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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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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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19년 02월호>

영국의 경제학자 존 스튜어트 밀은 "자유는 좋은 것이고,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자유는 포기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 그만큼 자유는 공짜로 주어지는 것이 아닌데, 자유의 토양에는 항상 누군가의 피가 흘려져 있는 것이다. 미국 제3대 대통령 토마스 제퍼슨도 "자유의 나무는 피를 먹고 자란다."라고 했다. 오늘날 우리나라가 자유민주주의라는 토양 위에 굳게 설 수 있었던 이유는, 공산주의자들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해 싸우다가 죽은 애국선열들의 피 때문이다. 그러나 진보 좌파 정권에서는 이렇게 피의 대가로 얻은 자유를 남용하여, 소위 민주화 운동이나 촛불 시위 같은 것들로 그 진정한 의미를 퇴색시켰고, 심지어 자유와 인권을 유린하는 북한 김정은 정권의 유익을 위해 "평화와 통일"이라는 명목으로 자유를 써먹고 있다.

종교의 자유 역시 피를 먹고 자라 왔다. 공산주의나 이슬람 국가를 제외한 대부분의 나라들에서 종교의 자유가 완전히 보장되기 시작한 것, 곧 "국가와 교회가 완전히 분리된 것"은 역사적으로 200년도 채 안 된다. 그 전까지만 해도 "국가 교회"에 대한 입장은 로마카톨릭이나 개신교나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종교개혁자들 역시 국가 교회라는 테두리를 쉽게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유아세례를 위시한 많은 비성경적인 교리들을 버리지 못했으며, 로마카톨릭이 그랬던 것처럼 자기들의 비성경적인 교리들과 반대되는 폴리시안이나 왈덴스 같은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 특히 재침례교도들을 박해하고 죽였다. 그런 가운데서도 재침례교도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국가와 교회의 분리"를 지속적으로 주장해 왔는데, 이처럼 재침례교도들이 흘린 순교의 피가 있었기에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나 국가들에서 국가와 교회의 분리, 곧 "종교의 자유"를 인정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미국의 독립 운동에 앞장섰던 정치가 패트릭 헨리는 침례교 설교자들이 거리에서 설교했다는 이유로 매질당하는 것을 목격한 적이 있었는데, 이에 그는 1775년 3월 23일 의회에서 했던 한 연설에서, 미국은 영국의 정치적, 종교적 폭정에 항거하여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해야 한다고 호소하며 이렇게 외쳤다. 『우리가 자유를 유지하려면 싸워야 합니다. 무기에 호소하고 하나님께 호소하는 것만이 우리에게 남아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강한 자만이 싸울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항상 경계하고, 행동하며, 용기를 가진 사람들도 싸울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제 전쟁은 피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평화, 평화"를 거듭 외치고 있지만 평화는 없습니다. 전쟁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우리 형제들은 이미 전장에 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이곳에서 한가하게 점잔 빼고 앉아 있는 것입니까? 진정 여러분이 바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쇠사슬을 차고 노예가 되어 가고 있는데도 목숨이 그리도 소중하고 평화가 그리도 달콤하단 말입니까? 전능하신 하나님이시여, 우리의 길을 인도해 주옵소서. 여러분이 어떤 길을 선택할지 모르지만 나는 이렇게 외칩니다. "내게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진정한 자유는 "진리"에서 나온다. 『진리를 알게 되리니 그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2). 진리는 『아버지의 말씀』(요 17:17)이다. 또한 『말씀』(요 1:1, 요일 1:1)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요 14:6)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자신의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가진 자, 곧 마귀를 멸망시키시며 또 죽음을 두려워하므로 평생을 노예로 속박되어 있는』(히 2:14,15) 죄인들을 자유롭게 해 주시는 데 있었다. 『만일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참으로 너희가 자유롭게 되리라』(요 8:36). 예수님께서는 이 일을 이루시려고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셨다. 구원받은 성도가 누리고 있는 자유 역시 거저 주어진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귀한 피의 대가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자유가 우리 편에서는 값없는 선물로 주어졌을지 모르지만, 하나님 편에서는 엄청난 "몸값"(막 10:45)이 지불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은 죄인에게는 자유가 없다! 자유가 없는 곳에는 "죽음"이 깃든다. 마귀가 관장하는 세상도 사람들에게 자유를 약속한다고 하지만, 사실상 죄의 줄들로 강력하게 얽어매어 멸망으로 이끌어 갈 뿐이다.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자유를 외친다. 성경에서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고후 3:17)라고 말씀하면, 세상은 주의 영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자유를 부르짖는다. 더러운 죄악을 마음대로 짓는다든지, 배우자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연애를 즐긴다든지, 동성연애자들이 변태 행위를 한다든지, 혹은 학생 인권을 운운하면서 부모나 선생님의 권위에서 해방되려 한다든지 등의 그런 자유를 외치는 것이다. 심지어 "언론과 표현의 자유"라는 미명하에 절대 기준인 성경의 권위를 뒤엎으려는 시도도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데, 그 결과 더럽고 추악한 죄악들이 학교, 교회, 가정의 안방구석까지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고 자유롭게 밀려들어 오고 있다.

하지만 그들이 추구하는 자유는 진정한 자유가 아니다! 『악인은 자기 자신의 악들에 걸리며 자기 죄들의 줄들에 매이리라』(잠 5:22). 그것은 죄의 속박의 길이자, 어둠의 길이며, 수치와 패배, 거짓과 속임수, 저주와 사망의 길이다. 왜냐하면 성경은 분명하게 『죄의 삯은 사망』(롬 6:23)이라고 말씀하기 때문이다. "죄와 사망의 법"은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절대적인 법령이다. 이 세상에서 진리와 무관한 자유를 외치는 어떤 죄인도 이 법망을 빠져나갈 수 없다. 그들의 자유는 지옥으로 가는 길이요, 죽음의 방들로 내려가는 길이기 때문이다(잠 7:27). 그러나 이러한 법령에서 빠져나온 사람들이 있다. 바로 구원받은 성도들이다. 성령을 통해 거듭난 성도들은 "죄와 사망의 법"에서 자유롭게 되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롬 8:2) 해방시켜 준 것이다.

