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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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중”의 죽음에 관한 개똥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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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1년 07월호>

영어 <킹제임스성경>에서는 “이단”에 해당하는 단어로 “sect”와 “heresy,” 두 단어가 쓰인다. <한글킹제임스성경>에서는 두 단어 모두 “이단”으로 번역되었으나 의미상 서로 구분된다. 우선 “sect”는 “집단, 무리”의 뜻이 있는데, 『이단 종파에 속한 사람은 한두 번 훈계한 후에 거절하라.』(딛 3:10)라는 말씀에서 “이단 종파”(heretick)가 바로 “집단이나 무리”의 의미를 지닌 “sect”인 것이다. 이에 반해 “heresy”는 “이단 교리”라는 뜻이 있다. 예를 들어 “여호와의 증인”은 “이단 교리”(heresy)를 가르치면서도 그들만의 “이단 집단”(sect)을 형성하고 있는데, 우리말로는 이것들 모두를 “이단”이라는 단어로 통칭해서 사용한다.


성경에서 “이단”이라는 단어가 처음 나오는 구절은 “사도행전 24:5”이며, 그 단어가 14권의 신약성경을 기록한 “사도 바울”을 향해 사용되었다. 당시에 “터툴로”라고 하는 변사는 펠리스 총독 앞에서 바울을 고소할 때 그를 가리켜 『나사렛 이단의 두목』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첫 언급의 법칙”에 따라 그 이후로는 교회사에서 “이단”이라는 단어가 주로 바울처럼 성경대로 믿는 믿음을 지닌 그리스도인들을 부를 때 사용되었다. 하지만 “이단”의 진정한 뜻을 보면, 성경 말씀에 “첨가”하거나(잠 30:6, 계 22:18), “삭제”하거나(계 22:19), “믿기를 거부”하는(왕하 7:2, 요 5:46,47) 집단 또는 그들의 가르침을 의미한다. 즉 자기들의 거짓 교리를 주장하기 위해 성경을 왜곡하거나 변개하고, 문맥을 무시한 채 특정 성경 구절만 뽑아내어 가르치는 사람들이 이단인 것이다. 그래서 “이단”이라는 말은 주로 기독교계 안에서 쓰인다. 왜냐하면 여타 다른 종교에서는 “성경에 대한 믿음”조차 없기 때문이다.


한편 성경적 믿음 자체가 없는 힌두교나 불교, 도교, 이슬람교 등은 “이단”보다는 “이교도”로 분류된다. 또한 기독교 신앙이나 종교적 믿음 자체가 아예 없는 사람은 “불신자”로 분류할 수 있다. 사실 “이교도들”이나 “불신자들”에게는 최종권위로서의 하나님의 말씀과 그 말씀에 대한 성경적 믿음이 없기에,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자들의 주장이나 종교적인 설법 등에 어떤 점수도 주지 않는다. 아무리 대단한 것처럼 보이는 이야기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삼지 않는다면 이러쿵저러쿵 논할 가치조차 없는 것이다. 특히 이교도들은 자신들만의 종교 경전에 따라 일정한 행위나 의식을 강조하면서 그런 것들을 그대로 준수하지 않을 경우 큰 벌을 받게 될 것이라는 식의 엄포를 놓지만, 사실 그런 것들은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세상 종교가 지닌 한계다. 그런데 최근 “지광”이라는 한 중이 <현실은 영원이다>라는 책을 내놓고서는, 마치 죽음의 문제에 관해 이렇다 할 해결책이라도 제시한 것처럼 사람들을 미혹하며 지옥으로 몰아넣고 있다. 하지만 그의 주장들은 한낱 “개똥철학”에 불과했다.


우선 “지광”은 인간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도 모르면서 인간을 논했다. 「부처님께서는 모든 것은 마음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셨습니다... 만상은 마음이 지어냈다는 가르침입니다. 만상은 물질이고 물질은 에너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에너지는 기입니다. 기를 가리켜 에너지인 동시에 정보라 부릅니다... 기는 마음이고 영입니다」(76쪽). 그는 마음에서 출발하여 만상, 물질, 에너지, 기로 갔다가 다시 마음과 영으로 돌아오는 “순환 논리”에 빠진 채 인간을 제대로 규명하지 못했는데, 기껏해야 인간이 “몸과 영혼”이라는 이분법적인 구조로 이뤄진 존재라는 전제 속에서 이야기를 전개했을 뿐이다.


