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신학논단 분류

자발적 가난의 역설

컨텐츠 정보

본문

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1년 03월호>

세상 사람들에게 가난은 쇠사슬 없는 족쇄요, 간수 없는 감옥이다. 어떤 이들에게는 가난이 종신형과 같은 구속이다. 가난에빠져들면 거기서 헤어 나오려 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고, 가난으로부터의 해방은 인류의 본성적 숙원이다.


“가난과의 전쟁!” 가난은 인류 전체가 전쟁을 선포할 정도로 막강한 적이다. 가난은 인류의 핵심 모토 안에 자리할 만큼 중요한 문제이지만, 지금까지 그 중대한 문제를 해결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가난의 위세 앞에 전쟁이라는 허세만 부릴 뿐, 그 전장에서 승세를 거머쥔 사람은 없었다. 인류는 가난 앞에 무력하다. 가난을 벗어 버리기 위해 애를 쓴 인생들이 많았지만, 그 모진 굴레는 절대로 벗지 못할 철갑이라는 사실만 드러났다. 그들에게 가난은 산 채로 들어가 누워 있어야 하는 관이었고, 죽는 순간 비로소 자유로울 수 있었다. “죽음”이 곧 가난으로부터의 해방이었던 셈이다. 심지어 가난은 속절없는 운명처럼 다가와 때 이른 죽음을 불러오기도 한다. 가난을 벗기 위해 자살을 택한 것이다. 일가족의 동반 자살 사건이 심심찮게 발생하는 것은 대부분 생계 때문이다. 막막한 앞날을 맞설 용기가 없기에 좌절해 버린 것이다. 가난의 궁극은 옷 한 벌만 걸친 걸인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가난을 두려워한다. 자신이 “먹고 싶은 것”을 먹을 수 없고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없는 가난을 넘어 그날그날의 양식을 걱정해야 하는 극빈층이 되는 것을 두려워한다. 가난은 질병, 외로움, 뒤틀린 성격, 씻지 않은 몸, 주거지의 역한 냄새를 끌고 다닌다. 가난은 태생이 흙수저이기에 대물림될 수도 있지만, 난데없는 실직 때문에 날벼락처럼 닥칠 수도 있다. 특히 가장의 죽음은 갑작스러운 가난을 불러온다. 채무 문제가 얽혀 있으면 망자의 가족은 죽음으로 내몰릴 수도 있다. 그나마 인정이 남아 있던 시절에는 가까운 친척이 보듬어 주기도 했지만, 가난이 연약한 인간이 감당하기에 몹시 힘겨운 상대인 것만큼은 변함이 없다.


