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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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에 행위를 더하면 지옥에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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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16년 01월호>

독일의 종교개혁가 마틴 루터의 "이신칭의" 교리가 잘못되었다면서 "행함이 있는 믿음으로의 구원"을 가르친 학자들이 언론의 눈길을 끌었다. 얼마 전 제2종교개혁연구소라는 곳에서 제2기 제2종교개혁 신학강좌를 열었을 때 그곳 소장인 임태수 박사(호서대 명예교수)가 "믿음으로만이 아니라 행함 있는 믿음으로 구원"이라는 주제로, 안종우 박사(아가페교회)가 "행함 없는 거짓 신앙과 전통교리의 모순"이란 주제로 발제한 것이다.

언론에 따르면, 임 교수는 "서구 교회가 죽어가고 아시아와 아프리카 교회들도 서구 교회가 앓고 있는 죽음의 병에 시달리고 있는 이 때, 하나님께서 21세기에 한민족에게 맡기신 중차대한 세계선교의 사명과 제2종교개혁의 사명을 한국 교회가 완수할 것이라고 믿는다."면서 "16세기 종교개혁을 마틴 루터가 말한 '이신칭의'라고 정의한다면, 제2종교개혁은 이를 넘어서고 보완한 '믿음과 행함으로 의롭게 되고 구원을 얻는다.'라는 신학을 구호로 내걸어야 한다."고 했다고 한다.

또한 그는 "루터의 구원론은 행함이 있는 믿음뿐만 아니라 행함 없는 믿음에도 구원을 보장해 주는 구원론이다. 이 구원론은 성경의 진리와는 배치되는 구원론으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교회 다니면 예수 믿으니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게 해 버린다."면서 "성경의 의인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우리들도 믿음으로 의롭게 될 뿐만 아니라, 행함으로도 의롭다 함을 받는 의인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요구하시는 기독교인의 삶의 길이다."라고 주장했는데, 그들 두 사람이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제시한 근거들을 성경으로 살펴보고 그 오류를 바로잡아 보도록 하자.

그들이 주장한 요점은 다음과 같았다.

『'행함 있는 믿음으로 구원'이 제2종교개혁의 핵심 사상이요, 이 구원론은 마태복음 7:21, 야고보서 2:24 등 철저히 성서에 기초해 있다.』

『(마태복음 7:15-27을 근거로) 주님의 이 말씀은 행함이 없는 믿음은 구원을 받을 수 없는 거짓 믿음이라 말한다.』

『"루터 스스로가 '오직 성경'을 주장하면서, 왜 야고보서의 말씀에는 복종하지 않는가? 예수께서 행함 없이도 구원받는다고 말씀하셨는가? 그렇지 않다. 루터가 예수님보다 위에 있지 않다. 예수님보다 루터를 높이는 것은 우상숭배"라며 "우상숭배를 그치고 회개하자. 그는 위대한 신학자였지만, 한 시대가 필요로 한 신학자였을 뿐이다. 그가 너무 오랫동안 지배하고 있다. 우리는 여전히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루터와 서구교회의 신학을 따라가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가면 교회가 죽고, 살릴 수도 없게 된다. 이미 야고보 사도가 이를 지적했고, 1,600년 전에 어거스틴도 말했다.』

이러한 주장들의 문제점은 현 교회 시대의 구원에 관한 교리적 근거를 "대환란 구절들"에 두었다는 점이다. 그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도래하게 된 이 은혜의 시대에 만인에게 열린 "쉬운" 구원을 방해하려는 마귀의 계략에 걸려든 것이다. 특히 그들이 행위 구원의 근거로 내세운 어거스틴은 A.D. 354년 북아프리카의 타가스테(Tagaste)에서 태어나 육신적으로 방탕하게 살다가 373년에 마니교에 입교한 인물이었다. 마니교란 그것의 창시자 마니(Mani, A.D. 216-276)의 이름을 딴 것으로,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를 바탕으로 하여 이원론적 철학과 기독교의 교리를 혼합시켜 만든 일종의 자연종교이다. 어거스틴은 그 뒤 신플라토 철학의 영향을 받아 마니교와 결별했는데, 종교 사상들과 신비주의 철학을 종합하려고 시도한 그 철학의 영향으로 기독교와 철학을 접목시키려고 시도했다. 그는 비성경적인 유아세례를 가르친 장본인이었고, 물침례가 구원과 관련 있다고 믿고 가르치며 실행했다. 어거스틴은 이와 같이 거듭나지 못한 카톨릭 신학자로서, 침례 후 범하는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성경에도 없는 "연옥 교리"를 창안해 내기도 했다. 이런 인물을 이 신약 교회 시대의 구원과 관련된 교리적 근거로 삼는 일이 결코 있어서는 안 된다.

