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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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가 선동이 되지 않으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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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3년 03월호>

예수님의 지상 사역 당시 종교지도자들이 주님을 공격하던 주된 방법은 무리를 선동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선임 제사장들이 무리를 선동하여, 오히려 그가 바라바를 그들에게 놓아주어야 한다고 하더라』(막 15:11). 그들은 스테판을 박해할 때도(행 6:12), 바울을 대적할 때도(행 13:45) 무리를 선동하여 진리를 대적했다(행 14:2). 그들은 무리를 선동했을 뿐만 아니라, 정작 예수님의 성경적 가르침을 가리켜서 백성을 선동하는 것이라고 몰아갔고(눅 23:5) 사도 바울에 대해서도 사람들을 선동하는 자라고 몰아갔다(행 18:13). 인류의 첫 조상을 미혹한 마귀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직전까지 선동하는 자들을 일으켜 세워 자신의 계략을 지속적으로 이뤄 갈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마귀 자신이 선동을 통해 통치할 것이다(단 11:2,10). 설교자는 이러한 마귀적인 선동을 강단에서 경고해야 할 사람이므로 그 자신의 설교가 선동이 되지 않도록 늘 주의해야만 한다.

설교가 선동이 되지 않으려면 “설교”가 성경적이어야 한다. 설교가 선동이 되는 이유는 설교자가 성경 본문에서 벗어난 설교를 하기 때문이다. 한국 교회의 잘못된 신학과 교리는 변개된 성경에서 비롯되었다. 그들은 교단 신학을 옹호하기 위해 바른 성경에서 단어나 절을 삭제시키거나 첨가시키고, 다른 단어로 대체함으로써 말씀의 능력을 없애 버렸다. 마귀는 설교자들이 그 잘못된 성경을 채택하게 하여 그들을 강단의 선동자들로 만들었다. 변개된 성경을 사용하는 그들은 결코 올바른 교리로 설교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잘못된 교리는 설교를 선동이 되게 한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관련된 성경적 교리인 전천년주의 종말론과 이스라엘의 회복을 중심으로 다루는 세대주의 신학을 배격하면 아무리 애써 준비한 설교라 해도 선동이 되고 만다. 이스라엘과 교회를 구분하지 못하면 이스라엘에게 주시는 율법의 말씀을 지켜서 구원받으려다가 그 말씀으로 저주를 받게 된다(갈 3:10). 율법은 복음이 아니다. 또한 사도 베드로는 자신들의 메시아를 십자가에 처형한 이스라엘을 향해서 그들의 죄들이 사함받은 것으로 인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으라고 했는데(행 2:38), 이 시대에 그 말씀대로 하려 하면 지옥에 간다. 그는 성령을 받으려면 침례를 받으라고 했지만 지금 그런 식으로 성령을 받고자 하면 악령이 들어가게 되고 그런 사람은 지옥의 형벌을 피할 수 없다. 이스라엘에게 주시는 말씀을 아무렇게나 받아들이면 그렇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는 방법은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라는 말씀에 나와 있다. 이것이 세대주의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성경을 올바로 나누셔서 율법과 선지서들이 침례인 요한까지라고 말씀하셨다(눅 16:16). 성경은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의 경륜과 그 다음 경륜을 구별하고(롬 5:14), 율법에서 난 의와 믿음에서 난 의를 구별한다(롬 10:4-6). 이를 올바로 나누어 교리적으로 적용하지 않을 때 설교가 아닌 선동이 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성경은 기록된 모든 것을 믿는 책이 아니라 올바로 나누어 믿어야 할 책이다. 성경을 보면 구원에 행위가 포함된 시기가 있는데,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과, 대환란 때의 이스라엘, 대환란 때의 이방인, 그리고 천년왕국 때가 그렇다. 또한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관련하여 이스라엘이 반드시 미래에 회복될 것이라고 자체적으로 일관되게 언급한다(롬 11:1,2,25-29, 히 8:8-12). 이를 무시하고 교단 교리를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끝내셨고 교회가 참 이스라엘이다.”라고 주장하며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약속들을 영적으로 이방인들에게 옮겨와 적용하게 된다. 그 결과 앞으로 문자적으로 성취될 성경의 예언들을 과거에 이루어진 역사 속에 묻어 버림으로써 살아 있는 예언의 말씀을 죽은 말씀이 되게 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약속들을 영적으로 적용하는 설교자는 윤리적, 심리적으로 도움을 주는 내용은 전달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예언과 관련된 참된 설교는 할 수 없다. 성경의 문자적인 약속들을 영적으로 적용하여 가르치는 것은 설교가 아니라 지독한 선동일 뿐이다.

