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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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바른 교리여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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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2년 03월호>

성경에는 성막, 성전, 왕국, 신비, 보혈, 거듭남, 용서, 구속, 경배, 그리스도의 심판석, 어린양의 혼인식, 큰 백보좌 심판 등 다양한 “성경 용어”가 등장한다.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용어 하나를 꼽으라면 “교리”를 꼽을 수 있다. 왜냐하면 “교리”는 성경이 기록된 첫 번째 목적이기 때문이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어진 것으로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훈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 3:16). 물론 신약성경에 들어 있는 많은 말씀이 현 교회 시대의 사람들로 하여금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여 “생명”을 얻게 해 주고(요 20:31), 신약을 위시한 구약의 모든 말씀이 이 시대의 성도들의 “교훈”을 위해 기록된 것이어서(롬 15:4), 성경은 그것을 통해 구원받고 책망받고 바로잡히고 의로 훈육을 받기에 충분히 유익하지만, 성경이 기록된 첫 번째 목적은 그 무엇보다도 “교리”(doctrine)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 현 마지막 “라오디케아인들의 교회 시대”를 사는 사람들은 성경이 기록된 첫 번째 목적을 망각한 채 바른 교리를 가르치지 않음으로써 “배교”를 가속하고 있다. 이는 교단 교회들의 설교 강단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바른 교리에 입각한 설교들이 아니라 인본주의적이고 도덕적인 내용만을 강조하는 교훈적인 설교들뿐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들은 진리를 철저히 배제한 채 정욕으로 가득 찬 교인들의 귀를 즐겁게 해 주고 그들의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꾸며 낸 이야기로 돌리고 있다(딤후 4:3,4).

그들의 이런 “불의한 행위”는 그들의 “변개된 성경”을 통해서도 지지를 받고 있으니, 곧 한글개역성경을 위시한 개역개정판, 표준새번역, 공동번역성서 등은 성경이 기록된 첫 번째 목적을 “교리”가 아닌 “교훈”으로 변개시켜 놓은 것이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개역개정판, 딤후 3:16). 결국 <한글킹제임스성경>을 거절하고 다른 성경을 쓰는 자들은 모두 “교리”를 위해 성경을 기록하신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고 바른 교리는 뒷전으로 미뤄 둔 채 교훈들에 대해서만 운운하며 “자신들의 배”를 위해(롬 16:18), 즉 먹고살기 위해 강단에 빌붙어 있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뿐만 아니라 성경의 바른 교리를 배제하려는 마귀와 그의 종들의 작품에 놀아나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기록하신 첫 번째 목적을 “교리”라고 말씀하셨기에, 우리는 “바른 교리”에 유념해야만 한다.

그렇다면 좀 더 구체적으로 왜 바른 교리여야 하는가? 우선 “마귀들의 교리”가 있기 때문이다. 성경에는 “성경적 교리” 또는 “바른 교리”라 부를 수 있는 “선한 교리”(잠 4:2, 딤전 4:6), “주의 교리”(마 7:28; 22:33, 막 1:22; 11:18, 눅 4:32, 행 13:12), “하나님의 교리”(딛 2:10), “그리스도의 교리”(요이 1:9), “건전한 교리”(딤전 1:10, 딤후 4:3, 딛 1:9; 2:1), “경건에 따른 교리”(딤전 6:3) 등의 표현이 나온다. 이에 반해 “마귀들의 교리”(딤전 4:1)라 할 수 있는 “사람의 계명들과 교리들”(골 2:22), “다른 교리”(딤전 1:3), “여러 가지 이상한 교리”(히 13:9) 등의 표현도 나온다. 그렇기에 성경 말씀에 나오는 여러 가지 교리들을 “성경에 입각한 세대주의적인 관점에서” 올바로 나누어 공부하지 않고(딤후 2:15) 그저 “교훈”으로만 성경을 배우고 안 사람들은 “마귀들의 교리”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 특히 성경은 마귀들의 교리들로 “발라암의 교리”(계 2:14)와 “니콜라파의 교리”(계 2:15)가 있다고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하시면서 그런 마귀들의 교리에 속지 말라고 경고하신다(벧후 3:17).

