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기자의 논단 분류

사랑의교회, 전혀 "바울적"이지 않은 과거와 미래

컨텐츠 정보

본문

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08년 11월호>

바울적 강박관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고하노니 너희는 나를 따르는 자들이 되라』(고전 4:16). 바울의 권고처럼 그리스도인들은 사도 바울을 따르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이것은 단순히 그의 "추종자"가 되라는 말이 아니다. 성도가 자신을 구속하신 주를 따라야 하듯이(살전 1:6, 엡 5:1,2), 사도 바울을 따라야 하는 이유는 그가 신실하게 주를 따르는 자였기 때문이다(고전 11:1). 그런 면에서 사도 바울을 따르는 것은, 곧 주님을 따르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위의 말씀의 권고를 따라야겠다는 결심과 태도가 바울과 같이 주를 따라 본 적도 없는 사람들에 의해 종종 왜곡되어 어떤 "강박관념"으로 나타나는 것을 보게 된다. 즉 그들은 바울처럼 진리를 위해 고난받은 적이 없고, 성경대로 믿고 실행한 적이 없음에도, 위의 권고를 따라야 한다는 어떤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나머지 바울과 같은 대열에 서고 싶은 막연한 동경이나 현재 그 대열에 서 있다는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피터 S. 럭크만 목사는 "바울적 강박관념"이란 용어를 사용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바울을 그와 전혀 닮지 않은 사람들과 한 그룹으로 만들어 버린다. 예를 들면... 이런 종류의 분류는 그 누군가가 바울과 같이 되고 싶거나 아니면 바울을 바울 아닌 그 어떤 것으로 만들어 버리려는 심한 강박관념이 있음을 보여 준다.』1) 이와 같은 "강박관념"으로 인해 배교한 신학자들과 교회사가들은 성경적인 믿음과 실행에 있어서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을 바울과 함께 묶어 놓음으로써, 마치 그들이 바울과 동일한 믿음의 노선에 서 있는 사람들인 양 속이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이렇다. "바울-어거스틴-칼빈-와필드," "바울-요한 바오로 2세-베네딕토 16세," "바울-베니 힌-조용기"
이처럼 오늘날 배교한 기독교계 안에는 그 믿음과 사역의 열매를 볼 때, 전혀 "바울적"이지 않으면서도 바울과 같은 부류에 속하기를 원하는 소위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교회들이 많이 있는 것이다.

지난 10월 5일, 잠실 실내체육관에서는 사랑의교회 창립 30주년 행사가 열렸었다. 이 날 본 교회의 과거 30년 역사를 돌아보고 앞으로 나아갈 방향과 비전을 제시한 자리에서, 옥한흠 목사와 오정현 목사는 단상에 함께 올라 동일한 성경 본문(빌 3:12-14)을 가지고 각기 과거와 미래의 관점으로 설교를 했다. 두 설교 모두 결론은 한 가지였는데, 바로 "사도 바울처럼" 하라는 것이었다. 우리는 여기서 "바울적 강박관념"에 따른 또 하나의 그룹을 만나게 된다. "바울-옥한흠-오정현"

제자훈련2) : 바울적이지 못한 과거 30년
사랑의교회 30년 역사를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제자훈련"이라 말할 수 있다. "나에게 소박한 소원이 있다면 교회마다 모든 평신도가 예수의 제자로 깨어나서..." 30년 전 개척예배 첫 설교에서 옥한흠 목사가 했던 말이다.
변개된 <개역성경>의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을 제자로 삼아...』(마 28:19)라는 말에서 비롯된 "제자훈련"은 그 기본 사상을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했던 권면(딤후 2:2)에 두고 있기 때문에, "제자훈련"이 마치 "바울적"인 사역은 아닌가라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전혀 "바울적"이지 않은 몇 가지 이유들이 있다.
첫째, 바울은 단 한 번도 디모데를 향해 "제자"라고 부른 적이 없다. 항상 그리스도 안에서 복음으로 낳은 "아들"이라고 불렀을 뿐이다(딤전 1:2,18, 딤후 1:2; 2:1, 고전 4:17, 빌 2:22). 디도나 빌레몬을 향해서도 동일한 입장을 취했다(딛 1:4, 몬 1:10). 심지어 육신적인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대할 때도 "스승과 제자의 관계"로서가 아니라, 아버지가 아들을 훈계하듯이 책망했던 것을 보게 된다(고전 4:15,16).
둘째, "제자훈련"은 근본적으로 "주의 제자"가 아닌 "특정 집단(선교단체 혹은 교회)의 제자"를 만들어낸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제자들 중 어느 누구도 "특정 개인이나 집단의 제자"로 불린 적이 없었다. 그들은 모두 "주의 제자들"이었다. 바울이 "이방인들의 선생"(딤전 2:7)이긴 했지만, 성경 어디에도 그 스스로 "나의 제자"란 표현을 쓴 적이 없다. 바울은 복음과 진리의 말씀을 전파하고 가르쳤을 뿐, 소위 "제자훈련"을 한 적은 없다.
셋째, "제자훈련"은 성공적인 목회를 위한 도구에 불과하지만, 바울은 단 한 번도 성공적인 목회에 관심을 둔 적이 없다. 다만 신실한 사람으로 발견되길 원했다(고전 4:2).
넷째, "제자훈련"은 "기초적인 신앙생활"(전도하는 법, Q.T., 기도하는 법, 성경 읽는 법)에만 국한되어 있어 성도들이 반드시 구비하고 있어야 할 진리의 지식이 결여되어 있다. 그러나 바울은 진리의 지식에 이를 것을 강조했는데(딤전 2:4, 엡 4:13,14), 그래야만 장성한 분량에 이를 수 있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되어 모든 선한 일에 철저히 구비될 수 있기 때문이다(딤후 3:16,17).
다섯째, "제자훈련"을 통해서는 변개된 성경, 비성경적인 교리, 비성경적인 믿음과 실행이 전수되었지만, 바울은 섭리로 보존된 바른 성경, 성경적인 교리, 성경적인 믿음과 실행을 전수했다. 『그리고 네가 많은 증인들 가운데서 내게 들은 것들을 신실한 사람들에게 맡기라.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딤후 2:2). 바울이 디모데에게 가르친 것과 사랑의교회가 "제자훈련"을 통해 가르친 것 사이에는 엄청난 간격이 있다. 이것을 결코 "바울적 강박관념"으로 메울 수는 없는 일이다.
결국 지난 30년간 사랑의교회가 "제자훈련" 프로그램을 통해 걸어왔던 그 길은 결코 바울이 달려왔던 그 길이 아니다.