설교자는 성경에서 이스라엘의 위치를 올바로 잡아야 한다. 그 위치를 잘못 잡으면 환란 전에 있게 될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휴거”(살전 4:17)와, 대환란 끝에 있을 이스라엘과 관련된 “환란 성도의 휴거”(마 24:31)를 구분하지 못하여 교회가 환란을 통과한다는 치명적인 이단 교리를 설교하게 된다. 이스라엘의 올바른 경륜적 위치를 배우지 못한 설교자는 대환란 기간에 끝까지 견뎌서 구원받는다는 구절(마 24:13)을 가져와 교회 시대에 끝까지 견뎌야 구원받는다고 설교하는가 하면, 천년왕국 때 지켜야 할 “산상 설교”(마 5-7장)대로 지켜서 그 행위로 구원받아야 한다고 설교한다. 이와 같은 설교자는 성경에 두 개의 교리가 중첩되어 기록된 전환기적 책들이 있음도 알지 못한다. 즉 구약에서 신약으로 옮겨가는 책인 “마태복음”과, 이스라엘에게 약속된 지상 왕국에서(유대인의 경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에게 약속된 하나님의 나라로(교회의 경륜) 옮겨가는 “사도행전”과, 신약 교회 시대에서 대환란으로 옮겨가는 “히브리서”가 있음을 알지 못한다. 신약성경에는 그러한 과도기적인 책들 외에도 야고보서처럼 십자가의 복음을 전혀 언급하지 않고 율법의 행위만을 강조하는 책도 있어서 이 점을 모르는 설교자들이 그러한 책들에서 행위 구원의 구절들을 가져와 강단을 율법의 행위를 선동하는 자리로 만들고 있는데, 당신이 출석하는 교회의 강단은 어떠한가?

설교가 선동이 되지 않으려면 “설교자”가 성경적이어야 한다. 한 초대형 은사주의 교회의 목사는 외국에 나가 설교하고 다니면서 여자들과 놀아났다. 그의 설교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열광을 했든지 그것은 설교가 아닌 선동이었다. 마귀의 목표는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인데 한꺼번에 많은 사람들을 멸망시키는 데는 설교를 위장한 선동만큼 경제적인 방법이 없다. 선동을 통하여 집단 최면에 빠지게 하든지 집단적으로 마귀들리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설교자가 회중에게 자신의 믿음을 상호 신뢰의 토대 위에서 입증해야 한다. 설교의 동기와 목적이 주 예수 그리스도만을 높여 드리고자 하는 데 있다는 점이 회중 앞에 입증될 때(히 13:7) 회중은 그의 설교를 마음으로 받아들인다. 설교자가 올바른 본문에 입각한 올바른 교리로 설교한다 해도 얼마든지 자신을 높이고, 또 열정으로 가장한 자신의 숨겨진 욕망을 실현하려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례로 빌리 그래함은 자신이 유명해지자 세상에 자기 이름을 더 많이 내고 세를 더 확장시키고자 로마카톨릭과 손을 잡았다. 그는 자신이 전하는 복음과 교황 바오로 2세가 전하는 복음이 동일하다고 공표했는데, 그의 선동에 놀아난 수많은 죄인들이 로마카톨릭의 과자 부스러기와 발효된 포도주를 마시고서 구원받은 줄로 착각했다가 지옥에 가고 말았다. 심지어 <킹제임스성경>을 옹호한다고 하는 자들과 흠정역을 운운하는 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한글킹제임스성경>을 가지고 설교한다는 자들조차도 자신의 이름과 교세를 확장하기 위해 성경을 이용하기도 한다. 그 동기가 바로잡히지 않는 한, 그들의 설교는 결코 진리가 될 수 없고, 다만 선동에 지나지 않게 된다.

성경에 따르면 설교자는 성경을 잘 가르쳐야 한다. 또한 그는 비난받을 것이 없어야 하고, 절제하고 신중하며 예의 바라야 하고, 외부 사람들로부터도 좋은 평판을 받아야 한다(딤전 3:2,7). 그래야만 그의 설교가 듣는 사람들의 마음에 효과적으로 역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설교는 성도들의 “마음”을 뚫고 들어가 그 마음 안에서 역사한다. 설교를 통해 “마음”에 찔림을 받아 회개하기도 하고(행 2:37) “마음”에 더디 믿던 자들의 “마음”이 뜨거워지기도 한다(눅 24:32). 설교를 통해 드러난 죄를 뉘우치고,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진리를 더 실행하고자 하는 열정으로 불타게 된다. 설교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여 설교자를 향해 분노하며 대적하게 하기도 하는데(행 7:54), 이 모든 일들은 설교자가 성경적인 설교를 할 때만 일어날 수 있다.

교회가 휴거되기 직전인 이 마지막 날들은 설교와 선동을 분별하는 데 있어서 매우 어려운 때이다(딤후 3:1). 많은 거짓 설교자들이 일어나 선동을 하자 진리를 분별하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미혹되어 진리의 설교는 배제한 채 자기가 듣고 싶은 것만을 추구하고 있다(딤후 4:3,4). 이러한 마지막 때에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어야만 무엇이 설교이고 무엇이 선동인지 분별할 수 있다. 바로 그래야만 당신 안에 형성된 믿음을 지킬 수 있고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온전히 성장할 수 있다.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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