“발라암의 교리”에서는 우상 숭배와 음행을 교리로 가르친다(계 2:14, 민 22-25장). 구약에서 브올의 아들 “발라암”은 애초부터 모압 왕 십폴의 아들 “발락”이 이스라엘을 저주하라는 요청과 함께 보낸 “점 값”(민 22:7)에 마음이 있었다. 그래서 비록 저주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이스라엘을 직접 저주하지는 않았지만, 결국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우상 숭배와 음행을 저지르게 하여 하나님께서 그들을 향해 진노하시게 했다. “니콜라파”(Nicolaitans, 계 2:6,15)라는 말은 “지배하다”라는 뜻의 “니카오”(Nikao)와 “평범한 보통 사람들”이라는 의미의 “라오스”(Laos)가 합성되어 만들어진 단어다. 다시 말해 “니콜라파의 교리”는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자들을 지배하려 하지 말고 오직 양무리의 본이 되라.』(벧전 5:3)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정면으로 거부하면서 일단의 “성직자”라 불리는 특권층의 사람들이 보통의 평범한 교인들을 지배하는 비성경적인 교리다.

“마귀들의 교리들”인 발라암의 교리와 니콜라파의 교리는 “퍼가모 교회 시대”(A.D. 325-500)에 등장했다. 한편 이 교회 시대가 끝난 후에 “두아티라 교회 시대”(A.D. 500-1000)로 넘어가면 로마카톨릭을 상징하는 “이세벨”이라는 여자가 발라암의 교리를 그대로 답습하게 된다(계 2:20). 그렇다면 “두아티라 교회 시대”가 끝난 지 천 년이 지난 지금은 어떠한가? 이 마귀들의 교리들이 사라졌는가? 아니다! 지금까지도 그 명맥을 이어 내려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교리”가 되었다.

마귀들의 교리라고 해서 공동묘지에나 있을 법한 어두침침하고 은밀한 구시대적인 교리들로 여겨서는 안 된다. 실상을 들여다보면 현 기독교계 내에서도 “발라암의 교리,” 곧 돈을 사랑하고, 믿지도 않는 것을 믿는다고 입으로만 떠들어 대며, 탐심이라는 우상 숭배를 자행하고, 영적인 음행과 육체적인 음행을 저지르는 등의 위선과 추태를 볼 수 있고, “니콜라파의 교리”의 경우에는 사제, 주교, 추기경, 교황 등의 성직자 계급을 두고 있는 로마카톨릭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는데, 개신교회들도 이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말하자면 “마귀들의 교리들”이 모두 소위 “환하고 웅장하며 거룩해 보이는 곳”에서 그것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버젓이 횡행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바른 교리”에 무지하면 “백주 대낮”에 펼쳐지고 있는 마귀들의 교리들에 속게 된다. 따라서 “성경적 교리,” 곧 “바른 교리”는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왜 바른 교리여야 하는가? 마귀들의 교리가 사람들의 혼을 파멸시키기 때문이다. 이는 “구원의 교리”를 살펴볼 때 더욱 명확해진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받은 성도의 영적인 상태를 설명할 때 “교리”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것은 너희가 죄의 종이었으나 너희에게 전하여 준 교리의 본을 마음으로부터 순종하여 죄에서 해방되어 의의 종이 되었음이라』(롬 6:17,18). “교리적으로” 세상의 모든 사람은 아담의 죄를 물려받음으로써 죄인으로 태어난다(롬 3:23; 5:12). 따라서 “교리적으로” 그렇게 태어난 모든 사람은 죄의 종으로서 죽은 다음에 그 혼이 지옥에 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었고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의롭게 되어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구원받게 되었다는(롬 5:9,10) 그 “교리의 본”을 마음으로 믿고 믿음으로 순종하면(롬 1:5; 16:26) 구원을 받아 의의 종이 된다. 혹자는 여기서 “순종한다”는 말씀이 믿음이 아닌 “행위”를 말한다면서 “행위에 의한 구원”을 주장하기도 하지만 얼토당토않은 말이다. 이는 로마서 10:16에서 『그러나 그들이 모두 복음에 순종한 것은 아니니라. 이사야가 말하기를 “주여, 우리가 전한 말을 누가 믿었나이까?”라고 하였으니』라고 말함으로써 “복음에 순종하는 것”은 “행위”가 아니라 “복음을 믿는 것”이라고 해석해 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믿음으로 복음에 순종할” 때 지옥으로부터 구원받고, 한 번 받은 구원은 절대로 잃어버리지 않는다는 것이(롬 8:38,39, 요 10:28,29 등) “구원과 구원의 영원한 보장”에 관한 “교회 시대의 구원의 교리”다.

