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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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혹의 영"을 따라간 “한국기독교성령100주년대성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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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07년 06월호>

지난 5월 18일, 여의도순복음교회에서는 한국의 오순절 역사 100주년을 기념하는 예배와 기도대성회가 열렸다. 본 행사에는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의 정신을 본받아 “제2의 성령운동”의 전환점을 맞이하자는 취지가 깃들어 있었다. 준비기간이 6년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본 행사에 대한 그들의 기대가 어떠했는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또 평양대부흥운동에 대해 바라보는 시각이 얼마나 긍정적이고, 그 부흥운동을 재현하고픈 기대감이 얼마나 컸었는지도 알 수 있다. 이는 은사주의자들이나 성령운동 및 오순절운동을 내세우는 자들만의 기대는 아니었다. 한국 기독교계 대부분 사람들의 기대요 시각이었던 것이다. 아닌게아니라, 그러한 기대를 반영이라도 하듯, 본 집회에는 CCC 전 대표인 김준곤 목사를 비롯하여 한국 교회의 대표적인 인사들이 다수 참석하였다. 이날 기념사를 맡은 민경배 목사는, ‘한국의 성령 강림이 세계를 위해 한국을 부상시킨 사건이라면서, 한국 교회를 새롭게 하고 활력이 넘치는 교회를 선언하는 날이 되어야 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의 눈에는 소위 “평양의 성령 강림” 사건을 재현하는 것이야말로 한국 교회를 소생시키는 주요 인자로 비춰졌던 모양이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그와 같은 사람들을 향해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경고하신다. 『이제 성령께서 분명히 말씀하시나니, 마지막 때에 어떤 자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들과 마귀들의 교리들을 따르리라』(딤전 4:1). 성령운동이나 오순절운동에서 내세우는 교리들이나 추구하는 행실들이 얼마나 비성경적이고 또 얼마나 미혹하는 영들을 따르는 데서 비롯된 것인지는 본지를 통해 여러 차례 밝힌 바 있다. 영적 분별력을 상실한 그들은 항상 마음이 미혹되어 있기에, 그들 스스로도 어떤 영을 따라가고 있는지 모르고 있다. 심지어 그들은 『양심이 화인을 맞아 위선으로 거짓을』(딤전 4:2) 말하고 있으면서도 그 사실을 모르고 있거나 감추고 있는 것이다. 또 이런 지도자들의 “거짓”에 미혹된 수많은 교인들은, 소경들을 따라가는 소경들처럼, 은사주의 거짓 교리에 휩쓸려 멸망의 길로 인도되고 있는 것이다.
본 집회에 참석한 이들을 인도한 영은, 성령이 아니라 미혹의 영이었다. 또 다른 기념사 발표자로 참석한 김삼환 목사(명성교회)는 “복음의 씨앗이 1907년 대부흥의 이른 비를 통해서 복음의 싹을 틔웠다.”면서 “올해 2007년의 부흥은 늦은 비와 같이 다시 한번 주변을 살리게 될 것”이라며 그 기대감을 밝혔다. 성경에서 이른 비와 늦은 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제대로 읽어내지도 못하는 은사주의자들은, 사도행전의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이른 비)과 같은 늦은 비를 오늘날에도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그들이 바라는 그런 “비”는 내리지 않을 것이다. 성경적 교리에 무지한 김목사 역시 그들의 덫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설령 그런 비가 온다 할지라도, 그가 기대했던 “복음의 싹”은 나오지 않을 것이다. 1907년 ‘평양대부흥’ 때도 그러했고, 2003년 ‘기하성희년대성회’ 때도 그러했으며, 2007년 ‘성령100주년대성회’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집회들에서 그들에게 내린 비는 “성령”이 아니라 “미혹의 영”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그런 집회들을 전후해서 나타난 여러 가지 열매들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그들은 그런 집회들을 치르고 나서 한 번도 복음의 싹을 틔워 본 적이 없었다. 교인수의 증가와 같은 외형적 측면에서는 무한한 싹을 틔웠을지 모르지만, 거듭난 성도들이나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의 증가와 같은 측면에서는 오히려 “싹”을 밟아서 죽이고 있었을 뿐이다. 그들의 열매는 19세기 영국의 에드워드 어빙의 부흥운동이나 웨슬리 부흥운동, 미국의 부흥운동 및 성결운동을 통해 나타난 열매와는 거리가 멀다. 그들의 열매(?)는 고작 영산싱어즈의 찬양, 이애라 무용예술단의 무용, 한국기독교성령100주년 국악예술단의 전통창극 ‘장대현 아리랑’ 공연 등을 통하여 1907년의 성령운동을 문화예술, 학술대회, 대성회 등 다각도로 고찰하고 승화시켰다는 평가 정도에 그칠 뿐이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를 통한 가장 분명하고 확실한 성경적 열매는 그런 평가가 아니라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것으로 나타나야만 한다. 『그들이 기도를 마치자 그들이 함께 모여 있는 곳이 진동하더니 그들이 모두 성령으로 충만하여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더라』행 4:31). 그러나 소위 성령운동을 주장하는 이들의 열매는 방언 및 신유 따위의 거짓된 열매나 일시적으로 고조된 감정과 분위기 속에서 자아내는 온전치 못한 회개의 열매로 끝날 뿐이다.