성경에는 가장의 죽음으로 가난의 수렁에 빠진 인물들이 등장한다. 바로 나오미와 두 며느리 룻과 오르파이다. 엘리멜렉의 아내인 나오미는 남편과 두 아들 말론과 킬리온이 모압 땅에서 죽자 며느리 룻을 데리고 베들레헴으로 돌아왔는데, 고향에서 그들은 모진 가난에 직면해야 했다. 『나오미가 그들에게 말하기를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마라라 부르라. 이는 전능하신 분께서 나를 심히 모질게 대하셨음이니라. 내가 풍족하게 나갔으나 주께서 나를 빈손으로 다시 집에 돌아오게 하셨도다. 주께서 나를 반대하여 증언하셨고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고통을 주셨는데 어찌하여 너희가 나를 나오미라 부르느냐?” 하더라』(룻 1:20,21). 나오미는 고향 사람들에게 자신을 더 이상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마라”라 부르라고 했다. 나오미란 이름은 “즐거운”이란 뜻이지만 마라라는 이름은 “쓴”이란 의미를 지닌다. 남편과 두 아들의 죽음으로 찾아온 가난은 나오미에게서 인생의 즐거움을 앗아갔고 쓴맛을 선물했다. 어디 나오미뿐이겠는가? 가난은 생각만 해도 쓴 것이다. 나오미는 하루의 양식을 며느리 룻이 남의 밭에서 주워 오는 보리 이삭에 의지해야 했다. 사실상 그녀는 극빈층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극빈층은 구약에서 하나님의 보호를 받았다. 고아, 과부, 타국인은 약속의 땅에서 대표적으로 가난한 자들이었는데, 그들을 각별하게 보살피시는(신 10:18; 14:29; 24:17)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생계와 관련하여 특별한 규정을 마련하셨다. 『너희가 너희의 땅에서 수확을 거둘 때에 너는 네 밭의 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며 네 수확의 이삭들까지 줍지도 말지니라. 너는 네 포도원에 떨어진 것들을 줍지도 말며, 네 포도원에 떨어진 포도도 다 모으지 말고 가난한 자와 타국인을 위하여 남겨 둘지니라. 나는 주 너희 하나님이라』(레 19:9,10). 룻이 보아스의 밭에 떨어진 보리 이삭을 주운 것은 보아스의 인간적인 호의 때문이라기보다는 율법의 규정에 따른 것이었다. 다만 보아스는 룻의 효심에 감동하여 청년들에게 “일부러 한 줌씩 떨어뜨리도록 하는 호의”를 베풀었던 것이다(룻 2:11-16).
가난한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배려와 보살핌은 레위기 25장의 “환희의 해”의 규정에서도 명백히 드러난다. 광야의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오십 번째 되는 해를 환희의 해라 불렀는데, 그해에는 모든 가난한 사람이 자기 소유와 가족에게로 돌아갈 수 있었다(10절). 만일 어떤 사람이 가난하게 되어 자기 소유의 얼마를 누군가에게 팔았는데 그것을 대신 사 줄 형제도 없고 자신이 다시 살 능력도 없다면, 『그 판 땅은 그것을 산 사람의 손에 환희의 해까지 있다가 환희의 해에 돌아갈 것이요 그가 자기 소유로 돌아갈 것이니라.』(28절)라는 규정대로 그는 환희의 해에 그 팔았던 소유를 되가질 수 있었다. 이외에도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자들”을 환희의 해와 관련하여 여러 가지 면에서 돌보셨다. 첫째, 어떤 사람의 형제가 가난하게 되고 쇠약한데 그 사람과 함께 있다면 그를 구제하여 함께 살게 하고, 고리를 받으려고 돈을 빌려주거나 이자를 받으려고 양식을 빌려주지 말라고 하셨다(35-37절). 둘째, 어떤 사람의 곁에 거하는 그의 형제가 가난하게 되어 그에게 몸이 팔린다면 그를 종으로서 억지로 부리지 말고 노예가 아닌 품꾼이나 체류하는 자처럼 함께 있게 하여 환희의 해까지 섬기게 하다가 그와 그의 자녀들을 가족과 조상들의 소유로 돌아가게 하셨다(39-42절). 셋째, 어떤 유대인이 가난하게 되어 약속의 땅에서 부유해진 타국인에게 팔리면, 그의 형제나 삼촌, 사촌 혹은 그의 가족 중에서 가까운 친족이 그를 다시 살 수 있으며, 만일 자신에게 능력이 있다면 자신이 팔린 해로부터 환희의 해까지를 그 산 사람과 계산하여 몸값을 지불하고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환희의 해까지 그 기간에 다시 살 수 없다면 그와 그의 자녀들은 환희의 해에 나갈 수 있었다(47-54절).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자들에 대한 보살핌이 남다르셨지만, 부자들에게는 그다지 많은 연민을 보여 주시지 않았다. 우리는 그 점을 다음의 말씀에서 엿볼 수 있다. 『어떤 사람이 성벽 있는 성읍에 있는 집을 팔았으면, 그것을 판 후 만 일 년 안에 다시 살 수 있으니, 만 일 년 안에 그는 그것을 다시 살 수 있느니라. 만일 만 일 년의 기간 안에 다시 사지 못하면 성벽 있는 그 성읍에 있는 그 집은 그것을 산 자에게 그의 후대에 걸쳐 영원히 확정될 것이며 환희의 해에도 돌려보내지 아니할 것이니라. 그러나 성벽을 두르지 아니한 마을들의 집들은 그 나라의 들로 간주되어 그들은 다시 살 수도 있으며 환희의 해에 돌려보낼 것이니라』(29-31절). 이 말씀들을 자세히 보면 “성벽 있는 성읍에 있는 집”과 “성벽을 두르지 아니한 마을들의 집들”이 대조를 이룬다. 주님께서는 이 두 종류의 집과 관련하여 환희의 해 규정을 달리하셨는데, 우선 “성벽 있는 성읍에 있는 집”은 그것을 판 후 만 일 년 안에 다시 살 수 있지만, 만 일 년의 기간 안에 되사지 못하면 그 집은 그것을 산 자의 것으로 영원히 확정되어 환희의 해에도 돌려보내지 않게 하셨다. 특히 팔았던 그 집을 되살 수 있는 기간도 아주 짧게 두셨다(1년). 반면에 “성벽을 두르지 아니한 마을들의 집들”은 “그 나라의 들(땅)로 간주되어” 환희의 해 이전에라도 되살 수 있었고, 환희의 해에는 이유를 불문하고 반드시 돌려보내게 하셨다. 성벽을 두르지 아니한 마을들의 집들은 그것들이 위치한 들과 동일하게 취급하심으로써, 들은 각 지파에 속한 땅이기에 영원히 팔지 못하듯이 그곳의 집들도 영원히 팔지 못하게 하시어 반드시 원래 소유주에게 돌아가게 하신 것이다.