그런데 이런 “바른 교리의 본”과는 다른, 어떤 특정한 사람들에게 어떤 특정한 목적으로 기록하신 특정한 “다른 구원의 진리”를 현 교회 시대의 교리의 본으로 삼는다면, 특히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행위를 구원의 요소로 첨가한 교리”를 전한다면 그 사람은 반드시 저주를 받을 것이고(갈 1:8), 그 변질된 교리를 본으로 삼고 순종한 사람 역시 영원한 저주와 지옥의 불길 가운데로 떨어질 수밖에 없다. 더욱이 우리나라 개신교의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소위 “장자 교단”으로 자처하는 장로교회에서는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구원받을 사람과 지옥에 갈 사람을 미리 정해 놓으셨다고 가르치는 “칼빈주의 예정론”을 그들의 구원의 교리로 삼고 있는데, 그 결과 교인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못하게 함으로써 그 수많은 사람을 지옥으로 쓸어 넣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왜 바른 교리여야 하는지 그 중요성을 다시 한번 실감하게 되는데, 성경을 그저 교훈으로만 가르치는 자들은 이 “위험의 심각성”을 절대로 깨닫지 못한 채 수많은 혼들을 영원한 파멸로 밀어 넣을 수 있는 것이다.

왜 바른 교리여야 하는가? 바른 교리가 있어야 바른 믿음과 바른 실행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그의 영적인 아들 디모데에게 보낸 첫 번째 서신에서 믿음에 대한 선한 양심을 내던짐으로써 파선해 버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에 대해 언급하며 믿음과 선한 양심을 붙들라고 권고했다(딤전 1:19,20). 이들 중 “후메내오”는 부활이 이미 이루어졌다고 말하는 소위 “무(후)천년주의자”였다(딤후 2:17,18). 즉 잘못된 이단 교리 위에 자신의 믿음을 세움으로써 파선해 버린 것이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알렉산드리아 태생의 “아폴로”는 또 어떠한가? 그는 주의 도를 배웠고 영 안에서 열심을 내며 주의 일들을 정확하게 말하고 가르친 인물이었지만 요한의 침례만 알고 있었다(행 18:24,25).

다시 말해 유대인을 위한 경륜에서 교회를 위한 경륜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적인 상황” 속에서 경륜이 바뀐 것도 모른 채 여전히 바뀌기 이전의 교리 위에 자신의 믿음을 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앞선 후메내오와 알렉산더는 잘못된 교리의 기초 위에 믿음을 놓아 믿음이 파선한 상태였기에, 사도 바울은 그들을 사탄에게 내어 주었다고 말했는데(딤전 1:20), 이것은 구원을 잃어버리게 했다는 말이 아니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기를 그침으로써 마귀가 그들을 죽이도록 내버려 두었다는 뜻이다. 이에 반해 아폴로는 아퀼라와 프리스킬라 부부를 통해 “하나님의 도”에 관한 교리를 정확하게 배웠고, 이내 바른 교리에 입각한 믿음과 실행으로 돌아섰다(행 18:26). 그래서 그가 바른 교리를 배웠던 에베소를 떠나 고린도가 있는 “아카야 지방”에 도착했을 때, 그 은혜로 말미암아 그곳에 있는 많은 믿음의 형제자매들에게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었다(행 18:27,28).

바른 교리가 가져온 믿음과 실행의 변화와 그 결과를 주목하라! 이처럼 교리가 중요한데도 이 마지막 교회 시대를 살아가는 교인들은 그 중요성을 무시한 채 교리를 교훈으로 변개시킨 성경을 쓰면서도 하나님을 잘 믿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다. 실로 대단한 착각이다! “바른 교리”가 부재한 마지막 교회 시대는 “건전한 교리를 견디지 못하는 시대”이다(딤후 4:3). 방향을 잃고 “온갖 교리의 풍조에 이리저리 밀려다니는 시대”이며(엡 4:14), “여러 가지 이상한 교리들에 끌려다니는 시대”이다(히 13:9). 그렇기에 진정으로 성경을 잘 믿고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기 원한다면 가장 먼저 “바른 교리”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그에 관한 답은 바른 성경인 <한글킹제임스성경>과 이 성경에 기초한 진리의 서적들에 이미 제시되어 있다. “바른 교리”를 찾으라!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이 배우고 믿고 실행하는 교리가 성경적으로 올바르게 부합하는 교리인지 아닌지를 잘 분별해야 한다. 그래야만 마귀에게 속지 않을 수 있다!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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