본 행사 며칠 전에 있었던 실무자들 좌담회에서 최낙중 목사(해오름교회)는 “장대현교회 성령운동 3년 후인 1910년에 백만인구령운동이 일어난 것처럼 단기적으로는 2010년, 장기적으로는 종교개혁 500주년인 2017년까지 개혁과 갱신이 이루어져 2,000만 구령운동이 전개되기 바랍니다. 한국 교회에 주어진 성령 100년의 역사를 일회성 행사로 끝내지 말고 초대 교회의 모습을 계승해 나가야 합니다.”라고 말한 바 있었다. 어쩌면 이것이 그들의 “성령 집회들”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궁극적인 목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알다시피 1910년에 있었던 백만인구령운동은 큰 열매 없이 실패로 끝나고 말았었다. 이번 집회 역시나 그와 같은 구령운동이 무위로 돌아갈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본 집회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이들은 회개, 신유, 회복, 부흥, 성령충만의 5가지 주제로 계속된 40여 분 간의 통성기도의 현장을 예로 들면서, 2만여 명이 동시에 부르짖는 기도함성은 성령의 강한 임재와 역사를 체험하게 하는 것이었다고 평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역사는 성령께서 주도하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이 마땅히 받아들이지 말아야 할 “또 다른 영”을 받아들인 결과일 뿐이다. 진실이 그러하기에 그들은 결코 온전한 회개의 열매로 복음과 진리를 담대하게 전파하기 위해 일어서지는 못할 것이다. 이는 그런 역사가 단순한 슬로건이나 운동, 일시적인 감정적 고조 따위로 일어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더욱이 그들 안에 역사했던 영이 성령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들이 따르고자 했던, 곧 재현하고자 했던 “평양대부흥운동” 자체가 잘못된 본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한결같이 입을 모아 평양의 “성령운동” 정신을 본받고자 했다. “본 대회를 앞두고 1907년 성령운동의 본질을 추구하고 이를 이해하고 배우려는 자세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장희열 목사, 순복음부평교회) “1907년의 성령운동을 본받고 회개를 통해 도덕성을 확립하는 한편 미래의 정체성을 찾아야 합니다.”(한영훈 목사, 서서울교회) 그러나 평양대부흥운동은 영국이나 미국에서 일어났던 부흥운동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후자의 부흥운동의 경우, 성령의 역사를 통해 성도들 안에 온전한 회개의 열매가 맺혀져 영적인 삶뿐만 아니라 도덕적인 삶의 변화를 일으켰다. 이는 복음과 진리를 확산시키는 열매로 나타나 구원받지 않은 수많은 사람들이 죄에 대한 심판과 지옥에 대한 경고 앞에 두려워 떨었고, 은혜의 복음에 대해 온전한 믿음으로 반응하였으며 극장이나 술집이 문을 닫는 등의 실제적인 열매들이 나타났던 것이다. 이에 반해 전자의 부흥운동의 경우, 사람들의 공개적인 죄의 고백과 그에 따른 행동의 변화가 있었음에도 선행이나 계명을 지키는 행위가 구원과 연관되어 있을 것이라는 혼란스런 구원관이 자리잡았고 샤머니즘적 요소가 기독교 안에 침투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것이 바로 “성경적 부흥”과 “한국식 부흥”의 차이였다. 평양대부흥운동을 주도한 영이 무엇이었는지는 쉽게 판단해 볼 수 있는 일이다.