부연하면, 성벽 있는 성읍에 있는 집은 일종의 고급 주택이었으며 어느 정도 부를 소유한 백성들이 거주했다. 성벽 밖은 들짐승이나 외적의 공격에 항시 노출되어 있었는데 그런 곳은 가난한 백성들이 거주했다. 중세 시대에도 성벽 안에는 사회적으로 중요한 인물들만 거주하고, 그 외 농민들이나 농노들은 성벽 밖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다가 전쟁과 같은 위기의 때에 성안으로 피해 들어오곤 했으니 이런 점에서 상통하는 면이 있다. “성”과 “부”의 상관성은 “부르주아”에서도 찾을 수 있다. 프랑스어 “부르주아지”(bourgeoisie)는 원래 “중산층”이란 뜻인데, 이들이 프랑스 혁명 이후 부를 축적한 계급이 되면서 오늘날에는 “자본가 계급”을 지칭하는 명칭이 되었다. 부르주아지는 본래 프랑스어로 “성”(城)을 의미하는 “부르크”(bourg)에서 유래한 단어로, 부를 축적한 계급은 성안에 살고 그렇지 못한 계급은 성 밖에 살았기 때문에 생긴 명칭이라고 전해진다. 한마디로 성벽이 있는 성읍의 집은 고대에서나 중세에나 부의 상징이었던 것이다.


구약의 “환희의 해”는 “가난한 백성들”을 그들의 소유와 땅으로 돌려보내는 목적이 있었기 때문에 가난한 자들에게는 자상한 배려가 있었어도 부자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가난해서 몸을 판 자, 가난해서 집을 판 자, 가난해서 땅을 판 자는 환희의 해에 반드시 자신의 가족과 집과 땅으로 복귀하게 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부자들에 대해 부정적이신 이유는, 부자들이 자신의 부를 의지하여 부에 집착하기가 쉽고 자신에게 하나님의 자비가 덜 필요한 것처럼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부자들의 그런 성향을 간파하시고 우리에게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눅 12:15-21)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쉽다는(마 19:24) 말씀을 해 주셨다. 대환란 기간에는 짐승의 표를 받지 않고서는 부자가 될 수 없기에 그 기간에 있을 부자들을 향해 다음과 같이 저주하셨다. 『이제 오라, 너희 부자들이여, 너희에게 닥칠 재난으로 인하여 울고 통곡하라. 너희의 재물은 썩었고, 너희의 의복은 좀먹었으며 너희의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이것들의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어 불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마지막 날들을 위한 재물을 쌓았도다... 너희는 땅에서 쾌락 가운데 살며 방탕하였도다. 너희가 살육의 날처럼 너희 마음을 살찌게 하였도다』(약 5:1-3,5).