HEART : 바울적이지 못한 미래의 비전
과거로부터 결코 교훈을 얻지 못한 사랑의교회는 미래에 대한 비전 제시에 있어서도 "바울적"이지 못했다. 이것이 바로 소위 "제자훈련"의 열매인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의 "심장"과 목자의 "심정"을 담았다는 의미로서 (각 문구의 앞 철자를 따서) 5대 비전 "HEART"를 제시했다. 이 그럴듯해 보이는 비전은 한마디로 말해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람들이 되자!"는 것이다. 그러나 이 바벨탑 사건만큼이나 낡은 구호는 해 아래 새 것은 없다는 진리를 다시 한 번 각인시켜 주었을 뿐이다. 특히 마지막 다섯 번째로 제시된 비전에 주목하라. 이 항목은 오정현 목사의 목회관이 담겨 있을 만큼 사랑의교회가 걸어갈 미래의 모습을 가늠케 해준다.
"사회를 변혁하는 정감공동체(Transforming Society & Culture) - 세상을 향하여 보냄받은 소명자이자 21세기 문화를 포용하고 변혁시킬 수 있는 전방위적인 교회로서, 정직과 감사가 넘치는 사회와 고품격 크리스천 문화를 선도하고 하나님 나라의 법과 질서를 회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생명의 공동체가 될 것을 다짐한다." 이 가증하고 비성경적인 인본주의적이고 후천년주의적인 발상이야말로 그들이 얼마나 바울과 동떨어진 사람들인지 알게 해준다.
(1) 세상을 향하여 보냄받은 소명자 - 바울은 세상을 변혁시키기 위해 보냄받은 적이 없다. 멸망해 가는 세상을 향해 복음과 진리를 전하기 위해 보냄받았을 뿐이다.
(2) 21세기 문화를 포용하고 변혁시킬 수 있는 전방위적인 교회 - 바울은 사탄이 관장하고 있는 세상 문화를 포용한 적이 없다. 그것을 변혁시키기 위해 가능한 어떤 방법들을 고려한 적도 없다.
(3) 정직과 감사가 넘치는 사회와 고품격 크리스천 문화를 선도함 - 바울은 어떠한 형태로든지 사회를 선도해 본 적이 없다. 오히려 복음과 진리를 통해서 소란케 했을 뿐이다(행 16:20; 17:6). "크리스천 문화"란 것도 배교한 기독교계의 산물로서 일고의 가치가 없는 것이다. 이는 세상 문화가 기독교란 이름으로 각색되어 교회 안으로 유입된 콘스탄틴식 문화이기 때문이다.
(4) 하나님 나라의 법과 질서를 회복함 -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실 때에야 비로소 모든 법과 질서는 회복된다. 자신이 할 수도 없고, 해서는 안 되는 그 일을 위해 바울은 시간을 써 본 적이 없다. 바울의 유일한 소망은 인간의 궁극적인 모든 문제들을 해결하실 수 있는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것이었다(딛 2:13, 딤후 4:8).
(5)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생명의 공동체 - 위의 4가지 항목들에 일생을 바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도 아니고 죽은 교회가 될 뿐이다.
이 "HEART"에는 결코 예수님의 마음도 바울의 마음도 담겨 있지 않다. 사랑의교회는 과거와 마찬가지로 미래에도 바울이 달려갔던 길을 가지 못할 것이다.


"바울적 강박관념"은 사랑의교회로 하여금 과거를 진단하고 미래를 설계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지만, 결국은 "강박관념" 그 자체로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진정 바울을 따르고 그와 같은 대열에 서고자 한다면, 이제라도 위와 같은 비성경적인 실행들을 버리고 바울이 성경에서 제시한 성경적인 믿음과 실행을 따라 나서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을 따른다면 사도 바울의 발자취를 따를 수 있을 것이다. BB

----------------------------------------------------------------------------------------
1) 피터 S. 럭크만, 『신약교회사』 (서울: 말씀보존학회, 1997), p.24.
2) 제자훈련에 대해 본지 153호 『한국교회의 위기, "제자훈련"으로 극복할 수 있는가?』(pp.9-15)를 참조하시오.

기자의 논단 203 / 5 페이지
RSS
번호
제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