무엇보다도 그들이 내세운 근거 구절들과 사도 바울이 갈보리 십자가 이후 갈라디아서에 기록한 말씀을 비교해 보면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서 얼마나 신중해야 하는가를 알 수 있다.

『나에게 '주여, 주여.' 하고 부르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라야 되느니라』(마 7:21). 『이제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이 행함으로써 의롭게 되는 것이요, 믿음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니라』(약 2:24). vs. 『사람이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하여 되는 줄 알고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하여 의로워지고자 함이라. 이는 율법의 행위로는 아무 육체도 의롭게 될 수 없음이라』(갈 2:16).

사도 바울은 분명히 선언하기를, 자신은 사람이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하여 되는 것으로 알고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다고 했다. 바울은 율법의 행위로는 아무 육체도 의롭게 될 수 없기에 행위가 첨가되지 않은 순수한 믿음으로 구원받아야 한다고 이야기한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율법 없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서들을 통해 증거된 것이니라. 곧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한 것으로 모든 자와 믿는 모든 자에게 미치나니 차별이 없느니라』(롬 3:21,22). 그래서 바울은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이 율법의 행위들이 없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단정하노라.』(롬 3:28)고 했다. 이것은 주님께 직접 복음을 계시받은 사도로서 신약의 구원과 관련하여 내린 "결론"이었다. 『그러나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나는 그것을 사람에게서 받지도 않았고 배우지도 않았으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하여 된 것이라』(갈 1:11,12). 즉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 1:17)는 것이었다.

마틴 루터는 신약의 구원과 관련하여 눈을 번쩍 뜨게 해준 이 말씀들과 상충되는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서신"이라고까지 하면서 그 정경성을 부정하기까지 했다. 그것은 카톨릭에서 갓 성별해 나온 사제로서 아직 온전한 진리에 눈뜨지 못했기에 나온 반응이었다. 그것은 그의 무지로 인한 것이었지, 결코 야고보서의 말씀이 틀린 것이 아니었다. 그 서신은 나름대로 "교리적으로"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있기 때문이다.

그들 두 사람이 깨닫지 못한 것은, 『이제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이 행함으로써 의롭게 되는 것이요, 믿음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니라.』(약 2:24)는 말씀이 그 기록자인 야고보가 바울에게 계시된 신약의 복음을 접하지 못한 상태에서 헤롯왕에게 죽임을 당했기 때문에(행 12:1,2) 여전히 구약에 속한 믿음과 행위의 결합을 강조하여 기록한 것이라는 점이다. 야고보서에 "율법" 준수와 관련하여 『누구든지 율법 전체를 지키다가 하나를 범하면, 전체를 범한 자가 되느니라.』(약 2:10)는 말씀이 기록된 것은, 그가 믿음과 행위의 결합으로 구원받는 구약적 지식으로 그 서신을 기록했기 때문이었다. 성령님께서는 "사람이 율법의 행위들이 없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단정한" 사도 바울의 로마서와 상충되는 이 야고보서를 "교리적으로" 다른 시대에 적용되도록 사용하시는데, 그것이 바로 "대환란 시대"이다. 이것이 성령님께서 기록자인 야고보의 지식적 한계를 들어쓰셔서 구약 시대처럼 믿음과 행위가 다시 결합되는 대환란의 구원 교리를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가르쳐 주시는 방법인 것이다.

대환란을 직접적으로 다루는 요한계시록에는 그 시대의 구원 교리와 관련하여 구약 시대처럼 "믿음과 행위의 결합"을 강조하는 구절들이 있다. 『그러자 그 용이 여인에게 분노하여 여인의 씨 가운데 남은 자들, 즉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키며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를 가진 자들 과 싸우려고 나가더라』(계 12:17). 『여기에 성도들의 인내가 있으며 여기에 하나님의 계명들과 예수의 믿음을 지키는 자들 이 있느니라』(계 14:12). 말하자면 대환란 때가 되면 "모세의 율법"이 다시 효력을 발휘하게 된다. 그 시대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율법의 행위로 끝까지 견뎌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 이것이 주님께서 『대환란』(마 24:21)에 관해 말씀하신 마태복음 24장에서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13절)고 말씀하신 이유인데, 그때에는 이 은혜의 시대처럼 단번에 구원받고 구원이 영원히 보장되는 것이 아니라 행위로 끝까지 견뎌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게 된다.

