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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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영원한 기초이신 예수 그리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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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0년 11월호>

지금까지 세상에 존재했던 사람 중에 시내 산에서 주어진 율법을 완벽하게 지킨 사람은 단 “한 사람,”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딤전 2:5)뿐이셨다. 주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 중에 누가 나를 죄에 대해서 힐책하겠느냐?』(요 8:46)라고 물으셨는데, 이것은 주님께서 지상 생애 동안 죄를 단 한 번도 짓지 않으셨고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키셨음을 보여 준다. 다시 말해 구약의 율법 아래 태어나(갈 4:4) 사시면서, 율법이 요구하는 “죄에 대한 속죄제”(레 4:1-3)가 전혀 필요치 않았던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셨던 것이다.


구약의 대제사장은 일 년에 한 번 “대속죄일”에 둘째 성막인 지성소에 들어가야 했는데, 그때 그는 피가 없이는 들어가지 않았으며, 또한 그 피는 “제사장 자신”과 백성들의 잘못들을 위해 드려진 것이었다(히 9:7). 반면 신약의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구약의 성막과 달리 손으로 짓지 아니한 더 크고 더 온전한 성막을 통하여, 그것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주님 자신의 피로 셋째 하늘 성소에(계 15:5) 한 번 들어가셔서 우리를 위하여 영원한 구속을 이루셨는데(히 9:11,12), 이 일은 제사장이신 그분의 죄가 아닌 “많은 사람의 죄들”을 담당하시려고 한 번 드려지신 것이었다(히 9:28). 주님께서는 죄와 완전히 무관한(고후 5:21) 대제사장이시며, 그분께서 자신의 몸으로 드린 속죄제는(히 10:10,12) 주님 자신이 아닌 우리를 위한 속죄제였던 것이다. 『그러한 대제사장은 우리에게 적합하니, 거룩하고 악이 없으며, 더러움이 없고 죄인들에게서 성별되시며, 하늘들보다 더 높이 되심이라. 그는 대제사장들처럼 먼저 자신의 죄들을 위하고 그 다음에는 백성들의 죄들을 위하여 제사드리는 일을 매일 할 필요가 없으시니, 이는 그가 자신을 제물로 드림으로 단번에 이루셨음이라』(히 7:26,27).


자,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해 보라. 이분은 과연 어떤 분이신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셨지만, 죄를 짓지는 않으신 온전한 사람(히 4:15), 곧 육신으로 나타나신 하나님이셨다(딤전 3:16). 주님께서는 지상에 계시는 동안 친히 이룩하신 “율법의 의”를 우리에게 값없이 주셨고, 나무 십자가에 달린 자신의 몸으로 우리의 죄들을 친히 담당하심으로써 우리에게 영생을 주셨다. 그때 그분께서 하신 말씀은 『다 이루었다.』(요 19:30)였다. 따라서 우리가 받은 영생은 우리의 행위에 의한 것이 아니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신 십자가의 공로를 믿고 그분의 의를 받음으로써 얻게 된 “하나님의 선물”(롬 6:23)인 것이다. 모든 자와 믿는 모든 자에게 차별 없이 미치는 『하나님의 의』를 받아들임으로써 구원받았다면(롬 3:21,22), 이 구원은 행위가 아닌 믿음에 의해 하나님의 은혜로 받게 된 구원이다(엡 2:8,9). 행함이 없어도 불경건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그분을 믿은 우리의 믿음을 의로 여겨 주셨으니(롬 4:5), 전적으로 은혜로 된 것이지 결코 행위로 된 것이 아닌 것이다(롬 11:6).