그 잘못된 부흥운동의 중심에는 “길선주 목사”에 대한 그릇된 평가가 자리잡고 있다. 그들은 마땅히 따라야 할 본을 잘못 선택했던 것이다. “그는 분명 한국 최초 성령운동의 주자였고 성경에 심취된 성경통달자요 기도자였습니다.”(최낙중 목사, 해오름교회) 그가 한국 최초의 성령운동의 주자로서 거짓된 교리와 열매를 낳은 장본인이었을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성경에 심취한 성경통달자는 아니었다. 다만 유교, 관성교, 선도와 같은 전통 종교들과 샤머니즘에 심취한 신학도였을 뿐이다. “길목사는 성령충만한 목사이기도 했지만... 민족 정신의 소유자였고 기독교 토착화의 신학적 실천자였습니다”(안준배 목사, 분당마을교회) 그는 성령충만한 목사가 아니었다. 미혹의 영으로 충만한 그의 기도는 선도 수행을 했을 때 체험했던 샤머니즘적 요소를 벗어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이러한 “본”은 새벽기도회나 통성기도, 철야기도회처럼 한국의 전통 종교와 샤머니즘의 방식이 교회에 자리잡는 계기를 마련했던 것이다. 실로 그는 “기독교 토착화의 신학적 실천자”였던 것이 분명하다. 여기서 말하는 “기독교 토착화”란 기이한 “한국식 기독교”를 정착시킨 것을 의미한다. 사실이 그러하기에 평양대부흥운동을 재현하려는 기대 자체가 무의미한 것이며 오히려 한국 교회를 퇴보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뿐이다.
이 모두가 오늘날의 영적 현실을 여실히 반영해 주고 있다. 성경적 기준 없이 다수가 따라가는 길이 곧 진리요 부흥이라는 편견이 증명되고 있는 것이다. 만일 은사주의자들의 규모가 오늘날처럼 크게 성장하지 않았더라면 평양대부흥운동에 대한 조명은 다른 각도로 재조명되었을 것이다. 실무자 좌담회에 참석했던 최낙중 목사는 성령운동 100년에 관한 회고를 다음과 같이 갈음했다. “성령운동 1세기의 시작이 길목사였다면 그 마무리는 조용기 목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성령 100년의 하반기 49년간 순복음교회를 중심으로 많은 내적 치유 사역을 통해 성령 역사를 재현하고 발전시켜 오늘에 이르게 했습니다. 천막교회로 시작한 작은 교회가 세계적인 교회로 성장했고 한국의 성령운동을 전 세계에 확장시켰습니다.” 만일 조용기 목사의 성령운동이 빛을 발하지 못하고 교계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렸다면 적어도 오늘날과 같은 정도의 비참한 영적 현실이 도래하지는 않았을 것이며 길목사의 성령운동은 다른 방향으로 재평가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성경 예언에 따라(살후 2:9-12), “강력한 미혹”은 조용기 목사를 현재의 위치로 부상시켜 많은 이들을 거짓으로 오도하고 있다. 그러나 주님의 다시 오심이 가까운 이 마지막 날들에 그의 사역이 마지막으로 치닫고 있음은 자명한 사실이다(살후 2:8). 자, 의의 태양이 이제 막 떠오르기(말 4:1,2) 전 어두움이 극심한 이 마지막 때에, 김삼환 목사(명성교회)는 자신의 기념사를 통해 ‘어두움의 세력을 물리치기 위해 모두가 기도로 하나 되는 노력이 필요하다.’면서, ‘어려움 속에 있는 이 민족을 치유시킬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은 성령’이라고 강조했다. 과연 그가 강조한 유일한 대안은 진짜 성령을 가리켜 말한 것일까? 아니면 또 다른 영을 두고 한 말일까? 만일 그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기대하고 있는 유일한 대안이 하나님의 영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었다면, 그들은 결코 “미혹의 영”이 관장하는 “한국기독교성령100주년대성회”의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지는 못했을 것이다.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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