자유롭게 된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대가로 얻은 그 자유를 육신을 위한 계기로 삼아서는 안 된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에로 부름을 받았으니 그 자유를 육신을 위한 계기로 삼지 말고 사랑으로 서로 섬기라』(갈 5:13). 우리는 육신을 위해 이 소중한 자유를 남용할 이유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육신에 빚진 자들이 아니기 때문이다(롬 8:12).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 구원받은 순간 과거 육신에 지고 있던 모든 빚은 이미 소멸되어 버렸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권면한다. 『우리가 이것을 아나니 곧 우리 옛 사람이 그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죄의 몸을 멸하여 더 이상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니라. 이는 죽은 자가 죄로부터 자유롭게 되었기 때문이라』(롬 6:6,7). 우리의 육신은 약 2천 년 전에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이미 죽었다. 죽은 자는 죄를 지을 수 없다! 따라서 우리가 더 이상 육신에 끌려다닐 이유가 없는 것이다. 육신의 비위를 맞춰가면서 그것이 요구하는 것들을 일일이 다 들어줄 이유가 없다. 사실 우리가 구원받기 전에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자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육신이 행하라는 대로 행동해야 했고, 바라보라는 대로 봐야 했으며, 말하라는 대로 말해야 했던 것이다. 구원받기 전에는 육신 안에서 혼과 몸이 서로 붙어 있었기 때문에 어떤 것을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전혀 없었다. 죄가 우리 육신 안에 군림하면서 몸의 정욕을 추구하게 했을 때, 우리는 육신의 노예요, 죄의 노예요, 사탄의 노예로서 그 명령에 순종해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구원을 받고 그리스도의 할례(골 2:11)를 통해 몸과 혼이 분리되는 영적 수술을 경험한 성도에게는 이제 "자유"가 생겼다. 죄를 거절할 수 있는 자유가 생긴 것이다! 반면에 자유롭게 된 성도로서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을 할 수 있는 자유도 생겼다. 우리는 바로 그 권리를 사용해야 한다. 영국의 역사학자 존 액턴은 "자유는 우리가 좋아하는 것을 하는 힘이 아니라, 우리가 해야만 하는 것을 할 수 있는 권리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 안에서 군림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정욕 가운데 죄에게 순종하지 말고 또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내어주지 말고 다만 너희 자신을 죽은 자들로부터 살아난 자들처럼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죄가 너희를 주관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기 때문이라』(롬 6:12-14). 우리에게는 죄의 주관을 받지 않을 자유가 있다. 동시에 우리의 지체를 의의 병기로써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자유도 있다. 이것이 바로 존 액턴이 말했던바, 구원받은 성도들이 해야만 하는 것을 할 수 있는 권리, 곧 "진정한 자유"인 것이다. 우리는 그런 자유를 사용해야 한다. 마음껏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공부할 수 있는 자유를 사용해야 한다. 원 없이 기도할 수 있는 자유를 사용해야 한다. 복음을 전파할 수 있는 자유를 있는 힘껏 다 누려야 한다. 예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의뢰할 수 있는 자유, 우리 몸을 기꺼이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자유를 마음껏 사용해야 한다.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의 바다"를 인생이 다 끝날 때까지 원 없이 누려 봐야 하는 것이다. 결코 육신을 위해 자유를 사용하느라 전전긍긍해서는 안 된다. 『자유롭게 행하되 너희의 자유를 악의 구실로 사용하지 말고 하나님의 종들로서 사용하라』(벧전 2:16).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자유는 결코 "방종"이 아니다. 자유는 올바른 것을 행동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는 것이지, 결코 그릇된 행동을 제멋대로 자행해도 괜찮다는 허가증이 아니다. 그래서 성경은 자유의 한계를 정해 주고 있는데, 곧 『성령 안에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는 육신의 정욕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 5:16)라고 말씀한다. "성령의 법" 테두리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 한계를 벗어나면 방종이 되고, 결국 육신의 정욕을 이루게 된다. 그처럼 자유를 육신을 위한 계기로 쓰게 되면 거기에는 고통이 뒤따르고, 심지어 죽을 수도 있다(롬 8:13). 왜냐하면 자유에는 반드시 "책임"이 수반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의 의지로 선택하고 승인하고 결정한 자유로 인해 스스로 정죄를 받아서는 안 된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자유의 권리만 알고 있고 자유의 한계를 알지 못하면 자유의 권리를 누릴 자격이 없다."라고 말했다. 자유는 결코 영적 권위나 질서, 성경에서 정해 놓은 어떤 법이나 한계를 완전히 무시한 채 제멋대로 행동하는 것이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성경은 예수님의 몸값으로 자유롭게 된 우리가 언젠가는 "하나님의 자녀의 영광스러운 자유"에 이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한다(롬 8:21-23). 우리 몸이 구속되는 날, 곧 영적 전쟁의 격전지요, 죄로 인해 병들어 죽고 썩어 가는 이 지긋지긋한 육체에서 해방되는 그날, 우리는 지금까지 상상조차 해 보지 못했던 "완전한 자유"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날이 올 때까지는 진정한 자유에로 부름을 받은 성도답게 이 자유를 올바르게 사용하고 누려야 한다.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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