당신은 십자가에서 구속 사역을 완성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원의 영원한 “기초”가 되셨음을 알고 있는가?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따라 내가 현명한 건축가와 같이 기초를 닦았더니 다른 사람이 그 위에 지으니라. 그러나 각 사람은 그 위에다 어떻게 지을지 주의해야 할 것이라. 이 닦아 놓은 기초 외에 아무도 다른 기초를 놓을 수 없나니 이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시라』(고전 3:10,11). 사도 바울은 자신을 현명한 건축가에 비유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그 건축물의 “기초”로서 제시한다. 건물을 지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뼈대도, 벽돌도, 외장재도 아닌 “기초”이다. 기초는 그 위에 수개월에서 수년에 걸쳐 지어질 건물의 외형을 규정하며 건물의 견고성을 결정짓는다. 기초가 허술하면 건물은 허술한 쪽에서 문제가 생기는데, 거기서 물이 새든지 아니면 홍수가 날 때 약한 쪽이 들떠서 떠내려가기가 쉽다. 간혹 홍수에 쓸려 가거나 그 있던 자리에서 옮겨지는 집들이 생기는 것은, 그 집의 기초가 부실하거나 아예 기초가 없이 맨땅 위에 지어졌기 때문이다.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땅을 깊이 파고 반석 위에 기초를 놓아 지은 집은 홍수가 나고 탁류가 그 집을 휩쓸어도 흔들리지 않지만, 기초 없이 땅 위에 지은 집은 탁류가 휩쓸면 그 무너짐과 파괴됨이 매우 크다(눅 6:48,49).


건축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기초”이다. 기초 위에 바르게 세워질 때 건축물은 멋진 위용을 자랑할 수 있는데, 그 모양은 건축가의 작업, 곧 “행위”에 달려 있다. 바울은 『각 사람은 그 위에다 어떻게 지을지 주의해야 할 것이라.』(고전 3:10)라고 말하면서, 기초이신 예수 그리스도 위에 세울 수 있는 것으로 “금, 은, 보석”과 “나무, 짚, 그루터기”를 제시한다(고전 3:12). 성도가 자신의 행위로 세운 건축물은 금, 은, 보석으로 지어진 “화려한 궁전” 같을 수도 있고, 나무, 짚, 그루터기로 지어진 “허물어질 듯한 폐가” 같을 수도 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이 지상 삶을 살면서 우리 몸으로(고후 5:10) 행한 것들로 지어 올린 이 영적 건축물을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시험해 보실 것인데, 그것은 불로써 드러나고 그 불은 각 사람의 일한 것이 어떤 종류인지를 시험할 것이다(고전 3:13). 물론 이때 사용되는 불은 지옥 불이 아니라 시험의 불이다. “지옥 불”은 땅속 지옥에 있는(시 55:15, 사 5:14, 마 12:40 등) “심판의 불”이므로(눅 16:24), 그리스도의 심판석이 펼쳐지는 셋째 하늘에는 결코 있을 수 없다.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단 한 사람도 예외 없이 휴거되어 그리스도의 심판석에 설 것이므로 땅 아래 있는 지옥 불에 들어갈까 봐 염려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겪게 될 시험의 불은, 우리가 거듭난 뒤로 구원의 기초이신 예수 그리스도 위에 “행위”로 쌓아 올린 것들을 시험한다. 예를 들어 하나님의 신성과 관련된 예배를 잘 드리면 “금”으로, 복음을 신실하게 전파하면 “은”으로, 혼들을 실제로 이겨오면 “보석”으로 남게 되지만, 그러한 일들이 육신적인 동기에서 비롯되었다면 다 타 버리고 빈털터리가 될 것이다. 불로 시험하실 때 그 실상이 모두 드러날 것인데, 일한 것이 세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일한 것이 불타 버리면 손해를 당하고 구원만 간신히 유지하게 된다(고전 3:14,15). 이처럼 그리스도의 심판석과 직결되는 “그리스도인의 행위”는 구원의 수단이 아닌 구원 이후의 삶과 연관되어 있다. 현 교회 시대에 죄인이 구원받는 데는 오직 “믿음”만 필요한 것이다! 『무슨 법으로냐? 행위의 법으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에 의해서니라』(롬 3:27).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은혜의 시대에 행위로 온전해지려 하는 어리석은 자들이(갈 3:3) 있으니 이 얼마나 우매한 짓인가! 알아들을 만큼 충분히 설명해 줘도 믿음의 법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그들이 거듭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상의 영을 받은 자연인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영이 없기에 하나님의 일들이 어리석게 여겨져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신 구원을 깨달을 수 없는 것이다(고전 2:12). 본래 유대인이었던 사도 바울은 율법을 지키는 행위에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회심하고부터는 그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빌 3:8) 율법의 행위를 쓰레기통에 던져 넣어 버렸다! 사람이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해서 되는 줄 알았을 때, 바울은 즉시 율법을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게 되었던 것이다(갈 2:16). 그렇다면 당신은 왜 그렇게 못하는가?

