꺼져 버린 천 년간의 중세 암흑시대(A.D. 500-1500)가 바로 그런 형국이었고 박 목사도 마찬가지이다!

▷ 죄를 지고 가는 것 vs. 제거하는 것

지난 10월, 그가 모 일간지에 게재한 세미나 광고 제목 역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었다. 사실 이것만큼 진리의 말씀과 그리스도의 영원한 구속을 모독하는 말도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를 지고 간다"는 말 자체는 예수님의 구속 사역이 여전히 완성되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세상 죄를 지고 가셔서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하셨다는 말인가? 죄를 처리하셨다는 것인가 못하셨다는 것인가? 또한 언제까지 세상 죄를 지고 가셔야 하는 것인가? 그런 표현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한 구속이 아직 "미완성"이란 것 외에는 어떤 의미도 부여하지 못한다. 그들이 어떤 말로 변명하고 포장해도 그 자체의 의미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박 목사는 성경이 마치 결론 하나 제대로 맺지 못하는 책인 양 진리를 얼버무리고 있는데, 이것은 현대 작가들의 미숙한 글쓰기 실력과 다르지 않다. 이들은 선악 간에 어떤 결론도 맺지 못한다. 옳고 그름에 대한 지식이나 분별력이 결여되어 있어서 항상 미완성으로 글을 끝낸다. 베스트셀러 작가로서의 명성을 유지하고 독자들을 잃지 않으려면, 가타부타 확정된 결론으로 그들의 심기를 건드려서는 안 되기에, 확실한 종지부를 찍지 않고 흐지부지하게 글을 마무리하는 것이다. 이것은 선인지 악인지, 빛인지 어두움인지, 단 것인지 쓴 것인지 중간의 경계가 무너진 시대(사 5:20), 뜨겁지도 않고 차갑지도 않은 미지근한 마지막 배교한 교회 시대(계 3:15), 자신이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르면서도 하늘나라에 가기 위해 예수님을 믿으려 하지 않는 세대, 설교를 듣겠다는 것인지 안 듣겠다는 것인지, 하나님께 헌신하겠다는 것인지 말겠다는 것인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그야말로 흐리멍덩한 세대의 주된 특징이다. 이런 풍조에 휩쓸린 거짓 목사들은 교인들을 잃어버릴까 봐 노심초사하여 확실하고 분명한 성경적 진리 하나 제대로 제시하지 않는다. 정확히 말해 그들은 제시할 수도 없다. 이는 그들에게 바르게 보존된 성경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개역성경 및 개역개정판에 있는 그대로를 인용한답시고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떠벌리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자기들은 "성경대로" 설교했다고 안심했을지 모르지만 그것은 변개된 성경과 무지에서 비롯된 거짓 안심일 뿐이다. "무지"는 그런 거짓 일꾼들이 받을 형벌을 피하게 해 주지 못한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을 불길 가운데서 벌하시리니 이런 자들은 주의 임재와 그의 능력의 영광으로부터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게 될 것이라』(살후 1:8,9).

바로 이런 자들 때문에 『진리의 길이 비방을』 받고 있다(벧후 2:2). 그런 모독적인 말로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와(요 14:6) 하나님의 말씀이(요 17:17) 비방받게 하는 짓을 그만두라! 66권의 성경책, 각 권은 모두 제대로 된 확실한 결말을 맺고 있다. 박 목사처럼 흐릿하지가 않은 것이다. 특히 하나님의 어린양을 통한 "완전한" 구속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말씀한다. 『보라, 세상 죄를 제거하는[taketh away] 하나님의 어린양이라』(요 1:29). 구약에서 어떠한 동물의 희생제사로도 결코 제거할 수 없었던 죄들을 그리스도께서 그 피로 제거하신 것이다. 『이는 황소들과 염소들의 피로는 죄들을 제거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라』(히 10:4).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똑같은 제사를 자주 드리지만 이것으로써는 결코 죄들을 제거할 수 없으나 이분은[예수 그리스도] 한 번의 속죄제를 영원히 드린 후... 한 번의 제사로써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기 때문이라』(히 10:11-14). 즉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속은 지금도 지고 가는 "미완성"이 아니라 과거의 단번 속죄로 온전히 제거되고 "완성된"(히 10:14) 영원한 구속(히 9:12)인 것이다.