한편 성경은 인간이 몸과 영혼으로 구성된 존재가 아니라 “몸과 혼과 영”으로 구성된 존재라고 말씀한다(살전 5:23, 히 4:12). 『주 하나님께서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의 콧구멍에다 생명의 호흡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살아 있는 혼이 되었더라』(창 2:7). 흙으로 지으신 “몸”에 하나님의 호흡인 “영”을 불어 넣으시니 사람의 “혼”이 생겨난 것이다. 각각의 기능을 살펴보면, “몸”은 “오감”(五感)을 통해 외부 세계의 자극을 인식한다. “혼”은 “지정의”(知情意)로 이루어져 있으며, “영”은 영교, 직관, 양심의 기능을 하기에 인간은 영으로 하나님과 소통하게 된다. 하지만 인간은 아담의 범죄로 인해 “영”이 하나님에 대해 죽어 버리면서 하나님의 형상이 깨지고 말았다(창 1:26; 2:17; 5:3). 이렇게 깨져 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시기 위해 “하나님의 인격의 정확한 형상”(히 1:3, 고후 4:4, 골 1:15)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이다. 특히 이렇게 죽었던 영이 되살아나는 것을 가리켜 “중생”(regeneration)이나 “거듭난다”(born again)라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그만큼 이것이 중요한 일이었기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내가 너에게 ‘너희는 거듭나야만 한다.’고 말한 것을 이상히 여기지 말라.』(요 3:7)라고 말씀하셨다.


인간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가에 대해 무지했던 “지광”은 인간의 “본성”에 대해서도 여실히 무지를 드러내 보였다. 그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다. 「화두를 들어 끊임없이 번뇌를 척결하고 염불, 기도를 하며 끊임없이 마음을 정화해야 합니다. 우리의 본질이 광명이기에 해탈의 길을 가기 위한 정진의 행로이기 때문입니다」(91쪽). 「우리의 본질은 부처님이고 시작도 끝도 없으며 태어나지도 죽지도 않는 무한자적인 존재입니다. 그러나 그를 망각했기에 생사의 고해에 뛰어들어 무진한 고통을 겪는 것입니다」(121쪽). 말하자면 기본적으로 “인간의 본질”은 광명이고 부처이며 영원한 존재라는 것이다. 하지만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딛 3:5)을 통해 영이 거듭나서 그 안에 “새 사람”이 형성되기 전까지, 인간의 본성은 광명이나 선한 것이 전혀 없는 “죄,” 곧 악함 그 자체다(시 51:5, 창 8:21, 롬 5:12 등). 더욱이 인간은 70-80년의 생애를 부여받았지만, 그 연수의 힘조차 수고와 슬픔뿐이며 그것이 곧 끊어지면 멀리 날아가 버리는바 신적인 존재와는 거리가 먼 “유한한 존재”일 뿐이다(시 90:10).