세상 사람들이 부자가 되려고 하는 것은 가난이 쓰고 고통스러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난을 자발적으로 택하는 사람들도 있다. <자발적 가난>의 저자 에른스트 슈마허는 “모든 인간에게는 삶에서 자연스럽게 얻을 수 있는 풍요가 있지만, 인간이 재산 증가를 위해 늘어선 강요된 가치 시스템 속에서 안간힘을 쓰고, 삶의 근원적인 문제들을 해결하는 수단으로 경제적 신분 상승의 좁은 사다리를 오르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것은 인생의 현실적인 대안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런 “자발적인 가난주의”는 물질을 더 소유하려는 집착에서 벗어나 꼭 필요한 것만 지니고 살겠다는 자들의 중심 철학이다. 부의 축적을 최상의 사회적 가치관으로 둘 때 세상은 무한한 생존 경쟁의 장이 되므로, 그렇게 탐욕스러운 이기주의를 몰아내고 가난한 삶에서 풍요로움을 발견하자는 것이다. 그 책에 따르면, 레프 톨스토이는 “가난이 행복의 원천”이라고 했고, 헨리 소로는 “진정한 부를 누릴 수 있는 가난을 내게 다오.”라고 말했다. 케이스 머리는 “진정한 풍요는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다.”라고 말했으며, 안드레 밴던브뤼크는 “가지려고 애쓸수록 존재는 더욱 왜소해진다.”라고 했다. 물론 이들이 절대적인 빈곤을 추구하는 것은 아니었고, 다만 “부와 극심한 가난” 사이 그 어딘가에 위치한, 곧 탐욕을 몰아낸 가난을 추구하려고 했다. 영속하지 않는 것에 집착하지 말고 의도적인 자기 규제를 통해 “적음이 곧 많음”이라는 원칙 속에서 욕심을 버리고 살아 보자는 것이다. 어찌 보면 이 세상의 현자들은 부와 건강을 복음의 핵심 요소로 삼고 있는 순복음 은사주의자들보다 나은 사람들이다. 6 ․ 25 전쟁 이후 찌들게 가난했던 이 나라 사람들에게 “예수 믿으면 복 받는다.”라는 감언이설로 다가가, 그 말에 현혹된 가난한 자들을 교회로 홍수처럼 밀려들게 함으로써 엄청난 교세를 확보한 그들은, 여전히 그 비성경적인 교리를 버리지 않고 예수님을 마귀가 통치하는 세상에서 번영을 이뤄 주시는 분으로 오도하고 있다.


그들이 알아야 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스스로 가난을 택하셨다는 사실이다. 그분의 가난도 일종의 “자발적 가난”이라 할 수 있지만, 슈마허나 톨스토이, 소로 같은 이들이 추구했던 가난과는 전혀 다르다. 『너희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알거니와 부요하신 분이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신 것은 그의 가난함으로 인하여 너희를 부요하게 되도록 하심이라』(고후 8:9). 예수님께서 누리셨던 부요함은 하나님으로서의 영광이었다. 하지만 그 영예를 버리시고 종의 형체를 입으신 가난을 택하신 것이다(빌 2:6-8). 주님의 가난은 하나님께서 육신으로 나타나신 성육신을 뜻하는데, 주님의 성육신은 머리 누일 곳조차 없는 실제적인 가난으로 이어졌고, 멸시와 천대 속에서 십자가의 죽음에까지 이르렀다. 그 목적은 우리를 부요하게 하시려는 데 있었으니, 우리를 주님의 부요하심의 수준까지 끌어올리시려는 것이었다! 『그의 가난함으로 인하여 너희를 부요하게 되도록 하심이라.』 우리는 “현 세상”에서 기도로 하나님의 부요하심을 맛볼 수 있고, “오는 세상”에서는 천년왕국에서의 통치권과 부를 누릴 수 있으며, 영원 세계에서는 새 예루살렘의 황금 길에서 한없는 부를 향유하게 될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만족하라고(딤전 6:8) 하시면서 영적인 자발적 가난을 요구하시는 것은 육신적으로 헐벗고 가난해지라는 뜻이 아니라, 생활의 모든 필요를 주님께로부터 얻고 그분 한 분만으로 만족하라는 뜻이다. 성도의 만족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온다(고후 3:5). 그래서 우리는 먹을 것과 입을 것만 있어도 가난하지 않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먹을 것과 입을 것 그 이상을 주시는 분이며, 하나님의 부요하심이 우리와 영원히 함께하기 때문이다. BB

『그런데, 보라, 한 율법사가 일어서서, 주를 시험하여 말씀드리기를 “선생님, 내가 영생을 상속받으려면 어떻게 하여야 하리이까?”라고 하니... 그가 대답하여 말씀드리기를 “‘너는 네 마음을 다하고, 혼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또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였나이다.”라고 하니』(눅 10:25,27).

신학논단 139 / 3 페이지
RSS
번호
제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