▷ 죄사함 vs. 구속

구약과 신약이라고 말할 때, "약"(約)은 "Testament"(언약)인데, 이것은 "피로 맺은 언약"을 의미한다. 구약은 "동물의 피로 맺어진 언약"으로서, 구약에 속한 성도들, 특히 율법하에 살았던 유대인들은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근거가 황소들과 염소들의 피에 있었다(히 9:13). 그러나 그 피의 효력에는 한계가 있었으니, 희생제물로 드려진 짐승의 피로는 죄를 용서함("죄사함," remission) 받을 수는 있었어도(히 9:22) 죄가 완전히 제거되거나 깨끗하게 되지는 못한 것이다. 출애굽기 34:7은 이런 한계를 잘 보여 준다. 『자비를 수천 대까지 간직하며 죄악과 허물과 죄를 용서하나 범법자가 결코 깨끗게 되지는 아니하리니 그 조상들의 죄악을 그 자손들과 그 자손들의 자손들 삼사 대까지 미치게 하느니라.』 즉 구약 성도들은 죄를 사함받기만 했을 뿐, "구속"(redemption)받지는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죽은 이후에 곧바로 하늘나라로 올라가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이를 때까지, 곧 새로운 중보자를 통한 "구속"이 이루어질 때까지 땅 아래의 "아브라함의 품," 곧 "지하 낙원"에서 잠시 머물러 있어야 했다(눅 16:22,23).

그런데 그 정해진 "때"가 차서(갈 4:4) 예수님께서 오셨고 갈보리에서 흘리신 자신의 피로 맺은 "새 언약"(마 26:28)을 통해 구속을 완성하셨다. 이에 대해 성경은 『이런 연유로 그는 새 언약의 중보자이시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죄한 것들을 구속하시려고 죽으심으로써』(히 9:15)라고 말씀한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단순히 "죄사함"을 위해서 죽으신 것이 아니라 "죄의 구속"을 위해 죽으신 것이다. "죄사함"은 구약에도 있었다. 만일 예수님께서 죄를 사하시기 위해 죽으셨다면, 그분의 죽음은 동물의 죽음과 별반 다를 게 없게 된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피를 통해 죗값을 온전히 지불하심으로써 죄들을 완전히 "제거하신" 것이다. 이로 인해 구약 성도들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을 때 함께 부활해서(마 27:52,53) 지하 낙원에서 빠져 나와 하늘들 위로 올라갈 수 있었다(엡 4:8-10). 그래서 이 교회 시대에는 성도들이 죽으면 지하 낙원으로 가지 않고 셋째 하늘의 낙원으로 가게 되는 것이다(고후 12:1-4). 이것은 예수님의 보혈을 통해 죄들이 제거된, 즉 구속의(엡 1:7, 골 1:14) 결과였다. 말하자면 예수님께서는 결코 죄를 "지고 가신" 게 아니란 말이다!

박 목사는 이런 기본적인 진리도 구분하지 못하기에 허구한 날 "죄사함의 비밀"이니 뭐니 하면서 떠드는 것이다. 예수님의 구속을 미완성으로 보이게 만드는 변개된 성경을 붙들고 있으니 그도 그럴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죄사함이 왜 "비밀"이 되어야 하는 것인가? 비밀은 본래 끝까지 알지 못하도록 감추어야 하는 것이라서 그것에 대해서는 알려고 물어서도 안 된다(판 13:18). 인류를 위한 예수님의 구속이 비밀이라면, 그것은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죄인들에게 "저주"를 선포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얼마나 그것을 비밀로 꼭꼭 감추고 싶었는지, 5분이면 충분히 알려 줄 수도 있는 복음을 그는 일주일씩이나 집회를 열며 전전긍긍한다. 지난 10월 광고에서는, 7일이 너무 심했다 싶었는지 4일로 줄여서 광고했다.

단순하고 분명한 복음을 어렵고 복잡하게 만드는 자들은 누구인가? 사탄의 간계에 속아 그리스도 안에 있는 단순함에서 떠나 부패해 버린 자들로서(고후 11:3), 혼란의 창시자인(고전 14:33) 사탄의 종들이며 기만하는 일꾼들이다(고후 11:13-15). 7일이든 4일이든, 그 집회에 참석한 사람이 그 기간이 끝나기도 전에 죽어 버리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또한 실내체육관이든 그 어디든 그들의 집회 장소가 아니고서는 복음을 전할 수도 들을 수도 없다는 말인가? 왜 그런 어리석은 짓을 하는 것인가? 그런 집회는 은사주의자들이 돈 벌기 위해 써먹는 수법이다. 자, 누군가가 속이고 있는 것이다. 구원받기 원하는가? 그렇다면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당신의 죗값을 치르시기(구속) 위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고백하면 된다(롬 10:9,10). 오랜 시간이 걸리지도 않는다. 지금 당장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구속을 믿으면 그만인 것이다!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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