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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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을 사람들로 장난치는 교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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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2년 03월호>

죽음은 인생을 규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다. 사람이 자기 인생을 “죽음의 관점”에서 보면 경거망동하지 않고 삶의 규모를 바로잡을 수 있다. 사람이 살려고 태어났는가, 죽으려고 태어났는가에 관해서는 전쟁과 재앙의 경험치가 늘어날수록 인류의 고민은 더욱 깊어만 가는데, 살려고 애쓰는 사람과(마 14:30) 애써 죽으려는 사람이(욘 4:3) 공존하는 현 세상에서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지가 큰 숙제가 된 것이다. “요나”처럼 “한 사람”에게 삶을 향한 욕구와 죽음을 향한 욕구가 모두 일어날 수 있다는 점에 대해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때 요나가 그 물고기 뱃속으로부터 주 그의 하나님께 기도하여 말하기를 “내가 나의 고통으로 인하여 주께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나를 들으셨나이다. 내가 지옥의 뱃속으로부터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내 음성을 들으셨나이다』(욘 2:1,2). 『해가 솟아오르자 하나님께서 몹시 뜨거운 동풍을 예비하시고 해가 요나의 머리를 쬐니 요나가 기진하여 스스로 죽기를 바라며 말하기를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더 낫겠나이다.” 하였더라』(욘 4:8).

셰익스피어의 희곡 <햄릿>에 나오는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라는 독백은 한 편의 비극에 기록된 대사이기 이전에 지금껏 인류가 직면해 온 “생의 진실”이다.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이 단순한 독백 속에서 매 순간 생사의 갈림길에 선 인간의 비극적 갈등이 메아리치는 것이다. 삶과 죽음의 문제, 그것은 그 누구도 단순하게 생각할 수 없는 냉혹한 무게를 지니고 있다. 『내가 사람들의 아들들의 지위에 관하여 내 마음속에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그들을 드러내사 그들로 자신들이 짐승들이라는 것을 보게 하소서.” 하였도다. 이는 사람들의 아들들에게 닥치는 일이 짐승들에게도 닥침이니, 곧 한 가지 일이 그들에게 닥치는도다. 하나가 죽는 것처럼 다른 것도 죽으니, 정녕, 그들 모두가 한 호흡을 가졌도다. 그러므로 사람이 짐승보다 월등함이 없으니, 이는 모든 것이 헛됨이라. 모두가 한 곳으로 가나니, 모두가 흙에서 왔고 모두가 흙으로 다시 돌아가도다. 사람의 영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영은 땅 아래로 내려가는 것을 누가 알리요?』(전 3:18-21)

“죽음”은 누구에게나 닥치지만, 육신에 한정되지 않으며, 분명 죽음 이후에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음을 솔로몬은 깨달은 것이다. 그가 한 인간으로서 할 짓 못 할 짓 다 해 본 뒤에 내린 결론은 모든 사람에게 죽음이 있다는 것이고, 그 뒤에는 심판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람이 여러 해를 살고 그 모든 것들을 즐거워한다면, 그에게 어두움의 날들을 기억케 하라. 이는 그 날들이 많을 것임이라. 장래 일은 모두가 헛되니라. 오 청년이여, 네 젊음을 즐거워하라. 네 마음은 네 젊은 날들을 기뻐하며 네 마음의 길들과 네 눈의 보는 대로 걸으라. 그러나 너는 알지니 이 모든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너를 심판하시리라』(전 11:8,9). 『전체 일의 결론을 들을지니,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키라. 이것이 사람의 모든 의무니, 이는 하나님께서 선이든 악이든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것들을 심판하실 것임이라』(전 12:13,14). 당신은 죽음과 그 이후에 있을 심판에 대해 대비하고 있는가? 살 것인지, 죽을 것인지를 고민하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어 영생의 소망 속에서 살아야 한다.

세계적인 전자 상거래 기업 아마존닷컴의 창업자 “제프 베이조스”(Jeff Bezos)는 “후회 최소화 법칙”(Regret Minimization Framework)을 세웠는데, 인생의 갈림길에서 중대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 사용할 수 있는 “세 가지 법칙”을 제시한 것이다. 그중 첫 번째가 “80살의 자기 모습을 떠올리는 것”이었고, 나머지 둘은 “최대한 후회를 적게 하고 싶다는 점을 전제로 한 뒤 인생을 되돌아보는 것”과 “지금껏 살아오는 동안 어떤 행동을 한 것이나 하지 않은 것에 대해 후회하는지 자문하는 것”이었다.

그가 인생의 갈림길에서 후회를 최소화하기 위해 첫 번째 법칙으로 삼은 것은 사실상 “죽음”과 연관된 것이었다. 80살이면 사람이 죽음을 코앞에 둔 나이가 아닌가?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어도 그 연수의 힘은 수고와 슬픔이니, 그것이 곧 끊어지면 우리가 멀리 날아가나이다』(시 90:10). 말하자면 80살이라는 죽음의 나이가 되었을 때 자신의 모습이 어떠할지를 예측해 봄으로써 현재 후회 없는 선택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죽음”에 대한 고찰은 자기 인생을 후회 없이 경영해 나가려는 이들이 인생을 새로운 각도로 바라보는 계기를 마련해 준다. 죽음에 관한 진지한 생각은 오늘 내가 최우선으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결정하는 데 도움을 주고,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 사이에서 정확한 판단력을 갖게 해 준다.