인간을 제대로 규명하지 못했고 인간의 본성에 대해서도 무지한 모습을 드러낸 “지광”은 이제 자신이 책의 화두로 꺼낸 “죽음의 문제”에 대해 불교의 “업”(業, 카르마) 또는 내부적으로도 의견이 서로 엇갈리는 “윤회 사상” 등을 언급하면서 인간은 모두 “해탈”(번뇌의 얽매임에서 풀려나는 것)로 나아가는 과정, 곧 “영적인 진화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말했다. 「지금 당장 조금씩이라도 영적인 진보를 도모한다면 그는 다음번 삶에서 분명 앞으로 더 나아갈 수 있습니다」(32쪽). 「우주의 무량 중생들은 하나같이 영원한 진보를 도모하며 끊임없이 나아가야 하는 존재들입니다」(96쪽). 「화엄경에도 등장하듯 영혼에도 등급이 있습니다」(104쪽).「집착과 허망을 떨쳐내지 못해 괴로워하는 영가(靈駕)들! 그들의 앞날은 열리지 않고 과거의 노예가 되어 진보를 모릅니다」(124쪽). 「물질세계를 즐기고자 하는 마음 때문에 끊임없이 다시 태어나면서 고통의 과정을 통해 영적 진화의 단계를 거칩니다. 끝없는 윤회를 통해 이 몸으로부터 해방될 기회를 얻으려 합니다」(220쪽). 「우리는 수많은 삶을 거치면서 끊임없이 영적인 품성을 개량해 나갑니다... 절대 선, 절대 악은 없습니다. 진화냐 퇴보냐는 전적으로 자신의 의지에 달려 있습니다」(221쪽). 특히 해탈로 가는 영적인 진화는 법(法)과 불(佛)에 관한 교육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마찬가지로 산 자나 죽은 자나 행복에 이르려면 부정적인 마음을 물리칠 수 있는 공부가 필요합니다. 무엇보다 행복의 첫 단추는 공부입니다... 끝없는 공부의 길, 기도의 길만이 우리 모두를 행복의 길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157쪽). 「부처님께서는 항상 끝없는 학습 과정을 통해 마음의 부정적 상태를 긍정적 상태로 변화시킬 수 있다고 강조하셨습니다」(158쪽). 끊임없는 학습으로 “업”을 제거해 가되 윤회를 통해 지속해서 해탈 또는 부처의 단계로 진화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의 개똥철학은 틀렸다. “인간 쇠락(붕괴)의 법칙”에 따라 인간은 진화해 나가는 것이 아니라 “쇠락”해 가고 있으며, 그 종말은 부처의 모습이 아닌 “벌레”의 모습이 될 것이다(시 22:6, 사 66:24, 막 9:44,46,48). 또한 인간의 본성은 단순히 공부함으로써 개선되고 영적인 진화를 이룰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생물학적이든지, 종교적이든지 간에 진화론은 인간의 상상으로 만들어 낸 허구에 불과하다. 심지어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고 사탄이 끝없이 깊은 구렁에 갇힌 후에 도래할 천년왕국조차도, 그 끝에 가서는 잠시 풀려난 사탄이 전쟁을 일으킬 때 “바다의 모래”와 같은 수의 인간들이 사탄의 반역에 동조하게 된다(계 20:1-3,7-10). 여기에서 우리는 인간의 본성이 결코 개선되거나 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따라서 온 세상보다 귀한 자신의 “혼”(마 16:26)을 그 실체도 없는 윤회에 따른 영적 진화나 교육으로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아예 접어 두는 편이 낫다. 다음 생애를 기약하는 가운데 두 번째, 세 번째 기회를 찾아 나서면서 그 실체도 부정확한 “영적 진화”를 이루어 나가려고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금 당장”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제시하신 구원의 복음을 믿어야 한다.


성경은 『사람이 존귀할지라도 오래 살지 못하니 그가 멸망하는 짐승들과 같도다.』(시 49:12)라고 하셨고, 『사람이 존귀에 처해 있어도 깨닫지 못하면 멸망하는 짐승들과 같도다.』(시 49:20)라고 말씀하셨다. 분명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점에서 보면(요 20:31) 존귀에 처해 있는 존재임이 틀림없다. 말하자면 “기회”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는 “유한한 존재”라는 점과 존귀에 처해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할 때는 “멸망하는 짐승들”처럼 되어 죽은 후에 지옥에서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는 점도 유념해야 한다. 따라서 “죽음을 면할 수 없다는 숙명적 위기감을 지니고 항상 죽음을 염두에 두고 삶을 충실히 살아간다면 이미 죽음은 극복된 것이다, 아울러 삶이 어떠해야 하고 삶이 어떤 것인가를 진실로 바르게 알고 있는 사람은 곧 죽음의 문제를 해결한 사람이라는”(192쪽) “개똥철학”이 죽음의 문제에 관한 해답이라며 뻔뻔하게 내놓는 어리석은 “중”의 말에 놀아나서는 안 될 것이다.

인류의 죄의 문제는 오직 피흘림을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 그래서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이다. 죄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갈보리 십자가 위에서 흘리신 그 보혈을 통해 우리의 죄의 문제는 완전히 해결되었다. 현 생애에서 내리는 결정이 영원을 가르는 결정이 될 수 있기에 “죽음 이후의 문제”를 다른 사람의 손에 맡겨서는 안 된다. 성경은 『오 어리석은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가운데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채로 너희의 눈 앞에 분명히 제시되었는데 너희가 진리에 순종하지 못하도록 누가 너희를 미혹하더냐?』(갈 3:1)라고 말씀하시고, 『이 무지의 때에는 하나님께서 눈감아 주셨으나 이제는 어디에 살고 있는 어떤 사람에게도 회개하라고 명령하고 계시니라.』(행 17:30)라고 말씀하시면서 회개를 촉구한다. 이 초청에 응하여 예수님께 나아가는 것만이 죽음 이후에 처하게 될 지옥의 형벌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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