행위가 요구되던(전 12:13,14) 구약 시대는 이미 오래전에 끝이 났다. 구원에 있어서 믿음만 요구되는 현 교회 시대가 저물면, 앞으로 다시 행위가 요구되는 시대가 올 것인데, 바로 “환란 시대”이다. 환란 시대의 구원은 그 특징상 믿음에 행위가 뒤따라야 하며, 그때는 구약 시대처럼 율법의 효력이 다시 살아날 것이다.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키며[행위]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를 가진[믿음] 자들』(계 12:17), 곧 『하나님의 계명들과[행위] 예수의 믿음을[믿음] 지키는 자들』(계 14:12)이 구원받게 되는데, 셋째 하늘의 보좌 앞으로 휴거된 그 환란 성도들이 부를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와[행위] 어린양의 노래[믿음]』(계 15:3) 역시 이 점을 계시해 준다. 이러한 참조 구절들의 공통점은 믿음보다 “행위”를 먼저 둔다는 데 있다. 믿음보다 행위가 중요하다는 것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계명들이 부활하여 실행되는 환란 시대는 그만큼 “행위”가 절대적이라는 진리를 보여 주는 것이다. 계명들을 행하여 구원을 받아야만 영원 시대에 들어갔을 때 생명 나무에 대한 권리를 갖게 되어 그 나무를 먹고 영원히 살 수 있는 것이다(계 22:14).


앞으로 다가올 대환란과 재림을 다루는 요한계시록은 행위 구원을 예언하는 예언서이다. 그 예언서에는 미래에 일어날 일들이 담겨 있기에, 거기에 기록된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교회 시대로 가져와 적용하면 혼들을 멸망시키는 이단 교리가 나오게 된다. 현시대의 교회들은 요한계시록 2,3장에 일곱 교회가 언급된다고 해서 그 교회들에 주어진 말씀을 현재의 “교리”로 사용하는 우를 범하는데, 그 일곱 교회는 지난 2천 년 교회사 기간을 일곱 시기로 나누어 “영적으로” 적용해 볼 수 있지만 “교리적으로”는 미래의 대환란 때 등장할 교회들에 적용되어야 한다. 앞으로 소아시아 지역에 등장할 일곱 교회에 주시는 성령님의 메시지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는데, 그 일곱 교회 모두에게 “행위”와 행위로 “이기는 자” 그리고 그에게 주어질 “영원한 보상”이 강조되고 있다는 점이다.


1. 에베소 교회 : 『내가 너의 행위와 수고와 인내를 알며... 또 네가 참고 인내하며 내 이름을 위하여 수고하고, 지치지 않은 것을 아노라』(2:2,3). “이기는 자”는 하나님의 낙원 가운데 있는 생명 나무를 먹게 된다(2:7).


2. 스머나 교회 : 『내가 너의 행위와 환란과 궁핍을 아노라』(2:9). “이기는 자”는 큰 백보좌 심판 때 둘째 사망으로부터 해를 받지 않는다(2:11).