즉 “오늘 죽는다면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순간이라면, 나는 그 일을 꼭 해야 하는가? 나도 언젠가 죽게 될 텐데, 이 일을 안 하면 죽을 때 후회할 것인가? 이번 기회를 붙잡지 않는다면 인생 말년에 후회할 것인가?”에 관하여 자기 자신에게 물어봐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이 생의 마지막 순간이라면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 생각해 보라는 것인즉, 이처럼 세상 사람들은 “죽음”을 진지하게 생각하면서 인생을 후회 없이 작동케 하는 동력으로 삼고 있다. 하지만 소위 교회라는 곳들에서 이토록 중요한 죽음을 너무나 가볍게 여긴 나머지 죽을 사람들을 데리고 장난을 치고 있다. 신약 교회사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일들이 그들 교회 안에서 버젓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얼마 전 서울에 소재한 27개 교회가 새해를 맞아 “생명나눔 사역”을 위해 사용해 달라며 후원금 약 2천3백만 원을 (재)사랑의장기기증운동본부 측에 전달했다는 기사를 보았다. 그들은 최근 2년간 코로나19의 여파로 교회의 생명나눔 예배 등 대면 캠페인이 위축되자 “장기 기증 희망 등록률”도 크게 움츠러든 상황에서 교회를 중심으로 생명나눔 운동이 다시 회복되기를 바란다며 후원금 기탁 의도를 밝힌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죽어 가는 사람에게 장기를 기증하여 그 사람을 살리는 것은 악한 일이 아니다. 나도 백혈병에 걸린 지인을 위해 자기 골수를 고통스럽게 빼내어 기증한 사람을 알고 있고, 만일 내가 죽을병에 걸렸는데 누군가가 자기 장기를 기증해서 내 육신의 생명이 연장된다면 당연히 그 사람에게 감사할 것이다. 그런데 만일 내가 구원받지 않은 죄인이고, 그런 식으로 육신의 생명을 연장받았지만 결국 죽어서 지옥에 간다면, 장기 기증을 받아서 육신의 생명을 조금 연장한 것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몇 년 더 살자고 장기를 기증받고, 그 후로도 여전히 순간의 제단에 영원을 불살라 버리는 삶을 산다면 장기 기증의 수혜자가 된 것이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말이다. 교회가 주는 “생명”이 그런 것이겠는가? 교회들이 할 일이 없어서 세상을 위해 생명나눔 예배나 드리고 자기 교인들이 땀 흘려 번 돈으로 바친 헌금을 영원과 무관한 일에 써 버린다면, 과연 그런 예배가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겠는가?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에게 가장 중요하고 절실한 것이 무엇이겠는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생명 연장”이다. 암에 걸려 시한부 선고를 받았다면 그 사람에게 생명 연장보다 더 절실한 것은 없다. 생명 연장에 대한 소망은 죽음을 눈앞에 둔 환자들뿐만 아니라 온 인류의 소망이다. 그래서 거금을 들여 스스로 “냉동 인간”이 되려 하고, 이후 질병과 죽음을 정복하는(?) 날이 오면 자기를 해동시켜 달라고 요구하는 자들이 나오는 것이다. 그런 자들이 있기에 죽음을 가지고 장사를 해 먹는 자들이 생겨난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살고 싶다고 해서 더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생명은 생명의 하나님께서 지으셨고 생명의 하나님께서 관장하시기 때문이다. 사람은 생명의 창시자께서 호출하시면 모든 걸 내려놓고 죽어야 한다! 『보소서, 이들은 악인들이나 세상에서 번성하며 그 재물이 늘어 가나이다... 내가 이것을 알려고 생각하자 그것이 내게 너무 고통스러웠는데 내가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서야 그들의 종말을 깨달았나이다. 확실히 주께서는 그들을 미끄러운 곳에 두셨으며 주께서 그들을 파멸에 던지셨나이다. 어찌 그들이 순식간에 황폐하게 되었나이까!』(시 73:12,16-19) 사람이 살고 죽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려 있다. “히스키야”에게 『네 조상 다윗의 하나님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보라, 내가 네 연수에 십오 년을 더해 주겠노라.』(사 38:5)라고 하셨던 말씀을 모른단 말인가?