교회가 아닌 "이스라엘 열두 지파"에게(약 1:1) 대환란 때의 구원 방법을 가르쳐 주는 야고보서 2:24(『이제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이 행함으로써 의롭게 되는 것이요, 믿음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니라.』)을 교리적으로 보지 않는다면 이 교회 시대에 실질적으로 적용할 수 있다. 지금은 믿음 하나만으로 의롭게 되지만 그 믿음은 믿음 하나만으로 있지 않고 그것에 어울리는 행위가 수반된다고 가르칠 수 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성도의 진실한 믿음이 내는 열매를 말하는 것이지, 구원의 수단으로서의 행위를 이 교회 시대에 "교리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아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마태복음 7:21," 즉 그들이 "행위"로 인한 구원을 위해 들고 나온 구절은 역시나 대환란 때의 구원과 관련된 말씀이다. 아직 십자가 이전이었던 그곳에서 주님께서는 야고보처럼 "행위"를 강조하신다. 『21 나에게 '주여, 주여.' 하고 부르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라야 되느니라. 22 그 날에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예언하지 아니하였으며, 주의 이름으로 마귀들을 쫓아내지 아니하였으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경이로운 일들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라고 말하리니, 23 그때 내가 그들에게 분명히 말하되 '나는 너희를 전혀 알지 못하니, 너희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고 하리라』(마 7:21-23).

이 구절들은 왕국복음을 통해 물리적인 천국을 가져오시는(마 4:17,23) 유대인의 왕, 곧 다윗의 아들이신(마 1:1) 예수 그리스도께서 왕국 헌법으로서 설파하신 산상설교(마 5-7장)의 일부분이다. 그것은 십자가 이후의 교회 시대를 위한 교리가 아니라, 유대인들이 주님을 그들의 왕으로 받아들일 경우 가져오시려고 했던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조건을 말씀하신 것인데, 역시나 야고보서처럼 "행위"가 강조된다. 이것은 주님께서 피흘리신 십자가의 은혜의 복음을 부정하신 것이 아니라, "다윗의 계보"를 통해 나신(마 1:1-16) 유대인의 왕으로서 천국을 가져오시려는 시점에서 하신 말씀일 뿐이다(십자가 이전). 그러나 천국은 주님의 백성인 유대인들의 거부로 연기되었고, 그렇기에 이 구절은 주님께서 재림 때 천국을 다시 가져오시기 전인 대환란 때에 적용되게 된다.

따라서 주님께서 마태복음 7:21-23에서 정죄하신 "주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마귀들을 쫓아내고, 많은 경이로운 일들을 행한 자들"은 자연스럽게 데살로니가후서 2장의 『멸망의 아들』과 관련된 미래의 『멸망하는 자들』에게 연결된다. 『그 악한 자가 오는 것은 사탄의 역사에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들과 거짓 이적들과, 멸망하는 자들 안에 있는 모든 불의의 속임수로 오는 것이니, 이는 그들이 진리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아니하여 구원을 받지 못하였기 때문이라』(살후 2:9,10). 이것이 바로 "대환란" 장인 마태복음 24장에서 경고하셨던 『또 많은 거짓 선지자가 일어나서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11절)와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서 큰 표적들과 이적들을 보여 주어, 할 수만 있다면 그 택함받은 자들도 미혹하리라』(24절)와 직결된 상황이며, 이처럼 강력한 미혹이 임할 때 정신을 차려서 행위로 끝까지 견디지 못하면 구원을 받지 못하게 되는 것이, 한국 교회가 알지도 못하고 알 수도 없는 "대환란 신학"인 것이다.

대환란 때에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받는 "구원의 영원한 보장"이란 것이 없다. 바울은 이 교회 시대의 구원에 관하여 『너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아무도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엡 2:8,9)고 기록했다. 이처럼 명백한 말씀 앞에 무지하게 "행위"를 들이댄다면, 그가 그 행위에서 나온 "더러운 걸레 같은 의"(사 64:6)를 가지고 가야 할 곳은 "지옥"뿐인 것이다.

주님께서는 성경을 올바로 나누어서 공부하라고 하셨다(딤후 2:15). 그들이 교회 시대에 적용한 마태복음과 야고보서는, 사도행전과 히브리서와 더불어 경륜의 이동을 다루는 과도기적인 책들에 속한다. 거기에는 이 교회 시대에 영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것들이 있지만, 지금 이 시대에 교리적으로 완벽하게 들어맞지는 않는다. 지난 2천 년 교회사 기간 동안 이 과도기적인 책들에서 행위 구원의 주요 이단들이 나왔다. 주님께서 유대인의 왕으로서 거부당하시고 십자가로 결행하시기 전에 하신 특정 말씀들과 과도기적 책들 안에 있는 대환란 구절들을 각 시대에 어울리는 하나님의 경영 방침에 따라 나누어 적용하지 않는다면, 이 은혜의 시대에 구원과 관련된 마귀의 망언을 일삼다가 구원도 받지도 못한 채 지옥에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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