3. 퍼가모 교회 : 『내가 너의 행위와 네가 거하는 곳을 아노니』(2:13). “이기는 자”는 감추어진 만나를 먹게 되고, 또 돌을 받는 자만이 알 수 있는 새로운 이름이 기록된 흰 돌을 받는다(2:17).


4. 두아티라 교회 : 『내가 네 행위와 사랑과 봉사와 믿음과 네 인내와 네 행위를 아노니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2:19). “이기고” 예수 그리스도의 일들을 끝까지 지키는 자는 민족들을 철장으로 다스리는 권세와 새벽별을 갖는다(2:26-28).


5. 사데 교회 : 『내가 네 행위를 아나니 네가 살아 있다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었느니라』(3:1). “이기는 자”는 흰 옷을 입게 된다(3:5).


6. 필라델피아 교회 : 『내가 너의 행위들을 아노라』(3:8). “이기는 자”는 하나님의 성전에 기둥이 되고, 그 사람 위에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도성인 새 예루살렘의 이름이 기록되며, 예수 그리스도의 새 이름 또한 기록된다(3:12).


7. 라오디케아 교회 :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3:15). “이기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좌에 그분과 함께 앉을 자격이 주어진다(3:21).
자, 어떠한가? 온통 “행위”와 그에 대한 보상뿐이지 않은가? “이기는 자”란, 대환란 때 행위로 죄를 이기는 “남은 자”(환란 성도)를 가리키며 교회 시대의 그리스도인을 뜻하지 않는다. 환란 시대의 지역 교회들은 믿음과 행위의 결합을 구원의 교리로 믿는 성도들의 집결지가 될 것이고, 그들의 교리서는 “바울서신”(로마서부터 빌레몬서까지)이 아닌 “히브리서”를 포함한 “일반서신”(야고보서부터 유다서까지)과 “요한계시록”이 될 것이다. 오늘날의 교회들이 행위 구원을 주장하는 이유는, 이와 같은 책들에서 발견되는 환란 시대의 교리를 현 교회 시대로 가져와 적용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알아야 할 것은 교회 시대의 그리스도인은 이기는 자가 아니라 이미 “이긴 자”라는 사실이다. 『어린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그들을 이겼으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분이 세상에 있는 자보다 더 크시기 때문이라』(요일 4:4).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난 자는 누구든지 세상을 이기기 때문이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곧 우리의 믿음이라』(요일 5:4). 말하자면 우리는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요 16:33)라고 말씀하신 주님의 승리를 믿고 그 승리를 우리 자신의 것으로 삼음으로써 이미 “이긴 자들”이 된 것이다. “이긴 자”라면 또다시 이겨서 구원받아야 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다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 안에서 안식하면 되는 것이 교회 시대의 이긴 자들의 신앙인 것이다!

구약 시대에는 그 시대의 대표적 건축물인 성막에서 제사장들이 매일 드리는 제물로 하나님께 나아갔지만(히 10:11), 그 성막이 예표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성전”(요 2:19)과 “대제사장”(히 3:1)과 “희생제물”(히 9:26)이 되셔서 그분 자신이 하나님과 사람들을 향해 뻗치신 양손으로 하나님과 사람들을 직접 연결해 주고 계신다. 이것이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벌리신 양팔이 갖는 의미이다. 이 구원에는 율법의 행위가 필요 없으며,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이신(딤전 2:5)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만이 필요할 뿐이다. 구원의 영원한 기초이신 예수 그리스도 없이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되려는 자들은 『좀 앞에서도 부서져 버리는 먼지에 기초를 둔 진흙집』(욥 4:19)을 짓는 것과 같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주 하나님께서 시온에 두신 단단한 기초이며, 그분을 믿는 자는 다급하게 되지 않는다고 성경은 말씀한다(사 28:16).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 단단한 기초에 대한 믿음뿐이니,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안이 구원을 받으리라』(행 16:31). 오직 “믿음”뿐인 것이다!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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