하나님께서는 “한 번 죽는 것은 사람들에게 정해진 것이고 그 뒤에 심판이 정해져 있다는 것”(히 9:27)을 인간에게 법으로 정하셨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죽음을 선고하신 것은 첫 사람 아담의 죄 때문이었으며, 아담 이후로 태어나는 모든 사람이 그 죄를 유전으로 물려받아 동일한 죽음을 맛보아야 했다. 한 사람 아담 때문에 죄가 세상으로 들어오고 그 죄에 의하여 사망이 왔으니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전달된 것이다(롬 5:12). 아담이 죄를 짓자 모든 창조물이 죄의 저주 아래 놓여 죽게 되었고, 인간의 수명도 갈수록 줄어들어 70-80년으로까지 감소하게 되었다. 지금은 각종 재해와 사고, 오염된 식수와 음식으로 인해 기본 수명도 채우지 못하고 죽는 이들이 부지기수다. 자기가 몇 살까지 살 것이라고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로 저주받아 죽게 된 인류에게 생명을 주시려고 오신 “유일한 구주”이시다(행 4:12, 딤전 2:5). 주님께서는 죽음의 원인인 죄 문제를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심으로써 해결해 주셨고, 그분을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죽음을 초월하여 생명과 불멸을 영원히 맛보게 해 주신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으로 그것이 드러났으니, 그는 죽음을 폐기하시고 복음을 통하여 생명과 불멸을 밝히셨느니라』(딤후 1:10).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 사건 이전에도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셨고(눅 8:54,55), 나인 성읍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리셨으며(눅 7:14,15),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썩은 냄새가 풀풀 나는 나사로를 살리시어 무덤에서 나오게 하셨다(요 11:43,44).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해 주시려고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셨고, 무덤에 묻히신 지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써 그분을 믿는 사람은 죽어도 다시 살고,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길을 열어 주신 것이다. 그 누구라도 주님께서 마르다에게 하셨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 것이며 또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누구나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요 11:25,26)라는 말씀을 빈말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당신은 이것을 믿고 있는가?

“복음”에는 부활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눈으로 확인된” 진리다. 주님께서는 성경대로 우리의 죄들로 인하여 죽으시고 장사되셨다가 성경대로 셋째 날에 다시 살아나셔서 “게바”에게 보이셨고, 그 후에 “열두 사도”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는 “오백 명이 넘는 형제들”에게 일시에 보이셨다(고전 15:3-6). 시리아의 다마스커스로 성도들을 박해하러 가는 “사울”(바울)에게도 나타나셔서 주님 자신의 부활을 증명하셨다(행 9:5). 이렇듯 주님께서는 죽음에서 부활하심으로써 그분을 믿는 모든 사람 또한 죽어도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 아무도 부인할 수 없게 하셨다. “교회”라면 바로 이 부활의 주님을 말이 아닌 행동으로 전파하여 죄인들에게 “진정한 생명 연장”을 설파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종교성을 지닌 인류가 실제로 바라는 것이 사후에도 생명을 실질적으로 소유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믿고 소유하는 것 외에는 없다! 『그 아들이 있는 자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는 생명이 없느니라.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런 것들을 씀은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며, 또한 너희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도록 하려 함이라』(요일 5:12,13).

구원받지 못한 인류가 하나님의 아들을 믿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존재가 누구인가? “마귀”이다. 이 세상의 신인 마귀가 믿지 않는 자들의 마음을 어둡게 하여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복음의 광채가 그들에게 비치지 못하게 하고 있다(고후 4:3,4). 사망과 음부의 권세에서 해방되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것뿐인데, 공중 권세의 통치자가 그 일을 방해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늘 들어도 뼈저린 진리다. 그런데 그 사악한 일에 교회들이 앞장서고 있으니 이보다 더 비통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오호통재(嗚呼痛哉)라!”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 말이 아니던가? “아, 비통하다!”와 같은 심정은 주님께서 이 땅 위에 사람을 지으셨음을 후회하셨을 때 느끼신 것과 똑같은 심정인데(창 6:6), 이제는 교회가 하나님의 마음을 비통케 하는 것이다. 땅 위에 세워진 교회가 그토록 부패하고 타락했기에 하나님께서는 몹시도 슬퍼하시고 마음 아파하신다.

인류의 죄는 어떤 종교나 학문, 철학, 자기 개혁 같은 것으로 치유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을 통해서만 치유될 수 있다. 『보라, 세상 죄를 제거하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요 1:29). 『그분이 우리의 죄들을 없애려고 나타나신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분 안에는 죄가 없느니라』(요일 3:5). 죄성을 지닌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죄가 제거되어야만 사후에 영생을 누릴 수 있다. 구주가 필요 없는 인간은 없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온 인류에게 필요한 유일한 구주이시다. 이토록 중요한 진리를 가로막는 교회들은 죄의 세상에서 존재할 가치가 없다. 십자가만 세워 놓으면 교회가 되는가? 자기 자신도 구원받지 못한 자들이 누구에게 무슨 생명을 줄 수 있단 말인가! 자기 자신에게 속지 말라(갈 6:7). “목사들이 먼저 거듭나고,” 그 뒤에 교회의 임무를 깨달아 생명의 복음을 전파해야만 교회다운 교회가 될 수 있다. 이 점을 꼭 기억하라!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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